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죄송합니다.”
해서는 세현에게 90도로 허릴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당황한 세현이 두이의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원래 자주 오해받는 편이고, 어제는 아예 여장을 한 거였어요. 일 때문에요.”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너무 예뻐요.”
“하하, 네…. 이거 칭찬 맞죠? 저 남자 맞습니다.”
김세현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발이 아니라, 진짜 머리카락이었다. 헤비메탈에 관심이 많은 그는 긴 머리카락을 갖고 싶어서, 벌써 7년째 기르는 중이라고 했다.
거기에 예쁘장한 이목구비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했고, 170cm 정도의 키에 마른 체구도 그를 여자로 보이게 했다.
해서는 신기한 눈빛으로 세현을 관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이가 해서의 눈을 가리더니, 의자를 홱 돌려 앉힌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만 좀 봐. 정들겠어.”
“뭐야, 질투해?”
“너 얼빠잖아.”
그는 짓궂게 웃으며 해서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른 김세현이 다이닝 테이블 위로 묵직한 스포츠 백을 올리며 말했다.
“팀장님, 세팅하셔야죠.”
두이는 해서에게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 뒤, 가방 안에 든 총기와 초소형 카메라 등 각종 장비들을 꺼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지금껏 종종 사용했던 모델들을 살핀 그는 스스럼없이 장비들을 착용했다.
“기기들은 승선 후 3분 뒤부터 작동합니다. 카메라는 슈트 버튼과 행커치프, 팀장님 벨트에 심어 놓았고 넥타이핀과 커프스 링크엔 녹음기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건 벨트 착용이 안 돼서 삭스 가터에 채우셔야 하고요.”
세현의 말에 가방 속에서 삭스 가터를 꺼내 든 두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 스타일 아닌데.”
“그래도요.”
“김세현 씨는 준비 안 합니까?”
“에! 예, 해야죠. 다행히 치마 아니고, 바지 정장 입습니다. 하이힐을 신어야 하지만 치마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잘 어울리겠네.”
“놀리지 마시죠? 아주 죽겠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김세현은 소파에 놓인 쇼핑백 안에서 여성용 정장과 하이힐을 꺼내 반대편 방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돌아본 해서가 커프스 링크를 채우는 두이에게 다가와 넥타이 매듭을 매어 주기 시작했다.
“무슨 일 하는지 안 물어봐도 알겠어. 다치는 거 아니지…?”
“다칠지도 모르지. 근데 죽진 않아.”
죽지 않는다는 말에 기가 찬 표정을 지은 해서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너도 사람이거든? 제발 조심해…. 다치지 마.”
그렇게 걱정이 되는 건지, 시선을 내리깐 그녀의 속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두이는 상체를 기울여 해서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입술에 닿는 감촉이 마치 실크처럼 부드럽다. 눈뜨자마자 룸서비스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주문한 그는, 윤해서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낮잠이 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안도하듯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사랑스럽다는 표현 이상의 무언가가 가슴속을 간질거리게 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제 손과는 다른 말랑말랑한 피부 때문일까.
입술이 닿을 때마다 신기하리만치 불안이 가라앉고, 지금껏 자신을 괴롭혀 온 고민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왜 밀어냈을까, 왜 겁냈을까. 그냥, 온 마음을 다해 지키면 될 일인데.
“이따가 나 나가고 나면, 손님이 올 거야. 너 지키려고 오는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나를 지켜? 왜?”
순간 겁먹은 두 눈이 커다래진다. 두이는 해서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정신 나간 미친놈들이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나 안 예뻐.”
“예뻐. 제일 예뻐.”
예쁘다는 말이 듣기 좋았는지 입술을 삐죽거린 그녀가 웃음을 꾹 참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해서는 두이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짙어지고, 자잘한 열기가 끓어오를 때였다.
“흠흠, 저기 팀장님. 저 준비 끝났습니다만.”
고개만 빼꼼히 내민 김세현이 주말을 강탈당한 회사원처럼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온다.
해서는 하이힐조차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현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감탄하지 마세요. 쪽팔리니까.”
“와…. 진짜.”
“예쁜 거 압니다, 저도.”
“놀리는 거 아니에요.”
해서는 싱긋 웃으며 두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러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뱉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다녀와서 설명해 줘. 기다릴게…. 누구처럼, 도망 안 가.”
“도망?”
“그래, 이 모 씨가 의외로 겁이 많더라.”
실소한 두이는 해서의 손목에 입술을 누른 뒤, 권총을 챙겼다. 비장한 눈빛을 한 세현이 두이의 팔짱을 낀다. 그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지만, 해서는 태연했다.
“기다려.”
그의 말에 해서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녀를 두고 나서는 걸음이 무거웠다.
이번 크루즈의 콘셉트는 커플이었다. 파트너 없이는 참석할 수 없다는 조악한 룰까지 만든 놈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정말로 KING을 사칭한 최우재일지, 아니면 또 다른 세력일지.
호텔을 나선 그는 선착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너머 호화롭게 반짝이는 크루즈선을 발견했다. 어둠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검푸른 바다 위에 뜬 크루즈선의 화려함에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레드 카펫까지 깔린 선박 입구. 온갖 사치품으로 도배한 이들이 각자의 파트너를 대동한 채 배에 오른다.
두이는 제 팔짱을 낀 김세현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에 파랗게 질린 김세현이 최대한 작게 중얼거렸다.
“웃지 마십시오, 팀장님. 죽을 맛이니까.”
“김세현 씨는 이번 임무 중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로.”
“예에.”
“그리고…. 내가 부탁한 건?”
이두이의 시선이 검게 가라앉는다. 정면을 노려보는 그를 올려다본 김세현이 휴대 전화를 꺼내 화면을 내보였다.
이어 걸음을 내디딘 그가 재킷의 라펠을 툭 건드리자, 귓속에 심어 둔 이어폰에서 본부의 무전이 흘러든다.
- 작전 시작합니다.
***
해서는 창문 너머 반짝거리는 크루즈선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화려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길 법도 하지만 지금 그녀는 들썩이는 분노를 짓누르는 중이었다. 귀에 댄 수화기 너머에서 모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쏟아진다.
- 엄마는 너 믿어. 빨리 돌아와!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이 팀장도 그래. 내가 그렇게 잘 말했는데, 어떻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니? 안 되겠다. 바꿔! 그 새끼 바꾸라고!
소파에서 일어난 해서는 침실 방향으로 걸으며 뇌까리듯 질문했다.
“엄마, 이두이한테 뭐라고 했는데? 뒤통수를 쳐…? 나 몰래 이 팀장 만났어요?”
- 몰래? 얘, 허구한 날 집에 드나들었는데 뭘 몰래야. 너…! 어떻게 그런 남자랑 남사스러운 짓거리를 할 수가 있어? 내가 박 프로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이두이가 어때서.”
- 해서야, 너 정말 왜 이래? 이두이가 어떻냐니. 가진 거 개뿔도 없는 놈한테 빠져서 뭐 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서 그 남자가 얼굴 빼고 볼 게 뭐 있니? 돈이 있니, 부모가 있니! 게다가 경호원? 삼류 건달이랑 뭐가 달라!
“엄마…. 함부로 말하지 마요. 그래서 엄마는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딸 실력을 못 믿어서 돈으로 서 단장 매수하고, 온갖 검소한 척은 다 하면서 뒤로는 명품 매장 VIP 대우받잖아. 그게 더 창피하고 소름 끼치는 거 몰라요?”
독하게 쏘아붙인 말에 정지숙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해서의 독설은 끝난 게 아니었다.
“속물인 것도 정도껏 티 내야지. 어떻게…. 내 인생을 아직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있어?”
지숙이 두이를 만나 무슨 말을 퍼부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존심을 있는 대로 뭉개 놓곤, 너를 위해서라며 위로했겠지. 견고하고 순수한 그의 자존심을 더러운 언어들로 짓밟았을 것이다.
해서는 지숙을 사랑하지만 이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모님이 만들어 낸 기준과 조건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 내지 못하면 패자가 된 것 같아서 항상 마음이 힘들었다.
-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네 아버지가 보통 분이시니? 삼선에 성공하면 대선에까지 나갈 분이셔. 그런데 네가 이렇게 막살면 어쩌자는 거야! 부모한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흐트러진 침대를 바라보는 해서의 눈빛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억울한 마음과 함께 반항심이 들끓었다.
“엄마, 대통령이 되고 싶은 건 아빠잖아요. 난 대통령 되고 싶지 않아요. 난 발레리나 할 거야. 그러니까 도움이 되지 못하면, 나한테 피해는 주지 마요.”
- 윤해서! 당장 올라와, 당장! 당장 안 오면, 그 새끼 아주 가만 안 둘 거야! 박 프로가 알면 어쩌려고…!
“그만 좀! 그 박인호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 새끼가 얼마나 쓰레긴지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해? 난 관심 없다고요! 날 좀 그냥 둬요, 제발!”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른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가 난 지숙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곤 휴대 전화를 집어 던지려다 멈칫했다. 허공으로 들어 올린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속 시원하게 던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속이 텅 비워진 것 같아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속물이어도, 억척같은 면이 있어도, 엄마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에 배신당한 것처럼 속이 쓰리다.
침대 위에 주저앉아 먹먹한 마음으로 눈가를 누르고 있던 그녀의 귓가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가 나 나가고 나면, 손님이 올 거야. 너 지키려고 오는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혹시, 두이가 보낸 사람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긴장한 해서는 휴대 전화를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환하게 불 켜진 응접실, 바다 방향으로 난 커다란 창문 앞에 낯선 여자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부산 앞바다의 풍경을 눈에 담던 여자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튼다.
“어?”
꼿꼿하면서도 또렷한 눈동자,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안녕하세요? 윤해서 씨.”
간신히 문설주를 움켜쥔 해서는 이두이와 지독하게 닮은 여자를 보며 놀란 마음에 입술을 가렸다. 그러자 소파 쪽에서 낮고 유려한 이탈리아어가 들려왔다. 손님이 더 있는 줄 몰랐던 해서는 소파에 앉은 근사한 외국인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저….”
“응, 나 이두이 누나. 이하나라고 해요.”
“아, 알아요. 하나 언니…?”
언니라는 호칭에 멈칫한 이하나가 작게 탄식하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언니래. 들었어, 줄리오?”
“영어로 해, 하나.”
[하, 나 언니란 소리 몇 년 만에 듣는 건지 알아?]
발까지 동동 구르며 줄리오의 어깨를 잡아 흔든 하나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그러자 하나의 손등에 키스한 줄리오가 윤해서를 흘깃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이탈리아어로 무어라 말했지만, 해서가 알아들을 수준이 아니었다.
“저…. 두이는 없는데….”
“알아요. 이두이 연락받고 온 거거든. 와, 근데 발레리나라면서요?”
“네? 네.”
“어휴, 볼수록 이두이한테 아까워. 그 자식은 연애 한 번을 안 해 놓고, 단번에 저런 귀요미를 꼬시는 게 말이 돼?”
이하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덩달아 그 기분 좋은 에너지에 휩쓸린 해서의 얼굴에 봄볕 같은 미소가 감돈다.
“꼬신 건… 저예요. 제가 두이 꼬셨어요.”
들릴 듯 말 듯 흘려 낸 말에 이하나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정말? 진심이에요? 이두이 그 위험한 놈을 꼬셨다고? 해서 씨가?”
“네. 고등학교 다닐 때, 첫눈에 반했었거든요. 꼬시는 데만 13년 걸렸어요.”
입을 떡 벌렸던 이하나는 이제야 생각나는 게 있는지 고개를 몇 번 주억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아, 맞아.’ 하고 중얼거리며 입가를 문지르는 모습이 영락없이 이두이의 누나였다.
이두이가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한 가족이라고 했던 여자다. 해서는 이하나를 직접 본 지금, 그가 부러워졌다. 제게도 이하나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성격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해서 씨, 겁이 없네.”
해서는 의문을 담아 하나를 응시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두이도 그렇게 말하던데….”
“말 그대로예요. 이두이가 진심이 되면, 그거 진짜 골 때리거든. “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윤해서 씨, 죽는 거 안 무서워요?”
“죽는 거…. 무섭죠. 근데 이젠 걔 없이 사는 게 더 무서워요. 그래서 제가 질척거리는 중이고요.”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딱히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를 말없이 응시하던 이하나가 다정하게 웃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키가 비슷한 해서에게 속삭였다.
“집착녀, 완전 매력적이야.”
그러더니 소파에 앉은 남자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입꼬리와 눈매를 부드럽게 휜다.
“내 남편인데, 줄리오 파렌티라고 해요. 저 자식도 한 집착 하거든. 물론, 나도. 그래서 난 집착력 쩌는 사람들이 좋아요. 그래야 뭐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절대 포기를 모르거든.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요.”
해서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기분 좋은 이하나의 미소에 덩달아 가슴이 들뜬다.
그때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하나를 불렀다.
그러자 현관 방향을 돌아본 이하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비릿하게 웃는다.
“정말 이두이 말이 맞았네…? 해서 씨는 방으로 들어가요. 우리 귀여운 해서 씨는, 예쁜 장면만 보는 거로.”
생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가죽 장갑을 손에 끼는 순간 이하나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었다. 해서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하나의 눈빛은 마치 사냥을 준비하는 포식자처럼 날카로웠다.
“자…. 어디 간만에 쓰레기들 면상 좀 볼까?”
***
행사가 열리는 크루즈에 승선한 두이는 곧장 갑판으로 향했다. 그러자 끊어졌던 신호가 살아나며, 서명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지금부터 싹 다 스캔해. 모두 현행범으로 넣어야 하니까, 현장 잡는 대로 신호 주고.
그는 찬 바람이 부는 갑판을 한번 돈 뒤,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력가들의 행사답게 서빙되는 샴페인은 고가였고, 선박을 채운 예술품들은 소더비와 크리스티나를 들썩이게 했던 작가들의 것이었다.
유명 프로듀서가 각색한 클래식 팝이 흘러나오는 행사장 곳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들의 직업적 경계는 모호했다. SNS의 유명 인플루언서와 모 대기업의 자녀들, 혹은 중견 기업의 대표나 운동선수 같은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무리를 지었다.
정치, 경제, 스포츠, 연예, 주식과 코인 그리고 파트너. 이들에게 파트너란 값비싼 명품 백, 혹은 고급 시계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두이는 이들에게 새롭고 신기한 존재였다.
미국의 성공한 재미 교포 사업가 제이든 리.
김세현은 며칠 전, 지라시를 통해 제이든 리로 추정되는 인물의 입국 정보를 흘렸고 이 중에는 그 내용을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면과 인터넷상으로만 존재하던 환상의 인물을 실제로 접한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훑는 흥미 어린 시선을 받으며 파티의 호스트를 찾아 움직이던 때였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서로를 경멸하고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마치 아군인 것처럼 구는 거.”
어딘가에서 샴페인 잔을 들고 나타난 최우재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선다. 최우재는 두이의 곁에 있는 김세현을 위아래로 훑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내가 생각한 파트너가 아닌데….”
두이는 김세현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간결한 눈짓을 보낸 뒤, 크림색 슈트로 화려하게 멋을 낸 최우재와 마주 섰다. 가뜩이나 시선을 끄는 두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에, 너도나도 대화에 합류하고 싶은 표정으로 주위를 맴돌았다.
하이힐을 신고도 복잡한 행사장을 잘도 활보하는 김세현을 턱 끝으로 가리킨 최우재가 물었다.
“우리 해서는 어디에 두고 저런 뉴 페이스와 나타났습니까?”
그 태연자약하고 뻔뻔한 질문에, 두이 역시 똑같이 답해 주었다.
“우리 해서는 지금 호텔방에서 편안한 한때를 보내고 있죠. 몸이 많이 상해서. 체력도 그렇고.”
“아아, 어제도 쓰러졌었는데…. 놀랐습니다, 우리 해서 원래 그렇게 약한 애 아닌데.”
“그쪽이 호스트인가?”
천장은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조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샴페인을 한 모금 삼킨 최우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이 쓰레기들을 모아서 뭘 할 거라고 생각하죠?”
“글쎄, 할 수 있는 게 워낙 많아서.”
“가령, 내가 KING을 사칭해 약을 유통한다거나. 그런 걸 말하는 겁니까?”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핵심을 꼬집은.
“본인 입으로 그렇게 떠벌리면, 안 오글거리나?”
“KING이란 이름은 참 써먹기가 좋죠. 약쟁이들에겐 신뢰의 상징이고, 경찰들에겐 맛 좋은 먹잇감입니다. 그런데 그쪽은 진짜 KING이 누군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역시나 최우재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제게 접근해 말을 걸고, 정보를 흘린다고?
“그래서. KING을 사칭한 이유는?”
“우리 정확하게 합시다. 사칭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았던 이정수의 여죄를 알린 거죠. 이정수는 죗값을 너무 덜 치렀거든.”
“이미 구속된 범죄자의 여죄를 알리는 정의의 사도가 되겠다?”
“그럴 리가. 그저 난…. 내 걸 망가트린 놈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망가트리려는 사람도.”
최우재는 무심한 눈길로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을 훑었다. 순간, 갑판에서 축포가 터졌다. 밤하늘 위로 쏘아진 수만 개의 불꽃이 어둠을 밝히고,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토록 화려한 행사였던가? 숨은 목적을 생각하면 철저한 신원 확인을 통과해야지만 초대받을 수 있는 미공개 행사여야 했다.
하지만 주변 소리를 모두 잡아먹는 불꽃을 쏘아 올렸다는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 이두이의 날카로운 눈빛이 기민하게 주위를 훑는다.
위화감을 느낀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 야! 함정이야!
리시버에서 서 부장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축포 소리에 맞춰 어딘가에서 총성이 울린다. 한두 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오히려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을 응시하며 뻣뻣한 목을 좌우로 꺾었다.
- 야, 이두이! 빨리 나와, 철수해!
“부장님, 철수하기 전에 질문 좀 해도 됩니까?”
- 뭐? 와 씨, 이 돌아이 새끼야, 지금 그게 할 소리냐!
형형색색의 불꽃은 점점 덩치를 키우고, 더욱 화려해져 갔다. 돌아선 두이는 살짝 질려 있는 최우재를 노려보며 서 부장에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이번 임무 끝나면, 윤해서는 어떻게 되는 거였습니까? 부장님은 이정수를 이용해 정말로 윤홍주를 치려 한 겁니까? 그게…. 상부의 뜻입니까?”
-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이거 빨리 녹음 중지해! 이 새끼야! 현장 스캔하라니까, 최우재랑 뭐 하는 짓이야!
서 부장은 사방에 외치며 당혹스러운 목소릴 냈다.
“현장 스캔은 이미 제 파트너가 끝냈습니다. 단, 개인적인 소장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변수가 있지만요.”
- 야, 너희….
“대답해 보십시오. 이번 일, 누가 뒤집어쓰는 거였습니까. 윤홍주입니까?”
- 이두이, 명령이야. 지금 당장 복귀해.
“윤해서 스토킹 이용해 윤홍주 움직이는 작전, 누가 짰습니까.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새끼는 파티 중간에 한국을 뜰 생각이었더라고요. 워싱턴행 편도를 두 장 끊었는데, 어째서…. 제가 한창 작전 중일 때 윤해서를 데리고 한국을 뜨려 한 건지도 궁금하네요.”
이두이의 말을 들은 최우재가 픽 웃더니 껌을 씹듯 입 안을 움직였다. 말 없는 서명택과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최우재의 반응에 그는 확신이 들었다.
“최우재 씨, 궁금해서 애가 닳은 얼굴이네. 다 알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여유로운지 알고 싶어요?”
“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두이 씨가 여기서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지금쯤….”
“왜. 해서가 걱정돼? 네가 왜 윤해서를 걱정하지? 해서한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헛웃음을 흘리며 창백하게 질린 최우재가 천천히 시선을 튼다. 놈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끝도 보이지 않는 건물 꼭대기였다. 어둠에 휩싸인 그 어딘가를 응시하던 최우재의 입술이 뒤틀리고, 주먹에는 힘이 들어간다.
“이번 설계는 하마터면 최우재 씨의 뜻대로 흘러갈 뻔했습니다. 이상하다 했지…. 돈 펑펑 써 가면서 작전하는 거, 우리 스타일 아니었거든. 게다가 굳이 박인호의 파트너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윤해서를 빼돌린 것도 수상하고.”
두이의 여유로운 말투에 한쪽 손으로 입가를 문지른 최우재가 한 걸음 다가와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정수가 KING이라는 증거를 내가 주기로 했거든요. 당신의 상관은 말이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더라고. 재미있지 않습니까? 돈으로 움직이는 국가라니.”
역시 그랬나. 돈이 움직인 건 비단, 조직뿐만이 아니었다.
최우재의 멱살을 잡아 바다에 처넣고 싶은 걸 꾹 참은 그가 건너편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노려보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당신이 조작된 증거를 주면, 위에서 어떻게 쓸지 알고는 있었나?”
“그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짐짓 태연히 어깨를 으쓱하는 최우재를 보는 이두이의 입술이 뒤틀린다.
“네가 빼돌리려 했던, 윤해서. 네 손으로 죽일 뻔한 거야.”
싸늘하게 뇌까린 그가 입술 끝을 둥글게 휘어 올렸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주먹을 풀고 목을 좌우로 늘렸다.
그제야 충격에 빠져 있던 최우재도 패거리를 만들어 다가오는 박인호를 발견하곤 차갑게 조소했다.
“나한테 할 화풀이, 저놈한테 하는 건 어때요.”
“윤해서, 손끝 하나 못 건드려.”
“이미 늦었다고 생각 안 해요?”
“실수했다고는 생각 안 하나 보지?”
최우재는 경련이 일어나는 미간을 문질렀다.
이두이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도 있었다. 허우성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한 건, 자신이 손을 쓴 게 아니라 서명택 때문이다.
제가 허우성을 만나고 나오자마자 들이닥친 서명택을 피해 도망치던 허우성이 베란다 난간에서 발을 헛디뎠다. 아마 배관을 통해 지상으로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졸지에 최우재는 사건의 증인이 되고 말았다. 약점을 쥐게 된 그는 서명택에게 제안을 했다. 이정수의 여죄를 모두 증명할 테니, 이두이의 정체를 알려 달라고.
거래는 쉽지 않았지만, 결국 돈이 이겼다.
최우재는 이번 설계의 중심인물로 이두이를 투입해 달라고 했다. 윤해서의 첫사랑을 그녀 앞에서 무너트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쾌감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두이를 투입해 달란 말에 난색을 표했다. 절대 그런 일에 쓸 수 없다며 작전을 어그러트리려 했지만, 윤홍주가 블랙 머니를 움직여 이정수를 도왔단 증거가 필요했던 그들은 결국 최우재의 손을 잡았다.
완벽했다. 지금쯤이면 자기 부하들이 윤해서가 묵는 방을 덮쳐 그녀를 데리고 공항으로 향했을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작은 문제가 지금 그의 눈앞에서 발생했다.
이두이가, 이 모든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걸 알면서도 이토록 여유롭다는 것이 최우재의 평정을 짓밟았다.
“와아, 이게 누구야? 이 행사 아무나 올 수 없는 거라더니, 아니네.”
어느새 다가온 박인호는 대략 일곱 명이 넘는 자신의 패거리를 믿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두이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멱살을 잡으려 했던 박인호의 앞을 막은 건 최우재였다.
어디선가 하나둘 나타난 최우재의 부하들이 박인호 패거리를 에워싼다. 분노가 들끓는 표정으로 최우재가 쓴웃음을 지으며 경고했다.
“함부로 나대지 마시고, 술이나 처드시죠. 이쪽 일엔 관심 끄는 게, 그쪽의 무병장수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 뭐 이런 개새…!”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말 듯 위협만 가하는 박인호의 꼴은 우습다 못해 창피했다. 그것도 주위를 에워싼 살벌한 덩치들의 눈치를 보며 꼬리 내린 개처럼 구는 것이.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 있는지, 최우재의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툭툭 두드린 박인호가 이두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런 놈 상종하지 마요, 형씨. 멀쩡하게 생긴 미친놈이니까. 씨발, 어쩐지 윤해서가 존나 싸구려같이 굴더라니.”
박인호가 내뱉은 말에 두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박인호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최우재는 가까이에 있는 대리석 벽에 그대로 내다 찍었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박인호의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최우재는 그대로 박인호의 머리통을 대리석 벽에 찍어 누르며 잔인하게 읊조렸다.
“우리 박 프로…. 아가리가 너무 싸구려시네.”
피를 철철 흘리는 박인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숨만 간신히 내뱉으며 경련하는 박인호의 머리채를 놓자, 피가 튀어 엉망이 된 최우재의 모습이 보였다.
박인호가 당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이 뒤늦게 뛰어들어 그를 부축했다. 그러곤 구급차를 부르라며 요란 법석을 떨었다.
여전히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을 한 최우재는 이를 갈며 이두이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순간 이두이가 손을 뻗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최우재의 이마에 총구가 닿았다. 흥분으로 씩씩대던 최우재의 숨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하, 하하…. 왜, 이번엔 내 머리통을 날리시려고?”
“안내해.”
“뭐?”
“이봐, 호스트 씨.”
한 걸음씩 물러난 최우재는 사람 같지 않은 놈의 살기에 짓눌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사고를 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가 그 껌이라는 물건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거든…?”
최우재는 말이 없었다. 그저 방아쇠에 올려진 이두이의 손끝이 실수하지 않길 바랄 뿐.
“그러게 사람의 트라우마를 함부로 자극하면 안 되는데, 실수했어.”
말끝을 흐린 그가 고개를 튼다.
그곳엔 포도 한 송이를 든 채 통째로 오물거리는 세현이 있었다. 선착장에 세워져 있던 차들이 일제히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요란한 소리에 놀란 이들이 너도나도 배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이미 출구는 봉쇄된 상황.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헬기 소릴 들으며, 최우재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최우재의 독 오른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나… 설계했습니까?”
“네가 윤해서한테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으니, 나도 도리를 해야지.”
패배라는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거친 숨을 몰아쉬던 최우재가 돌연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그리고 그 순간 두이는 최우재의 얼굴 옆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름 끼치는 총성에 어수선했던 실내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최우재가 헛웃음을 흘리며 양손을 어깨높이로 들었다.
겁에 질려 숨만 몰아쉬는 최우재를 보며 이두이가 비릿하게 웃는다.
“공포탄이야, 새끼야.”
안도한 최우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선박 입구에 수십의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선두에 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남자의 외침이 선박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자, 자! 마약 파티가 벌어진다는 신고 받고 왔습니다! 다들, 손 머리! 이렇게 한자리에 어렵사리 모이셨는데, 우리 다 같이 사이좋게 조사받고 맛있는 콩밥 먹읍시다!”
***
해서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침실로 들어가서 기다리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제적으로 문이 열렸다.
제법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의 수는 대략 일곱. 해서는 그들의 선두에 선 김 실장을 보며 사태 파악을 끝냈다.
김 실장은 응접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방을 잘못 찾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들은 돌변했다.
허리춤에서 꺼낸 잔인한 날붙이들을 보는 순간, 해서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하나는 이들을 어린애 다루듯 손쉽게 제압했다. 해서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서 기절할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이 우락부락한 장정 일곱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두 명은 양쪽 어깨가 빠져 쓸 수 없었고, 세 명은 정강이가 부러졌는지 제대로 서지 못해 바닥을 긴다. 남은 둘도 더하면 더했지 차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몰골에 해서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줄리오, 얘네를 한국의 조폭이라고 하는 거야. 따라 해 봐, 조폭.]
[그만, 이하나.]
[아, 왜. 따라 해 보라니까?]
이하나는 줄리오를 앉혀 두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그 엉뚱함과 발랄함에 해서는 할 말을 잃고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얼굴을 감싼 손이 덜덜 떨린다. 여전히 피를 흘리며 입구에 무릎 꿇은 이들이 두렵기도 했다. 해서가 주저앉아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한 하나가 피 묻은 가죽 장갑을 벗더니 뛰어왔다.
“어머, 놀랐어요?”
“아, 네…. 조금요.”
“이런 거 자주 볼 텐데…. 음, 의사를 불러 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저 사람들 뭐예요?”
해서의 질문에 ‘으음.’ 하며 고민하던 이하나가 한 사람을 가리킨다. 거품을 물고 기절한 김 실장이었다.
“저 새끼 상관이 윤해서 씨 데리고 한국 뜨려고 했다던데. 내가 급하게 온 거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두이가 신신당부하더라고요. 윤해서 호텔방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게 하면, 남매의 정을 끊는다나 뭐라나. 하여튼 별 개소릴 다 하기에, 일정 중간에 한국에 들른 거예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투성이였지만, 해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려 충혈된 눈으로 끝까지 경청하는 해서가 귀여웠는지, 입술을 살짝 깨문 이하나가 줄리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여기 귀요미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될까?”
그에 벌떡 일어난 줄리오 파렌티가 새파랗게 질려선 격정적으로 단어들을 쏟아 낸다. 해서는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섞인 매력적인 어투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들 다 체포하십시오. 전 형사님께는 제가 연락할 테니, 특수 폭행으로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그 순간 입구에서 들려온 이두이의 목소리.
놈들의 몰골에 기가 찬 탄식을 흘리는 경찰들에게 지시한 이두이는 룸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말고, 주저앉은 해서를 발견했다.
“어, 그게 이두이. 음….”
의미 없는 변명을 준비하던 하나는 미간을 구기며 홱 돌아섰다. 그러곤 줄리오에게 쪼르르 달려가더니 쯧, 하고 혀를 찬다.
[자식새끼 키워 봤자 아무 소용 없다더니. 저거 눈 돈 것 보여? 이두이가 원래 저런 놈이야.]
[내 눈도 저랬어, 하나.]
해서는 줄리오가 하나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두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독하게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던 해서는 손을 내밀었다.
“이하나…. 대체 애한테 이런 꼴을 왜 보였어!”
고래고래 소리친 두이는 주저앉은 해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해서는 익숙하고 그리웠던 향기에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흑….”
이상하게 서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체향이다.
이 넓은 어깨도, 따뜻한 체온도. 무엇보다 거세게 뛰어 대는 심장 박동과 자신을 품에 안아 주는 이 품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었다.
“끝났어. 해서야.”
뒷머릴 쓰다듬은 두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해서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허벅지 위에 앉았다.
“너 괴롭히던 일들…. 이제, 다 끝났어.”
그 말에 저도 모르는 사이 쌓여 있던 마음의 짐이 와르르 무너진다. 동시에 둑이 무너진 듯 가둬 둔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제 안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문드러진 속에 고여 있던 썩어 버린 잔여물들이 말끔하게 증발했다.
왜 이두이였을까.
오래전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테니, 단 하루만이라도 나를 사랑해 주면 안 되냐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받은 것 없이 온몸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속삭여 주었다. 마땅한 일을 행하듯, 그렇게.
‘이두이’스럽게.
***
침대맡으로 아스라한 빛무리가 밀려든다.
잠들었던 건지, 눈을 떴을 땐 수평선 가장자리에 태양의 끝이 걸려 있었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킨 그녀는 스르륵 흘러내리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빛이 머문 나신 위에 새겨진 짙붉은 흔적들이 선연하다. 해서는 제 옆에서 잠든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엎드려 잠든 남자의 어깨가 가볍게 움직이더니, 속눈썹이 들린다.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마치 오래도록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해서는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발견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힌 시계는 이두이의 취향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뭘까?
멍하니 시계를 살피던 그녀의 허리춤으로 그의 팔이 감겨든다. 두이는 그녀의 배꼽에 입 맞추며 올라와 둥그스름한 젖가슴을 깨물었다.
“잘 잤어?”
잠이 듬뿍 묻은 목소리로 묻는 그에게, 대답 대신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은 그가 손목을 감싸며 그녀를 눕혔다.
“그냥, 오기로 산 거야.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났거든. 네 손목에 채워진 걸 보고 싶기도 했고….”
“꼭, 다이아몬드 박힌 수갑 같은 거 알아?”
“아, 그런가? 그래서… 너한테 채우고 싶었나.”
눈썹 끝을 비스듬히 올린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여전히 짧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흡수되었다.
“내가… 혹시 사랑한다고 한 적 있어?”
달뜬 숨을 삼키며 해서가 물었다.
“아마, 매일 말했을걸?”
그가 웃었다. 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자 얼굴을 감싼 그가 이마를 대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냥, 그랬어. 매일 너한테 고백을 들은 기분이야.”
멍하니 그의 말을 듣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해…. 이두이. 이제 매일 말해 줄게.”
“나도 해야 하나?”
“응. 너도 해야 해.”
“그래…. 그럼 해 줘야지”
사랑해, 라고 속삭이며 맞닿은 그의 입술이 비스듬히 호선을 그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내 곁에 네가 있어서.
마땅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