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양팔을 쭉 뻗어 찌뿌듯한 몸을 폈다. 그런 해서를 룸 미러로 살피며 난처한 표정을 지은 택시 기사가 말했다.
“눈 때문에 저 집까지는 못 올라가겠는데, 아가씨.”
“그럼, 여기서 세워 주세요. 어차피 저기가 끝 집이라 차 돌리기 힘드실 거예요.”
“그래요. 그럼 조심히 올라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수고했어요. 나도 이렇게 장거리는 또 처음이네.”
“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해서는 동트는 지붕 너머를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하얀 입김이 쉼 없이 새어 나온다. 얕은 언덕길을 오를수록 대나무 숲을 병풍처럼 품은 시골집 하나가 가까워졌다.
해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2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담양 집을 찾았다.
이곳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온 가족이 모이는 가족 별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대나무 숲 자락에 지어진 목조 주택으로,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아는 이가 아니면 찾아오기 힘든 곳. 이곳은 주소지 등록만 되어 있을 뿐, 길이 복잡해 내비게이션이 도리어 방해가 되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 무용수였던 할머니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곳. 오늘의 제게 꼭 필요한 곳이었다.
털 장화에 눈이 들러붙어 벌써 발가락 끝까지 시려 온다. 해서는 더욱 서둘러 현관 앞에 섰다. 두 번째 돌절구 옆 화분을 살짝 들자 그 아래 깔려 있던 열쇠가 나온다.
도어 록을 쓰는 것이 번거롭다며,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열쇠가 필요한 자물쇠를 쓰셨다.
“와, 그대로네.”
해서는 짧아진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2년이나 방치되었음에도 생전에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할머니의 집 안은 고요와 청결 그 자체였다.
그녀가 좋아했던 할머니 향기로 가득한 곳.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틀자, 통유리로 된 창 너머 푸릇한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분다.
감상도 잠시, 일단 보일러를 틀어야 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집 안이 냉골이었다.
발을 구른 그녀는 보일러 컨트롤러를 찾아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거실 벽 한쪽에 놓인 펠릿 난로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이곳에서 혼자 지내며 연료를 준비할 수는 없을 테니, 쉽게 다룰 수 있는 난방 기구가 필요하다던 삼촌의 주장이 생각났다.
이건가?
해서는 사료 포대같이 생긴 것을 열어 그 안에 든 연료를 난로에 넣었다. 사용법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눈대중으로 가능할 것 같았다. 펠릿 난로와 씨름을 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한참을 고생한 끝에 제대로 붙은 불씨를 보자 그간의 긴장이 확 풀렸다.
거실이 따뜻해진 뒤에야 해서는 소파에 앉아 곱게 개어져 있던 담요를 둘렀다. 따뜻한 온기를 폐부 가득 삼키자, 그제야 숨이 쉬어진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부산에서 벌어진 집단 마약 파티에 관한 기사가 나간 뒤 일주일 만이었다.
부산에서의 일주일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매일매일 밤마다 그의 손을 잡고 해안가를 걸었고, 삼시 세끼를 함께했다. 평범한 나날이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달콤한 낮이 지나고 선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오면 그는 종종 응접실로 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거나, 라운지로 내려가 방문객을 만나곤 했다. 한국에 체류 중인 줄리오 파렌티와 호텔 방 한쪽에 마련된 홈 바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신 날, 그가 말했다.
“유럽으로 넘어갈 생각이야.”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미루고 미뤘던 일. 그래도 네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어.”
그는 멍하니 바라보는 해서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나도, 갈래.”
“내가 어디로 갈 줄 알고.”
“그걸 꼭 알아야 해?”
단호한 그녀의 말에 그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두 눈을 가늘게 접었다.
“나 지금은 꼴이 이렇지만, 세계 무대에서 러브 콜 받는 발레리나야. 머리카락 좀 짧아졌다고 나 거부할 발레단 없어. 그러니까 나… 다시 시작할래. 다시 시작해도 나 윤해서잖아. 악바리 근성, 먹히겠지.”
그 말에 이두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그렇게 종종 머리를 쓰다듬거나 해서를 품에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애 취급하지 말라며 투정도 부려 봤지만, 돌아온 건 담배를 끊어 보겠다며 진종일 달고 사는 알사탕의 달콤함뿐.
부산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던 해서는 커다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전, 수사를 마치고 집행 유예 상태가 되어 경찰서를 나온 서 단장은 제일 먼저 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해서야, 내가 아무리 쓰레기여도 네 노력을 돈으로 산 적은 없어. 그건… 몇 안 되는 내 진심이기도 하고.
“그 진심이 안 느껴져요, 단장님.”
- 그러지 말고 한국에 있자. 응? 내가 어떻게든 제너럴 발레단 다시 일으킬 거야. 나 정신 차렸어, 그러니까, 도와줘.
해서는 그저 묵묵히 서승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한 시간 가까이 푸념처럼 이어진 서승현의 변명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해서는 ‘안녕히 계세요’란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얗게 내리는 눈 때문이다.
대나무 숲에 내리는 눈.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 숲에 눈이 내리는 걸 본 건 열 살 때였다.
발레를 그만두고 싶다며 칭얼거리던 제 손을 이끌고 할머니는 숲으로 향했다. 대나무가 빙 둘러 자라난 작은 공터에서 본 할머니의 춤사위는 눈물 날 만큼 아름다웠다.
대나무 숲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소리가 음악이고, 공터에 쏟아지는 볕이 조명이었다.
60대 노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우아했던 몸짓. 그날, 첫눈이 내렸다. 잔머리 한 올 없이 단정히 묶은 할머니의 머리 위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꼬마의 콧등으로, 사시사철 푸릇한 대나무 사이사이로.
해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한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 이 순간을 이겨 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편의점에라도 들렀어야 했다는 걸 깨달은 건,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세 번 연속 울린 뒤였다.
‘먹을 거 하나도 없는데.’
결국 챙겨 온 물로 대충 곯은 배를 채운 그녀는 소파 위에 털썩 엎어져서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해서는 먼저 이곳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정리할 거라곤 옷 가방 하나뿐인 저와 달리, 이두이는 많은 것을 버려야만 했다. 그래서 해서는 그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기다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으니까.
***
- 짐 보냈어. 정말… 다시 생각하면 안 되겠니? 엄마가 미안해, 응?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용 공부하러 가는 거잖아요. 어차피 당장은 무대에 서지도 못하는 데다가, 서 단장 일 때문에 평판도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제 걱정 하지 마세요. 엄마 원망 안 해요.”
부산에서 올라온 뒤, 지숙은 길길이 날뛰며 패닉에 가까운 히스테리를 부렸다. 하지만 부산 마약 파티 사건에 박인호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는 넋 나간 것처럼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목매던 지숙에게 사윗감으로 점찍었던 박인호의 추락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더불어 아버지가 보인 이두이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지숙의 고집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 그래도…. 엄마랑 데이트도 하고, 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다가 출국하지. 담양에서 곧장 나간다고 통보하면 엄마 마음이 어떻겠어.
“미안, 방학 때마다 들어올게요. 지금은 나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어요.
- 어휴…. 그래, 알았어. 그래도 공항에선 꼭 보는 거야. 배웅 나갈 테니까, 엄마 보고 가.
“응, 그럴게요. 엄마도 식사 거르지 마세요.”
해서는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지숙과의 통화를 마친 뒤, 눈 쌓인 대나무 숲을 응시했다. 담양에서의 하루하루는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흘렀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마을을 산책하고, 친해진 동네 백구와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그럴 때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감자와 고구마 같은 것을 포슬포슬하게 삶아 내어 주곤 하셨다.
고작해야 며칠이었지만 그녀는 꽤 만족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폐부까지 깨끗해지는 듯한 찬 공기를 맡고 장독에서 꺼낸 와인에 얻어 온 음식들을 곁들이는 하루는 제법 괜찮았다.
그러다가 못 견디게 외로운 시간이 찾아오면, 유난히 그가 보고 싶었다.
“금방 데리러 갈게.”
금방이라더니, 벌써 일주일째거든?
혀를 찬 해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해 질 무렵의 대나무 숲 안으로 들어갔다.
외진 시골이어서인지 밤이 이르게 찾아온다. 겨우 4시밖에 안 되었음에도 저물어 가는 태양 빛이 대나무 사이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휴대 전화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쇼팽의 <레 실피드>가 가벼운 걸음처럼 고막을 간질인다. <레 실피드>는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이 쇼팽의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모은 발레곡이었다.
제목은 몰라도 들으면 절로 발레리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선율에 맞춰 해서는 가볍게 뛰어올랐다. 점퍼도 없이 얇은 셔츠 한 장에 레깅스를 걸친 가벼운 몸짓 위로 석양이 펴 발린다.
우아하게 뻗은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눈에 보일 듯한 곡선이 그려졌다. 쭉 뻗어 내는 그녀의 발끝은 흔들림 없이 꼿꼿했다. 공기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공터의 끝과 끝까지 오가는 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활처럼 휘어지는 허리, 새의 날갯짓처럼 자연스럽고도 유연하게 움직이는 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발끝까지.
찬 바람이 불어와 몸 구석구석에 맺힌 땀을 식힌다. 해서는 완벽하게 음악에 몰입했다. 얇은 플란넬 소재의 셔츠가 찰랑거리며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극도로 여성스러운 실루엣에 비해, 동작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잔근육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것과는 달랐다.
그러다가 음악이 바뀔 무렵, 다른 생각에 빠졌다. 숨이 차오르고, 점점 필요 없는 동작이 늘어난다. 고작 며칠 쉬었다고 벌써 몸이 굳기 시작하는 걸까? 얼핏 느낀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몸을 짓누른다. 회전하던 순간, 발등이 앞으로 꺾이며 균형이 무너졌다.
“악!”
빙그르르 돌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그녀는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한 번도 실수해 본 적 없던 동작에서, 처음으로 허망한 실수를 해 버렸다.
땀에 푹 젖어 하얀 김이 오르는 그녀의 몸이 얼어 가기 시작했다. 해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릎에 댔다. 이런 실력으로 프리마 발레리나의 자릴 얻었다니. 제가 단원들이었다 해도 분이 올라 잠을 설칠 만큼 어설프고 한심한 실력이었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 수 있으면 딱 좋겠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헛웃음을 연거푸 흘리는데,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놀란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어?”
안아 든 사람은 이두이였다. 해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만든 남자. 반가움과 동시에 찾아온 야속함에 심장 깊은 곳이 따끔거린다.
“지금 왔어. 그런데 넌 왜 이런 데 주저앉아 있어. 어디 다쳤어?”
고작 넘어진 것뿐이건만, 마치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심각하게 바라보는 이두이의 표정에 배시시 웃음이 난다. 해서는 그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왜 빨리 안 온 거야?”
“정리할 일이 많았어. 혼자 있느라 무서웠어?”
“아니. 나 친구 사귀었거든. 그래서 하나도 안 무서웠어.”
“친구?”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성인인 자신을 아이처럼 안고 성큼성큼 걷는 그의 어깨에 편안한 마음으로 기댔다.
마치 조금 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사이처럼 다정한 태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야속한 마음이 사라졌다.
마치, 단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었던 것처럼 이두이가 너무 좋았다.
“응, 친구. 진짜 귀여워. 좀 더 크면 엄청 잘생겨질 거야. 몸도 좋고, 뽀얀 게…. 와, 나 완전 반했다니까?”
어리광을 부리는 김에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비비자 말을 할 때마다 그의 피부가 입술에 닿았다. 아마 이 남자의 몸에서 가장 여리고 부드러운 곳일 테다.
“…어디 있는데.”
시큰둥하게 대꾸한 그가 마당에 놓인 평상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러곤 얇은 레깅스에 감싸인 그녀의 발목을 만지작거린다. 혹여라도 다친 곳이 있지는 않은지 걱정하는 투였다.
“저기.”
해서는 그런 두이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마당 입구를 가리켰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귀를 쫑긋 세운 백구 한 마리가 통통한 꼬랑지를 흔들며 뛰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녀석은 두이의 등에 앞발을 턱 올리며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평상 위로 뛰어 올라와 해서의 손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서 쓰다듬어 달라며 엉덩이를 어찌나 씰룩거리던지. 해서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녀석의 머리와 얼굴을 조물조물 쓰다듬었다.
백구에게 밀려나 커다란 앞발 자국이 남은 등을 비스듬히 돌아본 그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얘가… 네 친구라고?”
“응, 안 돼?”
“윤해서 친구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어휴, 하다 하다 개한테까지 질투하냐? 하나 언니 말대로 이두이 정말 성격 이상하네?”
해서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그가 대뜸 백구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러곤 능숙하게 품에 안은 채 마당을 가로질러 녀석을 대문 밖에 내려놓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누나랑 내가 할 일이 좀 있어서. 세 시간 뒤에 와, 간식 줄 테니까.”
당연히 개는 두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때마침 주인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나자 귀를 쫑긋 세운 녀석이 후다닥 뛰어 사라졌다.
돌아온 그가 황당해하는 해서를 다시 번쩍 안아 들더니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서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그의 턱과 입술에 계속해 입 맞췄다. 쪽쪽, 새가 쪼는 듯한 입맞춤에 결국 그도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씻자. 네 말대로 난 개한테도 질투하는 놈이라, 다른 새끼 냄새나는 꼴 못 보거든.”
“아니, 왜 그렇게 결론이 나?”
“그래서 같이 안 씻겠다는 거야?”
그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두이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으며 체향을 들이켰다.
“아니,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겨 줄 거지?”
***
분홍색이 된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로 깨물었다. 그럴 때마다 윤해서는 움찔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는 입술이 닿는 모든 피부에 자국을 남겼다.
“우리 해서…. 귀하게 생각해 줘서 고맙네. 자네한테는 큰 빚을 졌어.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내 욕심에 우리 해서까지 망가트릴 뻔했지 뭔가. 나 이제 정신 차렸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해서 좀 잘 부탁해.”
해서를 데리고 유럽으로 떠나겠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 윤홍주는 술에 잔뜩 취해 제 손을 꼭 잡았다. 날고 기는 정치인일지라도, 자식 앞에선 힘없는 아버지일 뿐이었다.
“해서, 우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
윤홍주는 그가 정상적인 출국을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로 인해 일 처리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윤해서와 헤어져 있어야 했던 일주일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줄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난로의 붉은빛이 실내에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든다.
따뜻한 체온이 맞붙으며 희미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두이는 잠든 해서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제 품에 안긴 작은 여자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척인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해서를 꽉 끌어안은 그는 어깨 너머 보이는 항공권 두 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시작이다. 이곳을 떠나 줄리오 파렌티와 합류하게 되면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윤해서가 위험해지는 일은 더 늘어나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울 테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언제라도 곁에 윤해서가 있다는 것.
13년 전, 버스 정류장에서 제 옆에 선 여자애를 보는 순간 거센 소나기 같은 감정이 쏟아져 내렸다.
시선을 빼앗겼고, 마음이 통제되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 버스 정류장을 찾았지만, 끝끝내 말을 걸지 못했던 여자애였다.
아찔하리만치 숨 막혔던 그날, 그리고 지금.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보았다.
“사랑해…. 윤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