소설리스트

3화 (3/245)

3.

“아! 아야!”

노아는 여동생의 진심 어린 걱정에 비명만 질렀다.

“할머니가 떠날 때 뭐라고 했어?”

클라레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야무지게 때린 만큼이나 아이의 손바닥이 빨갰다.

“남자와 술과 도박을 멀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언니는, 어떻게 외간 남자랑 결혼을 한대?”

그것도 내기?

“내기에 져서 결혼으으을?”

말끝을 늘리며 비아냥거리는 클라레는 거의 아들 셋은 키운 현역의 어머니 같은 말투였다.

옆에서 즐겁게 지켜보던 레토가 속으로 적잖게 감탄할 정도였다. 

보통 똑똑하고 야무진 게 아니었다.

“너, 너는 쥐방울만 한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노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빌어먹을 미친개 앞에서 어린 동생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했지만, 대꾸할 말이 없다는 게 또 가장 부끄러웠다.

“쥐방울보다 잘나서 이런 사달이 일어났어!”

하지만 힘없는 반박 따위, 언니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여동생의 노기까지 꺾진 못했다.

클라레의 치사랑 훈육이 다시 시작되는 사이, 마실 것을 가지고 온 아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까 하신 말은, 정말인가요?”

“그래.”

레토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아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답했다. 

건네준 음료에 들어 있는 얼음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달그락거렸다.

“정말이네.”

“아스한테 반말하지 마십시오.”

“울 아스한테 반말하지 마!”

노아와 클라레가 냅다 끼어들었다.

“아스는 제 언니입니다. 함부로 말을 놓지 말아 주십시오.”

노아가 제 귀를 잡아당기는 클라레의 손을 겨우 떨어트리며 말했다. 

레토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으음, 그렇지만 하녀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계신데?”

레토의 의문은 정당했다.

아스는 누가 보아도 하녀의 표본 같은 차림이었다.

단정히 올려 묶은 머리, 때가 타도 눈에 띄지 않는 감청색 원피스와 색이 누런 앞치마.

그나마 좀 의아한 점이라면 저 원피스의 재질이 상당히 값비싼 원단이란 사실이었다.

옷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레토마저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아스는 제 가족입니다.”

“맞아! 아스는 내 언니예요.”

클라레까지 아스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 저는 괜찮….”

무안해진 아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레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처형이라 부르겠습니다.”

“부르지 마십시오!”

노아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심술입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노아는 확실하게 물어봤다. 

기어코 참고 있던 화가 터지고 말았다.

“중장님께선 절 얼마나 싫어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잘했으면 잘했….”

“그래.”

레토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댄 아주 훌륭하고 바람직한 군인이야.”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위까지 오른 인물.

노아의 실력과 업적은 딱 저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올곧은 성격에 불의를 보면 참지도 못하니, 자연히 위에 계시는 썩은 생선들에게 밉보이기까지 하고….”

“그게 중장님과 무슨 상관….”

“그래서 반했어.”

불쑥 끼어든 고백은 단조로웠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묵직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가 노아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나도 내 성질이 더러운 건 잘 알아.”

레토는 제 단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남 괴롭히는 거 좋아하고, 비꼬아서 욕하는 게 취미고, 윗대가리들 놀려 먹는 맛에 군에 다니고….”

“저 정도면 혼자 살아야 되는 거 아냐?”

클라레가 아스에게 물었다.

“나 저런 거 알아! 리리네 엄마가 가르쳐줬는데, 저런 남자를 ‘개차반’이라고…!”

“쉿, 쉬잇!”

아스는 잠깐만 조용히 하자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클라레가 못 할 소리 했냐며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조용히 하기로 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끊겼던 고백은 다시 이어졌다.

노아는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레토가 클라레의 언변과 배짱에 꽤나 감탄했음을 알아챘다.

“그런 나라서, 자연히 그대에게 시선이 갔지. 올곧고 눈부신 그대를 보고 있자면 내가 얼마나 말종인지 처절하게 알게 돼.”

“고백이 아니라 고해성사인데?”

“아가씨, 제발 좀….”

아스가 결국 클라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처제의 언변이 범상치 않군.”

“제 동생이 왜 중장님 처제입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소리 한 뒤, 노아가 묵직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한 손으론 마른세수를 반복하기를 잠깐.

“중장님.”

노아가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한결 편안해진 말투를 눈치챈 레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거짓 같나?”

“예.”

“솔직하긴.”

망설임 없는 대답에 레토는 웃음이 터졌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상대의 마음으로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개차반은 아니잖아.”

“그건 또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즉답이었다.

노아가 아는 레토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대놓고 빈정거리지,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저열한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 인간이 나를…?’

노아는 레토의 고백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

게다가 청혼이든 고백이든, 누가 그딴 내기로 멋대가리 없이 한단 말인가.

고백의 진정성은 둘째치더라도 고백 당사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고백은 거절하겠습니다.”

노아가 단호히 말했다.

“절 좋게 봐 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저는 중장님을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정말?”

어느새 코앞까지 훅 들어온 레토가 눈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을 하면 쓰나.”

스윽, 올라온 레토의 손가락이 노아의 오른쪽 눈썹 끝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였으나, 노아는 직접 닿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거짓말을 하거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 때면 눈썹을 찡그리지.”

“…….”

“그래서 나랑 카드 할 때면 늘 졌잖아.”

레토의 손가락은 별짓 없이 금방 떨어졌다.

“내가 그대의 습관도 모를까.”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는데.노아의 얼굴은 딸기청보다 빨갛게 물들었다.

***

“아저씨!”

차를 타려던 레토가 멈칫했다.

“울 언니한테 왜 수작 부리는 거예요?”

어느새 밖으로 나온 클라레가 팔짱을 낀 채 떡하니 자동차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도 생각했는데.”

반쯤 열었던 차 문을 도로 닫은 뒤, 레토가 무릎을 쪼그려 앉아 클라레와 눈을 마주쳤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똘망똘망했고, 잘 먹고 잘 자는지 볼살도 토실하니 귀여웠다.

특히 저를 경계하는 태도가 아주 바람직했다.

‘노아도 이랬을까.’

레토는 노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봤다. 

입꼬리가 자연히 올라갔다.

“우리 처제께선 말투가 참 어른스러워.”

“애늙은이라고 놀리는 거예요?”

클라레가 푸른 눈을 샐쭉거렸다.

“칭찬이야. 어휘력이 수준급인 데다 표현력도 대단하니까.”

“그런데 초면에 반말은 좀 아니지요?”

“그렇군요, 처제.”

“언니랑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처제라 부르지 마요.”

레토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서둘러 다물었다.

빈틈없는 꼬마 숙녀에겐 천하의 미친개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레토가 물었다.

“저는 클라레 벨로라고 합니다.”

클라레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한 뒤,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레토는 한쪽 무릎을 고쳐 세운 뒤, 내민 손등에 입술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반갑습니다, 벨로 양.”

“예의가 무척 바르시네요.”

“오늘을 위해 열심히 배웠습니다.”

레토의 말에 클라레가 빵긋 웃었다. 

눈 밑을 찌르는 도톰한 볼살이 어찌나 귀여운지, 레토는 저도 따라 웃어 버렸다.

“아저씨는 울 언니가 좋아요?”

클라레가 물었다.

“으음….”

이렇게까지 대놓고 물을 줄이야, 레토는 아이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에 적잖게 당황했다.

“…아마?”

어쭙잖은 답변에 클라레가 눈을 치켜떴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말하는 남자는 바로 버리라고.”

“할머니가 현명하시군요.”

고민하기를 잠깐, 레토는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숨을 짧게 고른 뒤에 클라레에게 말했다.

“사실, 많이 좋아합니다.”

꺄악, 클라레가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얼마나요? 우리 언니 얼마나 좋아해요?”

“그건 비밀입니다.”

“에이, 나한테 잘 보여야 도와주죠!”

“그래도 안 됩니다.”

“치사해!”클라레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레토가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누르니, 이내 바람 빠진 공처럼 볼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쪼그만 혀가 삐죽 나왔다.

“하하하!”

예고 없는 귀여움에 레토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아, 이러다 클라레 양에게 더 반하겠는데?”

“할머니가 어린 여자 좋아하는 남자는 살해당하거나 사지 절단되거나, 둘 중 하나랬는데!”

“그런데 할머님은 어디 계십니까?”

“배 타고 일하러 갔어요. 나중에 올 거예요.”

선원이신가? 레토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이제 클라레는 레토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

저를 마냥 어리게 취급하지 않는 점이 좋았고, 무엇보다 잘생겨서 좋았다. 사실 잘생겨서 다 좋았다.

“언니를 좋아하면 친절하게 해 줘야지, 왜 만날 괴롭혔어요?”

“그렇게 괴롭히진 않았습니다.”

“그치만 언니는 일하고 돌아오면 아저씨 욕했는데?”

클라레는 제 언니가 술 마시고 돌아오는 밤에 했던 혼잣말을 기억해냈다.

“미친개 새끼! 뼈와 살을 발라 바다에 수장해 버릴 새끼!”

“작은 주인님! 아가씨 다 들어요!”

“으엑, 술 냄새….”

술을 안 마신 날에도

‘미친개 죽여, 진짜….’

라고 웅얼거리던 것을, 클라레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요즘은 우리 꼬마들도 좋다고 괴롭히는 짓은….”

클라레가 쫑알쫑알 잔소리를 퍼부었다.

“노아가….”

레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애꿎은 입가만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흘렸다.

‘내 욕을 했구나….’

짧은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수줍게 물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