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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Brewing (9/17)

9. Brewing

1년 후.

자전거 바퀴 두 개가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지안이 달리는 이곳은 경기도의 한 외곽도시. 이제 막 대단지 아파트와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하는 동네였다.

얼마 전 자전거전용도로가 새로 깔렸다. 발에 힘을 조금만 주어도 자전거는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수월하게 뻗어 나갔다. 이제 막 푸릇푸릇 초록빛 움트는 논밭 풍경이 옆으로 빠르게 스쳐 갔다.

이제 곧 여름인가.

얼굴에 감겨드는 바람에서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지안은 부지런히 발을 굴리며 어느새 훌쩍 흘러가 버린 시간을 가늠했다.

어느덧 1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찾아온 계절.

늘 깨끗한 단발 컷을 고수하던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턱 끝을 간지럽혔다. 지안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학교 정문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대연고등학교」

현재 그녀가 근무 중인 고등학교였다. 세경기업 본사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

박 이사의 배려로 세경기업의 사택에서 잠깐 머물던 지안은 운 좋게 그 부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갑자기 육아휴직을 들어간 교사의 대체 자리였다.

민영의 말로는 워낙 외곽지역이라 지원자가 없을 거라 했다. 면접을 봤던 당일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바로 학교 근처에 집을 구했다.

지안은 교무실에 들러 출석부를 챙긴 뒤 교실로 향했다. 그녀는 2학년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립학교라 교사의 이동이 적어 학교 분위기는 단란했다. 미개발 지역이 많은 학군이라 학생 수도 많지 않았고, 대학진학을 생각하는 아이들도 소수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방과 후 역 근처 가게에서 알바를 하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했다. 그래도 아직은 학생답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고, 임시로 온 젊은 교사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선생님, 여기 휴대폰이요.”

휴대폰 수거를 담당하는 아이가 반 아이들의 휴대폰이 가득 담긴 가방을 내밀었다.

화려한 새 기종의 휴대폰들. 아이들은 한 달 알바비를 꼬박 모아 이런 걸 사는 걸까.

지안은 아이들이 앉은 위치와 교탁에 붙은 자리표를 대조하며 빠르게 출결을 체크했다. 늘 늦게 오는 한 명을 빼고는 전원 출석이었다.

“오늘 3교시 영어에서 생물로 바뀌었으니까 참고하고, 이제 곧 시험 기간이라 책상 서랍 다 비워야 하니까 미리 준비하자. 책상 위에 낙서 같은 것도 다 지우고.”

지안은 자신을 향한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자거나 딴짓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지안은 빡빡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영어 시간에 이따 보자.”

지안이 문을 향해 걸어가자 몇몇 붙임성 있는 학생들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지안은 아이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때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고, 키 큰 인영이 하나 들어섰다.

턱밑에 반창고를 붙인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맨 끝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김관우.

그는 삐딱하게 굴 것 같은 인상과 달리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다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매일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할머니를 따로 챙겨드릴 사람이 없다고 했다.

문제아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아이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안은 사정을 이해해줄 테니 늦어도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그 이후, 그는 꼬박꼬박 등교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이라는 것이 그랬다. 지겹도록 시간이 가지 않기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어렴풋이 더듬게 되는 인생의 한 페이지였다.

지안은 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렇게 잠시 스쳐 가는 서로의 교차점을.

수업 2개를 연달아 마치고, 지안은 교내식당으로 이동했다. 배식처 부근에 교사들의 좌석이 따로 있었다.

“지안 쌤, 여기 앉아요.”

민준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생물담당으로 지안과 동갑내기였다. 이 학교에서 근무한 경력이 길어 종종 도움을 주었다.

지안은 민준에게 살짝 눈인사하며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교무부장, 영어과 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민 선생 왔어?”

“식사해요”

두 사람은 지안을 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연차 많은 교사들은 곧 떠날 임시직 교사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안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이 학교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다.

옛날부터 아버지와 살던 동네라 마음이 편하기도 했고, 맡은 아이들에게도 그새 정이 들었다.

“자기네 반 김관우, 걔 요즘 잠잠하더라?”

영어과 부장이 국을 뜨다 말고 지안에게 말을 걸었다.

“네, 따로 면담도 하고 신경 써서 챙기려고 해요.”

지안의 대답에 영어과 부장은 차갑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차피 임시로 맡은 건데 뭘 그렇게 힘을 빼? 그냥 적당히 해.”

이 학교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그녀는 신입 교사들이 오면 괜한 심술을 부렸다. 의욕에 들떠 있는 지안이 보기 싫었는지 유독 냉랭하게 말을 하곤 했다.

“요번 논술 수행평가는 민지안 선생님이 혼자 내봐. 자꾸 많이 내봐야 늘지.”

그녀는 지안에게 일을 많이 해봐야 익숙해진다며 제 일을 자주 떠넘겼다.

“주말에 하면 월요일까지는 줄 수 있지?”

“네.”

지안은 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불평해봤자 버릇없는 신입이라며 저만 손해볼 따름이었다.

“무슨 반찬이 싸구려 풀떼기밖에 없네. 저 먼저 일어납니다.”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놓은 영어과 부장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교무부장 또한 몇 술 뜨다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 국어담당 연화가 욕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저 면상 좀 안 봤으면 좋겠네.”

“저번에 교육청에 민원 들어갔잖아요. 교장 선생님한테 엄청 깨졌나 보더라고요.”

민준이 연화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것참 고소하다.”

연화는 키득거리며 지안과 눈을 맞췄다. 지안은 싱긋 웃었다.

연화는 오지랖 넓고 정 많은 성격이었다. 학교에서 체육을 담당하고 있는 문열이 그녀의 남편이었다.

“식사 다 드셨으면 교무실 가서 커피 한잔하실래요? 제가 직접 내려드릴게요.”

지안의 말에 연화는 눈을 찡긋하며 좋지요, 하고 외쳤다.

교무실은 한가했다. 지안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방에서 커피 원두를 꺼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화가 대뜸 말을 던졌다.

“그래서 민쌤은 혼자 산다고?”

지안은 전기포트에 물을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말에 심심하겠다. 여기 주변에 뭐가 없잖아. 자기 남자친구가 뭐라고 안 해?”

은근슬쩍 떠보는 질문에 지안은 애매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이도 그렇고,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지안이 결혼을 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청소하고 수업 준비 하다 보면 벌써 주말이 끝나있더라고요.”

어물쩍 넘기는 말에 연화는 수선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일만 하다 보면 시간만 빨리 가고 남는 게 하나도 없더라. 얼른 남자친구 만들어.”

“…남자친구요?”

지안이 생각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연화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얹었다.

“그냥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지. 노래 가사 몰라?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

“그래서 김연화 선생님은 훌륭한 선택을 했고?”

드르륵. 교무실 문이 열렸고, 연화의 남편인 문열이 등장했다. 그는 배구선수 출신이라 키가 훤칠하고 체형이 좋았다.

“목소리 좀 줄여. 결혼 어쩌고 하는 소리, 복도까지 다 들린다.”

입으로만 타박할 뿐 문열은 연화 옆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목소리 큰 거 뭐 하루 이틀인가?”

연화는 입을 삐죽였지만, 문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까지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어찌나 사이가 살갑고 좋은지 그 두 사람 때문에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첫째, 감기 괜찮을까? 이따 퇴근하고 내가 병원 데려가 봐?”

“그래 주면 고맙고. 어머님이랑 둘째 챙겨서 먼저 저녁 먹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밖에서 먹고 들어와.”

“그러자.”

별거 아닌 일상 대화들이 지안의 귓가에 박혀왔다. 옆에 있던 민준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결혼, 그거 해서 뭐해요. 갑갑하기만 할 것 같은데. 집에 가면 혼자인 게 제일 편하고 좋지 않나?”

비혼주의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마치 혼자 사는 이들의 연대감을 느끼고 싶다는 듯 지안을 바라보았다. 지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웃었다.

연화는 남편을 집에서도 보고, 학교에서도 보고 지겨워죽겠다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지안은 두 사람을 보면서 이런 게 정말 부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두 사람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교집합이 생겨나는 그런 생활.

사소한 일 하나하나 공유하면서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우기도 하고. 혹은 같이 야식도 먹고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난 뒤 다시 끌어안고 늦잠을 자기도 하는, 그런 일상.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실패로 끝난 자신의 결혼생활이다.

‘이대로 이혼하면 단 한 푼도 못 준다.’

혼전계약서에 의해 재산분할은 불가했다. 서강욱은 유례없이 크게 분노했다. 이혼하려는 이유야 어쨌든 간에 감히 이혼을 들먹거리는 자체가 괘씸하다며 빈손으로 내쫓겠다고 했다.

애초에 돈을 바라고 그 집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금전적인 건 서정후와의 결혼생활을 버텨내는 데 그 어떤 원동력도 된 적이 없었다.

아버지 발인 후 다시 돌아온 집.

‘…다시 재고할 여지는 없는 거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미 정후 씨랑도 얘기 끝났어요.’

서강욱은 어디 한번 고생해보라는 듯 혀를 차고는 자리를 훅 떠나버렸다. 그러나 영희의 입장은 달랐다.

‘너, 무슨 꿍꿍이 있어서 이대로 가는 거 아니니? 그냥 이거 받고 깔끔하게 끝내.’

영희는 돈 한푼 쥐여주지 않고 며느리를 쫓아냈다는 소문이 날까 봐, 지저분한 소송 따윈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변호사의 검토를 거친 이혼합의서를 건넸다. 그곳엔 꽉 찬 9자리 숫자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이거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야. 우리 정후 새장가도 가야 하고, 쓸데없는 소문 도는 거 질색이니까.’

이혼 후, 지안은 그 돈으로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졌던 빚을 모두 갚았다. 상속 포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끝을 내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사람들의 원망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지안은 세욱의 명예나마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그게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게 남은 통장 잔고액이 5천만 원 남짓. 오피스텔 보증금이 4천만 원이었고, 몇 달간의 월세와 생활비를 생각하면 돈이 빠듯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자리를 찾는 것이 급했다.

모든 생활이 간소해졌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심지어 걸어 다니는 길마저. 모든 것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지금 계약 기간이 끝나면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지 불안했다. 그러나 모든 건 그녀가 선택한 결과였고, 지안은 불평하지 않았다.

“아, 원두 냄새 좋다.”

연화가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 지안은 핸드밀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갈색빛 원두가 그라인더 속으로 들어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잘게 부서졌다. 신선한 원두 향이 교무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드리퍼에 가루를 털어 넣은 순간, 포트의 물이 끓었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물을 붓자 갓 쪼개진 원두가 연한 갈색 거품을 뿜어냈다. 투명한 액체가 저그 아래 고여 들었다.

“연화 쌤이랑 문열 쌤은 진하게, 민준 쌤은 연하게 맞죠?”

지안은 종이컵 4개를 꺼내 각각 여과액을 나누어 부었다.

“이 집 서비스가 좋네. 자주 와야겠어요.”

문열의 농에 지안이 싱긋 웃었다.

지안은 진한 커피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하게 마시는 정후의 몫과 섞어서 두 잔을 만들면 농도가 딱 알맞고 좋았다.

서정후.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은 지금처럼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헤어진 지도,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지도 이제 거의 1년. 그러나 그와 함께 살았던 7년 동안의 기억은 새로운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저도 모르게 굳어진 취향이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연이어 떠오른 얼굴 하나.

오영희에게서 파생되는 기억은 언제나 한두 가지로 끝나지 않았다. 그 언저리만 생각해도 지안의 마음은 차게 식었다.

‘저번에 해다 준 한약은 어쩌고 무슨 커피를 마시고 있어. 너, 내 성의가 우습니?’

‘지안이한테 적당히 좀 해요. 커피 좀 마시는 게 무슨 대수라고.’

‘상시 몸관리를 잘 하고 있어야지. 애 안 들어서는 걸 누굴 탓해, 누굴.’

그 집에서는 커피 한잔을 편하게 마실 수가 없었다. 역정을 내던 영희와 싸늘하게 반응하던 정후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재단되어가던 자신의 기호와 행동들.

“지안 쌤, 뭘 그리 생각해?”

연화의 말에 지안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른 와, 조금 있으면 종 치겠다.”

“네.”

숨이 턱턱 막혀왔던 삶이었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기억들은 그녀를 아프고 힘들게 만들었다.

지안은 이제 조금 편해지고 싶었다.

불순물 같던 감정들이 불투명한 여과지에 걸러져 조금씩 맑아지길. 시간에 기대어 조금씩 무뎌지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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