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빈 자리. (8/17)

8. 빈 자리.

서정후에게 결혼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세경기업의 사위가 되어 태강 그룹을 물려받기 위한 든든한 뒷배를 만들어 놓을 것, 그리고 한 가정을 일군 경영자의 모습으로 직원들과 주주들의 신뢰를 얻을 것.

6살, 서강욱의 집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그는 재단되고 평가받는 삶을 살아왔다. 서정후는 기꺼이 그 역할에 녹아들었다. 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난 듯 그는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국내 최고의 대학을 갔고, 장교 복무가 끝나면 그룹에 입사할 예정이었다. 결혼 또한 당연히 해야 할 것이었고,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거기에 특별한 감상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민지안.

그녀의 프로필은 대강 알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후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인상은 아니었다. 다만, 대화할 때 느낌이 나쁘지 않았던 기억은 있었다.

“급한 일 있으세요?”

침묵을 깨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후가 눈을 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 물 잔을 잡으려다 말고 앞에 앉은 지안을 바라보았다.

첫 맞선 자리였다. 양가에선 이미 조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이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오늘 맞선이 무리 없이 흘러간다면 그들은 내년 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호텔 레스토랑의 단독 룸이었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에서 반짝이는 조명이 쏟아졌다. 통창 너머의 1층 정원은 마치 누군가가 그린 풍경화 같았다.

“문 쪽을 향해 앉아 계셔서 바쁜 일이 있나 했어요. 얼른 가버리실 것처럼.”

농담인지 진담인지.

지안은 살짝 미소를 띠었다. 정후는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지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보이는 것만큼 유순한 기질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비스듬한 고개를 바로 하며 지안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여기 온도 좀 조절해도 될까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끝이 살짝 쳐진 눈매와 커다란 눈. 세필화로 그린듯한 가늘고 긴 속눈썹이었다. 흑요석같이 새카만 눈동자엔 하얀 눈자위 부분이 적어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졌다.

이런 얼굴이었던가.

그녀가 신입생이었을 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보다 젖살이 좀 빠진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에어컨 바람이 슬슬 서늘해지려던 차였다. 지나치게 더운 바깥 날씨를 의식한 탓인지 에어컨 온도가 평소보다 낮았다.

그는 가볍게 시선을 두며 지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려 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때론 숫자나 계약서보다 그 사람의 본질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윽고 지배인이 주문한 음료를 들고 왔다. 지안은 내부 온도를 조절해달라는 말과 함께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줄 것을 청했다. 마침 정후도 직사광선이 신경 쓰였다.

그녀는 주변 환경을 예민하게 살피는 편인 듯했다. 앞으로 여러 일을 함께해나갈 파트너로서 나쁘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블라인드를 내려 실내는 은은한 빛이 돌았다. 작고 오똑한 코와 위로 살짝 올라간 입매가 선명히 드러났다.

“제가 코를 조금 골아요.”

예상외군. 정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커피잔을 잡았다.

“…곤란하신가요?”

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이다.

“딱히 상관없어.”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곧바로 자는 편이라.”

“네.”

지안이 살짝 웃으며 빵을 조각내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이 붉었다. 정후는 그 움직임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일이 바쁜 편이야. 한 가지 집중하면 그 외엔 신경 못 쓰고.”

“네.”

“제대하면 바로 회사 들어갈 거야.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의무는 최대한 이행하겠지만, 상황에 따라선 일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을 거고. 물론 혼선 없도록 미리 통보는 하겠지만.”

이행, 통보. 계약할 때나 쓰일 법한 말들이 둘 사이에 오간다. 지안은 잠시 먹던 빵을 내려놓고 정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이것이 서정후가 원하는 결혼의 조건이었다.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지안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새하얀 뺨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지듯 내려왔다.

정후는 결혼을 위해서 이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일이 우선인 사람이었고, 결혼 또한 그 과정의 일부였으므로 이에 대한 협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능력 있는 분이시니 결혼생활도… 잘해주실 것 같아요.”

지안은 정후의 언어를 빌려 적당한 톤으로 대답했다. 정중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눈치가 빨랐다.

“그럼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지안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정후의 눈을 슬쩍 바라보았다. 정후는 계속해보라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저의 결혼관은요.”

결혼관이라니. 정후는 재밌다는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단어였다. 그녀는 멋쩍은 듯 볼을 붉히다가도 그래도 꼭 해야겠는지 말을 이었다.

“정략결혼에 결혼관을 갖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정후는 고개를 저었다. 뭐든 자신의 관점을 갖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말을 맞춰보고 피할 수 있는 부분은 서로 돌아가면 되니 도리어 합리적이었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라고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아버지가 자주 해주셨던 말이거든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래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결혼할 사이고 평생 볼 사이니까요.”

사랑, 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지안은 어색한 듯 말을 끌었다. 정후는 물 잔을 들어 올리려다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정후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안은 미리 준비한 나머지 말들을 뱉어냈다.

“그래서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부부는 평생의 동반자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서로 잘 모르는 사이긴 하지만 앞으로 큰 인연으로 맺어지는 거니까. 선배님의 인생을 온전히 다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잘 되기를 바라고요.”

“…….”

말하면서 조금 부끄러웠는지 지안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방금 달리기의 피날레 선을 넘기라도 하듯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정후는 희한한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저처럼 어떤 필요에 의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안은 정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설명이 길었는데, 이제까지 해왔듯 하면 된다는 말이었어요. 바쁘다고 서운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이해심이 많다고 해야 할지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정후는 판단이 어려웠다. 정략결혼에 평생,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다니 지나치게 순진한 것 같다가도 믿음이 깨지면 뒤도 보지 않고 가버릴 듯한 냉정함이 느껴졌다.

“바람을 피우거나 하면… 그건 조금 그렇지만요.”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 민망했던지 지안은 농담을 던졌다.

바람이라니. 정후는 대답 없이 짧게 웃었다. 결혼 또한 사업의 일부였다. 순간의 욕망으로 일을 그르치기엔 그는 너무 신중했다.

“선배님이랑 이 결혼, 잘해보고 싶어요.”

정후는 말없이 지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결코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선배라고 하지 말고.”

정후는 지안을 바라보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안과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깔끔하고 영리했다. 독립적이고 자기 생각이 있어 편했다. 그어진 선을 구분 못 하는 타입은 질색이었다.

정후는 그녀가 괜찮은 결혼 파트너라는 판단을 내렸다.

“네?”

“앞으로 이름 불러. 결혼할 사이니까.”

지안은 말없이 속눈썹을 깜빡였다. 까만 눈동자가 그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다. 정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 눈가를 엄지로 쓸면 어떤 표정을 할지, 정후는 문득 궁금해졌다.

* * *

지안과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정후는 급한 연락을 받았다. 서강욱이었다.

‘대원모터스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는데, 아무래도 네가 직접 가봐야겠다.’

그가 3개월간 밤을 꼬박 새워가며 준비한 합병계약이었다. 앞으로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건이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난감한 얼굴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기사님, 저희 차 좀 잠깐 돌려주세요.’

‘민지안.’

‘저는 상관없으니까 정후 씨 일 해요.’

지안은 단호한 표정으로 도리어 정후의 등을 떠밀었다. 정후는 그녀를 본가에 내려다 준 뒤 인수할 회사로 찾아가 계약조건을 다시 조율했다. 하루가 꼬박 걸렸고, 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서강욱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그는 2층 계단을 올랐다. 차후에 문건으로 어떻게 정리해둘지 생각하며 문을 열려던 차, 앞에 서 있는 지안을 발견했다.

“왔어요?”

정후는 잠시 묘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아오던 차에서 잠깐 떠올리긴 했지만, 서강욱과 대화를 하면서 생각의 트랙이 날아가 버렸다.

늘 혼자 쓰던 공간에 지안이 있는 걸 보니 그제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오늘 일은 잘 해결된 거예요?”

지안의 얼굴엔 서운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성품이 그랬다.

정후는 응, 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지안의 말 한마디에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신혼여행, 다시 스케줄 잡을게.”

“그래요.”

지안은 간단히 대답했다. 정후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지나쳤다. 커다란 눈동자가 제가 가는 대로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여행지에 가서는 최대한 일을 줄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정후는 습관처럼 샤워를 간단히 끝낸 뒤 서재로 직행했다. 마무리된 계약조항을 다시 한번 살피고, 회사 법무팀 팀장에게 메일을 한 통 썼다. 언제나처럼 사업 관련 기사들을 팔로우업 하고, 밀려있던 보고자료들을 빠르게 정독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 침실 문을 여니 지안이 아직도 깨어 있었다. 슬립을 걸치고 침대 위에 앉아있는 지안의 모습. 그녀는 무릎을 세운 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정후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기척을 느낀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일 끝났어요?”

“응.”

화장을 지운 말간 얼굴이었다. 오늘, 결혼식장에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하게 꾸민 것도 어울렸지만, 자연스러운 지금이 그는 더 좋았다.

“왜 먼저 안 자고.”

“잠이 안 와서요. 오늘 피곤했죠? 불 끌게요.”

지안은 책을 덮고 수면 등을 껐다. 정후 또한 침실의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갔다.

침대는 보통의 킹사이즈보다 훨씬 컸다. 답답한 걸 싫어하고, 체격이 큰 그를 위해 특수제작한 크기였기 때문에 각자 뒤척이거나 몸을 움직여도 불편하지 않았다.

“잘 자요.”

지안이 머리를 들어 올리며 다시 베개를 괴었다.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정후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 신혼여행인데.”

“괜찮아요.”

지안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잠을 자려는 듯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신경 쓰지 말아요.”

사업상 맺어진 결혼이라 하지만, 신혼여행이 취소된 건 충분히 서운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지안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내일 회사 나와. 같이 점심하게.”

정후는 지안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해 몸을 모로 누운 지안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 지안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렇게 그들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똑똑.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정후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마도 지안일 것이다.

태강 그룹은 곧 미국 남동부 쪽에 공장을 세울 예정이었다. 출장 가기 전 체크해야 할 자료들이 많아 최근 더욱 바빠졌다. 수출이 대폭 늘어나고,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가 챙겨야 할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무섭게 집중하는 그의 귀로 지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익숙한 향과 또 하나의 향긋한 냄새.

정후는 가만히 눈을 들어 올렸다. 책상 한쪽에 따뜻한 차와 마들렌을 담은 접시가 놓였다.

“이거라도 먹고 좀 쉬어요.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지안이 책상 모서리를 잡으며 옆에 섰다. 단정한 손등과 깨끗하게 잘린 작은 손톱.

“만든 거야?”

살짝 열린 서재 문틈으로 포근한 빵 냄새가 풍겼다.

“심심해서 만들어봤어요. 매번 어머님 따라다니느라 스트레스 쌓이는 것도 있고.”

지안은 투정인 듯 아닌 듯 정후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딱 알맞게 우린 찻물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일은 점점 바빠졌지만, 가끔 정후는 모든 게 안정되어 간다고 느꼈다. 특히 지안이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오거나 거실 소파에 앉아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랬다.

척박한 땅이 단비로 촉촉이 젖어 들듯 지안만이 가진 특유의 따스함이 그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고마워.”

그는 지안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살짝 웃었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해주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응원해준다는 것. 확실히 이제껏 사귀어왔던 여자들과는 달랐다.

단순한 이성적 호감이나 성적인 끌림보다는 좀 더, 그를 서서히 지펴 오르게 하는 오랜 장작불 같은 느낌.

“나도 여기 있다 갈게요. 대신 방해 안 되도록 조용히.”

지안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껍질을 넣어 상큼하면서도 촉촉한 마들렌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정후는 잠시 서류를 손에서 놓고, 서가를 오가는 지안을 눈으로 좇았다.

얼마 전,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너무 어리게만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네크라인이 넓게 파진 니트를 입어 새하얀 목덜미와 얇고 곧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났다.

요즘 들어 종종 지안에게 눈이 머무는 순간들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아, 이 책. 옛날에 보고 싶었던 건데.”

지안이 서가의 맨 위 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꺼내려는지 발끝을 들어 올리며 손을 높이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키엔 조금 역부족이었다.

정후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안은 발끝과 손끝에 힘을 잔뜩 주느라 그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이 책 괜찮아.”

묵직하면서도 산뜻한 체향이 지안을 감싸왔다. 정후가 그녀를 스쳐 갈 때 종종 나던 향이었다. 지안의 몸이 긴장으로 바싹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그를 피하려고 살짝 물러난 등에 이번엔 단단한 가슴팍이 닿아왔다.

“잠깐만.”

정후는 한 손으로 지안의 어깨를 감싸며 책꽂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곧게 뻗은 목과 남자다운 턱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정후의 커다란 품 안에 폭 안긴 듯한 자세였다.

“여기.”

정후는 단번에 책을 꺼낸 뒤 자세를 바로 했다. 지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책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지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책의 귀퉁이를 잡았다.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목덜미 부근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정후의 긴 눈매가 스치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안은 예상보다 훨씬 제 역할을 잘해나가고 있었다. 처음 맞선을 보았을 때 그의 판단이 맞았다. 까다로운 영희를 잘 보좌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잡음 없이 처리해나가고 있었고, 정후 또한 세심하게 챙기는 편이었다.

매사 지나치게 나서지 않으면서도 적재적소에서 행동하는 센스가 좋았다. 집안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편해졌다. 서 회장뿐만 아니라 사용인들, 심지어 그의 수행비서마저도 지안을 좋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렇게나 어른스러운 그녀인데, 겨우 이런 것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정후는 귀엽게 느껴졌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책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어?”

지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그대로 응시하며 정후는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다.

쪽.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정후는 살짝 벌어진 지안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웠다.

“흣.”

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작은 빵부스러기를 떼어냈다. 잠깐 스쳐 가는 손길에도 지안은 움찔했다. 더욱더 붉게 물드는 뺨을 보며 정후는 슬쩍 웃음 지었다.

“민지안.”

그녀의 손에 책을 건네주며 정후는 입을 열었다.

“나 좀 봐.”

책 표지를 내려다보던 지안이 고개를 들어 정후를 바라보았다. 물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정후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빼내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다.

커다란 손가락이 지안의 뺨을 움켜쥐었고, 정후의 콧날이 다시 지안의 볼 위를 누르며 두 입술이 포개져 열렸다.

키스가 원래 이랬던가.

와닿는 숨결이 달았다. 힘있게 파고드는 정후를 부드럽게 감싸는 그녀의 내밀한 공간.

정후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지안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그는 굳어있는 지안의 혀를 부드럽게 녹이며 빗장뼈 위를 엄지로 쓸었다. 단단한 손끝이 드러난 살갗 위를 누를 때마다 지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떨림마저 전부 삼켜버릴 듯 정후는 몇 번이나 거듭하여 지안에게 입을 맞추었다.

“으응.”

어설프게나마 착실하게 따라오는 반응이 있었다.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붙을 때마다 달콤한 숨이 흩어졌다.

“하아.”

순간 지안이 정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정후는 지안의 아랫입술을 깊게 머금으며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오직 그만을 향해 있는 말간 얼굴. 발갛게 달뜬 표정. 정후는 천천히 몸을 떼며 지안을 마주 보았다.

예뻐 보였다.

그가 물고 빠는 대로 부풀어 오른 입술과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는 눈동자가.

그는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다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절제했다. 아까 꺼냈던 책을 지안의 손에 들려주며 그는 입을 열었다.

“공부해, 이제.”

정후는 멍하니 올려다보는 지안의 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을 덮으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3시간 후, 미국 현지 책임자들과 화상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그전까지 자료검토를 전부 마무리해야 했다.

“…….”

지안은 의자에 앉는 정후를 잠시 바라보다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공부는 무슨. 지안은 서재 문을 닫고도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귀까지 울렸다.

지안은 침실로 들어와 아무렇게나 책을 놓아두었다. 지금 상태로는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침대 위에 누워 정후의 빈 베개를 바라보다 다시 이불을 끌어안기를 반복했을 때, 다시 침실 문이 열렸다.

정후가 단번에 침대로 걸어와 지안을 끌어안았다. 이불 위를 뒹굴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맞붙었던 입술이 다시 여러 번 겹쳐지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불빛이 다시 반짝거릴 때까지 두 사람의 키스는 멈출 줄 몰랐다.

* * *

매끈하게 뻗은 맨다리가 남자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얇은 발은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을 향해 흔들렸다.

소파 위에 누운 여자에게서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 소리가 낯선지 여자는 손등을 들어 입을 막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지안의 얼굴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정후 씨, 처음부터 너무―.”

이러다 곧 그와 자게 될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밤에 함께 잠들기 전마다, 정후는 지안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품에 가둔 채 숨이 막힐 것처럼 키스하다가도 애완동물을 대하듯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고, 어느 날은 삽입 직전까지 가는 진한 페팅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감정에 휩쓸려 갑자기 몸을 섞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일은 휴일이었고, 지안은 긴 시간 동안 욕조에 있었으며 정후는 해야 할 일들을 모조리 끝내버렸다. 그들을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서재의 안락의자 위에서 한 차례 기나긴 키스가 오갔다. 하나씩 떨어져 내린 옷가지가 듬성듬성,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 복도에서 거실로 죽 이어져 있었다.

브래지어를 걷어 올리며 키스하는 그에게서 쌉싸름한 샤워젤의 향이 났다. 겹쳐오는 몸은 차가웠지만, 맞붙은 틈에서 이내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침대 위에서 적당한 애무를 주고받으며 엉키다가, 정후는 갑자기 지안의 다리를 밀어 올리며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민지안.”

정후는 커다란 손으로 지안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그는 서늘한 눈매로 지안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지안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섹스에 순서가 어딨어.”

그는 손을 뻗어 지안의 손등을 확인했다. 살짝 잇자국이 나 있었다. 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상처내지마.”

그는 차갑고 단정한 얼굴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으응.”

우뚝한 콧날이 지안의 갈라진 틈새를 눌렀다. 정후의 턱이 움직일 때마다 지안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져 갔다. 정후는 그 섬세한 변화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제 인생의 반을 나누고, 그의 아이를 낳을 여자였다.

온전히 제 소유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닿지 않은 곳, 그녀의 가장 내밀한 부분, 심지어 몸의 주인조차 제대로 모르는 그곳에 영역표시를 하는 게 맞았다.

“하아.”

뜨겁고 단단한 혀가 있는 줄도 몰랐던 제 감각을, 하나하나 펼치며 물고 빠는 느낌에 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짝 닿는 감촉에도 달콤한 숨이 쏟아지자 정후는 입구에 입을 맞추며 느릿한 키스를 시작했다. 집요하고도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기분 좋을 때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여성스럽고 차분한 얼굴이 그의 손길과 몸짓에 야한 모습으로 흐트러져갔다.

그 얼굴을 밑바닥까지 확인하고 싶은 저열한 충동이 일었다.

“정후 씨, 흐읏, 흣!”

새하얀 발끝이 엉망으로 곱아들었다. 정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듯 파고들었다. 지안은 엉덩이를 조이며 밭은 신음을 내질렀다.

새하얀 다리가 위로 들릴 때마다 정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아흣!”

커다란 손바닥이 지안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신중한 표정으로 지안을 적셔갔다. 그녀의 몸이 완전히 부드러워진 후에야 그는 몸을 떼며 상체를 세웠다.

지안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후를 향한 눈동자가 멍했다. 그는 가끔 저 새카만 눈을 볼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마음에 잔상이 남는 듯한 느낌.

그는 제 페니스를 부드럽게 손으로 훑은 뒤 천천히 콘돔을 씌웠다.

“후.”

그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모든 걸 기억에 새겨넣고 싶을 따름이었다. 관자놀이엔 어느새 푸른 핏줄이 솟아있었다. 그는 지안과 눈을 맞추며 그녀의 몸 안에 서서히 제 분신을 밀어 넣었다.

“하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졌다.

미세한 아픔, 빠듯하게 빨아들이면서 감싸오는 따스한 느낌.

“으읏.”

이물감을 참지 못한 지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순간 확 조여들며 전신을 휘감는 쾌감이 정후의 뇌리를 쳤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지안의 모든 것이 그를 향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빈틈없이 숨통을 조여오며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그를 잠식해가는 기분.

정후는 잇새를 악물었다. 더 제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지안과 키스하며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혀와 혀가 얽히고, 두 사람의 성기가 맞물리며 생애 처음 맛보는 쾌락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읏! 흣!”

둘 다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정후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삽입 때의 배려는 이제 없었다.

그는 무자비하게 지안의 안팎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한껏 예민해지고 부드러워진 몸은 그의 흉포함을 삼키며 흐드러지게 벌어졌다.

그의 전신을 새하얗게 달구는 감각과는 별개로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날 선 이성이 그녀의 존재를 그의 뇌리에 똑똑히 새겨넣고 있었다.

“입 벌려봐.”

정후가 꾹 다물린 지안의 입술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네 소리 좋으니까.”

더 흥분되거든. 정후는 지안의 다리를 들어올려 제 허리를 감았다. 부드러운 엉덩이가 허공에 떴다.

누구의 것도 닿아본 적 없는 새빨간 속살,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정후는 제 몸의 일부를 묵직하게 박아 올렸다.

“하읏.”

지안이 교성을 지르며 정후에게 매달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신음이 흘러내렸다. 정후가 그대로 키스하며 맞닿은 하체를 비비듯이 꾹 눌렀다.

“으응.”

제게 더 깊숙이 박혀 든 그녀를 향해 정후는 거센 허리짓을 멈추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거실이 두 사람이 내뱉는 호흡과 소리로 달아올랐다.

고요한 밤, 정원의 샛노란 수선화만이 홀로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 * *

그의 기억 속엔 오래된 방 하나가 있다.

아주 넓고 삭막한 방.

그곳은 아주 어둡고 쓸쓸한 무념의 공간이었다. 외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선 입을 닫고, 눈과 귀를 막고, 아무것도 느끼지 말아야 했다.

그 빈 터에서 서정후는 어른이 되었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은 찰나의 추억조차 되지 못했다. 무수한 담금질을 거듭하며 그는 무뎌지고 단단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정후 씨, 들어가서 자야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상냥한 어조와 아내만이 가진 특유한 분위기.

정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의식이 붕 떠 있었다. 바다 깊은 곳에 반쯤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이렇게 많이 마신 거 처음 봐요.”

서늘한 손바닥이 그의 이마 위를 덮었다. 작지만 끝이 야물고, 보기 좋은 모양의 손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 실루엣이 그려졌다.

정후는 손을 뻗었다. 지안의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감겨들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정후는 아직 때때로 그 방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아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기 시작했다. 지안의 손길에 온갖 상념들이 의식 저 너머로 부옇게 흩어져갔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데, 정후 씨는.”

지안은 정후의 넥타이를 풀고, 목 끝까지 잠긴 셔츠 단추를 연 뒤 그의 다리를 소파 위에 곧게 폈다.

오늘, 지방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오던 차 안이었다. 30명도 넘는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 사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또다시 긴 터널과도 같은 시간을 지나야 했다.

이 모든 비난의 화살 또한 결국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이리 와.”

정후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었다. 작고 향긋한 몸이 옆으로 다가왔다. 정후는 길게 숨을 내쉬며 지안을 끌어안았다.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는지, 정후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잠깐 눈을 들어보면 일주일이 지나있었고, 잠시 한숨을 돌리면 한 달이 흘러 있었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의 사업가였고, 그가 능히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지금의 바쁜 날들이 지나면 지안과 다시 느긋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안 또한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걸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밤이 흘러갔다.

* * *

“이상으로 태강 그룹 신차 관련 보고를 마칩니다.”

새하얀 스크린의 빛이 꺼졌다. 상품전략팀 팀장의 발표가 끝나고, 정방형 회의실에 불이 들어왔다.

“그럼 질문받겠습니다.”

발표를 끝마친 남자는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테이블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서정후 부사장을 주시했다. 으레 그의 입에서부터 날카로운 질문이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

그러나 회의실은 고요했다. 발표자는 머쓱한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완벽한 슈트 차림을 고수하던 부사장이었으나 그는 재킷도 타이도 없이 정물처럼 앉아있었다.

까칠하게 일어난 얼굴과 핏발 선 눈동자. 예민하게 날 선 표정은 최근 몇 개월간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회의실을 가득 메운 임직원들의 눈동자가 전부 정후를 향했다. 분위기를 파악한 김 실장이 빠르게 질문을 시작했다.

“자율주행 부문 관련해서 질문드립니다. 배부된 자료 15페이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갖고 있던 보고서에 눈을 돌렸다. 그 후, 몇 번의 단조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그러나 스크린 위 어느 한 곳에 고정된 정후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빠져나간 텅 빈 회의실.

“…부사장님.”

정후는 김 실장이 다섯 번 정도 더 부른 뒤에야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짙게 뻗은 눈썹 아래, 그의 눈자위엔 실핏줄이 불거져있었다.

“회의 끝났습니다. 생각에 깊게 잠겨계시길래 다들 먼저 내보냈습니다.”

피로한 시선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먼 기억을 되새기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정후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이나 더 깜빡였다. 지친 듯한 손길로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갑시다.”

길게 내쉰 숨 끝에는 희미한 알코올 향이 묻어났다. 매끈한 뺨이 푹 꺼져있었다. 회의실 밖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진창에라도 빠진 듯 무거웠다. 냉랭한 옆모습에는 자칫 잘못 건드리면 폭발해버릴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집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신차 관련해서 내가 지적했던 사항, 오늘 발표자료에 누락됐던데.”

정후가 바뀌는 숫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해 까끌까끌한 음성이었다. 김 실장은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부분 반영 후 현재 연구소에서 테스트 중입니다. 조금 늦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늦어지고 있는 모양?”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가 내리꽂혔다. 김 실장의 입이 자동으로 다물렸다.

“데드라인 넘길 경우 보고하는 게 먼저 아닌가? 내일 오후까지 시간 주겠습니다. 담당 임원한테 보고서 만들어서 당장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해요.”

“…즉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늦었는지 제대로 된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

“네, 부사장님.”

김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정후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는 게 살길이었다.

“부산공장 시찰도 다시 일정 잡고.”

김 실장은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매주 공장방문은 피로하실 것 같습니다. 그다음 주로 하는 것이….”

정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같은 거로 반복해서 지시받는 게 요즘 우리 회사 유행인가?”

잠시 정적이 일었다.

“가는 방향으로 하죠.”

“네,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제 캘린더는 서정후의 일정만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무실로 향했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비서진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정후를 향해 인사했다.

“네.”

짧게 대답한 정후는 휴대폰을 한번 확인한 뒤 김 실장에게 넘겼다.

지금은 한시도 정신을 놓아선 안 되는 시기였다. 내부의 공기가 흡사 바위로 짓눌린 듯했다. 비서진들 또한 무서운 속도로 일하는 상사를 보좌하느라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현재 정후는 타임라인을 무시하며 평소의 배가 되는 업무량을 소화 중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이혼 이후, 쭉 이런 상황이었다.

작년 한 해, 회사는 서정후 부사장의 사생활 문제로 시끌시끌했다.

신문 기사를 장식했던 여배우와의 스캔들과 부친상을 당한 아내와의 이혼. 그룹 이미지에 좋지 않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세간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람피우다가 결국 갈라섰나 보네.’

‘와이프가 참다못해서 이혼하자고 했나 봐.’

김 실장은 지안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서정후는 절대 이혼을 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불명예를 떠안으며 이혼을 자처했다. 거기서부터가 김 실장에겐 불가해한 지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그의 상사는 늘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후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소파에 앉아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가도, 어떤 날은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해버릴 것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일만 했다.

“저, 부사장님.”

집으로 가는 차 안, 김 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사모님께 요청을 받은 게 있어서.”

서늘한 얼굴이 김 실장을 향했다. 모든 걸 건성으로 대하던 눈에 빛이 돌았다.

“서재에서 몇 가지 물품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아주머니께 미리 부탁해 놓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정후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나한테 얘기해요.”

“네?”

“내가 직접 찾을 테니까, 전달만 김 실장님이 하세요.”

여느 때와 같은 명료한 지시였다. 김 실장은 순순히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정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정후는 굳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영희가 가꾸는 정원은 여전히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침없는 보폭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사용인에게 인사를 하고, 익숙한 계단을 오른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정후의 지침에 따라 사용인은 2층의 물건들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넓은 거실과 소파, 언제나 깨끗이 정리된 서재와 침실, 티끌 하나 없는 복도. 모든 건 예전과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침 식사 때마다, 영희는 사용인을 옆에 세워두고 볼멘소리로 타박했다. 집안 분위기가 왜 이렇게 우중충하냐, 요즘 살림에 소홀한 거 아니냐, 청소는 제대로 하는 건지.

말도 안 되는 패악을 부리는 영희에게 사용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사모님, 어디 물건 난 자리랑 사람 난 자리가 같을 수 있나요.’

그러자 영희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 난 자리? 걔가 지금 이 집 물을 다 흐리고 간 거 아니야. 하는 건 쥐뿔도 없었던 주제에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좀 제대로 된 물건을 들였어야 했는데, 내가 끝까지 반대를 못 했던 게 아주 천추의 한이지. 하필 골라도 그런 망한 복권을 긁어서는. 돈 먹는 귀신이었지, 그게!’

정후는 냅킨을 던지며 그 자리를 떴다. 그가 그렇게 아침 식사를 건너뛴 지도 이미 한참 되었다.

끼익.

정후는 서재의 문을 열며 들어섰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한기가 맴도는 서가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책 3권과 화분 하나.

그게 지안이 요청한 물건 전부였다. 정후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찾았다. 서가 맨 아래 칸에 그녀의 남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정후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크리스털 글라스에 병을 기울였다. 싱글몰트 위스키 향이 버석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에서 책도, 업무도 들춰보지 않은 지 이미 오래였다. 지안이 떠난 뒤 그는 때때로 시간에 멈춘 듯한 이 서가에 들어앉아 그녀의 흔적들을 더듬어갔다.

정후는 지안의 책들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특별할 것 없는 제목들이었으나 전부 같은 작가의 에세이였다. 지안이 좋아하던 작가였었나,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지안이 남기고 간 것과 가져간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후는 알지 못했다. 이 공간에 자신만 두고 떠나버린 이유 또한.

정후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책 표지를 가만히 쓸었다. 그게 그녀의 무엇이라도 된다는 듯. 그러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골똘한 옆모습이 떠올랐고, 다시 발작처럼 그녀가 그리워졌다.

그녀가 다시 가져가려는 것. 거기에 뭔가 해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정후는 책을 들어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팔랑,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후는 몸을 숙여 사진을 들어 올렸다. 모서리가 바랜 초음파사진이었다. 사진의 맨 오른쪽 아래엔 지안이 처음 임신했던 해의 날짜와 메모가 그녀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반가워, 우리 아기.」

책상에 앉아 앨범 첫 페이지에 그 사진을 끼워 넣던 지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정후 씨 닮은 아이 너무 궁금한데, 정후 씨는 안 그래요?’

정후의 눈동자가 텅 빈 서재를 훑었다.

그 앨범도, 지안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이제 남은 건 뭐가 뭔지도 알 수 없는 흑백사진 한 장뿐이었다.

정후는 단숨에 잔을 비우며 제 손끝에 들린 사진을 바라보았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만이 제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병원에 다녀와 웅크리며 돌아 누워있던 등이 생각나 그는 미칠 것만 같다.

연거푸 잔이 비워졌다. 나중엔 숫제 잔을 가득 채워 한 번에 들이켰다. 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정후는 사진을 움켜쥔 채 천천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무의식은 언제나 그녀가 있는 기억 속으로 그를 데려갔다.

아내의 부재를 일깨우는 건 언제나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시작됐다.

정후 씨, 하고 그를 깨우는 지안의 나직한 목소리, 소파의 위치를 옮긴다며 부산을 떨던 발소리, 커피를 내리며 흥얼거리던 노랫소리, 키스할 때마다 작게 터지던 그녀의 웃음소리, 고요한 밤, 침실을 맴돌던 사랑스러운 콧소리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녀의 모든 순간이 그의 심장을 쳤다.

같이 사는 내내 해주지 못한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직도 손을 뻗으면 그 작은 몸이 품 안에 안겨 들어올 것만 같은데.

‘선배님이랑 이 결혼, 잘해보고 싶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귓가에 고여 들었다. 그는 팔을 들어 제 눈을 덮었다.

귓가가 윙윙거렸다. 누군가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미친놈처럼 날뛰는 심장. 새카만 눈앞이 핑글 돌았다.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서 홀로 떠 있는 것처럼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정후는 알 수 없었다.

나쁘지 않은 결혼, 괜찮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가 바랐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7년.

지안이 떠났다.

그녀가 떠난 텅 빈 자리에 있었던 건,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