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 다시
“오늘 6, 7교시에 있는 진로 활동 이거, 전교생 행사로 바뀌었으니까 체크 좀 해줘요.”
아침 교무회의 시간.
교무실 한가운데 선 영어과 부장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진로 진학부도 함께 담당 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나눠준 자료 참고하고.”
“오, 무슨 일이에요? 강당에서 하네요.”
연화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프린트를 받았다.
1학년은 직업인 초청 강연을 하고 2, 3학년은 각 교실에서 진로 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정이 바뀐 모양이었다.
“태강 그룹? 여기서 사람이 오는 거예요?”
민준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뭐?’
생각지 못한 단어에 지안의 고개가 들렸다. 그녀는 급히 내용을 확인했다.
“응. 요번 직업인 초청 강연은 태강 그룹에서 와주시기로 했어.”
영어과 부장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매번 통상적인 거절 답변만 하더니 이번에 갑자기 스케줄 잡겠다고 하는 거야. 그것도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온 거 있지. 무슨 장학금 얘기에 기업 견학 프로그램 얘기까지 나와서 교장 선생님 기분 장난 아니야. 자기들도 같이 준비 좀 도와줘.”
지안은 눈을 깜빡였다. 태강 그룹도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재단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정후가 직접 관여하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가 이런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 쓸 리는 없었다. 지안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생각했다.
“애들 강당 뒷문으로 도망 못 가게 또 열심히 잡아야겠네.”
연화가 기지개를 켜며 지겹다는 듯 말했다.
“또 모르죠, 태강은 유명하니까 관심 갖고 들을지.”
민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그럴까?”
연화가 동조를 구하듯 지안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홀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지안 쌤.”
“네?”
연화는 피식 웃으며 지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자기도 태강이라고 하니까 관심이 가?”
“아니요. 관심은 무슨.”
지안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 ‘태강’이라는 글자에 머물러 있었다.
체육관을 개조한 강당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강당에서 뭐 듣는 거 존나 지루한데.”
“아, 귀찮게 자꾸 내려오래. 그냥 교실에서 하지.”
아이들은 별 기대감 없는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평소 행사 때 얼굴을 비치지 않던 교장까지 나와 맨 앞에 앉아 있었다. 지안은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강당 뒷문 쪽에 서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강연 행사야. 요번 1학년 학부모 중에 태강 다니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통 여기까진 잘 안 오는 데 말이야.”
어느새 연화가 나타나 지안의 옆에 섰다. 강당의 앞문이 열리고, 촬영 장비를 든 사람들이 들어왔다.
“웬 카메라?”
연화가 길게 고개를 뺐다. 커다란 카메라 좌측에는 태강 그룹의 이니셜이 박혀있었다. 단상 아래에 카메라 장비가 설치되는 모습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와? 무슨 태강 그룹 후계자라도 오는 거야, 뭐야. 엄청 거창하네.”
연화가 비식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앞문이 열렸다. 단상으로 올라와 마이크를 확인하고 촬영 위치를 조정하는 남자는 지안도 아는 얼굴이었다.
‘…김 실장님.’
지안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윽고, 강당을 메운 사람들의 작은 탄성과 함께 한 남자가 등장했다.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남자의 긴 다리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순 그에게 쏠렸다.
그러나 단상 앞에 선 남자는 그런 주목에 익숙한 듯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였다.
“태강 그룹 서정후 부사장입니다.”
지안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무게감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어수선한 소음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비 오던 날, 지안을 기다리던 남자는 완벽한 성공을 거둔 기업인으로서 단상 앞에 섰다.
지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야, 우리 담임 쌤 기다리던 남자 아니야?”
“영어 쌤 쫓아다니던 남자가 태강 부사장이라고? 미쳤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뒤에 서 있는 지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왔는데,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기분이 새롭네요.”
세련된 슈트 차림, 남자답고 수려한 외모.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진중한 말솜씨. 강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학생들은 선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연화를 비롯한 교사들은 그의 외견에 대해 귓속말을 늘어놓았다.
“태강 그룹 후계자 말만 많이 들었는데, 완전 배우보다 잘생겼다. 조각상 아니야?”
“말도 진짜 잘하네.”
강연은 짧았지만, 파급력이 있었다.
그가 강연을 마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정후는 교장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번에 좋은 기회가 닿았습니다.”
교장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연신 감사의 말을 쏟아냈다. 정후는 의례적인 답례를 하며 서늘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찾는 애타는 시선.
지안이 정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이 단상 아래에 선 지안에게 고정되었다.
“선생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지안을 둥글게 에워쌌다.
“태강 그룹 부사장님, 선생님 때문에 여기 온 거예요?”
“둘이 진짜 무슨 사이예요?”
아이들은 정후와 지안을 번갈아 보며 말을 쏟아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좀 조용히 해.”
지안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후의 눈은 여전히 지안에게로 고정이 되어 있었다.
“부사장님?”
교장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분이 계셔서요.”
정후는 지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아,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아는 분이 누구신지?”
“민지안 선생님이요.”
정후가 갑자기 지안의 이름을 언급하자 교장의 눈이 커졌다.
“…요번에 들어온 민 선생이요?”
“예, 민 선생님 덕분에 대연고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교장은 생각지 못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지안을 바라보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임시 계약직이라 평소 관심도 없던 인물이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후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교장은 손사래를 치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민 선생님!”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 시간 좀 내지.”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연화가 얼른 가봐, 하고 지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럼 같이 교장실에 내려가서 말씀 나누시죠.”
교장이 정후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그는 지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 영어 쌤, 대박!”
“완전 잘 어울려요.”
아이들은 멋모를 환호성을 질러댔다. 영어과 부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던 문열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안은 단상 아래 서 있는 정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련된 정장차림, 너른 어깨와 긴 다리, 깔끔하게 잘린 뒷머리까지.
오늘의 정후는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해 보였다. 지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민지안 선생님.”
어른스러운 눈매 끝에 다정한 웃음 하나가 걸려있었다. 정후는 지안이 제 곁에 오고 나서야 그녀와 함께 발을 맞추며 교장실로 향했다.
‘장학금. 반마다 1명씩, 10년 동안 전 학년 지급하는 조건으로 하죠.’
‘네? 그렇게나 규모를 크게.’
‘저희가 회사 이름을 건 장학금 프로그램도 있긴 하지만 특정 지역과 연계해서 지역사업을 지원하고 일자리 창출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저희 학교로선 정말 좋은 기횝니다.’
‘민지안 선생님께서 계속 같이 일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
‘당연한 말씀입니다. 민 선생, 뭐해. 얼른 감사 인사드리지 않고.’
지안은 정후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후는 매끈한 미소를 머금고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짓는 표정이었다.
‘그럼 민 선생은 먼저 들어가 봐. 나중에 얘기 다시 나누자고.’
지안은 교장실을 나와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영어과 부장이 아직 퇴근도 하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기 잘했어? 뭐래?”
전에 없던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그녀는 지안이 다시 보인다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아, 장학금 사업 얘기 나왔어요.”
“뭐, 장학금? 얼마나?”
지안은 교장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부장의 눈이 커졌다.
“내가 지금 교사생활 30년 차인데, 그 정도 규모 지원은 처음 듣는다. 자기가 그런 인맥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 태강 부사장이랑 알은 척하는 정도면 언질이라도 해주지.”
그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근데, 애들이 말하는 게 사실이야? 정말 태강 그룹 부사장이 민 선생 쫓아다니는 거야?”
지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지안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있지, 내가 그동안 민 선생님 의지를 좀 했잖아. 업무 많이 배우라고 그랬던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
“자긴 진짜 꼼꼼해서 빨리 배우더라. 도움 많이 됐어.”
“…네, 저도 부장님 그런 마음이신 거 알았어요.”
영어과 부장은 그제야 불편한 마음이 가셨다는 듯 웃었다. 지안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부장님. 앞으로 업무 분배를 좀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나눠야 할 것 같아요. 빨리 끝낼 수 있는 일도 자꾸 늦어지고, 전반적으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부장으로 인해 일이 중첩되어 야근하는 교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안은 총대를 멨다.
“그, 그래?”
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장님이 그러신다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처리 관련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기분 나빠하지는 마시고요.”
“으응, 그래. 그 정도는 충분히 말할 수 있지, 뭐.”
영어과 부장은 표정을 관리하며 황급히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럼 앞으로 잘 좀 부탁할게. 수고하고.”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지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안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지안은 업무를 모두 마치고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운동장에 있는 몇몇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안은 정문을 향해 걸었다.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였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정후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 남자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서정후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한때, 지안의 일상에서 가장 멀리 있던 남자는 이제 그녀의 시간 속으로 점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와, 저 차 봤어? 쩐다.”
“이번에 태강에서 나온 새로운 스포츠카 라인 아니야? 실제로 처음 봐.”
“우리 가까이 가서 보자.”
학생들이 정문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태강이라는 단어에 지안은 괜스레 움찔했다.
과연 정문 앞에는 뽑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차 한 대가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요즘 TV에서 계속 광고하는 그 모델인가보다 생각하며 지안은 무심히 지나쳤다. 아이들은 차 주변을 맴돌며 속사포처럼 감상을 쏟아냈다.
날렵하게 빠진 차의 창문은 짙게 선팅되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안은 세워놓은 자전거를 향해 걸어갔다.
빵.
가벼운 클랙슨 음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차가 천천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수선을 떨며 차를 보던 학생들 무리도 함께였다.
‘뭐지?’
지안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몸을 돌렸다. 이윽고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민지안.”
차에 타 있는 건 서정후였다.
“……?”
“바래다줄게.”
지안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예요?”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어.”
“…….”
“계속 여기서 얘기할 거야? 난 상관없지만, 뒤에 사람이 모여드는데.”
정후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니 어느새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굳이 남의 눈요기까지 되면서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안은 차에 오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뒤로 가봐.”
정후가 손짓했다. 지안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지이잉.
차 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날개처럼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
갑자기 지안의 뒤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아이들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몇몇은 차의 내부를 보기 위해 지안의 앞으로 나와 고개를 디밀기도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진짜 영어 쌤이랑 무슨 사이예요?”
순간 전방을 바라보던 정후가 고개를 쓱 돌렸다. 그는 옆에 선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혼자 짝사랑 중이야.”
지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꺅!”
“그럼 둘이 사귀어요?”
아이들이 앞다투어 차 문 앞으로 다가왔다. 차 주변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안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차에 올랐다. 우선은 지금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여러모로 현명해 보였다.
“…어쩌려고 그래요, 정말.”
내일 학교에 가면 뭐라고 해야 할지, 지안은 난감했다.
“곤란하게 한 건가.”
지안은 뭐, 하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정후의 표정은 진지했다.
“…사실이니까.”
지안은 잠시 침묵했다.
“이제는 솔직해지고 싶어, 너한텐.”
이윽고 가만한 시선이 정후의 얼굴에 가닿았다.
“다시는 너 안 놓치게.”
정후는 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그녀와의 일분일초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사랑을 말하는 일이 이렇게 쉽고 행복한 일인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차는 웅장한 엔진소리를 내며 학교 앞을 요란하게 빠져나갔다.
아직 해가 밝은 초여름의 오후였다.
* * *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지안은 답안지를 걷어들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정후였다.
「회사에서 출발했어. 보고 싶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요즘 들어 그에게서 자주 메시지나 전화가 오곤 했다.
주로 지금 뭐 하는지, 언제 만날 수 있는지를 묻는 간단한 용무였다. 전과 달라진 건 메시지 끝에 하나씩 덧붙는 감정표현이었다.
평소 그런 식의 표현을 절대 하지 않던 사람이라 자꾸 생각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지안 쌤, 뭐해?”
연화가 지안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디밀었다. 지안은 얼른 휴대폰 화면을 껐다.
“뭐야?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아니에요.”
연화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지안을 잠시 바라보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기말 채점까지 끝나면 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주말이요?”
지안은 음, 하며 말을 끌었다. 연화가 안 돼? 하며 물었다.
최근 정후는 틈만 나면 지안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주중에는 단 몇 시간밖에 볼 시간이 나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시간을 냈기에, 주말은 당연지사였다.
흡사 데이트의 정석 같은 코스였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잠깐 밖을 거닐다가 늦지 않게 차로 데려다주는.
정후는 지안의 작은 말 한마디도 놓치려 하지 않았으며 늘 진지한 톤으로 그녀를 대했다. 물론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도 잊지 않았다.
“지안 쌤 요즘 수상하네. 누구 만나?”
“만나긴요.”
지안이 말만 빙빙 돌릴 뿐 크게 부정을 하지 않자 연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안이 태강 그룹 부사장이랑 뭔가 있다는 소문이 이미 교내에 파다했다.
“이제 곧 방학이니까 딱 하루만 시간 내봐.”
지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 갈까요?”
“거기 보양산 넘어가는 길목에 큰 레스토랑 있잖아. 퓨전 한식. 거기 어때?”
“아아, 거기 집 개조한 식당이요?”
지안은 반가운 표정을 했다. 그 식당은 예전에 지안이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이었다. 항상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학기 중에는 바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좋아요. 저는 찬성이에요.”
“그래? 나도 거기 계속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잘됐다.”
두 사람은 책상 위의 달력을 보며 괜찮은 날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문열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여튼 먹을 궁리가 제일 신나지. 근데 거기 못 갈걸. 저번에 보니까 폐업했더라.”
“뭐, 폐업?”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지안도 눈을 크게 떴다.
“거기 TV도 몇 번 나오고 장사도 잘됐는데, 집주인이 팔고 시내 쪽에 가게 다시 낸다고 하더라고. 뭐가 새로 들어오는지 지금 건물 전체 리모델링 중이고.”
연화는 실망한 표정을 했다.
“아쉽네. 거기 정원도 넓고 예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기 딱 좋았는데.”
“그 집은 안 되고 다른 곳 생각해봐.”
“아, 그러면 내가 저번에 부장 쌤한테 추천받은 곳이 하나 있는데―.”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지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가게 절대 다시 팔 생각 없습니다. 두 배 줘도 안 팔아요.’
레스토랑 주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나갈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언젠가 세욱이 아쉬운 마음에 슬쩍 농을 던지자 그가 정색하며 했던 말이었다.
“지안 쌤, 여기 괜찮은가 한번 봐봐.”
연화가 지안의 팔을 잡아 끌었다. 지안은 네네, 하며 그들의 토론에 합류했다.
* * *
“부사장님 애인 생기셨다면서요.”
프린터 앞에 서 있던 김 실장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출력물이 나오자마자 두툼한 가죽 결재판을 열고 그 안에 자료를 깊숙이 끼워 넣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목에 얇은 스카프를 동여맨 고은영 과장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부사장의 집무실 근처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정후가 오전 일정에서 복귀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은영은 주위를 한번 쓱 훑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혼한 다음에 누구 하나 잡을 것처럼 살벌하게 일하시다가… 요즘엔, 아시죠? 출근하실 때 표정부터 다른 거.”
“…….”
“저번에 스캔들 난 그 여자랑 결국 그렇게 된 거예요?”
한동안 말없이 은영을 바라보던 김 실장은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소문이 그렇게 돈 겁니까?”
김 실장은 지난번 병원에서 보았던 정후와 지안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렸다.
“근데 부사장님을 5년도 넘게 모셨지만 저런 건 처음 본다니까요. 생전 관심도 없던 장학사업 쪽을 다시 알아보라고 하시질 않나, 웬 시골 학교 강연까지 다녀오시고. 사모님이랑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도대체 누구예요?”
은영이 두 눈을 빛내며 김 실장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 과장, 부사장님 모실 때 사생활 함구가 제일 중요한 거 모릅니까?”
김 실장의 냉정한 반응에 은영은 입을 삐죽였다.
“그냥 다들 그 여배우랑 다시 만나는 거라고 하길래. 근데 또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김 실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최근 서정후는 회사보다 지안에게 거의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아붓고 있었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의 행보를 보아 두 사람의 사생활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시간문제 같았으나.
“됐고, 스케줄 뜨는 일 없도록 두 번 세 번 체크해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 놓치게 되면 불호령 떨어질 것 같으니까.”
은영은 네, 하고 대답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때, 멀리서 묵직하게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표정을 지우고 순식간에 업무모드로 돌입했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후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코너엔 긴장감이 흘렀다.
“3시에 나갑니다. 그때까지 확인할 것만 들여보내요. 나머진 이따가 원격으로 처리할 테니까.”
싸늘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후는 차가운 눈매를 들어 올리며 간결하게 지시를 내렸다.
“방으로 전화 연결하지 말아요. 그냥 메모만 받고.”
“네, 부사장님.”
몸을 돌려 집무실로 사라지는 정후를 은영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 실장은 은영에게 더는 관심 갖지 말라는 눈짓을 한 뒤 결재판을 챙겨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지난번 말씀하셨던 식사는 토요일로 최종확정 지었습니다.”
김 실장은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정후는 재킷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 주중엔 도저히 시간 빼기가 어렵다고 하고 장소도 무슨―.”
“상관없습니다.”
정후가 김 실장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중요한 일에 시간이랑 장소 가리는 거 봤습니까.”
그는 커다란 의자에 착석하며 맨 오른쪽 위에 있는 서류파일을 집어 들었다. 가장 빨리 살펴봐야 할 결재 건이었다.
김 실장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 부사장님.”
“…뭡니까.”
정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김 실장이 내민 결재판을 열었다. 메일 한 통과 첨부된 문서를 출력한 총 3장의 프린트였다.
“그냥 메일로 보내지 않고.”
정후는 까칠하게 중얼거렸다.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문서를 읽어 내리는 정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그는 들고 있던 결재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조용한 집무실에 거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거 팩트체크는 다 된 겁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눈이었다. 김 실장이 빠르게 네, 하고 대답했다.
“직접 확인해본 결과 차명계좌에 거래 흔적이 있었습니다.”
정후가 감정을 추스르는 듯한 긴 숨을 내쉬었다.
“…날짜는요.”
“작년부터 접촉이 있었고, 가장 마지막 입금일이 민세욱 사장님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후는 한동안 침묵했다. 관자놀이에 푸른 핏줄이 솟았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를 서성이더니 잠시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그래서.”
성대를 긁는 듯한 까끌한 음성.
“굳이 기사 내기 전에 친절하게 보여준 이유는 뭡니까.”
정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시릴 듯 차가웠다. 당장 누군가를 베어버릴 듯한 서늘한 눈이었다. 김 실장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부 사장님 단독인터뷰 요청입니다. 질문제한 없는 조건으로요.”
정후는 짧게 웃었다.
“인터뷰?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릴.”
정후는 차가운 눈을 들어 올렸다.
“일단 노코멘트해요.”
“네, 부사장님.”
“아마 브로커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입 막으세요. 증거 전부 확보해 놓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후가 무거운 시선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광고 몇 개 던져주고, 이 기사는 전부 내립니다.”
침묵에 잠겨있는 정후에게선 함부로 말 붙이기 힘들만큼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만 나가요.”
김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토요일이었다. 미세먼지도 없고, 날이 좋았다. 지안은 오랜만에 환기를 시킨 뒤 커피를 내려 책상에 앉았다.
「저녁 9시. 집 앞.」
남자의 메시지는 여느 때처럼 간결했다. 지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정후는 매일 지안을 찾아왔다. 더는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사이였다.
같이 있을 땐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지안에게 쏠려있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녀가 말하기 전에 알아차렸고, 지나치게 차갑게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정후는 지안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Rrrrrr.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박 이사님의 전화였다.
주말에 할 일 없으면 밥이나 한 끼 먹자는 연락이었다. 오늘이 세경기업 전체 회식이니 같이 합류하라는 말이었다.
“제가 왜요? 그리고 무슨 회사가 주말에 회식을 해요?”
지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새로 체결된 계약이 좀 많아야지. 그거 맞추려면 토요일까지 일해도 모자란다. 아무튼, 지금 고기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 너도 같이 먹자.
지안이 한사코 거절하자, 박 이사의 와이프가 전화를 대신 받아들었다.
“지안아, 이모 얼굴 보러 한번 좀 와라. 민 사장님 대신 참석하는 거다, 이 생각하고 오면 되지, 뭘.”
세욱 대신 오라는 말에 지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회사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회식 장소는 산 아래 있는 고깃집이었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지만, 주인장 인심이 좋고 육질이 실해 늘 손님이 많았다.
지안은 박 이사 내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직원들은 아는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렵던 회사가 잘 풀려가고 있어 분위기가 좋았다. 왁자지껄한 상태에서 다들 신나게 먹고 마셔댔다. 박 이사의 와이프는 나오는 반찬마다 족족 지안 앞으로 밀어주었다.
“여기서 자리 잡고 살고 싶다고?”
“네. 당분간은요.”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와서 반찬 해놓은 것 좀 갖고 가라니까.”
푸근한 인상의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왔다 갔다 하기도 바쁘고. 요즘은 사 먹는 게 더 편하고 잘 나와요.”
딸처럼 봐온 지안이 갑자기 이혼하고 동네에 들어앉은 게 그녀는 못내 마음 쓰이는 눈치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 집밥이랑 같아? 언제 집에 좀 놀러 와. 한 번이라도 좀 든든하게 먹여야 내가 마음이 편하지.”
지안은 조만간 갈게요, 하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 한 잔 주세요.”
지안은 박 이사를 향해 씩씩하게 잔을 내밀었다.
“오, 웬일이야?”
박 이사는 씩 웃으며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그냥 회사 다시 잘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여서요. 아빠도 좋아했겠다, 싶고.”
지안의 얼굴에 언뜻 그리움이 스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박 이사의 와이프가 슬그머니 잔을 내밀며 말을 얹었다.
“민 사장님이 알면 제일 기뻐하셨겠지. 한때는 이대로 그냥 회사가 없어지겠구나 싶었는데 잘 풀려서 다행이다.”
세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술을 비웠다.
“그 중국으로 튄 이사 놈도 어떻게 잡혔다네? 보통 그렇게 되면 잡기가 힘든데 인터폴인지 경찰인지 샅샅이 뒤져서 결국 찾았나 보더라고. 아주 콩밥을 지대로 맥인다던데?”
“그래요?”
지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간 세욱이 했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박 이사와 직원들은 새로 바뀐 회사에 대해 앞다투어 말을 늘어놓았다.
“새로운 투자자가 아주 대범하고 사람이 좋아. 전폭적으로 밀어준 덕에 계약도 엄청나게 따내고 조금 더 안정되면 규모 늘리는 건 시간문제지.”
“그 정도예요?”
지안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 회사를 아주 장기적으로 놓고 본다고 하더라고. 단기적인 수익 창출보다는 기술투자에 집중하고 싶다고. 난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든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오, 때마침 오셨네. 어서 오세요. 임 전무님, 여기로 앉으시죠.”
세경기업 직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이미 출근을 시작해 서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어 보였다. 지안 또한 반가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런데.
“어?”
“아니, 이게 누구야. 자네는?”
박 이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직원들도 웅성거리며 귀엣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갈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정후가 미닫이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정후 씨.”
지안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정후 또한 지안이 있을 걸 예상 못 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후반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 세경기업과의 협상을 진행해온 투자 운용기금의 임원이었다. 그는 박 이사와 직원들을 바라보며 옆에 선 정후를 소개했다.
“저희 회사 대표님이십니다.”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미리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후는 깍듯한 자세로 박 이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 이사는 당황한 얼굴로 아닐세, 하며 손을 내저었다. 정후는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안이 우선이라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구먼.”
박 이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의 시선이 지안을 향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놀랐다면 미안해.”
지안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 때문에 그동안….
정후가 종종 세욱의 입원실을 찾아왔다던 채윤이 말이 떠올랐다.
‘정후가 많이 바쁠 거다. 네가 조금만 이해해줘라.’
가끔 푸념을 늘어놓던 지안을 묵묵히 위로했던 세욱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자자, 그럼 우리 대표님은 여기 앉으시고.”
박 이사는 어색하게 마주 선 두 사람을 빠르게 번갈아 보았다. 지안의 옆자리에 방석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정후는 거절 한번 없이 성큼 지안의 옆으로 걸어왔다.
“정후 씨, 이게 무슨….”
지안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제 옆에 앉은 정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애틋한 시선이 지안의 얼굴 구석구석에 가닿았다. 그는 마치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듯 찬찬히 살폈다.
“도대체 왜….”
지안은 말문이 막혔다.
세경기업을 인수한다는 거물급 투자자 이야기가 나온 건 두 사람이 이혼하기 몇 달 전이었다. 아무리 장인어른의 회사라 할지라도 이혼 후까지 그 계약을 이어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정후의 입장에선 손해 보는 장사일 것이 뻔했다.
‘…….’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모펀드에서 차익을 남기려고 인수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한 것 같다던 박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자, 일단 한잔 받아놓고.”
박 이사는 소주병을 들며 정후를 재촉했다.
“예.”
정후는 두 손으로 깍듯하게 술을 받았다.
“자, 일단 우리 건배사 한번 하고 시작합시다.”
박 이사의 외침에 사람들은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안이도 한 잔 받아라.”
지안은 왠지 뭉클해지는 마음으로 술잔을 들었다.
“모두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냈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도 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이 악물고 뛰어서 우리 세경기업 제대로 살려냅시다!”
“건배!”
힘찬 건배사와 함께 수십 개의 잔이 부딪쳤다. 지안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알싸한 느낌에 지안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천천히 마셔.”
그녀 앞에 물 잔이 하나 놓였다. 지안이 놀란 눈을 들어 올리자 정후는 이미 몸을 돌린 채 다시 박 이사의 잔을 받고 있었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넓고 곧았다.
몇 차례 더 건배사가 이어지고, 테이블마다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피었다. 화장실에 간 사람, 잠시 전화 받으러 나간 사람 등등. 회식 자리는 한 차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테이블 끝자리엔 두 사람만 앉아있었다.
“한잔할래요?”
지안이 정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정후가 남아있던 술을 전부 비우며 잔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병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잔을 채웠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둘이서만 소주를 마시는 게 처음인 듯싶었다. 지안이 정후를 바라보며 잔을 내밀었다.
“건배.”
두 개의 잔이 부딪치며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두 사람 이렇게 보니 보기 좋네. 둘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느덧 박 이사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종일관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정후의 행동에서 지안과의 관계변화를 어느 정도 짐작한 눈치였다.
“…제가 지안이랑 살면서 서운하게 한 게 많습니다.”
정후가 박 이사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안의 눈이 정후를 향했다. 세욱이 그렇게 떠나고, 박 이사는 지안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온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담담히 쏟아지는 정후의 속내에 지안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박 이사는 픽 웃으며 정후의 잔에 술을 채웠다.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박 이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회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정후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아니, 근데 대표님이 이렇게 잘생겨도 되는 거야?”
“신수가 훤하네.”
정후는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며 술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강 그룹의 회식 자리에선 쉽게 말을 트는 사람조차 없었지만, 여기선 다 받아주기로 한 모양인지 그는 짓궂은 농담도 적당히 받아넘기며 물렁하게 굴고 있었다.
지안은 그 모습을 한동안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점은 한옥 형태의 단독건물이었다. 산 밑의 공기가 차가웠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고, 지안은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셨다.
지안은 툇마루에 앉았다. 어지럽게 뒤섞인 신발 속에서 제 것을 찾아 섬돌 위에 올려놓았다.
어디선가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카만 밤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일었다.
“잠깐만.”
지안은 고개를 돌렸다. 정후였다.
“신발 끈 풀렸어.”
눈을 떨어뜨려 제 운동화를 보니 매듭이 풀려있었다. 지안이 상체를 수그리며 다시 손을 뻗기도 전에 정후가 바닥으로 내려와 그녀 앞에 앉았다.
“신어봐.”
지안은 조심스럽게 발을 밀어 넣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단정하게 운동화의 끈을 묶었다.
이제 조금씩 길어진 머리카락과 잘생긴 이마, 너른 어깨.
묵직한 그의 존재감이 지안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완벽한 형태의 매듭이 꼼꼼하게 묶여있었다. 이런 부분조차 그답다고 생각하며 지안은 풀썩 웃었다.
“…고마워요.”
정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 홀로 또렷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안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 회사 말이에요.”
지안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만약 끝까지 버텨준 그가 아니었다면 세경기업은 공중분해 되어 그대로 없어졌을 것이다. 아버지도, 과거의 빛났던 추억도 모두 가슴 속에 묻어야 했을 것이었다.
“이제 아버지 회사도 아니지만…. 어쨌든, 저한텐 친정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요.”
정후는 한동안 지안의 발치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안아.”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동자가 굳건했다.
“아직도 멀었어, 난.”
정후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뭐든 다 해주고 싶어, 너한테.”
정후의 새카만 눈동자가 먹먹한 빛을 품고 있었다. 지안은 영문 모를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후 씨, 왜….”
정후는 휘몰아치는 감정을 추스르는 듯 길게 숨을 내쉬다 다시 지안을 바라보았다.
검은 상복에 휘감긴 채 자신을 바라보던 지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 아내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여자를 그동안 어떻게 취급했던 건지.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거기서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그런 너를 버려두고 나는 도대체 뭘 하며 살았던 건지.
“…내가 평생 갚으면서 살게.”
지안은 정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이 너무나 슬퍼보여서 지안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멀리서 새가 울고,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잠깐 걸을까.”
정후가 먼저 걷기 시작했고, 지안이 그 뒤를 따랐다. 몇 번 어깨가 스치듯 닿았고, 정후가 자연스럽게 지안의 손을 잡아왔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
그 안의 온도는 여전히 뜨거울 터였다.
두 손이 조심스럽게 서로를 향해 얽혀들었다. 손가락 끝을 더듬다 이내 맞물리며 깍지가 끼워졌다.
맞닿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음식점의 돌담 옆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 산속의 여름밤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까만 밤하늘 아래, 노란 초승달이 선명하게 빛났다.
“…좋다.”
말없이 걷는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한 침묵이 고여 들었다.
한때 그들에게 익숙했던 편안함이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시간마저 편하고 좋았던.
그냥 서로가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행복했던 순간, 그때의 느낌.
지안은 잠시 옛 생각이 났다. 진중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정후의 얼굴을 보며 지안은 지금 우리가 같은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함께 머무는 온기가 좋은 거라고. 다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너무나 달랐던 두 사람이었다.
가치관이나 성격,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마저.
그러나 그 마음만 같다면 결국 모든 건 하나로 흐르게 되는 것이라 믿는다.
언제나 쉼 없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나도 너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고.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향해 가고 있던 중이라고.
결국, 이 사랑에 대한 귀결점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을.
정후의 손을 잡고 걸으며 지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지안아.”
정후의 부름에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사랑하는 얼굴이 속삭인다.
“이 손, 다신 놓지 말자.”
내 유일무이한 사랑.
지안은 정후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