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기적. (16/17)

16. 기적.

“지안 쌤, 요즘 얼굴이 완전 폈는데?”

“핀 게 아니라 부었어요.”

지안은 뺨을 쓸며 민망한 듯 웃었다. 턱선이 살짝 둥그스름해졌다. 어제도 정후와 한밤중에 차를 타고 나가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고 왔다.

별것도 아닌 건데 정후와 함께 하면 별게 되는 기분.

차 안으로 들어오는 여름 밤 공기, 포장마차의 무심한 듯한 정겨움이 좋았다.

‘허리가 한 줌인데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

그러나 제일 좋은 건 묵묵히 앞에 앉아있는 남자였다. 그는 지안을 바라보며 제가 시킨 우동그릇을 밀어주거나 입가를 닦아주거나 했다.

“…아무래도 밤에 먹는 걸 줄여야겠어요.”

“같이 살면 그렇게 되는 거지, 뭘.”

연화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입을 열었다. 자신도 문열과 밤에 소주 한잔 하는 걸 좋아한다면서.

“그런데, 그분도 밤에 뭐 먹는 거 좋아해?”

연화가 지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이요?”

“같이 사는 그분.”

아아. 지안은 싱긋 웃었다.

지안은 연화에게만 정후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연화는 재원으로부터 지안의 얘기를 듣고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짐작을 하긴 했다.

다만 그게 태강 그룹의 서정후이고, 지안이 그의 전 부인이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서 임시직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구구절절한 사연에 대해선 함부로 묻지 않았다.

제 모든 비밀을 시시콜콜 공유해야 친하다고 믿는 아이들도 아니고, 때론 모른 척 덮고 지나가는 관계가 어른들 사이에선 더 큰 배려로 남는 법이었다.

“이제 보충도 내일이면 끝이네요.”

지안은 대연고와의 계약을 연장하였다. 태강 그룹에서 하고 있는 장학사업의 여파였다. 교장은 지안에게 한동안 재계약 걱정 없이 계속 일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 계약 연장됐다고 했지?”

“네.”

“축하해. 계속 같이 일하니까 좋다.”

연화는 지안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히 이야기했다.

정후가 곁에 있었지만 지안이 삶을 꾸려나가는 터전은 아직 학교에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굳건했지만, 아직 재결합을 논하기엔 애매한 시점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나머지를 위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도 좀 더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다.

“감사해요, 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안은 연화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그래, 더운 날 수고가 많다. 잘 들어가.”

지안은 학교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후는 지안이 자전거를 더는 안 탔으면 하는 눈치였다. 위험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속 고집부리면 직접 바래다줄 것 같은 태세라 지안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긴 숲길을 지나 정후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공기는 좋지만, 주택가와는 다소 떨어진 지역이라 정후는 경비와 보안에 신경 썼다고 했다.

지안은 주로 후문 쪽 차고를 이용했다. 차고와 연결된 통로를 통해 바로 1층으로 올라갔다.

“휴.”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몸이 유독 쳐졌다. 지안은 에어컨을 틀었다. 가사도우미가 오전에 다녀간 모양인지 아침에 나와 있던 물건들이 싹 정리되어 있었다.

1층엔 거실과 주방, 정후의 운동실과 서재가 있었다. 그리고 2층은 침실과 커다란 욕조가 있는 화장실, 드레스룸이 있는 구조였다.

2층에 있는 욕조는 밖으로 창이 나 있어 정원을 바라보며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땀도 났고, 컨디션도 끌어올릴 겸 지안은 욕조에 몸을 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은 나선형이었다. 지안이 어렸을 때 자주 장난을 쳤고, 세욱에게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며 늘 주의를 들었던 곳이었다.

정후는 지안의 추억과 취향을 반영해 근사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예전에 지나가며 했던 말도 하나하나 기억해 신경을 써준 흔적이 좋았다.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여전히 감정표현은 많지 않았지만, 지안은 이런 부분에서 정후의 사랑을 느꼈다.

그때였다.

지안이 배시시 웃으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지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살판이 났네, 이 요망한 년이.”

지안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어머님.”

영희가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지안을 쏘아보았다.

“너, 이러려고 정후랑 이혼했니? 위자료 받아내서 너희 아버지 빚 다 갚고, 둘이 나가서 살림 차리려고?”

지안은 계단 난간을 꼭 쥔 채 얼어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여기…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반쯤 미친 듯한 영희의 얼굴에 지안은 공포감을 느꼈다.

“애미가 돼서 내 아들 집에 마음대로 오지도 못해? 아주 이것들이!”

영희는 복장이 터진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지안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이야기하려 애썼다.

“어머님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존중해주세요.”

영희가 코웃음을 쳤다.

“뭐, 존중? 하여튼 이건 입만 살아서. 너 같은 년은 버릇을 아주 단단히 고쳐야 해. 백날 말로 해선 아주 들어먹지를 못하지.”

영희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와 지안을 향해 다가왔다.

“악!”

지안이 피할 새도 없이 어깨를 움켜쥐고는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당장 헤어지지 못해? 맞선 잘 보고 다니던 애를 왜 꼬드겨서 기어코 딴 살림을 차리게 만들어?”

영희의 날카로운 손톱이 지안의 어깨를 짓눌렀다. 분노와 악의로 가득 찬 힘을 지안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제발 이것 좀 놓고 얘기하세요!”

지안은 영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네 입에서 헤어진다는 말 듣기 전엔 절대 못 나간다.”

영희의 태도는 완강했다.

“정후 씨 제 말 들을 사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지안은 영희의 팔에 매달려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생각이 있는 애면 정후가 너를 찾아도 밀어내고 처신을 잘해야지. 너 진짜 우리 집안 망하게 할 일 있니?”

“어머님. 저 누구보다 태강 그룹이랑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제발 절 좀 내버려 두세요.”

“아닌 척 뒤에서 정후 조종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영희는 지안을 마구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감당하지 못할 악력에 지안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아무리 영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봤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이것 좀 놓고―.”

지안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애원하며 속삭였다. 뒤는 막다른 계단이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몸을 틀기 위해 발을 옮겼지만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아악―!”

지안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필사적으로 무언가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공중에 뜬 몸이 쿵 소리를 내며 계단 끝에 부딪혔다. 지안은 몇 번 굴러가다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뭐, 뭐야.”

영희의 눈에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굳히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주제도 모르는 년이, 어딜 감히.”

의식을 잃은 지안의 이마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희는 차갑게 식은 눈을 들어 널브러진 지안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양쪽 어깨에 찰과상, 허리와 하반신 쪽으로 다발성 타박상이 보입니다. 왼쪽, 네 번째 갈비뼈가 경미하게 금이 갔고, 이마는 찢어진 환부가 커서 5 바늘 정도 꿰맸습니다. CT 촬영 결과 머리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며칠 입원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정후의 시선이 지안에게서 붙박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싸늘한 분노가 감돌았다.

지안은 병실 침대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한번 깨어났다가 진정제를 맞고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정후는 지안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는 그에게 누구도 쉬이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입원해야 합니까?”

정후는 지안이 달고 있는 몇 개의 링거액을 바라보다 의사를 향해 물었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일주일 정도 더 입원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 회진 때 산부인과 박 교수님도 내방할 예정입니다.”

정후는 날 선 눈빛으로 뒤에 선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나보고 지금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당장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불러와요.”

차갑게 내뱉는 말에 의사가 어깨를 움찔했다.

“네, 부사장님.”

김 실장은 빠르게 대답했다.

지금은 무조건 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 실장은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의사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하아.”

정후는 지안의 손을 움켜쥐며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아까의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응급실에 오자마자 지안은 기본 검사부터 거쳐야 했다. 의사가 정후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

‘환자분께서 현재 임신 3주차입니다.’

‘…뭐라고요?’

정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놀랄 틈도 없이 의사가 재차 말을 이었다.

‘CT 촬영 여부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CT 촬영은 방사선 노출로 인해 태아에 좋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뜬 지안은 임신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안은 절대 CT를 찍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후에게 지안의 무사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그는 지안이 결국 허락할 때까지 길고 긴 설득의 시간을 거쳤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게 이런 기분일까.

정후는 말없이 지안의 얼굴을 쓸었다. 아직도 그녀의 뺨은 차갑기만 했다. 이마엔 몇 겹인지도 모를 붕대를 잔뜩 감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계단 아래 쓰러진 지안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정후는 말 그대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지안이 의식이 없어 급히 119를 불렀고, 바로 태강 그룹의 협력병원으로 이동했다. 치료받는 내내 정후는 지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의식을 찾은 지안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했다. 그 말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지만, 정후는 조심성 많은 그녀가 이런 식으로 다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집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거 맞아?’

‘…….’

얼버무리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빨리 대답해. 나 돌아버리기 전에.’

지안은 지친 눈을 들어 올리며 정후를 바라보았다.

‘…정후 씨도 이제 그만 좀 쉬어요. 나 돌보느라 잠도 못 자고, 당신 예민해졌어.’

그러나 정후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최근, 이 정도로 화가 나본 기억이 없었다. 지안에게 더 물었다간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다그칠 게 뻔했다.

정후는 김 실장을 불러 현관 CCTV를 확인하게 했다. 결과는 반쯤 그가 예상하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정후 씨.”

지안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안아.”

정후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뭔가 더 말을 하려다 눈썹을 찡그렸다. 입으로 소리만 내려고 해도 식도가 따가웠다.

“말하지 마.”

정후는 빠르게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셔왔다. 바싹 말라붙은 지안의 입술을 닦았다.

“물 좀 마셔.”

그는 물 잔을 들고 그녀의 입가에 댔다.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자 지안이 밭은기침을 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가녀린 등을 쓸었다. 그는 지안의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먹였다.

“아무 생각 말고. 낫는 것만 신경 써.”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하나도 없어 축 처진 몸이었다. 어떻게 다시 제 곁에 둔 지안인데, 또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속이 새카맣게 탔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정후가 까칠하게 일어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후 씨.”

지안이 그의 손등을 가만히 쥐었다.

“왜.”

그 손을 꼭 잡으며 정후가 지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지안이 힘겹게 한마디씩 내뱉었다. 정후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하고 속삭이며 지안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 고여 들었다.

“얼른 낫자.”

시퍼렇게 멍든 지안의 등허리를 보고 정후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래야죠. 우리 아기도 생각해서….”

지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후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겨우 되찾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평안한 나날도 잠시, 다시 영희를 보는 순간 덜컥 불안함이 앞섰다.

눈을 뜨자마자 다시 병원이었고, 또 무슨 끔찍한 일이 있을지 막막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임신 이야기에 지안은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낫고,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애보다 네가 우선이야.”

그러나 정후는 이미 지안의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또 고집부릴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건 양보 못 해.”

정후의 침묵에 지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는 일단 낫는 것만 생각하자, 하며 지안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다 빗장뼈 부분에 생긴 자국에 시선이 멎었다.

“이거.”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에 지안은 네크라인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정후는 이미 상처를 전부 확인한 뒤였다. 그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어머니가 그런 건가?”

순간 지안의 눈동자가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아니에요.”

일순 정후의 눈에서 날카로운 불꽃이 튀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정후 씨.”

“…….”

“당신 어머니예요. 나 심하게 안 다쳤고요.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지안이 정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정후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넌 모를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이성적인지.”

“…….”

“이성을 조금만 놨어도 무슨 짓을 했을지… 나도 모르겠어.”

지안은 말없이 정후의 손에 깍지를 꼈다. 다친 저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정후는 지안의 손을 잡아 손끝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더는 아프지 마.”

“…….”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제가 아프고 싶었다. 뭐하나 대신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칠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지안을 당겨 안았다. 지안은 다시 약 기운이 도는지 머리를 기대어왔다. 정후의 커다란 품에 안겨 지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 * *

“나 지금 나가니까 차 바로 대기 시켜놔.”

영희는 통화를 마치며 휴대폰을 가방 안에 던졌다.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은 L 미술관의 화장실 세면대 앞이었다. 영희는 거울을 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영희는 달마다 한 번씩 지인들과 미술 공부를 했다.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정·재계 사모들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대리모 관련 기사가 떴다. 어느 여성 월간지의 단독 특종 보도였다.

「충격 르포. 후계자를 얻기 위한 어긋난 모정. 나는 국내 굴지의 T그룹 대리모였다.」

세간의 관심을 확 끌 만한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2장 분량의 인터뷰에는 대기업 사모의 의뢰로 대리모가 된 과정, 오간 돈의 구체적인 액수와 일이 무산된 이후의 이야기까지 구체적으로 폭로되어 있었다.

소송을 피하기 위해 기사 내용은 전부 이니셜 처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몇몇 정황을 가지고 이 기사가 태강 그룹의 이야기라는 것을 단숨에 유추해내었다.

‘태강 그룹 며느리가 이것 때문에 못 참고 이혼했나 보네.’

‘남편은 외도에 시모는 대리모까지. 나 같아도 못 살겠다.’

언론에는 미처 공개되지 않았던 서정후의 전 부인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다.

태강 그룹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 뒷소문은 더 빨리, 마치 확실한 정황처럼 퍼져나가는 법이었다.

그러나 영희는 당당했다.

‘내가 왜 숨어야 하는데?’

그녀는 제가 한 모든 일이 회사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고 하나의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제 손 하나 더러워지는 것쯤이야 상관없었다.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았기에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모임에 나타났다. 그러나 자신을 위로해주리라 생각했던 지인들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영희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수군대는 시선을 피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얼굴에 선글라스를 얹은 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수치심도 없나 봐.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누가 아니래요? 오늘 내 눈을 의심했잖아.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복도를 걷던 영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갤러리 입구 앞에서 회원 너덧 명이 모여있었다.

“근데 그거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없던데.”

“당연히 언급 안 하겠죠. 긁어 부스럼 아니야. 나도 모른 척해줄까 싶다가도 그 인터뷰 보면 평소랑 말투가 너무 똑같아서. 여기서도 고상한 척하다가 자기 무시한다 싶으면 본성 나오잖아요.”

“매번 자기 며느리 복 없다고 하는데 난 그것도 듣기 좀 그랬어. 진짜 그런 집이랑은 사돈 하기 싫거든. 사위가 아무리 잘나도 결혼 못 시키지.”

“우리한테는 맨날 며느리한테 위자료 섭섭지 않게 챙겨줬다고 했는데 나 액수 듣고 놀랐잖아. 그걸 누구 코에 갖다 붙여.”

회원들 사이에서 동조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낯 같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원래 없이 살았던 사람이라 그런가? 이번에도 대리모한테 계약금인지 뭔지 안 준다고 했다가 이 사달 난 거 아니야.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어후, 질려 정말. 사람이 참 질색할 만한 구석이 있어요, 그쵸?”

“그거 보면 옛날에 그, 서 회장님 첫 번째 부인 사건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 비서였다면서.”

“어머, 그건 진짜 좀 무섭다.”

‘저 괘씸한 것들이!’

영희는 스카프를 휘날리며 발길을 돌렸다. 여자들은 걸어오는 영희를 보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머, 사모님. 아직 안 가셨네요.”

“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희가 따지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이 모임을 주관하고 있는 L 미술관의 부관장이었다.

“사모님.”

정중하면서도 고압적인 말투에 영희가 걸음을 멈췄다.

“넌 또 뭐야?”

영희가 꽥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말씀 드리긴 송구하지만, 한동안 모임을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옆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희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뭐라고?”

부관장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까지 불똥이 튀면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저희 회원 분들이 다들 사회적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라.”

태강 그룹은 최근 L 미술관에 대한 지원을 전부 중단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내부결정이 더욱 빨랐다. 영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글쎄 그거 사실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녀가 크게 내지르는 소리에 지나가던 일반 관람객들까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야?”

“…….”

“거짓 기사라고. 나 그런 적 없는 사람이야!”

부관장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상황이 잠잠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신들…!”

영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관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오픈된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리모 구할 생각을 해.”

“사람이 정도를 몰라. 격 떨어지게.”

회원들의 비웃음이 따라붙었다. 평소 오만방자했던 영희의 태도에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이때다 싶어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목까지 시뻘게진 영희는 황급히 차를 향해 걸어갔다.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기사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서 부사장 어딨는지 당장 찾아내.”

땅에 떨어진 제 명예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지금 영희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어 저를 업신여긴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 * *

‘용무가 있는 사람이 오라는 말을 하셨다고….’

영희는 운전기사의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 지르니 ‘그럼 지금 부사장님 계시는 병원으로 모실까요?’ 하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영희는 속에서 열불이 확 치솟았지만, 운전기사는 서 회장의 지인 소개로 들어앉은 인간이라 확 잘라버릴 수도 없었다.

“여기 민지안 병실 어디야.”

그녀는 병원 입구에 서서 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했다.

―전… 사모님을 말씀하시는지요?

시치미를 떼는 듯한 말에 영희는 코웃음을 쳤다.

“됐고, 빨리 병실이나 말해.”

―그분 병실을 제가 어떻게….

그는 능구렁이 같은 아들 밑에서 몇 년을 썩더니 요리조리 대답을 에두르며 잘도 빠져나갔다.

“지금 서 부사장 거기 붙어있는 거 다 확인하고 왔어.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빨리 말 안 해?”

영희가 쌍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김 실장은 그제야 지안이 있는 호실을 털어놓았다.

지안의 입원실을 향한 영희의 보폭이 점점 빨라졌다. 김 실장의 연락을 받은 정후가 이미 병실 문 앞에 나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너 진짜 제정신이니?”

영희는 정후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그는 영희의 팔을 잡고 비상구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게 진짜. 너 왜 이래?”

영희는 정후를 세차게 뿌리쳤다. 팔이 으스러질 것 같은 힘이었다.

“기사를 내리든가 무슨 조치를 취하든가 해야지,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옵니까.”

그러나 정후는 이보다 더 싸늘할 수 없는 얼굴로 영희를 내려다보았다.

“네 놈이 여기 있는데 그럼 나보고 어디를 가란 소리야?”

살았는지 죽었는지 코빼기조차 안 보이던 아들이었다. 지안과 딴 살림까지 차렸다는 소식에 영희는 그 자리에서 뒷목을 잡았다. 사용인을 통해 그 집 가사도우미를 알아내어 당장 쳐들어갔다.

“여기 지안이 병실이에요. 안 그래도 힘든 애를 어디까지 밀어붙인 거냐고요!”

사나운 음성이 계단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영희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정후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한 뒤였다. 뒷문 현관 쪽에 설치된 CCTV에 계단 아래 쓰러진 지안을 흘끗 보고 그대로 걸어 나가는 영희의 모습이 찍혔다.

“…내가 뭘?”

그러나 영희는 코웃음을 쳤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들은 마땅한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안의 입원에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바보같이 혼자 놀라서 발을 헛디딘 걸 어쩌라는 건지.

당분간은 아들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오늘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영희의 관심사는 오직 한가지였다.

“너, 일 안 하니? 그 기사 못 봤어? 지금 이렇게 손 놓고 있는 이유가 뭐야? 해명 기사는 왜 안 나오고. 그룹에서도 공식적인 발표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영희는 목에 핏대를 올리며 발악하듯 외쳤다. 정후는 짧게 웃었다.

“먹칠은 스스로 해놓고선.”

“뭐?”

“사실인 기사를 뭘 내리라는 겁니까.”

영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너… 너, 이놈이. 이거 네가 올리라고 한 거야?”

예상지 못한 발언에 영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십니까?”

영희는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제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병실까지 쳐들어왔다. 정후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사람이 그를 낳고 키웠던 것이다.

“…이 사건, 크게 띄우면 아주 볼만할 것 같은데.”

정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

영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 그래도 태강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이 개떼처럼 달라붙을 겁니다.”

아직 상정된 대리모 법이 없어 직접적인 처벌은 없겠지만, 언론에선 도의적인 책임을 물며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대리모와 브로커가 민사소송을 걸어올 가능성도 있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니? 회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영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후를 바라보았다. 언론에 사생활 나도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던 아들이었다.

“난 회사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후는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그런 순진한 거래를 하셨는지.”

“뭐라고?”

영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리모와 브로커가 접촉한 언론사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영희의 입이 바싹 말라왔다.

“그러니까. 네가 좀 어떻게―.”

영희는 정후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의 잡음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할 거라 믿었다.

시술 날짜를 받아두었으나 운 좋게 이혼을 하게 되어 대리모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 계약금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그동안 준비하는 데 썼던 비용을 정산해달라고 해 어이가 없었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용역을 불러 죽도록 패주었다.

어차피 할 짓이 없어 남의 애나 낳아주는 거머리 같은 인생들이었다.

자신은 태강의 사모였고, 그들은 자신에게 조그마한 흠집조차 낼 수 없는 한낱 미물 같은 존재였다.

“내가 당신을….”

정후는 영희를 노려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감정이 통제가 안 되는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는 아직도 종종 지안과 헤어지던 날의 장면이 생각나곤 했다.

힘들고 지쳐 그대로 바스라져버릴 것 같던 지안의 모습이.

그런 그녀에게 자신과 영희는 도대체 무슨 독을 퍼부었던 건지.

아이를 갖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지안을 알았기에, 정후는 영희의 말도 안 되는 요구가 더 용서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찰에 신고 안 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세요. 입원해 있는 애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는 거니까.”

집에 들어와 지안에게 해코지까지 할 줄이야. 원래도 정이 없던 모자지간이었지만, 정후는 없던 정마저 뚝 떨어질 만큼 영희가 증오스러웠다.

제 욕심을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도구처럼 취급하며 살려 하는지. 지안도 자신도 하나의 희생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랬다고 생각해? 다 회사를 위해서야.”

정후의 반응에 뭔가를 눈치챈 듯 영희가 긴장감이 감도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응? 정후야. 내가 지금 나 하나 잘 되자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지금 이 사건이 언론에 공개돼도 그 말 계속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정후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완강했다.

영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희생을 했는지―.”

“희생?”

정후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내키는 대로 휘젓는 걸 희생이라고 합니까?”

“…….”

“그런 고상한 단어로 본인이 저지른 일을 포장하지 마세요.”

“너 진짜….”

영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제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네가.”

영희는 정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미친 짓을 하셨으면 죗값을 치르셔야죠.”

“…….”

영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후를 응시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원하는 게 뭐야.”

영희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정후의 서늘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내리꽂혔다.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빨리 말해.”

일순 정후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몇 마디 말을 쏟아내었다. 정후의 입을 바라보는 영희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태강 그룹 안방 들어앉기 전처럼, 손가락 빨고 살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들 된 도리를 겨우 끌어내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니까.”

“…이 미친놈이! 야!.”

영희는 눈을 매섭게 치뜨며 정후를 죽어라 쏘아보았다.

“너, 기어코 그 애랑 다시 살 거니? 다시 붙어먹을 거야? 난 처음부터 걔 마음에 안 들었다. 순진한 척하면서 한마디도 안 지는 게 아주 눈엣가시였다고!”

그러나 정후는 영희를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나마 사람에 미친 게 낫죠.”

“…….”

“이대로 하면 기사 막고, 공식적인 입장표명도 하겠습니다.”

정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영희를 흘끔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며 문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기한은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확인 안 되면 바로 언론에 증거 풀 예정입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영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정후의 등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너 어쩜 나한테 이러니? 나 네 엄마야. 태강 그룹 사모라고!”

정후가 영희의 팔을 확 잡으며 거칠게 끌어내렸다.

“여기 병원입니다. 끌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세요.”

“…….”

“지안이 털끝이라도 더 건드리면 그때는 어머니고 뭐고 없습니다. 후레자식 소리를 듣더라도 한 만큼 그대로 갚아줄 테니까.”

그는 차갑게 읊조리며 문을 열고 사라졌다.

* * *

어느 새 입원실 창문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안은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부스스 쓸어올렸다. 진료를 받고 와서 잠깐 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하니 정후의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 일이 있어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

지안은 짧게 하트를 입력해 답을 보냈다. 바로 정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건 전화라고 했다. 밥은 잘 먹었는지, 낮잠을 잔 건지, 그냥 별다른 내용 없이 종료된 통화였는데 복도에 잠깐 나와있었던 건지 말이 낮게 울렸다. 빨리 가서 보고 싶다던 정후의 목소리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지안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소파 위에 놓인 책을 들고 왔다. 지안이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이었는데 정후가 어떻게 알았는지 심심할 때 읽으라며 사다준 것이었다.

규칙적이면서도 평온한 병실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후는 지안이 계속 병원에 있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지안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거동에 문제만 없으면 바로 퇴원할 생각이었다.

영희와 일련의 사고가 있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집이라 그런지 그곳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이 있었다. 지금 배 속에 아이가 있어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본능처럼, 몸도 마음도 편한 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리고 거기에 정후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똑똑.

“네.”

지안은 고개를 들어 훅 줄어든 링거액을 확인했다. 담당 간호사가 다른 수액을 하나 더 맞아야 된다고 했던 것 같았다.

침대로 다가오는 기척이 없어 얼굴을 돌리니 예상치 못한 인물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영희였다.

순간 지안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정후로부터 조만간 영희가 올 거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멀뚱하게 서 있는 영희의 모습에 지안의 기억은 얼마 전, 그녀와 맞닥뜨렸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계단에서 무지막지한 기세로 다가오던 영희의 모습이 생각났다. 흉포하게 일그러진 표정 또한. 그때 심하게 부딪혔던 상처가 갑자기 욱신거렸다. 만약 머리부터 부딪혔다면 이렇게 간단한 입원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발이 허공에 몇 초간 떠 있던 순간은 끔찍한 공포로 남았다. 눈을 감으면 심장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지안은 얕게 잠이 들었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옆을 지키고 있던 정후가 등을 쓸어주며 그녀를 다시 재웠다.

지안은 창백해진 얼굴로 혹시나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얼른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영희는 입술만 씰룩인 채 괜한 헛기침만 늘어놓고 있었다. 지안은 마음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영희를 바라보았다.

평소 특유의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는 금테안경만 추어올리며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

그녀가 왜 입을 떼지 못하는지, 대충 상황을 짐작한 지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안은 일부러 영희를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멀뚱히 서 있는 영희를 무시한 채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 지안은 영희의 침묵이 방해되었다.

“…할 말 없으시면 나가세요.”

지안의 차가운 음성에 영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안을 흘끔 보더니 말을 더듬었다.

“그럼 여기 왜 오신 건데요?”

영희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부채질을 하거나 머리를 쓸어넘기며 부산스럽게 행동했다.

“용건 없으면 그만 가주세요. 쉬고 싶으니까.”

지안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아직도 금간 갈비뼈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고, 영희를 보니 그때의 두려움이 다시 그녀를 엄습했다.

책을 쥐고 있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이를 위해서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한다는데 매 순간 마음을 편하게 다스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신 축하하고.”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금테 안경 너머 얇은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지안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영희를 쳐다보았다. 영희의 손엔 휴대폰이 꼭 쥐어져 있었다. 지안의 시선이 잠시 휴대폰에 머물렀다.

“…내, 내가 미안했다. 그동안―.”

영희는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지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 잘되려고 그랬겠니. 다 회사 위해서, 자식들 잘되라고 그런 거였는데, 그게 기분 나빴다면―.”

영희는 말하는 중간마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그것을 꾹꾹 누르며 호흡을 한 번씩 가다듬었다. 지안은 무감한 얼굴로 그녀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뜬금없는 노크 소리에 영희의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지안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네.”

병실문이 열리자 영희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지안을 쳐다봤다.

“수액 다 맞으셨을 것 같아서 다른 거 가지고 왔어요.”

지안을 담당하는 간호사는 예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네.”

지안은 상냥한 미소로 화답했다.

“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 어머, 사모님이 계셨네요.”

지안에게 걸어오던 간호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희를 향했고, 순간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영희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영희가 일전에 무릎 수술로 입원했을 당시, 혈관을 한 번에 찾지 못해 링거바늘을 여러 번 찔렀다는 이유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했다.

“…뭐, 응.”

그게 겨우 몇 달 전의 일이라 영희 또한 간호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희는 갑자기 제 처지가 민망해졌다.

“크음.”

그녀는 마치 병문안을 위해 이곳을 방문한 사람처럼 병실 중앙에 놓인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으며 휴대폰을 갑자기 껐다가 다시 켜기 시작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간호사는 지안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수액을 교체했다. 잠시 두 사람을 살핀 지안이 꼿꼿하게 앉은 영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

“…응?”

자신을 부르는 단정한 음성에 영희가 눈을 크게 떴다.

“왜 말씀을 하다 마세요?”

간호사의 눈이 조심스럽게 지안을 향했다.

“미안하다고만 하시고 그 뒤에는 말씀을 안 하셨는데.”

수액을 새로 걸고 정리하는 손길이 느려졌다. 소파에 앉은 영희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지안이 재차 말을 이으려고 했을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진입니다.”

지안은 네, 하고 들어오라는 대답을 했다. 영희의 낯빛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지안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가 그 아래 의료진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이 병원의 스타 교수이다 보니 그를 따르는 레지던트와 인턴들의 숫자가 유난히 많았다.

“오늘 좀 어떠세요.”

나이가 지긋한 교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지안의 상태를 물었다. 태강 그룹의 협력병원이었고, 정후의 입김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일이 없어도 지안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좋아요.”

지안의 대답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소파에 앉아있던 영희를 발견했다.

“아, 사모님이 와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영희와 제법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응, 그래. 김 교수도 오랜만이네.”

영희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내가 잠깐 볼일이 있어서 좀 왔는데.”

김 교수는 지안과 영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알아채곤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태강 그룹 부사장의 전처가 입원을 했고, 또 임신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서정후에 대한 이야기. 병원에선 명확한 실체가 없는 뜬소문만 알음알음 퍼져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갑자기 병문안을 온 태강 그룹 사모라.

교수 뒤에 서 있는 젊은 의사들은 뭔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간호사의 표정에 영희의 신경이 곤두섰다.

“…회진 다 끝났으면 좀 나가지?”

영희의 날카로운 반응에 머쓱해진 교수는 짧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간호사 또한 수액 교체를 마치고 다른 의사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어머님.”

지안이 다시 영희를 불렀다.

문손잡이를 잡던 교수가 동작을 멈췄다. 지안은 아직도 소파에 앉아있는 영희를 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뭐가 미안했는지 말씀을 하셔야 제가 사과를 받든가 말든가 하죠.”

지안의 말에 아직 병실에 있던 의료진들이 전부 영희를 바라보았다.

“얘, 지안아. 좀 나중에―.”

영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저 잘되라고 해주신 말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헷갈리는데.”

“…뭐, 뭐야?”

영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영희는 급한 걸음으로 지안을 향해 다가갔다.

“친정아버지 회사 어려워지니까 저보고 거렁뱅이 같은 집안에서 왔다고 하신 거요? 아니면 쓸데없이 시험관 시술 그만하고 대리모 써서 애 가지라고 한 거요?”

교수는 나가려던 것도 잊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입모양으로 대박, 이라고 속삭였다. 영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저 위로해주시면서 말씀하셨잖아요. 너는 애 못 낳으니까 난자채취하자고.”

맨 끝에 서 있던 인턴이 입을 막으며 쿨럭였다. 영희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면 저보고 주제도 모르는 년이라고 계단에서 밀어버린 거 사과하러 오신 건가요?”

“…너 진짜 미쳤니?”

영희가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으로 지안의 앞에 섰다. 지안은 담담한 얼굴로 영희를 바라보았다.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야!”

영희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었다.

“다들 안 나가?!”

영희의 새된 외침에 의료진들은 병실 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영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지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진짜 감히 누구한테….”

“…….”

“내가 네 년 앞에서 차마 무릎은 못 꿇겠다.”

다시 드러난 영희의 본성에 지안은 냉랭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사실 영희가 정말 용서를 구하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지안이 아는 영희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웬만한 사람은 다 제 밑으로 보았다. 그런 그녀가 평소 심하게 무시하던 사람을 찾아와 사과하고, 제 잘못을 낱낱이 고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럼 여긴 왜 오셨어요?”

그 말에 영희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발로 확 차버리곤 몇 번이나 욱여 밟았다.

그대로 문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 뒤 문손잡이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으나, 그녀는 이대로 갈 순 없었다.

‘지안이한테 사과하세요. 사과한 거 녹음해서 저한테 보내시고요.’

영희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나가버린다면 서정후의 주도 하에 제가 저지른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지 영희는 막막하기만 했다.

영희는 어떻게든 언론발표를 막고, 제대로 된 입지를 다진 후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대로 조롱당하며 살 순 없었다.

영희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다시 지안 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수치심은 잠깐일 뿐, 그녀는 언제나 제 목적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자존심보다 그녀의 안위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영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다시 휴대폰의 녹음기능을 켠 뒤 지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미, 미안하다. 내가….”

영희의 팽팽한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아 있었다.

“…뭐가 미안하신데요?”

지안은 담담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너한테 대리모 써서 애 갖자고 한 거. 임신 못 한다고 비난한 거랑 너네 집안이랑 아버지 무시한 거….”

“…….”

“…쓸모없는 며느리라고 한 것도 사과할게.”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안이 고개를 휙 돌렸다.

불편했다.

사과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저 불편하기만 한 광경이었다.

영희가 지안에게 한 일은 그런 것이었다. 사과를 주고받아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나았을 법한 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지안에게는 힘든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영희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옆에 있어준 적이 없었다.

지안의 상황이 점점 나빠질 때마다 그만큼 함부로 대해도 좋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지안을 재단하고 평가했으며 제 기분이 나쁠 때마다 아무렇게나 악담을 퍼부었다. 그것이 이 집에서 너의 역할이자 효용이라고 세뇌시키며.

“…다하셨으면 나가세요.”

지안은 영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제 쉬어야 하니까.”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영희는 피가 맺힐 듯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괘씸한 년.’

영희가 비참한 표정으로 병실 밖으로 나오자 너스 스테이션 앞에 모여 있던 간호사들이 바쁘게 시선을 피했다. 영희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올라탄 차 안.

영희는 정후에게 녹음파일을 보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영희는 어떻게든 이 분노를 풀고 싶었다.

“…차 안이 왜 이렇게 더워? 당장 에어컨 안 켜?”

영희는 애꿎은 운전기사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덤덤하기만 했다.

“에어컨 계속 틀어놨었는데. 사모님이 지금 더운 건 아니시고요?”

외려 그녀의 속을 뒤집는 듯한 반응에 영희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이게 진짜 미쳤나.”

“…….”

“일단 집으로 가.”

“네, 사모님.”

싱글벙글한 운전기사의 낯짝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집에 도착한 영희는 사용인에게 가방을 내팽개치듯 던지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서강욱이 앉아있었다.

단지 기사에는 이니셜만 드러났을 뿐인데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영희의 모든 것을 무시했다.

마치 집에 함께 있어도 그녀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 듯 식사도 따로 했다.

‘본분을 잊지 말란 말이야. 자꾸 내 신경줄 긁지 말고.’

영희는 강욱이 질린다는 듯 내뱉었던 말을 기억했다.

“당분간 나가 있어. 내가 오케이 할 때까지 들어오지마.”

그는 영희를 흘끔 보더니 마치 최종통보인 것처럼 러시아행 편도 티켓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영희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싫어요, 나는.”

“…….”

“나 거기 아는 사람도 없고, 춥고―.”

강욱이 차가운 눈을 들어 영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신 의사 물어본 거 아니야.”

영희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정후가 기사 막아준다고 했어요. 공식입장도 표명하고, 없던 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고요.”

서강욱이 싸늘한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져? 내가 오늘 밖에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알기나 해? 어차피 회사 이름 등에 업고 사는 주제에 행동 좀 조심하면 안 되겠나? 꼭 그 밑바닥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려?”

“여, 여보.”

영희가 강욱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차갑게 뿌리치며 일어났다.

“당신이 뭐라도 되는 양 헷갈리는 것 같은데 내가 정확히 말해주지. 당신, 아무 것도 아니야. 지금 여기서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고. 이번 기회에 똑똑히 새겨둬.”

서강욱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영희는 아무도 없는 거실에 홀로 남겨졌다.

* * *

똑똑.

김경미 원장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환한 빛이 쏟아지는 병실 안에 지안이 침대에 기대 누워있었다.

“오늘은 좀 어때요?”

김 원장은 싱긋 웃으며 지안의 얼굴을 살폈다. 침대 앞에 꽂힌 차트를 열어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제 자면서 배가 좀 뭉치기도 했는데, 금방 괜찮아졌어요.”

지안은 고위험군 산모에 속해있었다. 그동안 몇 번 피가 새어 나오는 긴급한 상황이 있었고, 정후는 아예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기 위해 지안에게 병원에서 지내자고 했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위해 김 원장이 있는 병원으로 옮긴 지도 어느덧 5개월.

조금이라도 무리를 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내내 누워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병원 자체에 산모를 위한 운동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정후는 김 원장을 따로 찾아와 구체적인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완전히 달라진 정후의 모습에 내심 놀라며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정후는 지안에게 직접 가벼운 마사지를 해주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쳐지지 않도록 그녀의 친구들과 반 학생들을 병실에 초대해 편안한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기적이네요.”

김 원장은 지안의 임신을 두고 그런 말을 했다. 임신 초기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엄마 아빠의 배려 아래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었고, 김 원장은 지안에게 아주 건강하게 출산할 것 같다는 긍정의 말을 했다.

“아이가 그동안 지안 씨에게 오고 있는 중이었나 봐요.”

긴 기다림이었다.

김 원장은 애틋한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지안 씨 컨디션도 좋아 보이고. 아기 초음파 검진일정은 다시 잡아볼게요.”

그녀는 지안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결과예요. 마지막까지 아기랑 건강하게 만날 수 있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줄게요.”

그간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안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저 정후가 진료실 앞 대기실 의자에서 같이 기다려주었으면 했던 게 그녀가 바라던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화목한 부부의 모습이 부러워 병원에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들이 가끔 지안을 힘들게 할 때도 있었지만, 지안은 이 모든 게 긴 기다림의 과정 속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픈 기억마저 행복한 과정으로 치환하며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작은 생명을 맞이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안은 김 원장을 바라보며 환하게 마주 웃었다. 부드럽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미소였다.

끼익.

“지안아.”

정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회사에서 오는 길이라 정장차림이었다.

“왔어요?”

지안이 정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정후의 가슴 한편이 술렁인다.

지안은 침대에 붙은 테이블을 위로 올린 뒤 초음파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후는 재킷을 벗은 뒤 간단하게 손을 씻고 지안에게 다가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오늘 뭐 했어. 좋은 하루였어?”

정후는 가위질에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이마와 살짝 흘러내린 잔머리.

본사에서 회의를 연달아 마치느라 잠깐 통화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지안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귓가에 꽂아주고 부드러운 볼을 한번 쥐었다 놓았다.

정후의 손길에도 지안은 초음파사진을 자르느라 정신없는 얼굴이었다.

“음, 오늘… 오전에 검진도 받고, 잠깐 운동하고요.”

“…….”

예쁘게 말하는 입술에 키스부터 하고 싶었지만, 아직 자신의 차례가 아닌 것 같아 정후는 가만히 기다린다.

“관우랑 반 아이들 왔다 갔어요. 민영이는 내일 온다고 하고.”

정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병실 한쪽 벽면에 여러 사람이 엉망으로 끼적인 듯한 커다란 종이가 붙어있었다. 지안은 아이들이 주고 간 롤링페이퍼라고 했다. 여러 개의 하트와 몇몇 문구가 거슬렸지만 정후는 내색하지 않았다.

“옛날 생각난다. 네가 이렇게 나 기다리는 거 보니까.”

지안의 관심을 끌어오기 위해 말을 던졌지만 그녀는 그냥 피식 웃고 만다. 정갈하게 자른 초음파사진을 한데 모으더니 직접 붙이려는지 옆에 있던 앨범을 펼쳤다.

“뭐하러 사진을 또 자르고 붙여.”

정후는 지안의 손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여러 장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냥… 좋아서 그러죠.”

지안은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겨우 사진 하나에 골똘해진 표정을 보고 정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와줘?”

지안은 정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앨범 위에 예쁘게 배치해 봐요.”

정후는 싱긋 웃으며 지안의 옆에 바싹 붙어앉았다.

“음.”

정후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지만, 그는 나름 고심해서 사진을 나눴다.

“됐어?”

“응, 완벽해요.”

지안이 링거 바늘이 꽂힌 팔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가만히 그의 허리를 안아왔다. 정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지안을 바라본다.

그는 팔을 크게 벌려 그의 완벽한 아내를 꼭 감싸안았다. 그의 품 안에 딱 맞게 안겨드는 작은 몸. 따뜻한 지안의 체향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정후는 이제야 정말 집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개를 숙여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키스를 하려는데 갑자기 지안이 얼굴을 들어 올리며 앨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후 씨, 근데 여기 좀 봐요. 눈은 정후 씨 닮은 것 같고, 코는 누구 닮았는지 모르겠는데….”

정후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소곤거리는 지안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말들이 그의 귓가에 젖어든다. 이렇게 온 밤이 지새도록 너의 말소리만 듣고 싶었다.

내일도 좋은 날이길.

내가 네 옆에 있는 일상이 켜켜이 쌓여가길.

그리하여 인생 전체가 우리의 모습으로 채워진다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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