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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기념일. (1/17)

결혼시차 1

1. 결혼기념일.

도심의 빌딩 숲 사이로 해가 저물어갔다. 오늘 하루를 버텨낸 직장인들이 집으로 흩어지는 시간. 그 사이를 역행하며 빠르게 다가오는 차 한 대가 있었다.

끼이익.

윤이 날 정도로 잘 닦인 검은색 대형 세단은 청계천 변의 한 거대한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지하주차장이 아닌 지상의 유리문 바로 앞이다.

경비원이 한달음에 달려 나와 뒷문을 열었을 때, 차에서 내린 건 그보다 한참은 젊은 장신의 남자였다. 남자는 긴 다리를 뻗어 바닥을 디딘 뒤 일말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빠져나갔다.

사옥 앞 정원 한가운데에는 남자의 차에 달린 엠블럼과 똑같은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었다.

태강 그룹.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남자는 큰 보폭으로 유리문을 통과했다. 공들여 재단된 슈트가 남자의 탄탄한 몸을 갑옷처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밖으로 향하던 몇몇 직원들이 그를 향해 인사했다.

임원용 엘리베이터로 직행하는 남자 옆으로 태강 그룹 제2부속실 김상욱 실장이 따라붙었다. 7년간 그를 보좌한 수행비서였다.

“부사장님, 고객분들은 40층 회의실에 모셨고, 저녁 7시 30분 한식당 ‘송연’에 식사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그 말에 남자, 서정후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약속 없이 들이닥친 고객이라 짜증 날 법도 한데 그는 도리어 신중한 표정이다.

“몇 시간 컷입니까?”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그는 외형과 어울리는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말수는 적고 늘 간결했다.

“1시간 안에 논의 끝내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서정후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잠시 생각을 골랐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을 노려보는 눈엔 미세한 핏줄이 불거져있었다.

방금 세종시의 정부 부처에서 5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 끝에 올라오는 길이었다. 예정에 없던 인도네시아의 VIP 고객 방문으로 급히 차를 돌렸다.

“저번에 만들어둔 합작법인 설립계약서 초안 준비해두세요.”

“네? 그건 부사장님께서 지금 제안하기엔 성급한 타이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눈길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190cm에 육박한 키, 깊은 눈매에서 떨어지는 시선은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했다.

“멀리서 온 손님인데 빈손으로 보낼 순 없죠.”

남자다운 단단한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사업에 있어 변수란 늘 존재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타이밍에 항상 대비해야 했다.

그 타이밍을 기회로 만들어 제대로 포획하는 것이 서정후의 역할이었다.

“저희 말고 L사 쪽과도 거래계약을 조율 중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럼 더 좋고.”

부하직원의 우려를 단칼에 정리하며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회의실로 직행했다.

회의실 앞에는 급히 호출된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느슨했던 공기가 서정후의 등장으로 분위기를 달리했다.

곧장 회의실로 들어가려던 그의 발길이 갑자기 멎었다.

“…오늘, 며칠이었지?”

대뜸 던진 질문에 옆에 선 기획팀 팀장이 빠르게 대답했다.

“3월 5일입니다.”

감정표현이 거의 없는 이목구비에 실낱같은 낭패감이 스쳤다.

“내 휴대폰 좀 줘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통화는 짧게 끝내셔야 합니다. 지금 고객이 30분째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실장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휴대폰을 건넸다. 회의실엔 그를 만나기 위해 8시간을 걸려 날아온 고객들이 있었다.

“이왕 30분 기다린 거 10분 더 기다리라고 해요.”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회의실 옆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서정후의 통화가 끝나기 전까지 모든 상황은 일시 중단되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김 실장은 재빨리 휴대폰의 캘린더를 열었다. 다른 색깔의 일정 하나가 있었다.

맨 아래 칸, 녹색 창 안의 글자를 읽으며 그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 * *

레스토랑의 통창 너머로 강의 전경이 짙푸른 어둠 속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다리를 넘나드는 차들의 움직임이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따라 빠르게 교차되었다.

산 중턱에 있는 특급호텔의 1층 레스토랑은 서울의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유명했다. 이제 곧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아름다운 야경이 빛을 발할 시간이다.

그때 통화를 끝마친 여자가 탁, 하고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하….”

동시에 짧게 터져 나오는 한숨 소리.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여자는 윤기가 감도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잠시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도자기 같은 새하얀 피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VVIP 라인을 통해 두 달 전에 미리 예약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이었다. 처음부터 혼자였고, 이미 예약한 시간에서 30분이나 흘러있었다. 오랜 경력의 지배인은 적당한 간격을 둔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1인 코스만 준비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지배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된 코스를 설명하려 하자 여자가 재차 말을 이었다.

“코스요리, 그냥 전부 한꺼번에 내어주시겠어요?”

“…네?”

지배인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다음 요리까지 기다리고, 지배인님은 테이블 사이 왔다 갔다 하고. 이런 거 피차 에너지 낭비잖아요. 디저트까지 한 번에 주세요.”

예쁜 축에 속하는 얼굴이었지만 크게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야물게 다물어진 입매가 그녀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게 했다.

“말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레드와인 먼저 적당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배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잠긴 검푸른 물 위로 여자의 모습이 새하얗게 떠올랐다. 지배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2인 코스 취소하고 1인 코스만 나갑니다.”

샐러드 위에 올라갈 예정이던 1인분의 블랙 트러플과 해산물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주방장의 거침없는 모습에 부주방장이 최상급 한우 안심과 푸아그라 일부를 재빨리 냉장실에 갖다 넣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주방장의 눈앞으로 커다란 접시 하나가 등장했다. 라즈베리 셔벗을 담은 새하얀 그릇 테두리에는 7th Anniversary 라는 글씨가 우아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장난하나?”

“죄송합니다.”

부주방장은 눈을 질끈 감으며 쨍한 분홍빛의 얼음덩이를 검은색 비닐봉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만드는 데 3시간이 걸렸든, 하루가 걸렸든 먹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셔벗이 동그란 형체를 잃고 으깨어지면서 순간, 달고 상큼한 향이 조리실 안으로 확 퍼져나갔다.

지안은 서브 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크게 반으로 썰었다.

오늘은 결혼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안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다 옆 테이블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 있으니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관찰하는 시선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손을 꼭 쥐자 여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관심을 돌렸다.

싱그러운 꽃다발과 작은 쇼핑백이 두 사람의 테이블 위에 있었다. 지안은 오늘이 그들의 특별한 날임을 짐작한다.

지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부신 야경보다 마음에 박히는 건 그녀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다.

3월 5일. 6:45 pm.

지금 흐르는 이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서정후.

그녀의 유일무이한 사랑.

24살,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치렀던 정략결혼이었다. 막역한 사이였던 두 집안의 선친이 농담처럼 주고받던 혼담이 여러 사업적 조율을 거쳐 현실이 되었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남편은 어딜 가든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였다.

누구나 한 번쯤 다시 돌아볼 만한 남자다운 외견과 명석한 두뇌.

목표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집념의 남자.

그에 비해 자신은 무던히 주변과 섞여드는 삶을 살아왔을 따름이다.

‘네가 감당하기 힘든 남자야.’

둘의 결혼이 공고화되었을 당시 그와 꽤 친한 사이라던 어느 여자 선배가 했던 말이었다. 지안은 표정 없이 그대로 대꾸했다.

‘일단 선배가 감당할 자격이 안 되는 건 확실하네요.’

어리숙한 자신에 비해 그 여자는 지나치게 예쁘고 몸매가 좋았다. 지안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여자가 싫었다. 그러나 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던 그녀의 미소가 왜 이제야 떠오르는 걸까.

지안은 오늘이 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서정후는 전화 한 통으로 불참을 통보했고, 지안은 휘황찬란한 야경과 음식 앞에 익숙한 포즈로 혼자 앉아있었다.

결혼할 때만 해도 그의 회사는 탄탄한 중견기업에 가까웠다. 그러나 처가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M&A와 정부 측 인사 커넥션을 교묘히 이용해 가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서정후는 경영일선에 전면으로 나서 회사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다 놓았다.

언제나 바쁜 남자였다.

일주일간의 인도네시아 출장과 연이은 국내 일정.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가 이틀 전이었다. 솔직히 오늘 이 자리의 약속을 기억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지안은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랑했지만….

지안은 다정한 귓속말을 나누는 옆자리 커플을 바라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조건에 맞춰 시작한 결혼생활이라고 하지만 살다 보면 그냥 막연히, 사랑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서정후라는 남자와 그 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

한 해가 지나고, 세 번째 기념일이 지나고, 어느덧 그렇게 7년.

서정후는 한결같이 일이 우선이었고, 지안은 그에게 중요 일정을 다 끝낸 뒤 처리하는 자투리 업무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문제는 그가 아니라 매번 기대하고 실망하는 제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지안은 나이프를 정교하게 잡고, 다시 한번 고깃덩이를 반으로 조각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골치 아픈 문제라도 된다는 듯 오래 공들여 씹었다.

식사를 일찍 마친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배인은 빠르게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음식 대부분을 비웠고, 커트러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지배인을 향해 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었습니다.”

지안의 얼굴 위로 일순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사라졌다. 혼자 있을 때 나오는 듯한 무의식적인 표정.

지배인은 엉망으로 으깨어진 라즈베리 셔벗을 떠올렸다.

준비된 차를 향해 걷는 뒷모습이 곧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아슬아슬했다.

* * *

빈속에 마신 와인이 잘못된 듯싶었다. 지안은 내내 뒤척이며 선잠을 자고 있었다. 멀리서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사용인이 정후를 맞는 음성이 들려왔다.

따로 준비할 건 없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갑니다, 하는 목소리. 그리고 계단을 올라오는 차분한 발걸음.

결혼할 때부터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두 사람은 2층 전체를 쓰고 있었다. 정후는 어릴 때부터 여기서 혼자 지냈다고 했다.

넓고 삭막한 공간이었다. 침대와 서재 빼고는 제대로 기능하는 곳이 없었다. 남자의 생활방식을 여실히 드러낸 텅 빈 공간.

지안이 밝은 톤의 가구를 놓고, 살림살이를 들이며 그 여백을 메우려 했지만, 서늘한 느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달칵, 하고 침실문이 열렸다. 무거운 우디 계열의 향이 풍겼다. 얼마간의 알코올 내음으로 보아 그는 술을 마신 듯했다. 돌아누워 있는 지안의 머리맡으로 탁, 하고 무언가가 놓였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서를 통해 고른 결혼기념일 선물이겠지.

어느 하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정후의 행동에 지안은 눈을 꼭 감으며 잠을 청하기 위해 애썼다.

“…….”

말없이 등에 와 닿는 시선이 느껴진다. 정후는 때때로 자고 있는 지안을 우두커니 들여다보곤 했다.

‘…취했나.’

지안은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편은 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술을 억지로 강요할 일도, 삶이 힘들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실 일도 그에겐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서정후 자체가 곧 회사였고, 그는 5만 명의 목숨줄을 쥐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5만 명분의 월급이 각자의 가정으로 들어가 수십만 명의 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 무거운 책임감 앞에서 워라벨이라는 말은 그저 한때 지나가는 유행어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이 마치 제 소명인 듯 묵묵히 그리고 치열하게 일하는 정후를 보면 지안은 좀처럼 더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후가 샤워실에 들어간 지 30분째다. 그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행동이 빠른 그는 절대로 미적거리는 일이 없었다.

지안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뿌연 수증기가 가득했다. 사각의 대리석 욕조 안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잠들어 있는 정후의 모습이 보였다.

“…….”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반듯한 이마로, 우뚝 솟은 콧날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겨있는 속눈썹이 가지런하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깊게 잠든 또렷한 이목구비엔 미동조차 없었다.

투명한 물 위로 선이 굵고 단정한 그의 목선과 넓은 어깨, 단단한 상박이 드러나 있었다. 욕조를 잡고 있는 탄탄한 팔 근육을 지안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욕조 옆엔 그가 벗은 옷가지가 그 와중에도 곱게 포개져 있었다. 술에 잘 취하지도 않지만, 그는 술버릇조차 거의 없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서정후의 무의식적인 습관들.

괜스레 심장이 간지러워진다. 지안은 정후를 깨울 생각도 않고, 욕조 난간에 앉아 고요히 잠에 빠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감긴 눈이 스르륵 올라갔다. 깜짝 놀란 지안이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정후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안의 상체가 욕조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어느새 정후의 가슴과 강하게 밀착된 채였다.

얇은 레이스 슬립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아!”

지안은 황급히 욕조 난간을 붙잡았다. 정후는 얼굴을 맞댄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헷갈려.”

지독하게 잠에 취한 목소리.

눈앞에서 마주한 눈동자는 그대로 빨려 들어갈 듯한 어두운 심연이었다.

“둘이 있을 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으면서 이렇게 보고 있으면.”

길게 내쉰 숨이 귓바퀴 안으로 고여 들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축축한 입술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볼에 비벼졌다.

“나를 꼭 원하는 것 같기라도 하잖아.”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지안의 뒤통수를 헤집다 그러쥐었다. 지안이 뭐라 항변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그와 마주한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민지안.”

정후는 지안의 볼에 입술을 문지르며 천천히 턱을 향해 미끄러지듯 옮겨갔다. 가느다란 턱 끝을 살짝 깨문 뒤 아랫입술을 빨았다. 멍해진 지안의 표정을 확인하며 그는 입술을 포개어 깊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하아.”

얽힌 혀는 뜨거웠고, 박하 향과 미약한 술 냄새가 났다. 달아오른 호흡이 겹치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렀다. 매끄러운 혀가 입 안을 휘저을 때마다 몸속 어딘가가 뜨겁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후 씨.”

“나중에 말해.”

정후는 지안을 응시하며 말을 잘랐다.

어제처럼 피치 못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는 습관처럼 지안을 안았다. 감정을 살피는 말 따윈 못하는, 과묵한 남자 나름의 위로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서정후에게 안기는 걸 민지안은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으니까.

넋이 나갈 것 같은 섹스는 때론 그들 사이에 얽힌 복잡미묘한 감정을 간단하게 풀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 지안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다소 굳은 안색의 지안을 정후는 부드럽게 리드하기 시작했다. 팔 사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들어 올린 뒤 제 몸 위에 얹었다.

엉덩이에 닿는 허벅지가 돌처럼 단단했다. 바늘조차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탄탄한 몸. 두 사람의 경계에 있는 건 흠뻑 젖어버린 슬립뿐이었다.

젖은 손가락이 날개뼈 위를 덧그리다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뽑힐 듯 강하게 혀를 빨면서도 어루만지는 손길은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지안은 눈을 살며시 떠 키스하고 있는 정후의 얼굴을 본다.

이 순간 오직 자신에게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차갑고 무관심한 남자는 자신을 안을 때면 붉은 열기를 띠었다.

몸으로 다가오는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그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부드러워.”

정후가 부풀어 오른 지안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지안은 숨이 막힐 듯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후는 지안을 응시하며 달아오른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어깨 위에 걸린 슬립의 끈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밀어 내렸다.

“여긴 빨고 싶게 생겼는데.”

왼쪽 젖꼭지가 물 위로 툭, 하고 드러났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지안은 몸을 잘게 떨었다. 차가운 공기가 닿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섹스할 때의 서정후는 마치 수치를 모르는 짐승 같았다.

그는 물기 어린 지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단번에 허리를 당겨 그녀의 상체를 끌어왔다.

“흣!”

축축하고 부드러운 혀가 꼿꼿해진 유두를 세게 빨아올렸다. 그의 혀가 닿는 감각만으로 지안은 다리 사이가 젖는 느낌이다. 살짝 이로 깨물다 휘감아 올리는 감촉이 자극적이었다.

그가 길게 핥아 올릴 때마다 오돌토돌한 혀의 돌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유두가 점점 단단해지고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져 갔다. 발갛게 부푼 젖꼭지를 그는 빠르게 혀끝으로 굴리다 느릿하게 비벼대기를 반복했다.

차가운 표정과는 반대로 적나라하게 움직이는 정후의 입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쾌감을 고조시켜갔다.

“하아.”

지안은 고개를 쳐들며 나른한 숨을 뱉었다. 뒤로 휘어지는 얇은 등을 커다란 손바닥이 안정감 있게 받쳤다. 정후는 입을 벌려 단번에 유륜까지 베어 물었다. 거칠게 쭉쭉 빨아당기는 감각에 다리 사이가 움찔거렸다.

정후는 반대쪽 가슴을 콱 움켜쥐며 젖은 슬립 위로 드러난 유두를 문질렀다. 지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어깨를 잡자, 정후가 슬립을 찢어내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흣!”

지안은 비명을 지르며 정후의 머리를 안았다. 그의 넓은 등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물이 범람했다. 아랫배의 얇은 살갗 위로 남자의 뜨거운 숨결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집요하게 키스하던 정후가 이윽고 배꼽 아래, 더 깊은 곳을 향해 파고들었을 때 지안은 가까스로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만.”

지안은 짙푸른 야경 앞에 텅 비어있던 의자 하나를 떠올렸다.

“…그만해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 채 다듬어지지 않은 호흡에 목소리가 떨렸다.

손끝에 닿은 단단한 어깨가 차갑게 식어갔다. 불도저처럼 돌진하던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지안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정후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둔부에 와 닿는 그의 중심은 이미 흉포하게 일어난 채다. 미끈해진 귀두가 당장이라도 뚫고 들어갈 듯 힘을 받아 꺼덕이고 있었다.

“후….”

남자의 흉곽이 두어 번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말없이 지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뼈째로 삼켜버릴 듯한 눈. 새카만 눈동자 안엔 채 해갈되지 않은 열기가 들끓어 올랐다.

정후는 그녀를 들어 욕조맡에 앉힌 뒤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힘이 풀리지 않은 전신엔 근육이 사납게 불거져있었다.

크고 넓은 등, 군살 하나 없는 허리와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타고 쉴 새 없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정후는 문 옆에 걸린 배스 로브를 갖고 와 그녀의 몸을 덮었다.

“나가 있어.”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서늘한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정후 씨….”

정작 말을 뱉어낸 지안이 머뭇거리자, 정후는 그녀를 옆으로 안아 올렸다. 우북한 음모 사이로 아직도 핏줄이 불거진 그의 중심이 보였다.

정후는 지안을 침대 위에 눕힌 뒤 짧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난 다른 방 가서 잘 테니까.”

빠르게 샤워실로 걸어가는 뒷모습.

쾅, 하고 매섭게 닫히는 문소리.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지안은 눈을 꼭 감았다.

같이 있어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남편은 늘 멀리 있는 기분이었다.

둥글게 말린 몸이 따뜻한 품을 찾듯 옆을 향해 파고들었지만, 그곳은 내내 텅 비어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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