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45)

1.

“아, 빌어먹을!”

연무장에 울려 퍼진 짜증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애꿎은 목검 하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시끌벅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조용한 것도 아니었던 훈련장 내부에 끔찍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 미친 새끼야!”

패악질의 주인공은 굳어 버린 동료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어딘가로 향했다. 

걸음을 따라 위로 올려 묶은 금발도 흔들렸다.화가 잔뜩 난 걸음의 끝에는.

“노아.”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미남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 벨로 대위.”

그는 노아의 이름을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달콤하게 읊조렸다.

그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찰나의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곤 노아에게 동정을 표했다.

‘하필 저 미친개의 마음에 들어서….’

노아에게 만약 잘못이 있다면, 아니, 솔직히 잘못도 없지만, 그래도 굳이 따져 보자면 저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벨로 대위도….’

보통 미친개가 아닌지라.

보좌관이 짧은 연민을 가지는 사이, 어느새 연무대 위로 올라온 노아가 미친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때는 보좌관의 눈도 튀어나올 듯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넌 내가 아주 우스운 모양이다, 그치?”

노아는 웃고 있었지만, 결코 상냥함이나 애정 따위에서 우러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의와 분노의 교집합에 가까웠다.

“레토 오케아누스.”

노아가 상관의 이름을 들먹였다.히익!동시에 누군가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대원들은 알아서 눈치껏 기절한 동료를 그늘진 구석에 밀어 넣어 치웠다.

“이런, 대위.”

레토라 불린 아름다운 미친개가 싱긋 웃었다.

“그대에게 하극상의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지만.”

“…….”

“그 정도가 심한 것 같군.”

레토는 제 멱살을 붙잡은 노아의 손을 가볍게 내쳤다. 

내쳤다기보다는, 노아가 먼저 밀치듯 그의 멱살을 놓아 버린 게 먼저였다.

“벌을 받고 싶은 거면 내 기꺼이….”

“벌 같은 소리 하네.”

말을 자른 노아가 보란 듯이 가슴에 달린 계급장을 뜯어냈다.

거친 손짓에 계급장이 달렸던 군복 가슴께에 구멍이 송송 났다.

“오늘부로 관둘 거야.”

시종일관 여유롭던 레토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정작 노아는 그런 상관에게 안중도 없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기함하며 슬그머니 레토에게서 떨어질 뿐이었다.

“근데.”

노아가 말했다.

“이대로는 못 가.”

이 빌어먹을 직장을 때려치울 땐 치우더라도. 

그간 저놈 때문에 생긴 억하심정은 어떻게 해서라도 풀고 가야 했다.

노아는 그간의 설움들을 떠올리며 레토에게 말했다.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

***

남부 사프 영지는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지역이다.

거대한 무역항 덕에 항상 유행의 선두를 주도하며, 매해 방문하는 수많은 외국인 덕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바다의 땅.

그런 항구와 시가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샤프 영지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언덕이 하나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운동 삼아 걷기 딱 좋은 완만한 경사였다.

푸른 수평선이 훤히 보이고, 번화가와도 적당히 떨어져 있어 소음 걱정 없는 명당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2층짜리 저택이 있었다.

“아스!”

차양을 친 테라스에서 간식을 먹던 아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더니 냅다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스! 아스, 이거 봐!”“클라레 아가씨.”

음료를 들고 온 하녀가 제 다리에 달라붙는 아이에게 가볍게 주의를 줬다.

“제가 무언가를 들고 있을 때는 달려들면 안 되어요.”

“그치만 아스는 물건을 잘 들잖아!”

그 말마따나, 아스가 들고 있던 음료 잔은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였다.

“잠시만요.”

아스는 얼음 세 조각이 들어간 레몬 음료를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클라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것 좀 봐!”

클라레가 들고 온 건 신문이었다. 

간식을 먹으면서 읽고 있었던 터라 신문 여기저기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이 사람.”

클라레는 그중 정치면에 실린 어느 사진을 가리켰다.

“언니가 말한 그 사람이지?”

“오케아누스 중장이네요.”

사진 속의 젊은 남자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미친개.”

클라레가 명랑한 목소리로 유명인의 별명을 말했다.

“아가씨, 고운 말을 쓰셔야죠.”

“그치만 언니가, 신이 이 남자를 만들 때, 얼굴이랑 몸에 너무 집중해서, 인성이랑 양심을 까먹고 안 만들었다고 했어.”

그래서 성격이 개차반이래.

“우리 아가씨는 똑똑하시지.”

어쩜 기억력도 좋으실까.

아스는 클라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그 ‘미친개’라 불리는 또 다른 한 명이 자신들의 가족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다.

클라레는 씩 웃으며 사진 아래 적힌 기사도 요약해 말했다.

“최근 기승을 부리던 해적을, 오케아누스 중장과 그의 부관들이 함께 일망타진했대.”

클라레는 어제 책을 읽다가 외운 어려운 단어를 곧장 써먹었다.

“어머, 우리 아가씨!”

아스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제 또 그런 단어를 외우셨어요?”

“어제 학교에서 배웠어. 그래서 오늘 시험도 만점이었잖아.”

“역시! 이 집에서 가장 똑똑한 건 아가씨라니까.”

“두말하면 코 아프지!”

“두말하면 입이 아프죠.”

“그렇구나. 입 아프지!”

클라레와 아스가 즐겁게 대화를 주고받던 찰나였다.

“어서 할머니 왔으면 좋겠다!”

“큰 주인님께 보여 드리려고 시험지 다 모으고 계셨죠?”

“응! 돌아올 때 엄청난 선물 사 온다고….”

삐약삐약 떠들던 클라레가 대뜸 입을 다물었다.

정원 입구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일찌감치 기척을 느낀 아스는 어느새 클라레의 앞을 막아섰다. 

클라레가 그 뒤에서 얼굴만 뽁 내밀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괴인의 정체는 노아였다.

“언니?”

“세상에, 작은 주인님!”

아스가 그 곁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클라레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그나저나 상태가….”

왜 이렇게 시체 같으세요?

노아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클라레와 아스가 다가왔을 땐 아예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허억, 헉…!”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숨찬 소리를 내뱉는 노아에게, 아스가 테이블에 있던 얼음 음료를 건넸다.

단번에 이를 들이켠 노아는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언니, 일은?”

클라레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탈영했어?”

“때려치웠어.”

“뭐라고요?”

깜짝 놀란 아스가 되레 소리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깔끔하게 올려 묶은 검은 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가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삐죽 섰다.

하지만 청천벽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망쳐야 해…!”

노아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뒤를 흠칫흠칫 돌아봤다.

“진급이 코앞인데 때려치웠다니요! 세상에, 신이시여! 큰 주인님이 돌아오셔서 이 사실을 알면 어쩌려고요!”

“언니 갑자기 왜 그래? 응?”

덩달아 놀란 클라레가 울먹거렸다.

“설명해 줄 시간 없어.”

노아는 클라레와 아스를 양손으로 잡아 저택 안으로 끌고 갔다. 

이제 클라레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언니, 언니!”

“아스, 얼른 돈하고 옷가지를 챙겨! 그리고 클라레, 정말 미안하지만….”

노아가 몸을 낮춰 클라레와 눈을 마주했다.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어.”

당장 울음을 터트리려던 클라레가 입을 쩍 벌렸다.

“어, 왜? 언니가 왜 죽어?”

“미친개한테 걸렸어….”

“미친개…?”

“설마 오케아누스 중장 말인가요?”

방에서 나온 아스의 손엔 어느새 짐이 꾸려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니, 그분이 왜….”

당황해서 어물거리던 아스는 뒤늦게 노아의 군복 가슴께에 구멍이 듬성듬성 난 걸 알아챘다.

‘설마…!’

오만 가지 상상이 아스의 머리를 후드려 팼다.

“설명은 나중에!”

한시가 급한 노아가 끝내 클라레를 번쩍 안았다. 

다른 한 손엔 만일을 위해 미리 챙겨 둔 제 짐가방을 들었다.

“그 미친 새끼,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어…!”

현관 근처 담벼락을 더듬거리던 노아가 헐렁한 벽돌 하나를 뽑았다.

안에는 비상시에 쓸 권총과 탄창이 들어 있었다.

그걸 챙겨 주머니에 넣은 노아가 몸서리를 쳤다.

그놈은 정말 얼굴만 신의 축복을 받았고, 나머지는 사탄의 축복을 받은 놈이었다.

“여기서 가장 먼 할머니 별장이 어디더라, 아니, 차라리 그냥 배 타고 할머니한테….”

“언니!”

클라레가 저택 밖을 가리켰다.

도둑 이사를 감행하려던 세 가족의 발걸음이 멈췄다.

동시에 노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 너어…!”

저택 현관 앞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잘 익은 포도주처럼 붉은 매끄럽고 긴 차체.

얼마 전 새로 나온 신형이었고, 현재 남부엔 딱 한 대 있었다.

‘미친개의 붉은 애마’란 이름으로.

“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거야.”

레토는 뒤에 숨겼던 커다란 꽃다발을 노아에게 내밀었다.

이를 본 클라레가 ‘어머머’ 수줍은 탄성을 질렀다.

“우리 신부님 데리러 왔지.”

“히익!”

노아가 진저리를 쳤다.

“계급장 떼고 붙자고 해서 붙어 줬는데, 내가 이겼잖아?”

레토가 노아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니….”

어느새 장미는 노아의 품에 반강제로 안긴 채였다.

강렬한 장미 향이 노아의 후각과 이성을 잠시 빼앗는 찰나, 그 틈에 성큼 다가온 레토가 노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대로 결혼해야지.”

안 그래?

레토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미소로 노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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