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눈사람.
“오랜만에 오셨네요.”
H 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김경미 원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반갑게 맞았다. 마지막 진료일을 체크하니 작년 봄이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원장님도 잘 지내셨죠?”
김경미 원장은 생식 내분비학을 세부 전공한 난임 분야의 유명한 전문의였다. 민지안은 지난 3년간 함께 해온 VIP 환자였다.
‘선생님이 실력 있는 분이라고 들어서 찾아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또렷했던 첫인상.
새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였다. 다소 새초롬한 인상이었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빈틈없어 보이는 깔끔한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다.
8번째 시험관 시술이 실패로 끝난 뒤 그녀는 잠시 쉴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다른 것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지안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그녀는 잠시 생각을 떠올리는 듯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아요. 최근엔 바쁜 일이 많아서 아기에 관한 생각도 전혀 못 했고요.”
잠을 충분히 못 자는지 눈 밑이 푹 꺼져 있었다. 어딘가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지안 씨 마음 편한 게 첫 번째니까 괜히 시간에 쫓길 필요 없어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김 원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2세에 대한 오랜 기다림은 종종 마음의 병으로 이어지곤 했다. 어떤 이에겐 쉽고, 자연스러운 임신이 누군가에겐 아무리 간절히 염원해도 절대 이뤄지지 않는 것이었다.
“네. 그래야죠.”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힘든 내색 없이 성실히 따라오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타입일수록 속으로 곪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김 원장은 우려하는 시선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난임 시술은 여자 쪽에서 감내해야 할 고통이 상당했다. 직접 배에 주사를 놓기도 하고, 주기에 맞춰 약도 복용해야 하며 그 약엔 여러 부작용이 수반되었다.
“그럼 자리 옮겨서 화면으로 간단하게 볼까요?”
김 원장은 지안을 향해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지안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초록색 천이 덮인 침대로 이동했다. 납작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천장을 곧게 바라보았다.
김 원장은 초음파 기구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모니터를 확인했다. 몇 분간의 짧은 검진을 끝낸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자궁이랑 왼쪽 나팔관 상태, 깨끗하고 좋아요. 오른쪽에 제거한 부분도 별 이상 없고요.”
“네.”
“당분간 시술 안 할 생각이라고 하셨죠?”
지안이 잠시 김 원장을 바라보더니 네, 한동안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남편분과 교감도 많이 하시면서 자연임신도 포기하지 말고 시도해보세요. 지안 씨가 임신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도 아니고, 한쪽 난관만 있어도 자연적으로 임신해서 출산 성공하는 산모들도 많아요.”
지안은 임신 초기에 유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의사의 권유에 따라 오른쪽 나팔관을 제거했다. 앞으로의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수술이었다.
“…남편이랑 교감이요.”
지안의 얼굴이 흐려졌다. 김 원장은 한두 번 정도 마주쳤던 그녀의 남편을 떠올렸다.
커다란 키에 한눈에 들어오는 외모였다. 굉장히 정중했지만 차가웠던 인상.
이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의 3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 원장에겐 아내를 병원에 혼자 오게 하는 비정한 남편일 뿐이었다. 언제나 지안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여 안쓰러웠다.
‘남편분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그래서인지 평소 환자에겐 절대 묻지 않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지안을 오래 보고 지내니 친정 동생 같은 느낌도 있었다. 지안 또한 별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선선히 답했다.
‘네. 바쁘기도 하고 일하는 걸 좋아하기도 해요.’
일이 무슨 남자의 취미라도 되는 양,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남자는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나 남편을 대동하고 진료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여타의 부부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언젠가 지안이 혼자 응급실에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김 원장은 혀를 찼다. 주사 부작용으로 복수가 심하게 차 혼자 택시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남편이랑 정략결혼 했다던데요? 쇼윈도 부분가 봐요.’
간호사들은 모른 척 지안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부부의 진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에 대한 지안의 열망은 여느 예비 산모들처럼 간절했다. 눈물이 쏙 빠지는 아픔도 찍소리 없이 참아내던 그녀였다. 그러나 배아가 배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갈 때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 이제 그만 할까 봐요, 선생님.’
지안은 소독을 받으며 힘없이 속삭였다. 김 원장은 지안의 손을 잡았다.
‘지안 씨 잘못 아니니까 절대 자책하지 말아요.’
난임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때론 가임 확률 1%에 불과한 부부가 기적같이 임신하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모든 과학적인 논리와 통계를 넘어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언젠가 지안 씨에게 아기천사가 꼭 올 거라고 믿어요.”
김 원장은 평소보다 감상적인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 검진 때 뵙겠습니다.”
지안은 고개를 숙이며 진료실 문을 닫았다.
당분간은 병원에 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기자들 쪽에서 부부의 사생활에 대해 문의가 오고 있으니 한동안 병원 방문을 자제해달라는 김 실장의 연락이 있었다.
산부인과에 간다는 말에 바쁘다고 대답했던 정후와 영희의 비상식적인 요구.
‘네 자궁이 약해서 애가 계속 못 버티잖니. 언제까지 그냥 손만 빨고 있을 거야?’
지안은 언제와도 변하지 않는 병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진료실 앞 대기 좌석엔 남편, 혹은 친정엄마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지안은 홀로 손을 맞잡은 채 그들과 같은 꿈을 꿨다.
내 아이가 나에게로 오는 꿈.
정후는 의자에 앉아 함께 기다려준 적이 없었다. 지안이 운전이 힘들어 택시 타고 다니는 걸 알자 따로 수행 기사를 고용해준 게 전부였다.
그는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아이를 그렇게까지 해서 꼭 가져야겠어?’
정후는 아이에 대한 필요성은 느꼈지만, 온갖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아이를 가지려는 지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2세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그만 포기하시라며 양가 어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안은 정후와의 아이가 간절했다.
아이가 생기면 혹시 조금은 달라질까, 생각했었다.
아이가 있으면 부부 관계가 훨씬 끈끈해지고, 정말 가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처음 임신했을 때, 제 배를 만져보던 정후의 표정이 아직도 지안의 뇌리에 콱 박혀있었다.
‘여기에 너랑 내 아이가 있다고?’
단단하고 서늘한 얼굴 위로 떠오른,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내가 이 남자를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지안은 그런 기대감으로 설렜다. 그러나 이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상상이었다.
제 배 속에 생명의 고동이 느껴졌던 일이 마치 오랜 꿈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 몇 년간 계속됐던 지안의 노력.
‘내가 이렇게 일하는 이유엔 너도 포함되어 있어.’
언젠가 정후가 술에 잔뜩 취해 그녀에게 했던 말. 그가 그렇게까지 취한 건 드문 일이었다.
분 단위까지 통제되는 정후의 스케줄. 서재에 틀어박혀 골몰하는 커다란 등을 보고 있으면 쉽게 투정 부릴 수가 없었다.
배가 많이 아픈 날은 침대에서 따뜻한 물주머니를 안은 채 혼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나 보면 정후가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평균 수면시간이 4시간도 채 안 되는 남자는 무섭도록 깊은 잠을 잤다.
지안은 몰래 일어나 그의 단단한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옆에 누워 무방비한 상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이 결혼을 버텨왔다.
“뺘뺘.”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지안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작은 몸에 걸친 오버롤즈가 귀여웠다.
“안녕.”
지안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를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옹알옹알 소리를 내며 지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넘어질 것 같아 지안은 아이의 팔꿈치를 가볍게 받쳤다.
“음마.”
아이는 앵두 같은 입술로 엄마를 연신 불러댔다. 뒤쫓아 온 아이의 아버지가 난감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하며 아이를 들어 안았다.
“아기가 참 귀엽네요.”
한동안 아빠 품에 안겨 까르르 웃던 아이는 저 멀리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다시 음마, 음마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뽀뽀를 하고 얼굴을 마주 비비는 모녀의 이목구비가 똑같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남편의 웃음은 아내의 미소와 닮아있었다.
‘…….’
지안은 복도 한가운데 서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나 쉽고 가까운 행복이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도 멀어 손끝조차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냥 제가 알아서 갈게요.”
지안의 말에 수행 기사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집에 가봤자 어차피 정후는 늦을 것이고, 영희가 병원에서 뭐라고 했느냐며 이것저것 캐물어 볼 게 뻔했다.
지난번에 꺼냈던 대리모 얘기가 어김없이 또 등장할 것이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지안은 조금 걷기로 했다.
늦은 봄날의 오후.
병원을 빙 둘러싼 돌담길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길가에 죽 늘어선 벚꽃은 이제 막 절정이 지나갔고, 초록색 이파리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만개한 벚꽃 나무 앞에서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연인들이 있었다.
한 남자는 아이가 꽃을 더 자세 볼 수 있도록 목말을 태우며 길을 걷고 있었다. 아까 진료실 앞에서 본 다정한 가족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람이 불었고, 얇은 꽃잎이 바람에 실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길가 한구석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모인 작은 무덤이 있었다.
지안의 가만한 시선이 봄날의 잔해를 훑었다. 산부인과를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그런 것들이 눈에 밟혔다.
지안은 다리가 아파질 즈음 저 멀리 오고 있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택시는 한적한 도로를 느긋하게 가로질렀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따스한 바람이 가득 밀려 들어왔고, 중년의 택시 기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느덧 택시는 교차로에 멈춰 섰다. 기사는 창문에 팔을 건 채 한가로이 말을 던졌다.
“아, 오늘 날씨 참 좋네.”
“…….”
“이럴 땐 일 다 때려치우고 어디 놀러나 가야 하는데. 안 그래요?”
그러나 뒷좌석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안을 흘끔 돌아본 기사의 표정이 굳는다.
“아이고, 이 좋은 날 울면 어떡하나.”
그는 혀를 쯧쯧 차며 옆에 놓인 휴지를 지안을 향해 건넸다. 지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없이 휴지를 받아들었다.
아까 병원에서 본 가족들과 행복한 연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계절은 아름다웠고, 결코 가질 수 없는 행복은 괜스레 더 서럽게만 느껴졌다.
“…지금은 힘들어도 다 지나가요. 시간이 그저 약이지.”
지안의 사정을 모르면서도 다 안다는 듯, 기사는 말을 툭 던졌다. 낯선 이의 위로가 서러운 마음을 더 건드린 순간, 한번 쏟아진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말없이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이윽고 잔잔한 선율의 음악이 택시 안에 울려 퍼졌다.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었고, 지안을 실은 택시는 봄날의 도로를 조용히 달려나갔다.
* * *
“부사장님, 들어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우레와 같은 인사 소리를 뒤로하고, 서정후는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닫이문을 닫자 고기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툇마루에 앉아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신었다. 마침 직접 서빙 중인 가게 여사장이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일찍 나오시네요.”
“예,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그녀의 손엔 커다란 은색 쟁반이 들려있었다. 마블링이 선명한 소고기와 싱싱한 쌈 채소들, 인심 좋게 담은 밑반찬들이었다. 방문 앞에는 초록색 소주병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저희 직원들 잘 부탁드립니다.”
정후가 정중히 이야기하자 여사장은 벌써 몇 년째 오시는 건데 어련히 알아서 하죠, 하며 사람좋게 웃었다.
그가 구두를 신고 일어서자 김 실장이 다가와 쇼핑백을 건넸다. 새로 갈아입을 셔츠가 들어있었다.
“저녁은 했습니까.”
그가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네, 부사장님.”
정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들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서정후는 태강 그룹 부사장으로 참석하는 자리엔 언제나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무심한 듯 보여도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살피는 방식 또한 그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신경을 안 쓰는 듯 보여도 기본적인 처우와 보상은 누구보다 확실했다.
물론 업무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직접 불러다 혼낼 정도로 가차 없는 편이었다.
지금 저 미닫이문 너머에서도 몇 달 내내 들들 볶였던 직원들이 내일을 잊고 부어라 마셔라 중이었다. 동남아 시장 진출 건으로 인해 정후도 그들도 한동안 저녁을 포기하고 살았다.
“장소가 어디라고 했죠?”
셔츠를 새로 갈아입고 나온 정후가 재킷을 꿰입으며 물었다.
“P 호텔 라운지 룸입니다.”
P 호텔이라는 단어에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나 단순히 장소에 대한 호불호로 빠져서는 안 될 자리였다.
“출발하죠.”
정후는 시계를 확인하며 음식점 문 앞에 대기 중인 세단에 올라탔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귀한 몸이 납셨네.”
“서정후 이거 부사장 되더니 얼굴 보기 힘들어?”
호텔 라운지 바의 가장 안쪽에 있는 룸은 코발트 블루컬러 풍의 인테리어와 간접조명으로 서늘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열댓 명의 중년 남자들이 기역자 모양의 소파에 앉아 정후를 향해 손짓했다.
윤성호 전 경제부 차관을 비롯해 현 정권에 입김 좀 쓴다는 재계 쪽 인사들의 친목 모임이었다. 형님, 아우 하며 느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아무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라인은 아니었다. 정후 또한 서강욱 회장의 소개로 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정후는 현장에 나가 실무진들과 부대끼며 성과를 내는 것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 책상을 지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이런 식의 인맥 관리는 필수였다.
정후가 자리에 앉자 농지거리가 멎고 시선이 쏠렸다.
“회의가 있어서 늦었습니다. 한 잔 주십시오.”
정후는 반듯하게 앉아 옆에 앉은 금감원 출신의 D 기업 임원에게 잔을 내밀었다. 정중하고 간결했지만, 완전히 숙이고 들어가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이대로 치면 가장 어린 축에 속했지만 오만한 빛이 도는 외모엔 쉬이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태강 그룹이 잘 나가고 있는 데에는 서정후의 공헌이 컸다. 그는 그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사장 자리를 꿰찬, 흔해 빠진 재벌 3세는 아니었다.
“와이프가 서 부사장 얘길 하더라고. 실물이 어떠냐면서.”
윤성호 전 차관이 능글맞게 웃으며 정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후는 대답 없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사사로운 가십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잔을 돌려가며 단 한 사람의 잔도 빼지 않고 술을 받아 마셨다.
최근 며칠째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개인 시간을 쪼개서 온 만큼 얻어가는 게 있어야 했기에, 모임의 목적에 충실해지려 했다.
“서정후는 안 빼는 게 마음에 들어. 술도 세고.”
윤 차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술잔을 비우는 정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최근 상정된 법안, 골프, 모 의원에 대한 뒷말, 최근 다녀온 여행지 등등 온갖 화제들이 두서없이 오갔다. 정후 또한 회사와 업계에 대해 몇 가지 준비했던 정보를 흘리며 어르신들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때였다.
라운지 문이 열리고 묘한 분위기의 여자들이 들어왔다. 20살 남짓한 앳된 얼굴들과 TV에도 얼굴을 비치는 여자들이 섞여 있었다. 지망생과 연예인.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함께 하는 P 호텔 사장의 작품인 듯싶었다.
그녀들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자리의 사이사이 빈 곳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았다. 순간 공기의 흐름이 탁하게 변했다.
“허허, 이건 또 뭔가.”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남자들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고위 인사들의 점잖은 친목 모임이 너저분한 룸파티로 변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이거 누가 보낸 선물인지는 모르겠는데 타이밍 죽이네.”
윤 차관은 큰 소리로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여자는 미소를 흘리며 수박에 포크를 꽂아 그를 향해 내밀었다. 윤 차관은 여자의 스커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능글맞게 속삭였다.
“야, 너는 화면발이 왜 이렇게 안 받냐.”
공중으로 흩어지는 높은 웃음소리와 안줏거리 같은 외설적인 농담들.
정후는 말없이 술을 따르며 자리를 지켰다.
“제가 한잔 드릴까요?”
어느새 옆에 앉은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열사 광고에서 봤던 여자 연예인이었다. 깨끗한 이미지가 소비자들에게 어필한다고 판단해 컨펌한 모델이었다.
과하게 쏟아부은 향수. 어떻게든 한몫 잡아보려는 듯 반짝거리는 눈빛.
“부사장님 어떤 분인지 얘기만 많이 들었는데. 직접 뵈니 더 멋있으세요.”
정후는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질리도록 익숙한 풍경.
“손 치워요.”
여자는 주춤하며 정후의 팔 위에 얹으려던 손을 뒤로 뺐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의 단추를 채우며 윤 차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사에 다시 가볼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윤 차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후를 바라보았다.
“허허, 이 사람 좀 보게. 좀 앉지 그래. 분위기 깨지 말고.”
“죄송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해. 나 목 아파.”
윤 차관은 혀를 차며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두툼한 손아귀가 축축했다.
“다음번엔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정후는 최대한 예의를 잃지 않으려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윤 차관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모임 장소가 P 호텔이라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친목을 다지던 모임이었다. 그런데 저번 만남부터 낌새가 좋지 않더니 이렇게 대책 없이 판을 벌일 줄은 몰랐다. 애초에 사업상 문제 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예쁘게 생겨서 좀 만지고 빨아준다는 건데 무슨 문제 생기겠나? 얘도 내가 좋다잖아. 남자가 이런 거에 까탈스럽게 굴어서 어디 큰일 하겠어? 서 회장이 자식농사까지는 잘 지었는데 말이야.”
윤 차관의 말에 한 바퀴 웃음이 돌았다. 후처의 자식인 서정후를 은연중에 비꼬는 말이었다. 그가 여자 문제에 결벽을 떤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회사가 연일 승승장구하자 정후를 씹는 무리가 생겨났고, 출생의 비밀은 완벽해 보이는 그의 약점이 되었다.
정후가 걸음을 멈추고 윤 차관을 돌아보았다.
“방금 그 말, 취소하시죠.”
“뭐?”
여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윤 차관이 얼굴을 붉혔다. 정후는 윤 차관을 향해 걸어왔다. 매끈한 얼굴이 일순 그 빛을 달리했다. 기업가의 가면이 거두어지고 눈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되겠습니까.”
정후는 룸 한가운데 서서 윤 차관을 내려다보았다. 싸늘하게 굳은 그에게서 여과되지 않은 분노가 쏟아져나왔다. 회사를 위해서 적당히 손을 더럽히는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모멸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계급장을 떼고 드러낸 날카로운 발톱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허허, 이보게. 농담이야.”
순간의 살의에 짓눌린 윤 차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후의 손을 잡고 툭툭 치며 표정 좀 풀지, 하는 말을 내뱉었다.
“술이 과하셨습니다.”
순간 붉으락푸르락하며 쏘아보는 윤 차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갔다.
정후는 타이를 잡아끌며 말없이 차에 올랐다. 눈치를 살피는 김 실장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는 집으로 가는 내내 어두운 침묵 속에 잠겨있었다.
* * *
산 아래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곳. 전구가 깨져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다 태우고 남은 연탄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었다.
“엄마, 나가서 눈사람 만들고 싶어요.”
하늘만 겨우 보이는 조그만 창을 바라보며 아이가 속삭였다. 다 뜯어진 벽지와 장판의 경계엔 시커먼 곰팡이가 점점이 퍼져있었다.
“안 돼.”
여자는 엄하게 일렀다. 허술한 창과 얇은 문짝 너머로 차디찬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무리 연탄을 때워도 단칸방엔 언제나 썰렁한 냉기가 돌았다.
여자는 서랍에서 아이의 내복이며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을 꺼내 가방에 집어넣었다. 내일 아침 아이를 시골에 사는 먼 친척에게 보낼 예정이었다.
늘 술을 끼고 사는 이모의 행태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이곳에 6살짜리를 덜렁 두는 것보단 낫겠지 싶었다.
“저 오늘 엄마가 읽으라는 신문이랑 책도 다 읽었단 말이에요. 나가서 눈 만지면서 놀고 싶어요.”
늘 조용한 아이가 오늘따라 울먹거렸다. 아이의 손등은 겨울만 되면 동상에 걸려 벌겋게 익었다. 여자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옆에 있는 베개를 쳐들었다.
“조용히 안 해?”
베개를 보자마자 아이는 반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집주인은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했다. 여자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아이가 울 때마다 베개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후 아이는 베개만 보면 울음을 뚝 멈췄다.
“잘못했어요.”
여자는 말없이 짐을 계속 쌌다. 아이가 저를 미워할지언정 한겨울에 쫓겨나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아이는 문 옆에 쌓인 누렇게 변색된 신문을 가져와 팔을 괴고 엎드린 채 조용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또박또박 글자를 읽고 있는 아이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오늘 내내 일터에서 마주한 그녀의 상사와 꼭 빼닮은 이목구비다.
‘저 임신 했어요.’
‘……수술해.’
오랜 고민 끝에 꺼낸 말.
남자는 여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차갑고 냉정한 남자였다. 그에겐 아내가 있었고, 자신은 그저 의미 없는 심심풀이였다.
처음엔 임신인 줄도 몰랐다. 여자는 고작 21살이었다. 병원에 갔을 땐 이미 5개월이 넘어있었다. 매일매일 아이를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부인과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배가 부를까 봐 무서워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7개월이 되도록 배가 나오지 않아 아무도 그녀의 임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는 그때부터 배 속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아이였다. 여자는 아이를 낳자마자 1달도 안 되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여자가 급하게 수소문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도움과 방치 속에서 혼자 커왔다. 응급실을 밥 먹듯 드나들고 폐렴과 장염에 걸려 몇 번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았다.
아이도 엄마도 어렸다.
어느 날, 남자의 부인이 사고로 죽었다. 여자는 혼자 남은 그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아이가 있어요.’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남자는 비웃으며 여자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든가요.’
남자는 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일절 여자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제 막 6살이 된 아이는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다. 여자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신문을 보다가도 자꾸 창밖을 바라보는 등이 애처로워 여자는 결국 허락의 말을 한다.
“멀리 가지 말고 대문 앞에서만 놀다 와.”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을 죽이며 혼자 옷을 여러 벌 껴입고 문을 열고 나갔다.
“와.”
아이는 작게 탄성을 뱉었다. 을씨년스럽던 집 앞 골목길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아이는 화단 위의 눈을 손으로 긁어모았다.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꾹 누르니 제법 동그란 모양이 되었다.
녹슨 철조망 사이사이의 눈을 덧붙여 더 크게 만들었다. 철조망의 뾰족한 가시가 손등을 찔렀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골목길 구석, 잔뜩 쌓인 눈 위로 몇 번 구른 눈덩이는 금세 커졌다.
아이는 눈덩이 두 개를 이어 붙여 초록색 대문 앞 시멘트 계단 위에 올려놓았다. 도둑과 귀신을 물리치는 눈사람이었다.
눈알로 박을만한 걸 찾으며 골목 앞까지 걸어 나갔을 때 멀리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잠시 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병뚜껑과 돌멩이, 나뭇가지를 꺾어 집으로 가니 아까 그 남자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이는 손에 쥔 병뚜껑과 돌멩이로 눈사람의 얼굴과 단추를 완성했다.
방안에서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말없이 눈덩이를 굴려 또 하나의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 눈사람을 완성했을 무렵,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가자.”
아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무섭게 생긴 남자였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매가 표정이 없는 눈사람과 닮아있었다. 여자가 나와 남자의 손에 짐가방을 들려주었다.
“정후야, 우리 이제 새로운 집 갈 거야. 먼저 가 있어. 엄마 따라갈 테니까.”
아이는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간절함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손에 붙들려 눈 덮인 골목길을 쉼 없이 내려갔다.
골목 아래엔 남자의 차가 서 있었다. 아이는 검은색 차의 번호판을 외워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차는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양복 차림의 남자가 차 문을 열었고, 앞치마를 한 여자가 외투를 받아들었다.
그날 정후가 보고 겪은 건 그동안 신문 속 사진이나 글자로만 읽었던 것이었다.
웅장한 2층 저택, 드넓은 정원, 깨끗한 침대와 책상. 방이 전부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엄마는 내일 올 거야. 자라.”
남자는 정후가 누운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갔다. 정후는 푹신한 베개 위에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칠이 벗겨진 초록색 대문 앞에 서 있던 두 개의 눈사람을.
아침이면 전부 녹아 흔적 없이 사라질 것들을.
* * *
“내일 새벽에 일정 있으니까 아침은 준비 안 해도 됩니다.”
“네, 부사장님.”
정후는 건조한 목소리로 스케줄을 알리며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여섯 살, 처음 이 저택에 온 뒤 그는 몇천 번, 아니 몇만 번도 넘게 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모든 게 하나의 관성처럼 느껴졌다.
계단 앞에 서면 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모든 건 이미 그의 발아래에 준비되어 있었다.
‘너 다시 그 산동네 가고 싶어?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거기로 보내버릴 줄 알아.’
영희는 정후가 마음에 안 차는 일을 할 때마다 그의 어깨를 붙들고 윽박질렀다. 2층에 있는 서재에 그를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
정후는 말없이 문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다시는 옛날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불도 없는 컴컴한 곳에서 혼자 있는 게 싫었다. 생리적인 결핍이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다.
‘자꾸 1층에 얼굴 비치지 마. 너 또 실수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아줌마한테 전화로 얘기해.’
그렇게 2층은 그의 공간이 되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어린 시절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투쟁이었다.
사춘기 시절, 출생의 비밀이 그의 신경을 좀먹어갔다. 서강욱의 첫째 부인 가족들이 찾아와 영희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계획적으로 애를 갖고, 교통사고를 사주했다는 말을 퍼부었다.
만약 오영희가 저를 계획적으로 가진 것이었다면 4살짜리 아이에게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며 악담을 퍼붓고 목을 조르진 않았으리라.
모든 이를 불행으로 밀어 넣은 서강욱에 대한 혐오감이 일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제 아랫도리 단속조차 못 한 그를 증오했다. 얼른 회사를 물려받아 그를 밀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어린 생각이었다.
서강욱은 지독히 말이 없어진 정후를 데리고 지방 출장을 가고, 현지 공장을 견학시켜주었다. 앞으로 그가 직접 다뤄야 할 것들을 눈앞에 보여주었다.
바다를 눈앞에 둔,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 위에 수만 대의 자동차가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똑같은 엠블럼을 달고 땅덩이를 누비는 네 개의 바퀴에 그는 본능처럼 끌렸고, 강한 책임감이 일었다.
그렇게 태강 그룹의 서정후가 되어 관성처럼 살아왔다.
이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장소로 돌아가기를 수십 번, 그리고 수천 번. 그는 제 앞에 놓인 트랙을 모든 생이라 믿으며 충실히 살아왔다.
일할 때마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무의식에는 태생을 부정당한 기억이 짙게 깔려있었다.
태강 그룹의 서정후로 살아가며 그는 약자였던 자신에게 벗어나 어디까지 타인을 휘두를 수 있고, 무얼 만들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갔다.
그 외엔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무언가 결핍되어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본래부터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가 사는 세계에선 없어도 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자신을 태워 곧장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초처럼 그는 모든 것을 연소하고 싸늘한 그의 집으로 돌아와 몸을 뉘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침실로 향한다. 커튼이 반쯤 쳐진 2층의 통창 너머로 괴괴한 달빛이 내렸다. 바닥에 쏟아진 제 그림자를 서늘한 눈으로 관조하며 그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그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
라벤더 향이 맴도는 침실엔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지안이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가느다란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며 호흡하고 있었다. 정후는 침대 옆에 서서 지안이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침실은 그녀의 숨소리로 고요했다.
정후는 오늘도 자신의 하루가 지독히 끔찍했음을 깨닫는다.
넥타이조차 풀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지안의 옆에 몸을 뉘었다. 얕게 숨을 쉬는 등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언제나 결정의 순간에 있었다.
태강 그룹의 영속을 위해 끊임없이 발밑을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명확한 답은 없었고, 더 합리적이고 옳은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항상 적과 아군을 구분하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파악하여 다음 수를 읽어내야 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고, 그저 더 나은 성과만이 당연한 사실처럼 있을 뿐이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본연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흐트러진 모습도, 못 미더운 모습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그의 모든 걸 아무런 가감 없이 이해해주는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
지안을 볼 때마다 어떤 감정이 턱 아래까지 밀려온다.
그것은 분명 실체를 가진 무엇이었지만, 그 형태와 의미에 관해선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치 감각기관이 거세된 동물처럼 더듬거리는 손을 뻗어 지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떤 편안함.
어떤 평온.
어떤 안식.
네가 이곳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
아내에게선 언제나 기분 좋은 향이 났다. 그건 향수도 체취도 아닌,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안온함이었다.
정후는 그 따스한 물에 둘러싸인 채 꿈도 찾아오지 않는 깊은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