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다시 흘러가는 시간.
태강 그룹 빌딩 맨 꼭대기 층.
전용 엘리베이터 한 대가 소리 없이 멈춰 섰다. 서정후는 오늘도 빈틈없는 모습으로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향했다. 언제나처럼 김 실장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여느 때와 같은 정신없는 하루였다.
이른 새벽부터 미국 현지와의 화상회의가 있었다. 여의도에서 오찬 모임을 끝낸 뒤 본사로 복귀해 내부 임원진 회의를 마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조만간 미국 출장 일정 잡으시면 어떨까요.”
김 실장이 정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출장 말입니까?”
정후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았지만, 김 실장은 재차 말을 이었다.
“최근 미국에서 출시한 신차 판매가 호조를 보여 시기가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마침 남부 쪽 공장도 설립 5주년이라 관계자들 초청해서 기념행사도 하고, 직원들도 직접 격려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5주년이군요.”
“네, 보도자료가 같이 나가면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요.”
김 실장은 정후에게 다시 한번 출장을 권유했다.
과거 미국 공장 설립 건으로 정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에 이번 행사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러나 그는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 실장은 그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현재 부사장의 아내는 출산한 지 3개월 정도 지났고, 서서히 컨디션을 회복 중이었다. 그로 인해 한동안 국내 출장마저 전부 취소했던지라 이번 해외 출장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반응이 돌아올 거라 예상은 했었다.
“일단 신차 출시 행사 관련해서는 작년에 북미지사 쪽에 있었던 전략지원실 본부장을 보냅시다.”
정후는 잠시 생각을 고르다 진중한 표정으로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미국 공장 쪽은.”
김 실장은 말없이 정후를 바라보았다.
“올해 연말로 잡아보죠. 그때쯤이면 가족 다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으니. 5주년 행사, 제대로 기획해서 한번 진행해봅시다.”
“네, 부사장님.”
김 실장은 입가에 미소를 걸며 정후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습니까?”
정후는 김 실장의 노고를 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네, 충분합니다. 바로 일정 다시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저 멀리, 집무실 바로 앞에 익숙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정후 씨.”
지안이 생기 넘치는 얼굴로 그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고은영 과장을 비롯한 비서들과 담소를 나누다 정후가 다가오자 환하게 웃는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내부 비서진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후는 고개를 까닥이며 지안을 향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지안이 회사에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정후 씨 생일이잖아요.”
“…생일?”
정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 축하한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해 뜨기 전부터 일정이 연달아 있어서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새벽부터 밥도 같이 못 먹고 나갔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그랬어?”
부사장의 다감한 말투에 뒤에 서 있던 고 과장의 눈이 커진다.
“아침에 케이크도 만들어서 왔는데.”
지안은 손에 쥐고 있던 상자를 들어 올렸다. 정후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힘들게 그런 걸 뭣 하러 만들어. 아직 몸도 불편하면서.”
“이제 괜찮아요. 너무 앉아만 있어도 안 좋대요.”
“그래도.”
정후의 목소리가 짐짓 엄해진다.
“정후 씨가 집에서 너무 못 움직이게 하니까 그게 더 답답해요.”
“걱정되니까 그러지.”
김 실장은 이제 적당히 하라는 신호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걸 눈치챈 지안이 정후를 향해 사근사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정후 씨, 우리 이제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응.”
고개를 끄덕이는 정후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다정한 빛이 감돌았다. 정후는 지안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집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고, 고 과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서정후 부사장이 전 부인과 재결합을 했다는 소식에 한동안 회사 전체가 떠들썩했다. 도대체 왜 다시 결혼한 거냐, 그럼 이혼을 왜 했던 건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건 아니냐 등등 의혹이 무성했지만, 김 실장은 거기에 무슨 이유가 더 있겠냐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서로 안 보고는 못 살겠으니까 그랬겠죠.’
‘…설마 정말 그런 것 때문에요?’
은영은 김 실장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오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함께 살아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상대방의 닫힌 시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시간.
책을 읽고 있을 때의 옆모습이나 이를 닦고 있을 때의 얼굴. 안락의자에 앉아 잠들어버린 무방비한 표정, 싫어하는 음식이 나왔을 때 살짝 찌푸려지는 눈썹 같은 것들.
한번 잃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일상의 사소함마저 귀하게 다가왔다. 정후는 지안의 옆에 누워 그녀가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이마와 유려하게 뻗은 눈썹, 숱이 촘촘한 속눈썹과 끝이 살짝 둥근 콧날, 꽉 다물린 것도 살짝 벌어진 모양도 예쁘기만 한 입술까지.
단아한 선.
첫 맞선에서 지안에 대한 감상이었다.
한눈에 파고드는 강렬함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적절하고 조화로워 어떤 거슬림도 없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모든 틈으로 스며온 것은 얼마나 견고한지.
그리고,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무결점주의.
세상에 완벽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서정후 자신이어야 했다.
정후는 눈을 들어 가지런하게 정돈된 침실의 풍경을 보았다. 어젯밤, 정신없이 벗어 던진 옷조차 일정한 방향으로 개켜져 있었다.
강파른 부모의 성질을 빼닮아 본성이 그러했고, 그렇게 길러졌고, 나중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안과 결혼을 했다.
그녀가 일깨운 건, 있는 줄도 몰랐던 제 몸의 거대한 구멍이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그 모든 틈으로 그녀가 소리 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안은 제 시간의 뒤안길에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함께 살아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떠났고,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메마른 바다만 남았다. 허옇게 드러난 모래사장 위에는 한때 끊임없이 밀려들었던 파도의 흔적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던 것들.
그것은 새로운 인식의 세계였다. 지안 없이 모든 게 무의미했다. 텅 빈 심장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정후는 희미해진 사랑의 흔적을 찾아 무작정, 막무가내로 그녀에게 매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스러져가던 자신을 받아준 너.
완벽한 것이란 없고, 다만 사랑 속에서 온전해질 뿐이었다.
정후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지안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오밀조밀한 새하얀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잠에 취한 얼굴은 그저 순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정후는 깨끗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살짝 뺨을 쥐었다. 지안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바싹 안겨들었다.
맞닿은 살갗이 따뜻했다. 그녀는 두 손을 겹쳐 쥔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정후는 가느다란 어깨를 꼭 끌어안고 얇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다 부드러운 가슴을 쥔다.
한동안 아이에게 젖을 내어준 가슴은 모양이 살짝 변해있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하며 젖을 먹이던 지안의 모습은 그가 인생에서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 장면 중 하나였다.
불완전한 모양이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차오른 살결 위로 정후의 얼굴이 내려왔다. 뽀얗게 핀 가슴 위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말랑한 돌기를 빨아올렸다.
그녀의 몸은 언제나 그를 흥분케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습관처럼 지안의 아랫배 왼쪽에 있는 조그만 절개 자국을 더듬었다.
모든 건 자연스러운 시간의 변화였다.
지안과 정후는 그들을 닮은 아이를 낳았고, 그 강렬한 경험은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
정후는 지안과 함께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그저 애틋할 따름이었다.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과 지안의 모습이 좋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움찔하더니 얇은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지안의 허벅지 위에 키스하던 정후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왔다.
“깼어?”
“…율이는?”
지안의 손이 습관처럼 옆을 더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잊었어? 본가에 두고 온 거.”
“아아.”
그제야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아이였다. 어렵게 갖고 힘들게 품었던 아이라 그런지 지안은 아기에게 유독 집착이 심했다.
어제도 서 회장의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인사하던 아이와는 달리 지안은 활짝 웃으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잘 자고 있대.”
정후는 이미 아침에 전화 통화를 끝낸 참이었다.
그 말에 지안의 얼굴이 한결 풀어진다. 어딘가 기쁘면서도 서운해 보이는 얼굴을 끌어다 정후는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까만 눈동자가 오롯이 그를 향했다.
“나만 봐, 이제.”
정후는 잠에서 깨어난 지안을 안고 욕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미리 물을 받아놓은 대리석 욕조엔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욕조 옆으로는 커다란 통창이 나 있어 화사한 정원 전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정후는 지안을 제 허벅지 위에 올린 채 긴 키스를 나누었다.
“나 꿈꿨는데요.”
정후는 지안의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거기 정후 씨가 나왔어요.”
정후가 피식 웃으며 지안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근데.”
“정후 씨가 내가 담당한 반 학생이었는데.”
“응.”
정후가 지안의 턱 끝을 살짝 물어 당기자 지안이 작게 웃었다. 정후는 다시 입을 맞추며 계속해, 하고 말했다.
“말을 너무 안 들어서 내가 힘들었어.”
정후가 물끄러미 지안을 보더니 꼿꼿하게 선 유두를 입에 물었다. 딱딱해진 젖꼭지를 깨물며 혀로 굴리자 지안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못된 학생이었겠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지안의 다리 사이로 내려왔다.
“선생님을 괴롭히는.”
부풀어 오른 돌기를 매만지며 질구를 휘저었다.
“으응.”
다시 겹쳐 드는 숨결이 점점 뜨거워졌다. 정후는 여러 번 각도를 바꾸어가며 키스했다. 지안을 한껏 달아오르게 한 뒤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몸 위로 끌어올렸다.
“흣.”
지안이 정후의 목을 끌어안은 채 서서히 엉덩이를 내렸다. 삽입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하아, 하아.”
지안은 정후의 위에 올라탄 채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정후가 한 번씩 허리를 크게 쳐올릴 때마다 지안의 얇은 눈썹이 휘어지며 목이 뒤로 꺾였다.
정후는 지안의 표정을 가만히 눈 안에 담았다.
언제나 그를 설레게 하는 지안의 모든 얼굴.
사랑을 나눌 때의 표정, 그를 조용히 응시할 때의 눈동자, 그녀가 아이를 바라볼 때의 눈웃음, 정색할 때 꾹 다물린 입술, 가끔 짓는 속상한 표정까지.
“지안아.”
나직한 그의 부름에 지안이 얼굴을 마주했다. 달아오른 두 뺨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난 너만 보면 왜 이렇게 미칠 것 같지.”
정후는 지안의 뺨을 붙잡고 키스하며 속삭였다.
네가 웃는 모습도 화내는 모습도 고집부리는 모습도 나를 달래며 천천히 설명하는 모습도.
이제껏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오며 그는 그녀의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지안이 피식 웃으며 얼굴을 뗐다. 정후의 진지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만나든 분명 너를 사랑했을 거야.”
정후는 다시 지안에게 길게 키스했다. 그리고 지안을 껴안은 채 욕조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의 몸을 욕조 위 넓은 공간에 눕혔다.
넓은 통창 너머엔 정원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정후 씨.”
지안은 달아오른 호흡을 천천히 내뱉으며 정후를 바라보았다. 정후는 싱긋 웃으며 지안을 향해 커다란 몸을 기울였다.
그가 언제나 욕망하고 갈망하는 그녀의 고요하고도 맹렬한 틈으로.
찬란한 봄의 정경 속에서 하나로 겹쳐진 두 몸.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두 개의 존재는 그렇게 사랑 속에서 완벽해져 갔다.
* * *
“근데, 몇 번째 생일이라고 그랬죠?”
L 레스토랑의 부주방장은 옆에 서 있는 지배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4번째 생일이라고 합니다.”
부주방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접시의 빈 부분에 멋들어지게 글씨를 써나갔다.
「Happy 4th birthday」
화이트 초콜릿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돔 모양의 케이크는 먹기에도 아까워 보였다. 부주방장은 제가 만든 결과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정후 사장님 테이블 맞죠?”
지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 위에 케이크를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홀을 향해 걸어갔다. 주말 낮은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서정후 사장 내외도 그중 하나였다.
구름이 풍성한 어느 맑은 여름날이었다. 시원하게 트인 통창 너머로 짙푸른 한강의 전경이 보였다. 따사롭게 내려오는 햇살 한가운데, 그림 같은 모습의 가족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 여자아이를 두고 부부가 양옆에 앉아 있었다. 아이와 엄마는 서로의 손가락을 접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었고, 남자는 턱을 괸 채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지배인이 정중하게 이야기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다른 듯 비슷하게 서로 닮아있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아이를 향해 드디어 왔네, 하고 속삭였다. 바로 포크를 쥐고 달려드는 손을 잡으며 기다려, 하고 짐짓 엄하게 이야기한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정후는 서늘한 눈매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자주 있는 일인 듯 아이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를 닮아 눈이 동그란 아이는 지배인을 향해 감사합니다, 하고 서툰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배인은 싱긋 웃으며 맛있게 먹어요, 하고 속삭이며 자리를 떴다.
“잘했어. 우리 율이. 이제 케이크 먹자.”
지안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케이크를 잘라 조그만 입에 가져갔다. 아이는 신나는 표정으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율이가 엄마도 줄게요.”
아이는 포크를 쥔 채 케이크를 쑤시기 시작했다. 생크림이 포크 목 부분까지 엉망으로 묻어났다. 그걸 보는 정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
지안은 아이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지안의 입에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고마워.”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엄마 할머니다.”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는 모습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왜?”
지안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아이는 더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지안아.”
정후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지안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 지안이 볼을 살짝 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후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지안을 마주했다.
그녀의 남편으로서 7년. 그리고 지안의 소중함을 깨닫고 되찾기까지. 그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정후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너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무수한 나날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언제나 기억되고 싶은 모습으로 정후는 지안에게 다가갔다.
“사랑해.”
정후는 나직이 속삭이며 지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지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세 사람이 앉은 통창 너머로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부신 여름의 태양은 대기의 움직임에 따라 그 빛을 달리했다. 멈춰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변에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의 그림자가 태양의 고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가족은 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고, 산 위에는 달이 걸렸다.
지안과 정후가 함께 녹아든 까만 밤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쉴 새 없이 변해가는 계절에 따라 아이의 옷차림이 달라졌고, 정원의 나뭇잎은 색을 바꿔갔다.
용서할 수 없던 누군가가 다시 돌아왔고, 강렬한 미움의 감정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모든 것은 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득하고 넓은 우주과 쉼 없이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지금 이 순간만의 감정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렇게 지금 이 찰나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하다.
〈결혼시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