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달의 이면.
침대에 앉아있던 지안은 협탁 위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새벽 1시. 아직도 정후는 퇴근 전이었다.
그는 베트남 공장 설립 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새벽에 들어와 아침에 얼굴만 보고 나간 지 벌써 3일째.
「부사장님 15분 후 본가 도착 예정입니다.」
지안은 휴대폰을 켜 김 실장이 보낸 알림을 확인했다. 그러다 대학원 후배 하나가 보낸 메시지에 시선이 머문다.
“…뭐지?”
창을 클릭하니 그냥 흔한 연예인들의 지라시였다. 가벼운 동작으로 화면을 넘기던 손가락이 어느 한 대목에서 멈췄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회사 재벌 3세 A 씨가 계열사 광고 모델인 B양과 사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소문. A 씨는 국내외를 넘나드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따로 시간을 내 B양을 챙길 정도로 푹 빠져 있다고. 지금까지 자사 광고 모델은 전부 A 씨의 컨펌으로 청순한 듯 볼륨감있는 몸매가 취향이라고 함. 그동안 소속사 빨 못 받은 B양이 이번에 제대로 스폰을 물었다는 평.」
지안은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누가 봐도 서정후를 지칭하는 내용이었다.
보자마자 거짓말, 하고 생각했다. 잠잘 시간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따로 챙긴다니. 일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의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스캔들 기사는 처음이었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지안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기자들 따라붙으면 피곤해져.’
기념일 날 왜 혼자 밥을 먹었냐는 정후의 타박이 생각났다.
포털사이트를 확인하니 정후와 B양이 나란히 검색어 1, 2위였다. 흐릿하게 처리된 정후와 그녀의 사진이 온갖 링크에 걸려있었다.
지안은 여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에 환하고 깨끗한 미소.
무심코 그녀의 사진을 확대하려던 손가락이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왔어요?”
지안은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정후를 바라보았다.
“어.”
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재킷을 벗었다. 깔끔하게 잘린 뒷머리와 곧은 등. 그에게서 바깥바람의 냄새가 났다.
차가워 보이지만 눈이 절로 가는 단정한 생김새. 함께 외출할 때마다 그를 바라보던 여자들의 눈길이 떠올랐다.
정후의 일과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가 누굴 만나고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지안은 알 수 없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단추를 툭툭 풀어 내렸다. 흰 와이셔츠가 너른 등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조도를 낮춘 조명 아래 탄탄한 갈색빛 등 근육이 드러났다.
남편은 운동조차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는….
샤워실 문이 닫혔고, 이내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후는 샤워실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깎아내린 듯한 옆모습에선 여전히 냉기가 흘렀다. 지안은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 기사는 뭐예요?”
정후는 수면 등을 켠 뒤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졌다.
“곧 내려갈 거야.”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정후 씨 그런 기사 나온 건 처음 봤어요.”
지안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정후를 바라보았다. 거짓 기사인 줄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안은 가볍게 웃어넘기고 싶었다. 별거 아닌 일이라며 안심시켜주길 바랐다.
정후에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턱을 굳히며 지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딱 잘라 긋는 선.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찾아본 B양의 얼굴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지안은 두 사람이 나란히 연결된 사진만 봐도 누군가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정후가 B양을 만나러 가는 동선을 세세히 설명해놓은 기사도 있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할 정도로.
“그 여자, 만난 적도 없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질문.
지안은 그저 정후를 통해 직접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특유의 짧고 신랄한 어조로 아니라고 하는 대답을. 그러나 정후는 그런 지안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만난 적은 있어.”
여느 때와 같은 배려 없는 대답. 지안의 동그란 눈동자가 굳었다. 누가 보아도 상처받았음을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정후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사람들 관심 좀 끌어보려는 그 쓰레기 같은 기사를 믿어?”
정후는 그 기사에 대한 제 불쾌감을 그대로 담아 지안에게 물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하루였다. 해외 출장 전, 갑자기 몰린 회의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오늘 몇 개의 부서와 연달아 미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삼성동까지 오찬모임을 다녀와야 했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캔들 기사를 보았다.
“만나서 뭐라도 했을까 봐?”
한껏 예민해진 상태라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내가 그 여자랑 자기라도 했을 것 같나?”
지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선 와중에 지안이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행동과 말투를 보이자 저도 모르게 불필요한 말까지 내뱉었다. 뱉자마자 후회를 했지만, 이미 지안의 귀에 흘러 들어간 뒤였다.
그녀에게 떳떳지 못할 행동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물론 그런 걸 하나하나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게 비효율적인 감정 소모라는 생각이었다.
“적당히 좀 해둬.”
정후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번갈아 눌렀다.
서 회장에게 불려가 시답잖은 소릴 들을 생각을 하니 입이 썼다. 사생활 관련한 처신만큼은 강욱에게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지라시의 출처가 대강 짐작이 되었다. 윤 차관의 작품일 것이다. 속이 좁은 성격만큼 복수의 방법도 치졸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평소 손버릇이 안 좋던 양반이라 시궁창에 처박아줄 자료만 한 트럭이었다.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해.”
정후는 수면 등을 껐다. 얼른 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굳이 이런 삼류기사가 아니어도 베트남 출장 관련해 검토할 보고서가 차고 넘치게 쌓여있었다.
그러나 지안은 아직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채다.
“민지안, 안 잘 거야?”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후는 천장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도통 알 수 없는 아내의 머릿속, 그 안을 헤아려보기에 그는 오늘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정후는 하릴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안고 있는 지안을 흘깃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이불 끄트머리를 사부작거릴 때마다 은은한 체향이 맴돌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지안이 텅 빈 눈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후 씨는 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요.”
“뭐?”
정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계속 정면을 향해 있었다.
“말 그대로예요. 당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요.”
길게 뻗은 속눈썹이 그늘지듯 내려왔다.
그녀가 숨 쉴 때마다 뺨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지안은 부드러운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좋은 향기가 풍겼고, 깊게 파인 네크라인 위로 부푼 가슴이 드러났다.
정후는 그저 지안을 끌어안은 채 자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그가 손을 뻗어 지안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손을 뒤로 물렸다. 정후는 빈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만해. 네가 이러면 하루 종일 신경 쓰이고 거슬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후는 순간 멈칫했다.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안 돼요?”
지금의 상황을 애써 견디고 있는 듯한 흐린 웃음.
“나는 온종일 당신 생각만 할 때도 있는데.”
“…….”
정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안은 자조했다. 한없이 구질구질해지는 기분. 할 수만 있다면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강욱의 말대로, 영희의 말대로 지안만 참으면 모든 게 순조로울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점점 어려워지는 걸까.
“민지안.”
정후는 지안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를 돌려 저를 보게 했다.
“너 지금 지나치게 감정적이야.”
매사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했다.
세상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사람. 신사적이면서도 냉정하게 그녀를 쥐고 흔드는 남자였다.
“나한테는 조심하라고 해놓고서 본인은 그런 기사를 내요?”
지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
“나는 밥도 혼자 못 먹게 만들면서, 병원도 못 가게 만들면서 정후 씨는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 건데요?”
“좀 진정하고 얘기해.”
“이거 놔요.”
침대의 가장자리에 있던 지안은 정후를 밀어내며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정후는 지안의 손목을 꽉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지안은 막무가내로 몸부림쳤다. 순간, 무게중심이 급격히 이동하며 그녀의 전신이 아래로 기울었다.
쿵.
지안은 질끈 눈을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무언가 자신을 확 끌어안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익숙한 품.
정후가 떨어지는 그녀를 안으며 바닥에 대신 몸을 부딪힌 것이다. 지안의 두 눈이 커졌다.
“정후 씨!”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본능적으로 지안의 안위를 살폈다. 그녀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정후가 안도의 한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이윽고, 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고여 들었다.
“…너 요즘 왜 그래?”
정후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응?”
그가 지안을 달래듯 재차 물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지안의 몸이 맞춘 듯 들어찼다.
지안은 가만히 정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안고 있는 굳건한 팔과 흔들림 없는 눈동자.
매사에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남자였다. 절대 넘어지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 견고한 얼굴을 볼 때마다 지안은 마구 그를 뒤흔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진창 속에 빠진 건 저 혼자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내가 바라는 건.”
지안은 손을 들어 정후의 단단한 턱과 입술을 쓸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흐려졌다.
“정후 씨가 절대 줄 수 없는 거예요.”
지안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날 때부터 자기 본위적인 사람이라 사랑을 몰라서, 그래서 돌려주지 못하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르게 흩어지던 호흡이 점점 길게 늘어졌다.
“왜.”
눈썹을 쓱 들어올리는 남자의 얼굴선이 관능적이었다. 맞닿은 몸 아래로 정후의 하체가 점점 단단해져 갔다. 습관처럼 몸속을 맴도는 뭉근한 열기.
지안은 엉덩이를 살짝 비끼며 그에게서 떨어져나왔다. 꿰뚫어버릴 듯한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 지안은 정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오늘 섹스하는 거예요?”
“뭐?”
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이런 일 있을 때마다 그러잖아요. 내가 투정 부릴 때마다.”
지안은 담담하게 말하며 눈을 들어올렸다.
“무슨 소리야, 대체.”
“우는 애 달래는 것처럼… 정후 씨는 나 안고 그렇게 가버리잖아요. 이 정도면 해주면 됐지, 하는 식으로요.”
정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지안이 바라는 걸 주었다고 생각했다. 더도 덜고 말고 딱 그녀가 원하는 만큼만.
더 욕심내면 지안이 힘들어할까 봐 다른 방에 가서 잔 적도 부지기수였다.
“…좋았던 거 아니었어?”
새카만 눈이 그녀를 향했다.
무릎을 안은 채 앉아있던 지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감정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눈동자가 정후를 향했다.
“좋았어요. 단 한 번도 싫었던 적 없었어요.”
“그런데.”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만큼은 정후 씨가 나만 봐주니까… 그래서 좋았어요.”
일말의 주저 없는 고백이었다. 정후는 침묵했다. 흔들리고 있는 지안의 눈동자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후 씨에게 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집에 놓고 나온 인형같이… 그냥 옆에만 있으면 되는 그런 존재예요?”
지안의 말에 정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갑자기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지안의 감정을 그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당신 바쁜 사람인 거 알아요. 일 좋아하고 책임감 강하다는 것도요. 그렇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당신 옆에 있는 내 마음 좀 헤아려주면 안 돼요? 별거 아닌 일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나는 그냥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지안은 정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간 응답받지 못했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변명조차 안 하는 성격도 정말 싫어요.”
지안의 얼굴 위엔 오랫동안 아픔을 참아왔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신 성격 알면서도 언젠가는 나를 봐주겠지, 내 차례가 오겠지, 하고 기대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고 비참해서.”
“지안아.”
정후가 손을 뻗어 지안의 팔을 잡았다. 지안은 팔을 뿌리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놔요.”
정후의 손이 허공에서 홀로 맴돌았다.
“…힘들어요.”
지안은 먹먹한 눈으로 정후를 바라보았다.
“정후 씨만 기다리며 사는 거.”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며 힘없이 속삭였다.
“…더는 못 버틴다고요.”
정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던 하루였다. 지안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정후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일단은 지안을 진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대화하기에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나중에 얘기해. 일단 자고 나서―.”
그의 말을 들은 지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나중에.’
지안은 입술을 꾹 깨물다 정후를 보며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다시… 언제요?”
“…….”
“정후 씨 급한 일정 다 처리하고 시간 날 때요?”
정후는 할 말을 잊고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사방에 가시가 돋친 사람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전부 튕겨 나올 것 같았다.
“민지안.”
그간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정후는 생각지 못한 거대한 빙하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했으나, 지안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 차분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간극에 정후의 신경이 바싹 섰다.
“…이제 그만해요, 우리.”
지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뭐?”
“말 그대로예요. 그만하자고요.”
“정확하게 말해. 뭘 그만하자는 건지.”
정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알잖아요, 당신은. 내가 뭘 말하는지.”
지안의 새카만 눈동자가 굳어있는 정후를 그대로 비춰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직접적인 단어는 꺼내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말은 그만큼 서로에게 낯설었다.
“…겨우… 이깟 일로?”
정후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애들 장난 같은 기사였다.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하등의 쓸모없는 활자 낭비. 정후는 그런 기사가 지안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이혼이라니, 진심이야?”
정후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안은 미동조차 없었다. 고개를 돌린 채 침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정후는 지안이 이러는 게 비단 그 기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너….”
정후는 눈을 크게 뜨며 지안을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던 거야?”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얇은 입술은 꼭 잠긴 채였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을 고르던 정후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안아.”
“…….”
“나 혼자 좋자고 일하는 거 아니야. 그 모든 이유엔 너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모르겠어?”
“…….”
“처음부터 다 이해한다면서 시작한 결혼 아니었나? 그땐 괜찮았던 게 왜 지금은 안 되는 건데?”
정후의 말에 지안이 갑자기 울컥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얘기 뭘로 들은 거예요?”
“…….”
“당신이랑 언제까지 똑같은 얘기 매번 반복해야 하는 건데요.”
지쳐 보이는 눈동자엔 어느덧 눈물이 고여있었다.
지안은 정후의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후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낯빛을 굳혔다.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으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 이제 막 정상을 코앞에 둔 지점, 그 어딘가에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지안의 이면은 점점 바스러져 가고 있었지만, 정후는 아직 그걸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 * *
커다란 손바닥이 슬립 위로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볍게 주무르다 이내 정점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트는 움직임.
지안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어둑한 새벽녘, 그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단정히 포개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건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손끝 하나였다.
속옷을 끌어 내리는 감촉도,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온도도, 갈라진 둔덕을 쓸어올리는 손길도 모두 익숙한 것이어서 그녀의 감각은 자연스럽게 깨어났다.
“으음.”
정후가 뒤에서 지안을 끌어안은 채였다.
무심한 남자였다. 그러나 마치 본능인 듯 그는 여자의 몸을 잘 알았다.
지안의 눈썹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내뱉는 신음이 언제 달라지는지, 손끝이나 발끝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을 살피며 능숙하게 허리를 놀렸다.
섹스할 때의 서정후는 제 모든 기관으로 지안을 감각했고, 그녀가 원하는 걸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쏟아부을 줄 아는 남자였다.
단단한 손가락이 겹쳐진 살갗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이미 내부는 살짝 젖어있던 터였다.
“흣.”
얇은 피부 사이로 부드럽게 부푼 정점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음핵을 자극하며 중지로 질구를 둥글게 문질렀다.
지안의 몸이 서서히 열려갔다. 여유로우면서도 섬세한 손길은 그녀가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전체로 음부를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깊게 찔러넣다가도 이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흐읏.”
지안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꼭 감은 눈을 움직이자 정후가 숨 막힐 듯 끌어안으며 하체를 바싹 붙여왔다.
“…민지안.”
정후는 낮게 읊조렸다. 묵직한 남자의 체향이 그녀를 뒤덮었다. 뜨거운 혀가 그녀의 귓바퀴를 덧그리다 말랑한 귓불을 그대로 삼켰다.
“하아.”
도톰한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샜다. 지안의 손이 무언가를 감지하듯 제 아랫배를 더듬었다. 정후가 그대로 지안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깍지를 낀다. 나란하게 겹쳐진 두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네가 만져봐.”
갈퀴 같은 손끝이 축축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뭉툭한 무언가가 툭 불거진 음핵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지안은 허벅지를 움찔하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정후는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싫어―.”
지안이 작게 도리질 쳤다. 그러나 정후가 귓가에 입을 바싹대며 뭐라 속삭일 때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흠뻑 젖어갔다.
“으응….”
지안은 몸을 들썩였다. 새하얀 엉덩이가 꿈틀했고 그사이에 자리한 정후의 페니스가 단단해지면서 용적을 넓혀갔다. 정후는 두툼하게 솟은 귀두로 그녀의 음부 위를 스치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아.”
지안이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정후는 한쪽 팔로 지안의 허리를 감으며 각도를 조절했다.
두 성기가 비벼지며 마찰할 때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샜다. 지안의 아래는 이미 한껏 젖어있어 조금만 스쳐도 눈앞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녀의 신음이 참을 수 없이 짙어질 때쯤 정후가 페니스를 강하게 박아 넣었다. 뒤에서 삽입하는 체위였다.
“하읏!”
눅진하게 풀어진 아래가 단번에 그를 받아들였다. 정후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지안의 내벽 전체가 그를 바싹바싹 조여물었다. 지안의 달뜬 숨소리가 적막한 침실 안으로 나른하게 퍼져갔다.
혼곤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정사는 그들 사이에서 빈번한 것이었다. 주로 퇴근이 늦은 정후가 지안을 안는 방식이었다. 가끔은 이른 아침, 먼저 깨어난 지안이 그의 위에 올라타 있기도 했다.
지안은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정후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지점을 떠올렸다.
“얼굴 보여줘.”
교접부에서 나온 물로 허벅지 사이가 흥건했다. 지안의 몸이 정면으로 돌려졌다. 지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밀어버리고 뺨을 한 대 올려붙여야 했지만.
“으응…, 흐읏!”
지안은 눈을 떴다. 남자의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작렬했다. 그녀를 욕망하는 눈동자였다.
삽입할 때마다 그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턱, 탄탄하게 뻗은 목에는 핏대가 바짝 서 있었다. 흉포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지안의 속살을 살라 먹듯 거센 힘으로 드나들었다.
“하아…읏, 흐윽!”
지안이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비틀었다. 정후가 그 턱 끝을 그대로 붙잡으며 입술을 겹쳤다.
혀를 얽으며 페니스를 돌리듯 깊게 쑤셔 넣자 맞물린 부분이 흠뻑 젖어갔다.
구겨질 듯 품에 안긴 몸. 남자의 페니스가 거센 몽둥이로 내리치듯 그녀의 내벽을 쉴 새 없이 쿵쿵 찧어댔다.
“아아….”
이지러지는 얇은 눈썹, 붉게 달아오른 두 뺨과 벙긋벙긋 벌어지는 작은 입술.
정후는 지안이 느끼는 지점만을 노려 말없이 집요하게 박아 넣었다. 어둑한 눈동자가 지안의 얼굴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후는 지금의 섹스로 지난밤, 어긋난 감정을 해갈시키길 원하는 것이다.
쾌감에 젖은 지안의 얼굴을 보며 그는 어떤 화해의 제스처를 찾는 듯했다.
“흐읏, 흣!”
한껏 예민해진 스팟에 그의 페니스가 연속적으로 박혀 들었다. 마치 터치다운을 하듯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진한 만족감에 지안의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녀가 혀를 내어 입술을 적시자 남자는 곧바로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각기 다른 온도의 숨결이 섞여들었다. 달뜬 숨소리에 지안의 흉곽이 가파르게 부풀어갔다.
지안은 젖은 속눈썹을 천천히 밀어올렸다.
그녀의 눈앞은 온통 서정후였다.
남자의 새카만 눈동자 속에 짙은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 지안을 향해 흘러내렸다.
제 허리를 감는 단단한 팔과 까슬한 음모가 맞닿을 때의 감촉이 좋았다.
남자의 무게는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살짝 버거웠다. 짓누르는 듯한 삽입감은 관계가 끝난 뒤에도 지안의 몸 어딘가에 뭉근하게 남는 느낌이었다.
지안의 의식이 닿지 않는 모든 기슭으로 그가 스며들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마치 서정후 그만이 다른 성질의 입자인 듯, 그녀의 심장 속으로 녹아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형체도 없이 한데 뒤섞여버린 뒤였다.
그랬기에 조금 더, 안아주었으면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이란 존재가 걸러지지가 않았다.
그러니 좀 더 꽉 안아주었으면.
과묵한 남자의 단단하고 너른 품에 갇혀 있으면 이 남자도 피가 돌고 심장이 뛰는 평범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고, 언젠가 옆에 있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을 품게 되니까.
그러나.
행위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시작과는 별개로 관계의 끝은 언제나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정후는 지안의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허리를 쳐댔다.
“아흑!”
높은 교성이 일었다. 정후의 전신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지안의 다리 사이로 질감이 다른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고요한 절정이었다.
진한 탈력감에 지안의 몸이 시트 위로 푹 꺼졌다. 그러나 한없이 자극된 감각에 그 어느 때보다 의식은 또렷했다.
정후가 서늘한 눈으로 지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엉킨 시선이 협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 불빛으로 인해 어긋났다.
“중요한 전화라.”
정후의 몸이 지안에게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의 팔을 쥐고 있던 지안의 손이 힘없이 떨궈졌다.
“잠깐 있어봐.”
정후는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낮은 목소리로 영어를 읊조리며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안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허옇게 메말라 붙어가고 있었다.
지안에겐 대화의 시작이었던 섹스가 그에게는 모든 것의 종결이었다.
그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때까지 정후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지안은 2층 복도 끝에 있는 나무문을 열었다. 북서향에 위치해 늘 서늘한 기운이 도는 곳이었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여느 때와 같은 서재를 눈 안에 담았다.
햇빛에 잘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 너머로 오후의 햇볕이 방 안을 들이비추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월넛으로 만들어진 책장과 수백 권의 책이었다.
“…….”
지안은 중후하고 단단한 무늬의 책장을 만지며 그 앞을 거닐었다. 이 집의 서재와 그 안에 있는 정후는 특별했다.
오래된 책들이 많았다. 그의 증조부 때부터 서재로 쓰던 곳이었다.
정후가 어렸을 때부터 즐겨 읽던 문고판 책들뿐만 아니라 대학교 때 보던 전공 서적, 현재 업무에 관계된 책들, 쾨쾨한 냄새가 나는 오래된 장서까지 방대한 양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영희가 그를 서강욱 회장의 눈에 들게 하려고 얼마나 수선을 피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 초 어느 날, 집안 어딘가로 사라진 정후를 찾아 지안은 서재의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자 정후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며 들어와, 하고 말했다.
맨발에 가벼운 셔츠차림이었다. 앉아있던 안락의자를 내어주며 그는 책을 들고 긴 테이블로 이동했다.
‘구경해도 돼요?’
지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후는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안은 수백여 권의 장서 사이를 누비며 지금껏 서정후라는 사람을 만들어온 오랜 시간의 결을 보았다.
겉보기에는 빈틈없이 관리되고 있는 책장이었지만, 빽빽하게 꽂힌 책 사이에서 어린 시절 봤을 법한 그림책이나 대학교 때 쓰던 공통교양서적을 발견하게 되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지안은 정후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글자를 따라 움직이는 먹색 눈동자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후 씨는 여기 있을 때 편해 보여요.’
나뭇결이 살아있는 커다란 책장과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남자.
‘처음부터 편한 공간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어.’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정후가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느낌.
지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이제 막 여름을 알리는 듯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처마 끝에 매달려있는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바람과 소리로 채워진 시간 속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편안하고 좋았다. 얼마든지 이 상태로 있을 수 있을 만큼 서로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 후로 지안은 서재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다. 퇴근하고 들어온 정후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별말 없이 회사 업무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안은 긴 테이블 위에 작은 화분을 가져다 놓거나 사다 놓은 책을 꽂으며 도서의 배치를 바꾸기도 했다. 정후는 한번 쓱 쳐다보기만 할 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건 마치 아이가 어지르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어른 같은 눈이었다.
‘하고 싶은 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
그는 한 번도 지안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지안이 원하는 것은 모두 하게 해주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정후가 그어놓은 일정한 선을 넘어갈 수 없었다.
지안은 정후를 기다렸던 무수한 시간을 생각했다. 겉으론 쿨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그가 와주길, 곁에 있어 주길, 일보다 제 손을 잡아주었으면 했다.
홀로 보냈던 몇 번의 결혼기념일, 혼자 오갔던 병원, 혼자 떠난 여행, 기다리다 차갑게 식어버린 식사와 침대 옆 빈자리.
서정후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아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의 가시거리 안에 있는 가구나 장식품 혹은 소품처럼 그 자리에 놓여있을 뿐 어떤 의미로나마 그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는 될 수 없었다.
지안은 연애하는 정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 남자가 사랑에 빠진 모습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얼음 같은 심장의 소유자가 누군가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일이 생길 수 있을지.
지안은 창고에서 꺼내온 박스를 서재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가 중간중간에 놓인 자신의 책들과 장식품들을 박스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지난밤의 말다툼과 습관처럼 맺은 관계.
그러나 정후는 변함이 없었다. 지안의 토로를 그저 호르몬의 변화나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한 건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새벽 귀가도, 필요한 말만 나누는 짧은 대화도, 차가운 표정까지 여느 때와 같았다.
지안은 이제 기다림만으로 가득한 이 공간이 버거웠다.
한계점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정원에선 봄을 맞이해 인부들이 새로운 꽃나무와 묘목들을 심는 중이었다. 영희는 질린다는 이유로 한 계절 이상 같은 꽃을 두지 않았다.
제 임무를 다한 수선화가 뿌리째 뽑혀 돌바닥 위에 내쳐져 있었다. 채 시들지도 않은 꽃대와 꽃잎이 꼿꼿해 보였지만, 양분을 빨아들일 수 없는 생명은 곧 말라비틀어질 것이었다.
다시 화려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인공정원을 바라보며 지안은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쓰지 않는 화장품과 향수들을 다시 빈 박스에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안의 물건들이 하나둘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