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아내의 쓸모. (3/17)

3. 아내의 쓸모.

“잠깐 얘기 좀 하자.”

영희가 2층으로 향하는 지안을 불러세웠다. 얇은 입술이 차갑게 빛났다.

지안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입에서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넌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가뜩이나 지금 개나 소나 다 있는 손주 소식을 못 봐서 속이 뒤틀리는 판에 그렇게 아침부터 수선을 피워야겠어?”

대놓고 면박을 주는 발언에 지안의 얼굴이 굳었다. 정후가 없을 때마다 영희는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지안의 신경을 긁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고분고분한 지안의 대답에 영희는 혀를 크게 찼다.

언젠가 지안이 제발 좀 그만하시라며 참다못해 반항하자 영희는 외려 네가 우리 집안에 해준 게 뭐가 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며느리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안이 묵묵부답으로 굴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도에 있는 백자 달항아리를 집어 던졌다. 순백색의 도자기는 바로 산산조각이 났다.

영희에게 지안은 쓸모없는 며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댁 재산 거덜 내는 며느리, 애도 못 낳는 며느리.

‘아침마다 네 얼굴 보면 밥 안 넘어가니까 웬만하면 안 보이게 내 옆에 앉아라.’

‘자꾸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붙어있어. 쓸데없이 싸돌아다니면서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존재하는 이 집에서 지안의 쓸모란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영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안에게 그 사실을 환기시켰다.

“근데 너 요즘 병원 다니는 건 그만뒀니?”

또다시 튀어나오는 민감한 화제에 지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상 누구보다 정후와의 아이를 원했지만, 이 이야기만 나오면 그녀는 죄인이 되었다.

“요즘 정후 씨도 너무 바쁘고 아버지도 아프시고 해서 당분간 쉬려고요.”

담담히 쏟아낸 지안의 대답에 영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참 팔자 편하다.”

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정후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고, 우리가 손주 꼭 봐야하는 건 굳이 입 아프게 얘기 안 해도 너도 알겠지.”

영희 또한 정후 이후로 또 다른 자식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받을 수 있는 의학적인 도움은 모두 찾아 받았고, 애를 배기 위해서 안 먹어본 게 없었다. 서 회장 몰래 몇 억을 쏟아부으며 굿까지 했건만, 결국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후처로 재벌 집에 입성해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증이 있었고, 그것은 자식과 후계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바깥 사람들처럼 애를 좋아서 낳고, 싫어서 안 낳고 이런 거 아니잖니, 우리 집안은. 당연히 낳아야 하는 거고,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영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며 제 울분을 토해냈다.

손주에 대한 영희의 집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영희가 이 집에 어떻게 들어왔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았는지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그러나 영희는 제 관심사만 중할 뿐 지안의 의사는 관심 밖이었다.

일가의 며느리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었고, 지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적인 존중이 없는 일방적 관계였다.

여느 때처럼 차분한 지안의 표정에 영희는 복장이 터지는 듯 숨을 씨근덕거렸다.

“우리 집안 후사가 끊긴다는 생각만 하면 밤에 잠도 안 오는데, 너는 잠도 자고 향수병도 깨고 아주 할 건 다 하고 다니더라?”

선을 넘는 발언에 지안이 얼굴을 붉혔다. 간혹 정후와 분위기가 묘해져 아침 식사 때 몇 번 늦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영희는 지안을 따로 불러 성과 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곤 했다.

“그래서 무슨 대책이라도 있니?”

“대책이라니요?”

지안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하자 영희는 열불이 터진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럼 이 중대한 일에 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숨만 쉬면서 살고 있는 거니?”

영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줌마, 여기 찬물!”

영희의 새된 외침에 주방에 있던 사용인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물 잔을 건넸다. 그녀는 찬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사용인을 향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한동안 숨을 고르던 영희는 냉기가 흐르는 눈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죽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너무 대책이 없는 것 같아서 결국 내가 나섰다.”

영희의 얼굴은 집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네가 정후 옆에서 잘 버티고 있는 건 나도 인정하마. 집에선 일절 말 한마디 없던 놈이 결혼하고 나선 그나마 인간답게 굴고 있으니. 근데 너도 네 몫은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요즘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젊은 애가 왜 이렇게 머리를 못 굴려?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네네, 하고 언제까지 손만 빨고 있을 거야? 입 무거운 사람으로 잘 골랐다. 뒤탈 없고 조건 맞는 사람 찾느라 힘들었어.”

영희는 이미 결심이 선 표정으로 지안을 향해 말을 쏟아냈다.

“…조건이라뇨?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지안은 영희의 말을 되물었다. 영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네 자궁이 약해서 애가 계속 못 버티잖니. 벌써 몇 년째야, 이게. 밭이 시원찮으면 남의 땅이라도 빌려다 농사를 지어야지. 내가 정말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그래도 우리 집안을 생각하고, 자식새끼 생각해서 필요하면 하는 거지, 안 그래?”

대리모를 구했다는 말이었다.

지안은 충격으로 혀가 굳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지안이 사고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듬듯 입을 열었다.

“사람 수소문한 지 한 6개월도 넘었다.”

영희의 폭탄 같은 발언에 지안은 머리가 어질했다. 아무리 후계자가 필요해도 그렇지 다른 여자의 몸을 빌려 출산하다니, 지안의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머님, 지금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몸을 써서….”

지안의 말에 영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게 어디서 어른을 가르치려 들어? 그냥 고고하게 앉아 있으면 일이 술술 풀리는 줄 알아? 이 정도 각오는 되어 있어야지. 이 집에서 네 역할이 도대체 뭐야?”

지안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영희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싫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도 마라. 조만간 내가 알아본 의사랑 얘기해서 날짜 잡을 예정이니까. 회장님이랑 정후한텐 입도 뻥긋하지 말고.”

“…회장님이랑 정후 씨가 절대 허락할 리가 없어요.”

지안의 말에 영희는 어디 두고 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락을 하든 말든 이미 애가 태어나면 자기들 핏줄이라 외면 못 한다. 정후가 딴 데서 씨 뿌리는 것보단 너도 그게 낫지 않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지안을 향해 영희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번 일만 잘되면 너한테도 보상이 있을 거다. 이 집에서 대접받고 살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영희는 지안을 차갑게 쏘아보며 휙 하고 자리를 떴다.

“하아….”

지안은 우두커니 선 채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스산한 기운이 밀려왔다. 어딘가 창문이 열렸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온 집안의 문은 꼭 닫힌 채였다.

* * *

“아빠, 저 왔어요.”

지안이 병실 문을 밀며 들어섰다.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안이 왔니.”

아버지 세욱이 편안한 미소로 지안을 맞았다.

항암치료 중에 있던 세욱은 현재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 입원해 있었다.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 가벼운 감염조차 몸속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불안한 지안은 빠르게 입원수속을 밟고 매일 세욱을 찾아왔다. 그런데 오늘 세욱 옆에 반가운 얼굴이 하나 있었다.

“민영아, 여기 웬일이야.”

지안은 활짝 웃으며 친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함께 다닌 절친한 사이였다. 민영은 세욱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냥 선생님도 뵙고, 너도 요즘 정신없을 것 같아서. 마침 선생님께 연락드렸는데 입원해 계신다고 해서 너도 볼 겸 와봤어.”

“오늘 수업 없었어?”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일찍 끝났어.”

민영은 현재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민영이가 아주 노련해졌어.”

세욱이 두 사람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세경기업은 화학 공학자였던 지안의 할아버지가 일군 회사였지만 세욱은 경영에 뜻이 없었다.

교직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말할 만큼 세욱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회장이 타계한 뒤 사장직을 물려받으며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얼른 나으셔서 저희 3학년 2반 동창회 한번 나오세요. 다들 선생님 보고 싶어 해요.”

세욱은 말없이 웃었다.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을 지원했던 그는 교단을 떠난 뒤에도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지안은 그런 아버지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아빠, 목마르시면 이거 드세요.”

지안은 테이블 위에 주스 병을 집어 대신 땄다. 서랍에서 빨대를 찾아 입구에 꽂은 뒤 세욱 앞에 세팅해놓았다.

“고맙다, 지안아.”

빨대를 향해 뻗는 손가락이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인데, 암세포가 아버지의 몸을 잠식해가는 걸 볼 때마다 지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별일은 없고?”

부드러운 눈가가 지안의 얼굴을 살핀다. 언제나 그녀의 편에서 조건 없이 믿어주는 눈빛. 지안은 마음속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엄마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지안은 내내 이런 사랑 속에서 자라왔었다.

바쁘고 무뚝뚝한 남편, 시모가 내뱉은 말들이 지안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왔지만, 지안은 세욱을 생각하며 그조차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네. 아무 일 없어요. 이제 아빠만 퇴원하시면 돼요.”

“그래야지. 별거 아닌데 무슨 입원까지 시키고. 날이 많이 따뜻해졌더라. 5월에 너랑 정후랑 멀리는 못 가도 어디 근교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은데.”

“좋죠.”

지안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정후가 시간이 날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빠와 보내는 시간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지안의 침울함을 눈치챈 민영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간병인이 자리로 돌아왔고, 금방 피로해지는 세욱을 위해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민영아, 타.”

병원 정문에 선 민영의 앞으로 매끈하게 빠진 차 한 대가 등장했다. 최근 태강 그룹에서 출시된 배기량 3,500cc급의 고급 세단이었다.

“오늘은 직접 운전하는 거야?”

민영은 조수석에 올라 활짝 웃으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응, 답답해서.”

지안은 민영을 살핀 뒤 도로로 진입했다.

“차 또 바뀌었네?”

조수석에 앉아 신기한 듯 내부를 둘러보는 민영의 말에 지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차도 아닌데, 뭐.”

언제나 같은 친구의 반응에 민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이게 왜 네 차가 아니야. 그 회사가 민지안 씨 남편 건데. 그럼 네 거 맞지.”

지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후로 인해 얻게된 걸 제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어려워지고, 몇 번 시가의 도움을 받은 뒤 영희는 지안의 씀씀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후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 그런 일이 더는 없었지만, 지안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혹여 사돈댁으로 돈이 샐까 의심하는 영희의 의중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빌린 것 같아. 남편도 그렇고, 이 차도 그렇고.”

남편과의 연결고리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민영은 농담인 듯 던지는 지안의 말을 깊게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다는 이해할 순 없지만, 정략결혼이라는 게 겉으로 보이는 만큼 화려하고 달콤한 건 아닌가 보다,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지안 또한 제 속을 가볍게 털어놓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도 좋지?”

민영이 웃으며 던지는 말에 지안이 잠시 전방을 바라보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경했던 선배에서 남편으로.

무려 4년간의 짝사랑이었다. 자각 못 했던 시절까지 하면 근 7년.

사랑이 시작된 지점은 희미했지만, 지안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정후를 생각했고, 그건 마치 오랜 습관과도 같았다.

“요즘도 많이 바빠, 정후 선배?”

왠지 풀 죽어 보이는 지안을 바라보며 민영은 가볍게 이야기의 운을 띄웠다.

지안에게서 단 한 번도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본 적 없는, 두 사람 관계의 대전제가 되는 질문이었다.

민영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서정후는 과연 한가한 날이 있을까 싶은 사람이었다.

“똑같지, 뭐. 어제도 3일 만에 봤어.”

담담하게 대답하는 지안의 눈언저리가 거뭇거뭇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남자랑 결혼해서, 그 남자의 회사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잘 나가고 있는데 친구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지안은 똑 부러지는 인상이었지만 알고 보면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학기 초, 알만한 집 딸이라는 소문에 아이들은 그녀를 어려워했다. 그러나 1년 정도 같이 지내고 학년이 올라가기 전, 지안과 같은 반에 배정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친구의 속내를 잘 들어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뒤에서 말없이 챙겨주는 타입이라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근데 저번에 너네 집에 갔을 때 보니까 아직도 옛날이랑 똑같더라.”

민영의 말에 지안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인가. 토요일에 민영이 잠시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그때 모임 약속으로 외출하는 정후와 잠시 마주쳤었다.

“선배는 나이도 안 먹나 봐. 피부가 어쩜 그래? 따로 시간 내서 관리 받고 하는 거야?”

서정후는 여전히 잘 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민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관리는 무슨. 잠잘 시간도 없이 일해. 새벽에 들어와서 욕조에서 자는 거 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그 정도야? 심하다. 그래도 본인은 힘들다고 생각 안 할걸?”

정확한 분석이었다. 지안이 맞아, 하며 입꼬리를 올리자 민영이 말을 이었다.

“왜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잖아. 경영대 과 수석에 학술지 편집장에 공모전까지 팀 짜서 하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며칠 동안 도서관에서 밤새우는 거 보고 다들 괴물 같다고 했었는데.”

“그랬지.”

지안은 설핏 웃으며 대학 때의 정후를 떠올렸다.

그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깔끔하고 남자답게 생긴 외형 때문이기도 했고,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행동들이 갖가지 소문을 부추겼다.

입학식 당일, 영화에 나올법한 차를 끌고 와 교수회관 앞 주차장에 세워놓은 것부터 시작하여 미인대회 수상자였던 여자 선배가 정후를 보고 한눈에 반해 제 남자친구를 차버린 일화도 유명했다.

“그런 남자와 같이 사는 건 어때?”

호기심 반 걱정 반의 눈동자가 지안을 향했다.

그에 반해 지안은 주변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왔다. 그저 멀리서 제가 결혼할 상대를 지켜봐 왔을 따름이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야. 쿨하고, 숨김없고. 깔끔하고.”

직접 만나본 서정후는 선명한 직선 같은 남자였다. 그렇게 온갖 시선을 다 끌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중하고 있는 건 오직 회사 그리고 일.

부풀 대로 부풀어진 소문에도 지안이 별 흔들림 없이 그를 받아들인 건 정후는 그저 앞에 놓인 제 할 일을 할 뿐, 잡음을 만들 의도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혼 또한 그랬다. 그가 해치워야 할 일 중 하나였고,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근데 난 정후 선배 너무 차갑더라. 사람이 너무 냉정해 보인달까.”

민영은 지안을 흘깃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은근 상냥한 구석도 있어. 나름대로.”

지안이 조심스레 내뱉는 말에 민영은 뜨악한 표정을 했다.

“와, 민지안. 지금 와이프라고 편들어 주는 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후 선배 상냥하다는 말 들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인간들만 한 트럭이다.”

“그래. 쉬운 성격은 아니야.”

지안의 빠른 수긍에 민영이 씩 하고 웃었다.

“근데 정후 선배랑 너, 대학 때 무슨 교양강의 같은 조 하지 않았어? 그때 서로 결혼할 사이인 거 알고 있었다고 했나?”

갑자기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내는 민영의 이야기에 지안은 가만히 생각을 더듬는다.

처음 그와 말을 나눴던 건 대학교 1학년 시절, ‘심리학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에서였다. 계단식으로 된 강의실에서 지안은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첫날이라 강의에 대한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나서 교수는 앞뒤에 앉은 사람들과 조를 짠 뒤 이름을 써 제출하라고 했다. 한 학기 동안 같이 과제를 할 팀이라고 했다.

‘야, 완전 대박.’

뒤를 돌아본 동기가 지안의 팔꿈치를 치며 속삭였다.

‘경영학과 그 선배, 우리 뒤에 앉아있어.’

그 말에 다른 친구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더니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지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강의실 맨 끝자리엔 너른 어깨의 깔끔한 셔츠차림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앉아있었다. 남자다운 이목구비에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주변에 있는 남자 동기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모일까?’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 사람들은 그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1학년?’

정후의 물음에 지안을 비롯한 동기 2명은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의 옆에 앉아있던 두 명의 남자 또한 2학년이라는 말을 보탠다.

‘난 4학년이니까 말 놓을게.’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노트를 꺼내 간략히 메모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과제를 해나가면 좋을지, 교수의 특성이 어떤지, 모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짜야 하는지 핵심사항만 정확히 짚으며 이야기해갔다.

모두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안은 고개를 들어 신중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 설명회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그 후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 이렇게 마주치기를 오랫동안 꿈꿔왔다.

지안은 정후가 말하는 모습을 눈과 귀에 담았다. 그는 세련된 방식으로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여기 자기 이름이랑 연락처 써서 줘.’

한 바퀴 돈 종이가 지안 앞으로 왔다. 지안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정후에게 건넸다. 종이를 받아든 그는 가볍게 명단을 훑어내리다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선선히 눈을 들어 지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민지안이야?’

서늘한 눈동자가 그 빛을 달리하며 지안에게 물었다.

‘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 당시엔 이미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던 상황이었다. 아마 자신의 이름과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지안은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은 척을 하기도, 뭐라 말을 보태기도 어색하기만 했다. 남자다운 입매가 살짝 올라가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조원 구성이 끝난 팀은 명단 앞으로 가지고 나오세요.’

정후는 간결한 필체로 조원들의 이름만 다시 메모한 뒤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야, 우리 완전 이거 듣길 잘했다. 저 선배 진짜 멋있어.’

‘조장님을 잘 만났네. 그냥 따라가면 A 나올 것 같다.’

팀원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후는 강의실 중앙통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같은 조가 된 지안의 무리를 부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이어졌다.

‘경영대실 세미나룸, 수요일마다 내가 예약해 둘 테니까 조별 회의는 거기서 하고. 내가 지금 다른 일도 하는 게 있어서 학교 매일 못 나와. 조원들 연락은 다른 사람이 해.’

정후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첫 번째 수업이 파했다.

‘그럼.’

정후는 가방을 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는 인사말들이 쏟아졌다. 지안 또한 정후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며 지안을 바라보았다.

‘또 보자.’

지금도 지안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정후의 표정과 누군가를 좋아하기 직전 느껴지는, 어떤 감정의 전조와 같은 떨림이었다.

* * *

“오늘 스케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 11시 30분 서울 투자자 컨퍼런스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장소는 여의도 C 호텔이고 오찬까지 진행될 예정입니다. 오후 4시엔 본사 대회의실에서 하반기 신차출시 관련 홍보 계획을 브리핑할 예정입니다. 저녁 6시에는 한국 대학교 인공지능연구소 김성훈 교수님과 저녁 식사 약속 있으십니다.”

서정후는 결재판에 서명하며 김 실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가 등진 통창 너머로 도심의 푸른 전경이 선명했다. 가장 높은 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은 시야가 탁 트인 경관과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현대미술가의 그림과 소품들이 오피스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쳐들어온 지안의 흔적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올록볼록한 강아지모형이 황당하긴 했지만, 딱히 거슬리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블라인드를 전부 걷어 올린 유리창 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숨 막히는 일정을 소화해내기 위해선 체력관리가 필수였다. 탄탄한 어깨를 휘감은 와이셔츠가 새하얗게 빛났다.

얼마 전, 비서실에 합류한 여직원의 눈이 정후의 상체 부근을 배회하다 만년필을 쥔 기다란 손가락에 머문다. 거침없으면서도 우아한 필체였다.

“향후 업데이트된 스케줄입니다. 다음 달 21일에 인도네시아 총리가 방한할 예정입니다. 청와대에서 오찬을 계획할 예정이니 참석해주십사 연락이 왔습니다. 5월 13일 일본에서 열리는 G20 에너지 환경 회의에 발제자로 참석하셔야 합니다. 필요한 자료는 모레까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정후는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져가요.”

열댓 개 되는 결재판이 곧바로 거두어졌다. 여직원은 정후를 힐끔 바라보았다. 볼이 살짝 붉어진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고 나갔다.

“흠.”

김 실장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정후는 쉴 틈 없이 또 다른 보고서에 눈을 돌린다.

“세경기업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굵직한 스케줄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그는 세경기업 건을 도마 위에 올렸다.

책상 위엔 바싹 깎은 연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정후는 페이지를 넘기며 몇 군데 표시를 한 뒤 간략한 메모를 적었다. 여느 때처럼 차분함이 감도는 모습을 보며 김 실장은 입을 열었다.

“현재 알아보고 있는 단계지만 생각보다 부채 규모가 커서 이대로 인수를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세경기업은 그의 장인, 민세욱이 물려받은 기업으로 자체 기술력을 가진 배터리 제조회사였다. 과거 태강과 비등한 규모에 자금력은 오히려 더 탄탄했으나, 사세를 키우기보다는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운 태강과 반대의 행보를 걸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두 회사의 성패가 갈렸다.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았다.

민세욱은 성품은 훌륭했지만, 사업적인 감각은 없었다.

세경기업의 주요 임원 중 하나가 핵심기술을 들고 중국으로 사라졌다. 무리한 투자를 끌어다 만든 기술이라 회사에 타격이 컸다. 그 후로 쭉 내리막길이었다.

“외국에 있는 부동산 몇 개 처분할 예정이니까 장 변호사랑 이야기해서 리스트 좀 만들어봐요.”

정후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네?”

뜬금없는 지시에 김 실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장인어른 회산데 구색은 갖춰야지.”

정후는 이미 결정을 끝낸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김 실장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진행 건 밖으로 안 나가게 보안 철저히 하고요.”

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밖을 바라보았다. 성냥갑같이 늘어선 건물들과 분주한 오피스지구의 풍경이 그의 발아래 있었다.

“특히 오 여사님.”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정후와 김 실장은 말없이 피로한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이 시점에 정후가 세경기업을 인수하려는 것을 알면 오영희의 입에서 싫은 소리가 나올 것이 뻔했다.

상황이 시끄러워지면 고생하는 건 그의 아내, 민지안이었다.

몇 년 전, 세경기업이 첫 부도 직전의 위기였을 때 정후가 도와준 일을 가지고도 영희는 말이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당연히 할 도리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정후에게 앞으로 처가 일에 지나치게 나서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그 뒤로 세경기업 관련 업무는 모두 수면 아래에서 처리되고 있었다.

“베트남 출장이 다음 주 맞습니까?”

정후는 풍선 모양의 은색 강아지모형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목요일 출발입니다.”

“그 전에 병원 스케줄 좀 빼봅시다.”

“…다시 한번 조율해보겠지만 어려울 가능성이 큽니다. 죄송합니다.”

난감해하는 김 실장을 흘깃 바라보며 정후는 걸음을 옮겼다.

“김 실장님이 죄송할 건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미안할 일도 아니었는데.”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챙겨 들며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요즘 따라 신경 쓰이네요.”

미세하게 구겨지는 정후의 미간을 바라보며 김 실장은 깍듯이 대답했다.

“스케줄 살펴보겠습니다.”

“출발하죠. 여의도까지 평소보다 더 막힐 것 같으니까.”

“네, 부사장님.”

김 실장은 서둘러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비서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다. 김 실장은 비서가 건넨 파일을 챙기며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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