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Good Day (6/17)

6. Good Day

“샌드위치는 이중으로 포장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병원 가서 바로 먹을 거라서요.”

“네, 사모님.”

지안은 병원에 갈 준비를 끝낸 뒤 1층 주방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용인과 함께 아버지가 좋아하는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병원식을 잘 못 드시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주방에 있는 TV에선 태강 그룹이 베트남에 공장을 착공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김 실장에게 내일부터 일주일간 베트남 출장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영희는 정후의 스캔들 기사를 보았는지, 지안을 불러다 집요하게 훈계했다.

‘잘난 남자랑 살면서 이 정도 예상도 못 한 건 아니겠고. 시끄럽게 굴어봤자 네 얼굴에 먹칠하는 꼴밖에 안 되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

태강 그룹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서정후는 조만간 모든 사람의 인정 속에 사장직을 무리 없이 이어받을 것이었다.

지안은 그의 성공 속에 자신의 위치는 어디쯤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찬합 뚜껑을 닫다가 고개를 돌렸다.

Rrrrr.

주방 상판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세경기업 박충근 이사」

아버지의 오랜 동료이자 친우로 지안 또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지안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안아, 나다. 사장님은 몸 좀 괜찮으시고?

정겨운 목소리에 지안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사용인이 다가와 편하게 통화하라는 손짓을 했다. 지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접실로 나왔다.

1층은 조용했다. 서강욱과 영희는 지방에 있는 골프 모임으로 내일 저녁쯤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지금 감기 때문에 잠깐 입원하셨는데 그것만 나으면 금방 퇴원하실 것 같아요.”

―감기? 폐암 환자가 어쩌다 그런 거에 걸렸어. 또 걱정하는 사람 말 안 듣고 싸게싸게 돌아다녔구먼. 딸내미가 아주 고생이 많다.

박 이사의 버릇 같은 농에 지안이 비식 웃음을 흘렸다.

“요즘 회사는 어때요?”

아버지는 병환이 깊어지면서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세경기업은 마땅한 인수처가 나오지 않으면 폐업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어느 사모펀드에서 지분을 사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상황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회사 문 닫는 건 다행히 면하게 생겼다. 그래도 너희 증조부 때부터 50년도 넘게 해온 회사 아니냐. 한때 세경기업 하면 다들 알아줬는데 인생무상이다. 그 중국으로 튄 도둑놈만 아니었어도…. 벼락 맞을 새끼 같으니.

박 이사는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근데 그 회사가 우리 배터리 기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투자 제대로 해서 한번 키워보겠다고 하더라고.

“아버지가 좋아하셨겠네요.”

세욱은 지안에게 회사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좋아하다마다. 애초에 회사 더 힘들어지기 전에 그렇게 해야 했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지. 이제야 아버지 뵐 면목이 섰다고.

세욱은 회사가 어려워지고 직원들을 떠나보내면서 심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태강 그룹은 날로 승승장구하는 데 비해 세욱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영희가 지안을 눈에 띄게 구박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빠는 왜 또 마음 약해지게 그런 이야기를.”

―안 그래도 내가 그딴 소리 말고 얼른 고뿔이나 털어버리라고 했다.

지안이 작게 웃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언제 한번 회사에 놀러 갈게요.”

―바쁜데 안 와도 돼. 나중에 사장님이랑 같이 오든지.

“그렇지 않아도 요번에 아빠 퇴원하시면 옛날에 살던 동네에서 며칠 지내볼까 생각 중이에요.”

지안은 거실 창에 기대어 눈부시게 만발한 꽃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아버지와 살았던 집에도 정원이 있었다. 지안은 주말마다 호스를 들고 옷이 다 젖도록 물을 뿌렸다.

―그럼 나야 좋지. 세욱이놈 딸내미 본다고 일찍 퇴근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구먼.

“네,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지안의 말에 박 이사는 껄껄대며 웃었다. 그는 밥이나 잘 챙겨 먹으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여행이라….’

본래 지안의 집은 경기도에 있는 세경기업의 본사 부근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단독 주택이었다. 지안이 결혼한 뒤 혼자 살던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부도 위기 직전 그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제법 큰 부지였던지라 공장이 매물로 나오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현재는 그 집을 개조한 현대식 레스토랑 한 채가 들어서 있었다.

지안은 얼른 병원에 가 세욱과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일 또한 잘 해결되는 중이라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아버지의 간병인이었다.

“…….”

심장이 덜컥했다. 병원에서 오는 예고 없는 전화는 불안한 법이었다. 노련한 간병인은 좀처럼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지안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지안 씨, 지금 아버님 중환자실로 가셨어요. 얼른 오셔야겠어요.

간병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급히 이동하는 중인지 수화기 너머로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네? 갑자기 왜요?”

지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안은 좀처럼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용인이 놀란 눈으로 달려 나왔다.

―어젯밤 주무실 때 기침을 몇 번 심하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침 회진 때 한번 봐달라고 했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서…. 지금 급성폐렴 진단받고 중환자실로 모셨어요.

항암치료를 받는 폐암 환자에게 폐렴 증상은 치명적이었다. 지안은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거실 한가운데 멈춰있었다.

“지금 얼른 갈게요.”

최악의 상황과 나쁜 생각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지안은 겉옷을 가지러 2층 계단을 오르다 중간에 멈춰 섰다. 멍하게 있는 지안의 곁으로 사용인이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아버님 일인 거죠? 지금 얼른 김 기사님 오라고 할게요.”

그녀는 지안을 데리고 내려와 응접실 소파에 놓인 외투와 도시락이 든 가방을 건네주었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저라도 같이 가드려요?”

“아니에요.”

지안은 한 박자 늦은 타이밍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안은 황급히 코트를 걸치고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의사는 초록색 마스크를 살짝 끌어 내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세욱의 상태를 설명했다.

“지금 폐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 급성폐렴 증상까지 겹쳐서 자가 호흡이 힘든 상황입니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계시긴 하지만, 지금보다 혈중산소농도가 떨어지면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고요. 이 부분은 보호자께서 미리 동의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긴급상황 시 바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요?”

지안은 놀란 눈으로 의사를 향해 물었다.

“네, 인공호흡기를 한번 달면 쉽게 제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현재 환자분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확답은 못 드립니다.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폐렴 증상을 치료하는 데 집중할 예정입니다. 항암은 그다음 문제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욱과 웃으며 헤어졌다. 식사도 문제없이 잘했고, 다음번엔 좀 더 강도 높은 항암치료는 어떻겠냐며 주치의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정도로 악화되다니. 지안은 믿기 힘들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거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의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틈 사이로 각종 의료용 호스에 연결된 채 침대 위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보였다.

저기 어딘가에 세욱이 있는 것이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지안은 한동안 그 앞을 서성이다 걸음을 옮겼다.

간호사로부터 뒤늦게 입실동의서를 받아 서명하는 손이 벌벌 떨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입원실 정리를 끝낸 간병인이 다가와 지안의 팔을 잡았다.

“지안 씨, 식사는 했어요?”

지안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침 이후로 뭘 먹은 기억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였다.

“이따 저녁 7시에 면회 시간이니까 그 전에 식당가서 뭐라도 먹고 와요.”

“괜찮아요. 지금은 뭘 먹을 생각이 안 나네요.”

지안이 고개를 젓자 간병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채근했다.

“보호자가 힘이 나야지 먼저 쓰러지면 어떡해. 에고, 그새 얼굴이 완전히 상했네. 이따 손잡고 말 한마디라도 걸어드리려면 기운이 있어야 하니까 안 먹히더라도 한술 뜨고 와요.”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병인에게 오늘은 제가 있을 테니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다.

중환자실 옆엔 보호자 대기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와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 몇몇이 앉아있었다.

지안은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정후에게 전화했으나 김 실장이 받았다.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는 회의라고 했다.

지안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말만 간단히 전했다.

불행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지안은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세욱과 같이 먹으려고 준비했던 도시락이 옆에 놓여있었다.

지안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떠있었다.

‘난 인공호흡기 같은 거 절대 안 달란다. 지안이 너도 잘 기억해둬라.’

‘아빠, 자꾸 그런 말 좀 그만해요.’

중간과정 없이 닥친 현실에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했다. 담담한 척해보려 했지만 떨리고 무서웠다. 평소처럼 꿋꿋하게 견뎌보려고 했으나 자꾸 나쁜 생각이 들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갑자기 대기실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두런두런 나누던 말을 멈췄다. 지안 또한 고개를 돌렸다. 태강 그룹의 수행비서들이었다.

지이잉.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의사와 함께 밖으로 나온 사람은 서정후였다. 그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손에 쥔 채 심각한 얼굴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안과 이야기할 때만 해도 피곤한 표정으로 주의사항을 읊던 의사는 이보다 더 성의 있어 보일 수 없는 자세로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중이었다.

정후는 회의 도중에 급하게 빠져나왔던 건지 재킷은 없고 와이셔츠만 걸친 채였다. 너른 어깨 아래 군살 하나 없는 등허리에는 미세한 주름이 가 있었다.

보고가 끝난 듯 의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정후는 대기실 문 앞에 서 있는 지안을 발견하고는 성큼 다가왔다.

“아버님 상태 설명 들었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은데.”

그는 한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그 또한 소식을 듣고 놀란 듯 다소 굳은 얼굴이었다.

“…네.”

지안은 시선을 떨궜다. 그의 구두 끝이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최대한 신경 써달라고 했어.”

세욱은 정후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항암치료를 하려 했다. 시어른과 함께 사는 지안을 위해 조금이라도 부담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지안 또한 그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정후의 등장에 단번에 의료진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니 그저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고마워요.”

지안은 고개를 숙인 채 속삭였다. 아직 그녀는 아버지와의 작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늦게라도 나타나 준 정후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고, 떠내려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후의 눈동자가 고개를 숙인 지안의 얼굴로, 축 처진 어깨로, 맞잡은 손 위로 내려앉았다.

“지안아.”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지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정후는 빠르게 지안의 행색을 훑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아무렇게나 걸친 외투.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그녀의 시간이 전부 읽혔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정후가 지안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안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가 잡은 것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트렌치코트의 깃이었다. 정신없이 입고 나와 옷매무새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깃을 세워주고 바로 떨어져 나갔다.

“…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요.”

지안은 그제야 코트를 바로 입고 단추를 채웠다. 정후의 눈은 아직도 부스스하게 엉켜있는 지안의 머리끝에 머물러 있었다.

“식사는?”

지안은 정후를 바라보며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먹었어요.”

“뭐 먹었는데?”

허공에서 맞붙은 두 사람의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

지안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금방 가버릴 줄 알았던 정후는 지안 앞에 서서 평소답지 않은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지안이 빤히 바라보자 정후 또한 생각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부사장님,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먼발치에 서 있던 김 실장이 다가왔다. 이제 이곳에 할애할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가서 일 봐요.”

지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사이엔 방향을 잃은 감정들이 두서없이 흩어져있었다. 지안은 대답 없는 정후를 향해 짧게 눈짓을 한 뒤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병원 상황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라고 해놨어. 회장님도 올라오는 중이고.”

지안은 몸을 반쯤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난 오늘 저녁에 공항 가야 해.”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으로 먹먹하게 고여 들었다. 이 또한 그녀가 이해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후는 여느 때처럼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표정으로 지안을 응시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올게.”

“…….”

지안은 대답 없이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매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굳센 의지와 기개, 스스로에게 엄중한 완벽주의, 일말의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어나가는.

지안은 그런 그를 사랑했었다.

“…안 가면 안 되겠죠.”

지안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

“미안, 중요한 출장이라―.”

정후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얼른 가요, 더 늦기 전에.”

지안은 예의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흘끔 바라보며 시선을 비꼈다.

“먼저 들어갈게요.”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가 가버릴 걸 알면서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걸 알면서도 오늘만큼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렸고, 복도를 메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모두가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간 대기실은 어둡고 적막했다. 흰색 벽 귀퉁이에 놓인 TV에서는 병원에 대한 광고와 시설 안내, 유행성 질병에 대한 설명들이 한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정수기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건지 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안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대기실과 중환자실을 막고 있는 얇은 벽, 저 너머엔 열댓 명 남짓한 환자들이 생명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의료용 튜브를 달고, 전기로 돌아가는 생명유지장치에 의지하며 얼굴 위로는 아무 표정도 없지만, 수면 아래로는 목숨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전투가 진행 중인 것이다.

‘…아빠.’

지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스르르 감긴 눈에 접혀있던 기억의 한 귀퉁이가 펼쳐졌다.

‘이제 우리 딸이랑 이렇게 인사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세욱은 현관문 앞에 나와 학교에 가는 지안을 배웅했다. 구두를 신던 지안은 잠시 기분이 멍해졌다. 현관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을 어깨에 메며 세욱을 돌아보았다.

‘결혼하고도 자주 보면 되잖아요.’

그때 지안의 나이는 23살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세욱은 교직을 그만두고 한창 사업에 매진 중이었다.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그게 마음처럼 쉽겠니.’

아무리 바빠도 아침 인사는 빼먹지 않던 아버지였다. 속내를 잘 비치는 편이 아니었던지라 그날따라 서운함을 내색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가만 보니 아버지의 눈가에 주름이 많이 잡혔다. 조금씩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지안은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난 아빠 보러 자주 올 거예요.’

결심하듯 이야기하는 지안을 보며 세욱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운전 조심하고.’

‘네, 오늘 일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우리 딸.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고.’

‘네. 아빠도요.’

‘아빠는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다.’

지안은 세욱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밖으로 나섰다. 별로 감상적인 성격은 아닌지라 결혼을 앞두고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세욱을 보니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현관문에서 아버지의 배웅을 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시큰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시작했던 과거의 어느 평범한 하루.

지안은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오늘도 즐겁게 생활해야 한다.

사랑하는 우리 딸.

한동안 잊고 있던 아버지의 아침 인사였다.

이윽고 면회 시간이 다 되어 마주한 세욱은 고요히 잠이 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빠.”

지안은 가만히 그를 소리 내 불렀다. 두 눈을 감고 있는 세욱은 오늘도 지안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있니, 우리 딸.’ 하고.

한밤중, 중환자실을 향해 달려가는 의사들의 급한 발걸음이 들렸다.

벽 너머로 무거운 기계를 끌어오고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삐―하고 울리는 기계음과 사납게 외치는 말소리.

지안은 분주한 이들의 움직임이 제발 세욱 때문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아빠와의 마지막이었다. 의사는 건조한 톤으로 세욱의 사망에 대해 설명했다. 지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다가 겨우 휴대폰을 켰다.

김 실장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정후 부사장님 금일 오후 8시 30분 항공편으로 베트남 출국하셨습니다. 부사장님 지침에 따라 24시간 동안 병원에서 대기할 인력을 준비 중이고, 내일 오전 8시경에 제가 직접 찾아뵐 예정입니다. 혹여 긴급한 상황 생길 경우 저에게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안은 아무도 오지 않는 복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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