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네가 있는 곳
“아아악!”
쨍한 여자의 음성이 온 집안 가득 울렸다. 곧이어 온갖 살림과 물건들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태강 그룹 저택의 사용인들은 저녁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파를 다듬던 손을 놓고 재빨리 주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뭐, 뭐야. 도대체?”
소리의 근원지는 2층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사모님.”
정후와 지안이 떠난 2층은 이제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공간이 된 지 오래였다. 가구 몇 점만 휑덩하게 남았고, 그 위엔 얇은 먼지마저 내려앉았다.
영희는 분노에 찬 얼굴로 복도에 있던 화장대를 발로 차고 있었다. 그 위에 진열되어 있던 향수병은 이미 바닥에 부서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대가 넘어갔다. 영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쥐고 있던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사용인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막고 섰다.
“뭘 보고 앉았어! 이거 얼른 치우지 않고서!”
빽 지르는 소리에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뒤늦게 나타난 서강욱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제정신이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그만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2층엔 두 사람만 남았다.
영희는 한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매섭게 치떴다.
“요즘 정후가 누구 만나고 다니는지, 당신 들었어요?”
“…지금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서강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당신, 알고 있었던 거예요?”
영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뭐가.”
“정후가 이혼한 애 다시 만나는 거요.”
“그게 뭐?”
강욱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쩜 그렇게 태평해요?”
영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욱을 바라보았다.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 걸 며느리라고 품고 산 것도 힘들었는데, 서정후 그놈은…!”
“…좀 놔둬. 이제 겨우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서강욱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영희를 바라보았다.
지안과의 이혼 이후, 정후가 그 정도로 힘들어하는 건 처음 보았다. 지금껏 사업을 일으켜오면서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불평조차 하지 않던 아들이었다.
정략결혼이라 정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의지를 많이 하면서 살았던 모양이었다.
“서재에서 자꾸 술 퍼마시고 쓰러질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 걔가 요즘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내가 알아보고 어이가 없어서.”
영희는 어지러운지 벽을 짚고 섰다.
처음은 정후가 여배우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에서 시작됐다. 김 실장을 들볶으며 알아낸 결과 정후가 경기도 부근의 한 오피스텔 건물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화병이 날 것 같은, 망해가는 회사 하나를 제대로 살려낸 소식까지. 그리고 정후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던 고등학교에 누가 근무를 하고 있었냐 하면.
영희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만 좀 하지.”
강욱은 영희를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지안이와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던 정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회사 지분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말까지.
어차피 강욱은 정후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었고, 회사만 잘 돌아간다면 나머지는 관심 밖이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데려온 아이였고, 그게 그의 쓸모였다.
“당신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할 것 같나?”
강욱이 싸늘하게 내뱉는 말에 영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여보.”
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엉망이 된 공간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가정에 원체 무관심한 서강욱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영희의 행동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제 목적과 욕망에 충실한 여자였다. 태강 그룹을 위해 간도 쓸개도 내줄 듯 열성적으로 구는 내조는 나쁘지 않았으나 착각을 하면 곤란했다. 선을 넘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본분을 잊지 말란 말이야. 자꾸 내 신경줄 긁지 말고.”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었다. 그는 침묵에 휩싸인 영희를 홀로 남겨두고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 * *
“오늘 고마웠어요.”
지안은 제 앞에 선 정후를 바라보았다. 오피스텔의 복도는 지나치게 넓어 밤에는 살풍경한 기운을 풍겼다. 그러나 그가 서 있으니 그렇게 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거.”
정후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랑 1층에서 샀던 향초였다. 지안이 두 가지 향을 두고 고민하자 그는 종류별로 다 사버렸다.
지안은 쇼핑백을 받았다. 정후의 단단한 손끝이 손을 스쳐 갔다. 끈을 꼭 쥐고 있었는지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차 한잔도 안 줘?”
사위는 적막했다.
정후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서늘한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면서 던지는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참기 힘들다는 듯 짙은 눈동자가 지안을 마주했다.
“…너무 늦었어요.”
지안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었다.
벨트를 채워주면서 스치는 손끝이, 걸을 때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그녀를 늘 안쪽으로 두는 배려가, 더 다가가도 싶으면서도 욕망을 애써 누르는 그의 노력이.
오늘 차에서 만났을 때부터 밥 먹을 때까지, 정후의 시선은 내내 지안을 떠날 줄 몰랐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정후는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랑 있으면.”
지안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두드린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남자의 단단한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설레, 아직도 너만 보면.”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지안은 갑자기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손이 지안의 뺨을 쓸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앞으로 흘러내린 지안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귓불을 스쳐간 손끝의 감촉이 아릿한 잔상을 남겼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그리고 정후의 상체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빨리 가요. 내일 출근하려면―.”
지안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키스하는 순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시작이 어려울 뿐이었다. 한번 불붙으면 제어가 안 되는 몸이었다. 지난번, 정후의 목에 매달렸던 기억만으로도 아랫배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
머리 위로 긴 바람이 불었다. 남자의 몸을 돌다 빠져나온 숨은 더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지안은 발끝에 힘을 꾹 주었다.
“먼저 들어갈게요.”
지안은 몸을 돌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후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뚜벅뚜벅. 묵직한 발소리가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맥박이 일순 빨라졌다. 지안은 숨을 참으며 도어락을 열었다. 키패드를 입력하는 손끝이 떨려왔고,
삐삐삐삐―.
잘못된 비밀번호를 눌렀다는 알림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안이 바짝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손가락을 뻗었을 때, 익숙한 향기가 그녀를 덮쳐왔다.
“흣.”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입맞춤이었다. 차가운 철문의 감촉이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후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지안을 문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숨 막힐 듯 옭아매는 남자의 힘이 터질 듯 말 듯한 긴장감을 폭발시켰다.
“하아.”
잠시 시선이 얽혔다. 그녀를 이대로 삼켜버릴 듯한 냉엄한 눈동자였다. 정후는 고개를 기울이며 살짝 벌어진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여러 번 각도를 바꾸며 키스했다.
“…번호, 틀리지 말았어야지.”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느리게 핥아왔다.
단단한 팔이 지안의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지안은 거의 발끝이 들릴 듯한 상태로 정후에게 덥석 끌려갔다.
“내가 지금 너한테 미쳐있는데.”
하체가 바싹 맞닿았다. 정후가 지안을 품에 가둔 채 정신없이 키스하기 시작했다.
작게 흘러나온 신음마저 먹어버릴 듯한 탐욕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고요한 복도엔 두 사람의 점막이 맞붙는 소리만 울렸다. 정후가 지안의 아랫입술을 빨다가 다시 혀를 넣어 입천장을 핥으며 거의 삼키듯 크게 입을 벌렸다.
“하아.”
그저 키스만 했을 뿐인데, 이미 그에게 여기저기 만져진 느낌이 났다.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이 차갑고도 뜨거웠다. 묵직한 그의 무게감이 온몸을 잠식해갔다.
“으응.”
지안은 손을 뻗어 정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설프게나마 밀려 들어오는 그의 혀를 얽고 빨았다. 순간 정후가 움찔하며 뭐라 중얼거렸는데, 지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흐읏.”
가느다란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가 박혀들었다. 떨리는 어깨를 그대로 고정시키며 정후는 얇은 목에서부터 쇄골로, 점점 그 아래로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맞닿는 입술이 델 듯 뜨거웠다. 축축한 혀가 그녀를 그대로 녹여버릴 듯 여린 몸 곳곳을 물고 핥아왔다.
“…으읏, 정후 씨.”
지안이 몸을 비틀며 정후의 손을 잡아왔다. 언제 누가 문을 열고 나올지 모르는 복도였다. 엘리베이터가 육중한 소음을 내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땡, 하고 다른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안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우리 잠깐만―.”
그러나 다시 겹쳐드는 입술을 그녀는 피할 수가 없다. 혀끝이 문질러지며 쭉 빨아 당겨지자 나른한 신음이 절로 샜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정후의 어깨에 매달렸다.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아오는 남자의 손. 그대로 엉덩이를 콱 움켜쥐는 거센 힘엔 한계점에 다다른 욕망이 느껴졌다.
“번호 불러.”
위잉, 하고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농밀하게 겹쳐진 입술 사이로 맑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정후의 손가락이 키패드 위를 빠르고 정확하게 오갔다.
단번에 열린 문 사이로 뒤엉킨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전조등을 켠 검은 세단이 어둠에 휩싸인 숲길을 느린 속도로 전진했다. 어두컴컴한 차 안을 밝히는 건 대시보드 계기판의 하얗고 파란 불빛뿐이었다.
정후는 한쪽 팔을 창문에 걸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떠올리는 건 지안의 오피스텔에 있던 욕조였다.
본래 그녀의 습관처럼 깨끗하게 관리하는지 욕조는 말끔하게 건조된 상태였지만, 오래된 사용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비좁고 낡은 욕조. 그 위에 걸터앉아 지안을 몇 번이나 가졌다.
현관에서 정신없이 키스하던 두 사람은 샤워실로 직행했다. 수전을 열고, 뜨겁게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서로를 정신없이 탐했다.
그 욕조 끝에 앉아 정후를 받아들이던 지안의 모습은 다시 생각하기만 해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 뽀얀 젖가슴 한가운데 돌올하게 솟구친 유두와 부드럽게 열리던 허벅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욕조 위에 걸쳐진 희고 곧은 다리가 아슬하게 흔들렸다.
둘이 서면 그게 전부인 공간이었다. 크게 움직일 수가 없어 코너에 지안을 몰아넣고 양쪽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마찰하는 면적이 넓고, 깊숙한 곳까지 닿아 그녀가 잘 느끼는 자세였다. 페니스를 강하게 찔러넣을 때마다 욕실 벽이 쿵쿵 울렸다.
지안은 신음을 내지르면서도 불안한 얼굴로 정후의 품에 바싹 안겨들었다.
꼭 잡아 오는 손, 매달리듯 달라붙는 몸이 좋아서 굳이 침대로 가지 않았다.
지안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적당히 마무리하고 샤워볼로 가볍게 몸을 씻겨주었다. 그녀를 먼저 내보내고 간단하게 씻고 나가니 지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집을 못 치웠어요.’
정후가 벗어놓은 옷가지가 식탁 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켜있었다. 지안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민망한 듯 뺨을 쓸었다.
정후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공간을 한 바퀴 훑었다.
집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다만 공간이 좁고 살림이 단출할 뿐이다.
낡아빠진 수전, 조그만 침대, 두 사람이 겨우 앉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식탁까지. 그러나 지금 정후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안과 잠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자고 갈게.’
허리에 수건을 대충 두르며 성큼 들어서는 그를 지안이 단번에 밀어냈다.
‘절대 안 돼요.’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지안을 이겨 먹고 싶진 않았다. 미치게 보고 싶어도 언제나 그렇듯 좀 참으면 될 일이었다.
정후는 턱을 매만지며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아침은… 돼?’
결국, 한발 물러서는 그에게 지안이 다가와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
어이없게도, 겨우 그거 하나에 서정후는 달아오른 본능을 누르고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제가 주차해놓은 차에 올랐다.
‘…미쳤군.’
약간의 자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것에 설렘을 느끼는 자신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지안의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는다. 달싹 안겨드는 작은 몸 하나가 그리워서 그는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다.
커다란 철문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는 시동을 껐다. 빛이 사라지고 모든 건 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지안의 눈동자가 그의 머릿속에서 집을 짓다가 그가 미처 돌보지 못했던 상처받은 지안의 모습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다시 세워지고 부서지는 지안의 기억 속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또 다른 아침을 기다렸다.
* * *
「지금 W 빌딩 1층 카페예요.」
지안은 빠르게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학교는 현재 방학이었다. 2주 뒤, 보충 수업을 빼고는 일정이 없었다.
태강 그룹 본사와 지안의 동네까지는 차로 1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정후는 본가에서 나와 회사 근처 호텔과 지안이 사는 동네의 오피스텔을 오가며 머무는 눈치였다.
정후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안은 그가 힘들까봐 신경이 쓰였다.
정후가 오늘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잠깐 그를 본 뒤 민영의 집에 가서 잘 계획이었다.
「갈게.」
왜 왔는지 묻는 말도, 언제 끝난다는 대답도 없이 정후는 짧은 메시지로 대화를 종료했다. 이런 부분조차 서정후답다고 생각하며 지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카페는 한산했다. 빌딩엔 여러 개의 회사가 모여 있어 손님 대부분은 회사원이었다.
잔잔한 라운지 음악이 흘러나왔고,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넓은 실내는 에어컨과 대형 실링팬이 함께 돌아가고 있어 전반적으로 쾌적했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훌쩍 큰 남자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190cm에 가까운 키. 크고 날렵한 골격, 신체 비율이 완벽한 몸은 언제나 슈트가 잘 어울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제 관심사 외엔 시선조차 주지 않을 듯한 차가움이 묻어났다.
카페 주인장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후는 눈인사를 한 뒤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다 창가에 앉은 지안을 발견하고 성큼 다가왔다.
“퇴근하고 가려고 했더니.”
그는 지안을 바라보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한창 일하는 도중에 빠져나온 듯 다소 예민해진 얼굴을 보며 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냥 얼굴 보려고 왔어요.”
정후의 눈가에 언뜻 미소가 스쳤다.
“그 대답, 마음에 든다.”
낮은 목소리에 지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앞으로도 종종 와.”
지안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전부 이곳을 보고 있었다. 다들 그가 누군지 아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태강 그룹 본사에서 떨어진 곳으로 찾아왔건만 헛수고였던 것 같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여기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정후가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후 씨 아는 것 같아서.”
지안의 말에 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카페 내부를 성의 없이 둘러보자 몰렸던 시선이 순간적으로 흩어진다. 정후는 다시 지안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남자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모른다기보다는 신경 쓰지 않는다에 가까운 표정이다.
“오히려 알아줬으면 싶어.”
정후가 지안의 손을 끌어와 깍지를 꼈다. 놀란 지안이 손을 빼려 하자 정후는 다른 손바닥으로 그 위를 덮으며 단단히 감싸왔다.
“뭐 더 마실래?”
지안의 난감한 표정에도 정후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후 씨.”
지안이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정후는 그제야 손을 뗐다.
“주문하고 올게.”
그저 손 한번 잡혔을 따름인데 지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왠지 모르게 저릿한 손바닥을 문지르며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정후는 카운터로 걸어가 주인장과 담소를 나누며 지갑을 꺼냈다.
크고 듬직한 어깨와 쭉 뻗은 다리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대화하는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일할 때는 누구보다 냉정한 편이었지만, 지안은 정후만이 가지고 있는 어른스럽고 진중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는 케이크 한 조각과 차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직원들이 여기 케이크 많이 먹더라.”
얇은 크레페를 겹겹이 쌓아올린 새하얀 크레이프 케이크였다. 정후는 그릇을 지안의 앞쪽으로 밀었다. 기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지안의 손에 검은색 포크를 쥐여주었다.
“고마워요.”
지안은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지안의 취향이다. 정후가 지안의 앞에 놓인 커피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커피 말고 차 마셔. 따뜻한 거.”
지안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자 정후는 지안이 먹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너 몸 차갑잖아.”
지안은 정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안을 세세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더운지 정후는 재킷을 벗었다.
“여기 가끔 오나 봐요?”
“응.”
정후는 재킷을 정갈히 포개 의자 위에 걸쳐놓았다. 너른 어깨 아래 반듯하게 뻗은 상체가 보기 좋았다.
“혼자 올 때도 있고, 가끔 직원들이랑도 오기도 해.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너랑 같은데.”
그 또한 회사 앞은 부담스러워 삼가는 눈치였다. 정후와 지안은 마주보며 웃었다.
“회사 다시 들어가봐야 해요?”
“아니. 아예 나왔어.”
“근데 오늘 어디 가는 거예요?”
“왜?”
정후가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민영이네 집에서 자기로 했거든요. 이따가 데려다줄래요?”
“아아, 그래?”
정후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왜요, 중요한 일이에요?”
지안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정후는 고개를 저었다.
“민영이한텐 몇 시까지 가야 돼?”
배려하는 듯한 그의 물음에 지안은 잠시 말을 끌었다.
“음, 11시 정도까지…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정후는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
지안은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정후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둘에게 집중되었다. 정후는 지안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울 외곽에 있는 야외 미술관에 들른 뒤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정후는 지안의 손을 꼭 잡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지안의 의견을 들었다. 학교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지안의 말에 뭘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고 했다.
남편과 아내로 만났던 두 사람은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한 남자와 여자로서 존재했다. 앞으로의 거창한 계획보다 현재의 감정에 집중했고, 함께 하는 지금이 소중했다.
옆에 선 남자의 듬직하고 다정한 온도에 지안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어느덧 해가 뉘엿거리며 지고 있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라 두 사람은 주차해놓은 차로 향했다. 정후는 먼저 지안을 태운 뒤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가고 싶었던 곳이 여기 맞아요?”
지안이 정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여긴 저번에도 왔던 곳이라서. 정후 씨가 어디 가보고 싶다고 미리 얘기한 건 처음이라 물어봤어요.”
정후는 짧게 웃었다. 그걸 또 기억했어. 그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가도 돼.”
지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벨트 매.”
지안은 웃으며 벨트 선을 잡아끌었다. 정후는 항상 차에 타면 지안에게 그 말부터 했다. 그러나 선이 어딘가에 걸렸는지 잘 빠지지 않았다. 지안은 몇 번 힘을 주었다. 정후가 고개를 돌려 지안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정후는 몸을 기울여 지안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목선과 넓은 어깨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살짝 맞닿은 가슴에 지안은 잠시 숨을 멈췄다.
달칵, 하고 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고 지안은 그제야 몸을 바로 할 수 있었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었다.
“민영이네 집이 어디랬지?”
정후는 내비게이션을 누르며 지안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자 그는 지안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후를 보느라 대답을 놓친 지안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민영이네 집은―.”
그때 정후가 다시 커다란 몸을 기울였다. 부드럽고 단단한 입술의 감촉. 더운 숨결이 지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고는 떨어져 나갔다. 지안은 눈을 깜빡였다. 정후의 시선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남자답고 섬세한 이목구비, 오롯이 저만을 담고 있는 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감싸줄 것 같은 너른 어깨와 품.
심장이 다시 소란스럽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른 가자.”
차에 시동이 걸렸다. 정후는 핸들 위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지안은 손을 뻗어 정후의 팔을 잡았다. 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좋아해요.”
지안은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말하고 싶었다.
“나도.”
정후가 지안을 바라보았다.
“너 좋아해.”
새카만 눈동자가 진중한 빛을 품고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이 손을 뻗어 정후의 목을 감쌌다. 그의 목덜미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탄탄하고 매끄러운 남자의 살갗이 느껴졌다.
쪽.
지안은 먼저 그의 목울대에 입을 맞췄다.
정후가 지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금세 빛을 달리했다. 작은 입술이 이번에는 단단한 턱 끝을 깨물었다. 정후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나쁘지 않은데.”
정후는 지안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를 안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얇은 등을 숨 막힐 듯 옭아맸다. 지안이 작게 비명을 지르자 정후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흣.”
그는 거칠게 입술을 겹치며 물어뜯을 듯 키스하기 시작했다. 숨 막힐 듯 파고드는 정후의 숨결에 지안이 매달리듯 그의 목에 안겨들었다.
몇 번이나 엇박자로 겹쳐지는 입술이, 흘러넘치는 감정의 온도가 두 사람을 점점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아, 천천히.”
정후가 지안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응, 하고 속삭이며 혀를 밀어 넣었다. 지안은 정후의 어깨를 그러쥔 채 입을 벌렸다. 정후는 지안의 혀를 얽으며 부드럽게 빨아주었다.
“으응.”
정후가 지안의 손을 쥐었다. 커다란 손바닥 전체로 작은 손을 꼭 감싼 뒤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따뜻했다. 간질거리면서도 묘한 느낌. 지안이 어깨를 움찔하자 정후가 턱을 끌어당기며 더 깊게 키스했다.
가깝게 닿은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부르르 떨렸다.
“…안 되겠다.”
정후가 입술을 살짝 떨어트리며 지안을 바라보았다. 지안의 손가락 사이를 꾹꾹 누르는 그의 표정에서 어떤 한계가 느껴졌다
“가지 마, 오늘.”
잠시 정후를 바라보던 지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후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차는 지안의 동네로 향했다. 지안은 제가 사는 오피스텔로 가는 건가 싶었다.
“…우리 집 가는 거예요?”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침대도 비좁았고, 매번 자고 가는 문제로 정후를 쫓아내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정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정후 씨 오피스텔?”
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거기 말고.”
정후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두 사람을 실은 차는 지안의 동네로 가는 듯하다가 옆으로 빠졌다.
“어딘데요?”
지안의 물음에 정후는 짧게 대답했다.
“가보면 알아.”
한참 외곽으로 크게 돌던 차는 긴 숲길을 지나 어느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어?”
지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정후를 돌아보았다. 높다란 담과 정문이 생겼지만, 지안은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옛날, 지안이 살았던 집이었다.
“잠깐만.”
정후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곧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정후 씨.”
지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차가 내부로 진입하면서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2층 저택과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려.”
정후는 1층 차고에 주차했다. 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지안이 내리길 기다렸다. 지안은 정후의 손을 잡으며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바닥을 디뎠다. 두 사람은 잔디가 촘촘히 깔린 넓은 정원 앞에 섰다.
“여길 어떻게….”
지안은 먹먹해진 눈으로 과거의 추억이 담긴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 한구석, 철제 가제보는 그녀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던 놀이터였다. 지금은 흰색으로 깔끔하게 페인트칠 된 뒤 화려한 장미 넝쿨로 뒤덮여있었다.
지안이 태어났던 해에 심었던 배롱나무도 완연하게 자라나 연분홍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었다.
“…….”
지안은 울컥하는 감정을 꾹 눌렀다. 다시는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세경기업의 부도 위기로 결국 이 집을 팔아야 했을 때, 이곳을 떠나기 싫어 몇 번이나 다시 돌아보며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저 한때의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후가 이런 식으로 다시 제 앞에 가져다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기가 오늘 오려고 했던 곳이야.”
정후는 옆에 선 지안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가 내내 지안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같이 살았을 때, 지안은 몇 번이나 이 집에 얽힌 추억을 정후에게 들려주었다.
사실 생각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계획에 옮긴 건 이혼 후였다. 위자료든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지안에게 이 공간을 다시 돌려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다시 네 집으로 만들어주고 싶었어.”
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지안을 향해 이야기했다.
지안은 자신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 또한 제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이기심의 발로일지 모르겠지만, 정후는 지안에게 뭐든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웃을 수 있다면.
이게 너에게 어떤 위안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정후 씨.”
지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느덧 새카만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일들이 지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민지안.”
정후는 흔들림 없는 단단한 눈동자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우리,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지안이 뺨이 어느덧 젖어있었다. 정후는 그녀를 천천히 제 품에 끌어안았다. 동그란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
“평생 내 가족이 되어줘.”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목소리.
이제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 * *
그의 모든 것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정후는 현관에서부터 지안을 들어 안으며 키스했다.
이미 구조가 익숙한 듯 정후는 지안을 안은 채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지안은 정후의 목을 꼭 감싸 안은 채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밀려드는 향기와 체온에 정후는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지안을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으응.”
뜨거운 혀가 지안의 입 안을 휘저으며 거칠게 파고들었다. 턱까지 집어 삼켜버릴 듯 지안의 입술뿐만 아니라 그 안팎을 정신없이 빨아댔다.
“하아.”
그보다 모든 게 다 작고, 부드러웠다. 이대로 한입에 삼켜도 시원치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여린 몸, 보드라운 살갗. 조금이라도 힘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정후의 키스를 감당 못 하면서도 더 원하는 표정이, 작게 헐떡이는 호흡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런 너를 영영 잃을 뻔했다니.
서늘한 위기감과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이 순식간에 그의 마음속을 교차했다.
침실은 2층에 있었다. 정후는 침대 위에 지안을 내려놓고 발치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지안아.”
그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제 앞에 앉은 지안을 바라보았다.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다. 이렇게 너를 다신 안지 못하게 되는 줄 알았다.
지안이 떠난 공간에서 매일매일 그녀를 기다렸던 생각만 하면 아직도 숨이 턱 막혀왔다. 도저히 견뎌지지가 않아서 막무가내로 지안을 찾아가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사랑까진 바라진 않았다. 그저 지안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지안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안겨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평생 제 곁에 있으면서 그것만 받으며 살아도 정후는 충분했다.
“…정후 씨.”
지안이 정후의 커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따스한 몸이 제게 안겨들며 지안의 보드라운 뺨이 그의 가슴에 닿아왔다.
“고마워요.”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정후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웃음이 예전에 지안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어느 순간과 닮아 있는 것만 같았다.
“…민지안.”
정후의 떨리는 손끝이 지안의 눈가를 스쳤다. 자신을 보며 웃는 지안의 모습에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두 팔이 정후의 허리를 꼭 감아왔다. 지안이 다시 정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묵직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타고 그녀의 몸속으로 녹아들었다.
영원히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 * *
“하아.”
숨을 몰아쉬며 자신만을 바라보는 눈동자. 뽀얗게 피어난 나신에 정후는 이미 사정한 듯한 쾌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것이었다.
너를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며 살지만, 죽을 때까지 영원히 모를 것 같은 미궁 같은 존재.
정후는 조심스럽고도 진중한 눈으로 제 팔에 안긴 지안을 바라보았다. 얽혀드는 시선마다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넘쳐흘렀다.
정후가 지안의 뺨을 쥐면 지안은 정후의 목을 끌어당겼고, 두 사람은 사랑을 이야기하듯 긴 키스를 나누었다.
여린 입천장을 핥으며 정후는 그대로 손가락을 내려 그녀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이미 한껏 젖은 상태였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갈라진 틈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아.”
혀끝을 문지르며 손가락을 길게 움직이니 지안의 입가에서 나른한 신음이 샜다. 그녀가 느끼는 지점을 찾아 섬세하게 압박하니 지안이 참지 못하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정후가 발목을 잡아채며 망설임 없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흠뻑 젖은 음부 위로 뜨거운 혀가 내려왔다. 남자의 턱이 크게 움직였다.
“흐읏, 안 돼―.”
이마를 밀어내는 손을 그대로 움켜쥐며 정후는 더 깊게 파고들었다.
“흣.”
반듯한 이마, 유려하게 뻗은 짙은 눈썹과 긴 눈매, 우뚝한 콧날이 지안의 다리 사이로 가라앉았다.
정후가 무릎을 움켜쥐고 다리의 각도를 더 벌렸다. 연한 음모를 쓸어 위로 들추고, 얇은 살갗을 옆으로 벌렸다. 팥알같이 툭 불거진 음핵을 손끝으로 건드리니 흐응, 하는 소리가 꽉 다물린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정후는 질구를 혀로 길게 쓸어올리며 음핵을 쭉 빨았다.
“하읏.”
지안이 못 견디겠다는 듯 허리를 들썩였다.
“달아, 너.”
두 개의 낯선 감각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모양인지 혀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맑은 액이 입가 전체에 묻어났다.
“으응.”
“여기에 계속 얼굴 박고 먹고 싶은데.”
조여드는 허벅지를 밀어젖히며 그는 음부에 혀를 강하게 밀착시켰다.
“정후 씨, 그만―.”
“여기까지 빨아주면 자지러지게 좋아했잖아.”
그는 새하얀 엉덩이를 움켜쥐고 거의 들어 올리듯 활짝 벌렸다. 회음부부터 감싸듯 핥아오자 발끝이 공중에 들렸다.
“아아―.”
지안이 시트를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를 모르는 혀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게걸스럽게 드나들었다.
부끄러운 곳의 주름까지 길게, 혀끝으로 꾹꾹 누르는 움직임에 지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예뻐.”
정후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달뜬 숨을 내뱉으며 잔뜩 달아오른 지안의 표정이 그를 미치게 했다.
어떻게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는지.
정후는 지안의 속눈썹 사이로 맺힌 눈물을 쓸어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애무로 흥건해진 지안의 음부 위로 제 페니스를 문지르며 그녀의 흥분을 돋웠다.
“흐응, 흐읏.”
곧게 뻗은 다리가 허공에 뜨며 그의 허리를 감았을 때 그는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쑥 빨려 들어가는 듯한 부드러운 삽입이었으나 빠듯하게 물어오는 느낌에 정후가 미간을 좁혔다.
“아….”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넣는 것만으로도 정후는 뒷골이 당겨왔다.
그를 확 빨아들이면서도 안온하게 감싸는 묘한 감각.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곳이었다.
“하아, 지안아.”
정후는 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부는 이미 젖을 대로 젖어있어 그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페니스를 강하게 쳐올리며 뒤로 쑥 뺄 때마다 그녀의 내밀한 부분이 딸려오는 듯했다. 정후는 지안의 표정을 확인하며 삽입하는 각도를 조절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힘껏 쳐올리자 맞물린 지점이 금세 흥건해졌다. 지안이 엉덩이에 힘을 주며 그의 어깨를 꼭 쥐었다. 어디를 건드리든 예민하게 달라붙는 내벽에 정후는 길게 숨을 내쉬며 상체를 바싹 붙였다.
“하아, 이렇게 조여댈 거면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읊조렸다. 귓불 전체를 입속에 넣고 쭉쭉 빨다가 잇새로 살짝 깨물었다. 동시에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드나들었다.
거센 피스톤질에 지안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 쾌감으로 벌어진 붉은 입술이 그의 흥분을 돋웠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너.”
정후가 침대 헤드를 붙잡으며 점점 속도를 올리자 지안이 교성을 지르며 그의 품에 달싹 안겨들었다. 그는 봐주지 않고 절정을 향해 달렸다.
깊고 좁으면서도 한없이 넓은 몸이었다. 겉보기엔 약해 보였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의 전부를 다 받아내었다.
한 차례 정사가 끝난 뒤 짙은 후희가 있었고, 어느새 체위는 바뀌어 지안이 정후의 위에 올라와 있었다.
“으으응. 흐읏.”
지안은 정후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납작한 배와 뽀얗게 피어난 가슴이 그녀의 동작에 따라 함께 흔들렸다.
지안의 움직임은 어설펐지만,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었다. 서툴게 흔들면서도 정후가 한 번씩 엉덩이를 쳐올리면 그녀의 아래가 페니스의 밑동을 꽉 물며 거세게 조여들었다. 그럴 때마다 정후는 이성이 훅하고 나가버리는 기분이었다.
“흐으, 자꾸 보지 말아―.”
지안은 저를 뚫어져라 보는 정후의 시선이 부끄러워 그의 눈을 가린다. 정후가 그 손을 잡아채 지안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녀를 제 위에 엎어놓은 채 꼭 끌어안으며 그는 허리를 튕겨 올리기 시작했다.
“하읏, 흣!”
“눈 가리면 무슨 소용이야.”
“흐윽, 흐읏!”
“그거 보려고 내 위에 올려놓는 건데.”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쾌락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은 언제나 그를 반쯤 미치게 했다.
“…지안아.”
정후는 몸을 돌려 그녀를 제 아래 눕혔다. 정후는 지안의 귓가에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느긋하게 그녀의 안팎을 드나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사람의 호흡이 점점 가까워져 갔다.
“…나 다시는 너랑 못 헤어져.”
지안을 내려다보는 정후의 눈가엔 미세한 핏발이 서 있었다. 지안은 말없이 손을 뻗어 정후의 얼굴을 끌어왔다.
그의 눈과 코, 그리고 입술에 지안의 키스가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사랑해요.”
작지만 정확하게, 그를 향해 속삭이는 말. 정후가 둔탁한 신음을 흘리며 지안에게 달려들었다. 정후는 고개를 숙이며 깊게 입술을 겹쳤다. 지안이 팔과 다리를 감으며 얽어 들자 정후가 다시 하체에 힘을 주며 거칠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쾌감에 저항하듯 지안이 고개를 마구 저을 때마다 정후가 지안의 몸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아플 정도로 깨무는 그의 입술에 지안의 목덜미와 가슴 주변이 붉게 물들었다.
정신없이 맞물리는 두 사람의 연결점이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격렬한 움직임 끝에 두 사람은 길고 긴 키스를 시작했고, 지안은 온몸 가득 차오르는 지독한 충만감을 느끼며 그녀의 사랑을 끌어안았다.
커튼 사이로 미약한 달빛이 들어왔다.
정후는 지안이 잠들고 나면 종종 일어나 제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까 지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정후는 시간을 내어 지안에게 저녁을 만들어주었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한동안 정후의 품에 안겨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지안은 갑자기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난 가끔 불안할 때가 있어요. 정후 씨가 다시 차갑게 가버릴까 봐.’
정후는 그런 지안을 아무 말 없이 꼭 끌어안았다. 과거, 자신이 지안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앞으로 그런 마음 들지 않게 내가 잘할게.’
정후는 믿어줘, 하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안은 웃으며 그의 목을 둘러안았다.
‘…정후 씨가 변하려고 많이 노력해줘서 나도 용기 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지안아.’
‘나도 이제 정후 씨랑 두 번 다시 헤어지기 싫어요.’
그녀는 정후를 밀어내면서도 그가 가버릴까 두려웠다고 했다. 정후는 지안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받아줘서 고맙다고, 네가 다시 내 손을 잡은 걸 절대 후회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속삭였다.
지안의 색색거리는 콧소리가 어둑한 공간을 메웠다.
정후는 한쪽 팔을 괸 채 입가에 미소를 걸고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끔 지안이 옆에 있는 순간이 아까워 잘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얼마나 바라고 꿈꿔왔던 순간인지 너는 알까.
서로가 부서져 내린 뒤 다시 솟아오른 오롯한 우리의 공간.
네가 있는 지금이 내겐 가장 완벽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