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

09

후드득 떨어진 땀이 연습실 바닥 곳곳을 미끄럽게 만든다. 간단한 동작부터 고난도 동작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는 윤해서를 지켜보는 윤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벌써 열흘째였다. 윤해서는 연습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결국 정지숙은 비상 연락망을 뒤져 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서가 연습실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윤희는 연습 벌레인 윤해서에겐 종종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윤해서는 누구보다 독종이었고, 노력으로 만들어진 천재에 가까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백화점에 들러 초밥까지 잔뜩 사 들고 온 윤희는 연습 중인 윤해서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단단히 느꼈다.

“윤해서!”

아마 두 시간 동안 100번쯤 불렀을까.

하지만 윤해서는 단 한 번도 그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에 맞춰 움직이는 윤해서의 움직임은 경이로울 만큼 완벽했다.

짧아진 머리카락 덕분에 더욱 가늘게 드러난 목선과 길고 우아한 팔다리. 서 있는 자세부터가 남다른 그녀의 몸짓은 괜히 프리마 발레리나의 칭호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방증 같았다.

같은 무용인으로서 질투가 날 정도로 완벽한 그 움직임에 윤희는 결국 부르는 걸 멈추고 가져온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도 어딘가 단단히 망가진 게 분명하다. 연습실을 나온 윤희는 그 앞에 의자를 놓은 채 앉아 있는 박대희에게 말을 걸었다.

“쟤 정말 열흘 동안 한 번도 안 나왔어요?”

그러자 휴대 전화에서 시선을 뗀 박대희가 연습실 창문을 흘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도 안 하시고, 간간이 음악 바꿀 때 물 드시는 게 답니다. 대회 같은 게 있는 겁니까?”

“아니요? 대회는 무슨. 단장님 구속된 것 때문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그런데 이두이 씨는 어디 가고 그쪽이 계세요?”

이두이를 아는 사람의 등장에 박대희의 눈빛에 경계가 스친다.

“팀장님을 아십니까?”

“네, 대학 같이 다녔어요. 엄청 유명했고요. 혹시, 그만뒀어요, 이두이?”

여자의 눈빛이 반짝인다. 특종을 잡은 기자처럼 양손을 모은 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뭐야…. 아, 이거 제 번호거든요? 해서 무슨 일 생기거나 저 미친 짓 멈추면 연락해 주세요.”

명함을 받아 든 박대희는 까딱 인사한 뒤, 연습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윤해서가 처음부터 저런 상태였던 건 아니었다. 교체 투입 첫날에는 오히려 생글거리며 인사도 했고, 즐거운 일이 있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지 잦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따금 제게 이두이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박대희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알 수 없다는 정해진 멘트뿐이었다. 요원의 사생활을 함부로 떠들 수 없다는 수칙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윤해서가 찾은 곳은 이두이가 지내던 아파트였다. 윤해서는 텅 빈 집 안을 둘러보며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박대희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한마디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박대희는 윤해서가 방황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팀장님, 어디서 뭘 하시는 겁니까. 하, 정말….’

박대희는 생수 한 병으로 5일을 버텨야 했던 생식주를 떠올렸다. UDT 훈련 과정 중 일부라지만 상당수가 못 버티고 낙오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생식주를 자신의 의지로 해내고 있는 윤해서가 소름 끼칠 만큼 독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윤해서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연습실 바닥에서 자고, 연습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한 뒤, 바닥에 누워 음악을 감상하다가 불쑥 일어나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미쳤거나, 미쳐 가거나. 누구라도 좋으니 윤해서를 말려 주길 바랐다.

“또 뵙네요.”

박대희는 불현듯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슬랙스에 검정 가죽 코트를 걸친 키 큰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다. 최우재를 알아본 박대희는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가볍게 내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인 최우재가 돌연 연습실 문을 열려고 했다.

“안 됩니다. 최우재 씨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왜요. 나 해서 친군데.”

“죄송합니다. 클라이언트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나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던가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최우재의 미소가 짙어진다. 으흠, 하며 고개를 끄덕인 최우재는 연습실이 보이는 창가에 섰다. 그러곤 마치 무대를 감상하는 사람처럼 윤해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리 해서, 다치지 않게 잘 부탁합니다.”

뜻밖의 말에 박대희의 눈빛이 험악하게 굳었다. 가식이거나,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윤해서 씨가 불편해하십니다. 돌아가 주시죠.”

박대희의 이어진 축객령에 최우재가 선뜻 돌아서더니, 박대희의 어깨를 움켜쥐곤 상체를 숙인다.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해서 누구 만나는 사람 생겼어요? 이두이 말고.”

“클라이언트의 사생활은 모릅니다.”

“요즘 어떤 정신 나간 한 분이 우리 해서 이름, 열심히 팔고 다니던데….”

“모릅니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박대희가 삐딱한 표정으로 최우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픽 웃으며 돌아선 최우재가 창 너머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든다.

최우재에게 신경을 뺏기는 바람에, 어느새 노래가 끊어졌다는 것도 몰랐다. 멍하니 최우재를 바라보던 윤해서가 천장 방향으로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쉰다.

“아…. 저러다 쓰러질 거 같은데.”

짧게 뇌까린 최우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이어 윤해서의 눈이 감기고, 그녀의 몸이 뒤로 꺾였다.

최우재의 몸이 스프링처럼 그녀에게로 튀어 나갔다.

***

누군가 부드러운 타월로 입술을 적셔 주는 느낌에 해서는 눈을 떴다.

간접 등 몇 개만 켜진 연습실의 천장과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최우재와 안도하는 박대희의 얼굴이 보였다. 해서는 아픈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차갑게 실소한 최우재가 한숨을 내쉬며 이온 음료를 내민다.

“탈수야. 마셔.”

해서는 거절 없이 이온 음료의 뚜껑을 열고 꿀꺽꿀꺽 삼켰다. 말라비틀어졌던 식도가 촉촉하게 젖어 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어쩐 일이야.”

갈라진 해서의 목소리에 최우재의 표정이 더없이 험악하게 굳는다.

“네가 죽으려 작정했단 소문이 돌기에, 확인하려고.”

“내가? 내가 왜.”

“지금 하는 꼴을 보니까, 딱 죽으려는 사람 같은데 뭐.”

“연습량을 늘린 것뿐이야.”

“머리카락은.”

해서는 뻗어 온 최우재의 손을 성가시다는 듯 쳐 내곤, 남은 음료를 모두 마셔 버렸다. 반항기 어린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최우재가 입가를 올려 웃는다.

“실연이라도 했나 보지?”

“내가 실연을 하든, 사랑을 하든 그쪽이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나는 여전히 윤해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한테 구애하고 있잖아.”

“하, 미친 새끼.”

평소의 윤해서다운 반응에 최우재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조금은 허탈하고 힘없는 웃음소리에 그녀도 조금 긴장이 풀렸다.

이온 음료 때문인가?

어쩐지 정신이 드는 듯한 기분이다. 지난 며칠간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지나치게 예민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하루에 단 두 번, 샤워할 때와 쪽잠에서 깨어날 때. 그때를 제외하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배 안 고파?”

해서는 한때나마 함께할 미래를 꿈꾸었던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최우재는 평생을 열등감 따윈 모르고 살아온 남자 같았다. 어떤 상황에도 여유롭고, 힘든 상황에도 패배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제게 집착하는 이유를.

우리가 열렬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었잖아.

“정말, 이해가 안 돼. 최우재….”

“지금이라도 이해해 볼래?”

“아니.”

“이두이는 안 와, 해서야.”

“뭐?”

최우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해서는 순간 손에 힘을 주었다. 입가에 난 상처를 문지르는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해서는 최우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감정의 너울이 넘실대며 그녀를 함몰시켰다.

좋아한다더니….

함께 멀리 나가자고 했으면서….

해서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한 최우재가 강조하듯 한 번 더 말했다.

“네 첫사랑, 안 돌아온다고.”

굳어 버린 해서는 답을 바라는 표정으로 박대희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박대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최우재가 이두이의 행방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지금 잡아야 할 지푸라기는 박대희가 아니란 걸 확신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최우재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묻자, 박대희를 돌아본 그가 마치 답을 알지 않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박대희 씨는 내 경호원이야.”

“나와 있을 때 경호원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네 경호원이 네 애인을 찾아 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틀렸나?”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 체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박대희에게 말했다.

“나, 믿어요? 아니… 나 한 번만 믿어 볼래요? 나 좀 도와줘요, 박대희 씨.”

***

박인호의 앞에 수천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급 손목시계 3점이 놓였다. 하지만 모두 여성용. 직원은 유명 프로 골퍼인 박인호와 함께 방문한 여자를 흘끔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빠, 나 이거 정말 사도 돼요?”

“어. 그러라고 데려온 거잖아.”

“너무 비싼데….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곧 생일 아닌가? 생일 선물인 셈 쳐.”

“정말요? 그럼…. 이거 차 봐도 돼요?”

여자는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힌 상품을 가리키며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생긋 웃어 보인 직원은 여자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준 뒤 우아한 태도로 거울을 비춰 주었다.

여자가 고른 건 이번 시즌 상품 중 다이아몬드가 가장 빼곡하게 박힌 하이엔드 제품이었다. 게다가 한정판으로 나와 소수의 고객에게만 보여 주는 모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원은 여자가 이 고가 제품만은 고르지 않길 바랐다. 함부로 오더를 받을 수 없는 제품이었기에, 이것을 고른다면 적당히 거부할 변명거리를 준비해야 했다.

소파 위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 있던 박인호는 만지작거리던 휴대 전화에 뜬 이름에 반색하며 곧장 전화를 받았다.

“해서 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됩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박인호는 순간 머쓱한 표정을 짓는 여자를 보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 제가 연습 때문에 좀 바빴어요.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연습하느라 바쁘신 건데요 뭐. 이제 좀 한가해졌어요? 해서 씨 연락 없어서, 저 방구석 한량 신세라니까요? 우리 만나죠. 지금 모시러 갈게요.”

- 아, 그게 아니라…. 죄송한데, 전에 말씀하신 행사요. 함께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예? 갑자기 왜….”

박인호는 꼬았던 다릴 풀곤, 험악한 얼굴로 구겨지는 미간을 문질렀다. 아, 왜 갑자기 파투야. 박인호의 젠틀한 가면이 아슬아슬하게 벗겨지기 직전이었다.

- 죄송합니다.

“어디에요?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지금 갈 테니 위치 알려 줘요.”

- 지금…. 연습실 근처예요. 그런데 혼자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 말에 순간 윤해서의 경호원 얼굴이 떠올랐다. 짜증스럽게 욕설을 흘린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닌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게다가 그 행사 아무나 갈 수 있는 거 아니라서 주위에 윤해서 씨와 같이 간다고 말 다 해 뒀는데.”

- 아, 그러셨구나…. 어쩌죠.

어쩌죠? 조금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말투에 박인호의 인내심이 훅 꺾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경우가 없네, 윤해서 씨는.”

-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더 죄송합니다. 파트너라면, 박인호 씨 주위에 계신 많은 여자분이 대신해 주실 거라 생각됩니다.

“뭐라고요?”

- 이만, 끊을게요. 정말 미안해요.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지고, 자존심에 금이 간 박인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직원도, 동행한 여자도 모두 씩씩대는 박인호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본다.

“하, 하하…. 어이없네?”

박인호는 차마 젠틀한 가면을 모두 벗지는 못하고, 똥이라도 밟은 사람처럼 웃으며 여자의 허리를 감쌌다.

“좀 잘해 줬다고 기고만장해서, 나더러 다른 여자 많지 않냐는데? 자기가 왜 그런 것까지 참견해. 사생활은 서로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돈이랑 이름 보고 하는 결혼인데. 안 되겠다, 까야지.”

박인호는 여자의 귓불을 콱 깨물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무례함에도 여자는 그저 예쁘게 웃으며 손으로 박인호의 허벅지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럼, 이거로 할게요. 오더 넣으면 얼마나 걸리죠?”

“길게는 3년 짧게는 2년 정도 걸리실 겁니다. 워낙 인기가 좋은 모델이라서요. 그래도 VIP 고객님이셔서 오더를 넣어 드리는 겁니다. 일반 고객분들은 오더도 넣지 못하고 계신 거 아시죠?”

“뭐, 잊고 있으면 오겠네. 오면 얘한테 연락하시고요. 3년 뒤에도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돈 되는 거면 알아서 찾아가겠죠.”

박인호의 짓궂은 말에 여자가 뺨을 붉히며 눈을 흘긴다. 그에 직원은 예의 환한 미소를 띤 채, 예약증을 가지러 잠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3년이라….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었지만, 저 말인즉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VIP인 제게 그런 소릴 하는 이상, 정말로 구하기 힘든 물건이 맞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꼬이지?

박인호는 소파에 앉아 여자의 팔과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윤홍주 장관의 딸이란 타이틀이 없었다면 나가지도 않았을 자리였다. 물론 얼굴부터 몸매까지 모두가 취향이기도 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뻤고, 비쩍 마른 몸이 아니어서 더 끝내준다고 생각했다. 그 예쁜 얼굴로 털털한 성격인 점도 마음에 들었고, 이따금 습관처럼 보여 주는 우아한 제스처에 시선을 빼앗겼다.

종내에는 자고 싶어졌다. 윤해서는 침대 위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식으로 남자를 흥분시키는지 궁금해져서 제가 먼저 굽히고 다가갔다.

그런데 뭐?

“와 씨, 생각할수록 열받네. 뭐 그딴 년이….”

박인호가 기가 찬 표정으로 이죽거릴 때였다. 그가 앉은 소파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확인한 박인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보는 상대는 이두이였다. 그것도 보통의 재력으로는 구매할 수 없는 고급 슈트를 입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박인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박인호는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놀라 입술을 달싹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라도 윤해서가 이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기, 지금.”

하지만 박인호의 말을 무시한 두이는 뒤에 선 점장을 돌아보더니 턱 끝으로 테이블에 놓인 시계를 가리킨다.

“저거로 하죠. 지금 준비됩니까?”

“물론입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선물할 겁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점장이 먼저 앞장서고, 이두이는 고개를 까딱인 뒤 천천히 돌아섰다.

박인호는 스쳐 지나가며 보인 이두이의 경멸 섞인 눈빛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제게는 3년이나 걸린다던 시계가, 이두이의 앞에선 당장에 준비할 수 있는 쉬운 물건으로 전락했다. 대체 뭐지?

기껏해야 월급쟁이나 다름없는 평범한 회사원 아니었던가?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자존심이 뭉개진 박인호는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여자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야! 일어나, 빨리!”

***

- 팀장님, 아까처럼 함부로 나서시면 안 됩니다. 크루즈에 오르기 전까지는, 지켜보기만 하시죠.

운전석에 앉아 해서의 연습실 입구를 응시하던 두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윤해서와 함께 걸어 나온 사람은 세현의 말대로 최우재였다. 보이지 않는 박대희의 행방에, 그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최우재가 차 문을 열자, 잠시 고민하던 윤해서가 조수석에 오른다. 며칠 사이 윤해서는 눈에 띄게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다.

“윤해서 GPS, 내비게이션에 띄워요.”

차갑게 가라앉은 두이의 말에 마른침을 삼킨 세현이 대답했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시계, 여성용 아닙니까? 사비로 계산하셨던데….

“선물할 거라서.”

- 정말요? 팀장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정말 이번 일 끝나면 퇴사하실 겁니까? 소문이 돕니다. 팀장님 한국 뜨신다고. 아, 30분 전부터 오디오는 껐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왜요, 같이 뜨게?

- 진짜예요?

“아마도요.”

해서를 태운 최우재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직접 운전석에 올랐다. 두이는 옆 좌석에 놓인 쇼핑백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부터 이 시계를 구매할 생각은 없었다.

여자와 함께 있는 박인호의 모습을 보자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박인호와 여자는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람처럼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따로 만나는 상대를 두고, 윤해서에게 진심을 운운하며 구애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 저, 팀장님 그만두시면 따라갈 겁니다. 저 버리고 아무 데도 못 가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음은 뭡니까.”

두이는 기분을 환기하듯, 창문을 조금 열어 찬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윤해서의 경호 임무를 종료한 시점부터, 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신흥 재벌에 이름을 올린 제이든 리를 연기 중이었다. 뉴욕주 맨해튼에 거주하지만 전 세계 곳곳에 별장을 두었고, 재산 규모는 42억 달러 규모의 성공한 재미 교포.

정보 통신 분야의 신흥 강자로 등장한 제이든 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한국에 없었다. 상부는 KING을 사칭한 놈처럼, 이두이를 제이든 리로 사칭해 크루즈에 태울 계획을 세웠다.

돈 많은 재력가의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이두이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요원이었다. 매력적인 외모와 피지컬을 가졌고, 원어민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 게다가 이두이는 돈을 아는 남자였다.

물질적인 것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에 비해, 그가 소지한 물건 대부분은 보통의 재력으론 구매조차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두이의 뒤에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모, 혹은 후원자가 있을 거란 추측을 했다.

- 김포 공항으로 가시면, 전용기 대기 중입니다. 김해 공항에 내리시면,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파트너로 누가 옵니까?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 제가 갑니다, 팀장님.

“김세현 씨가?”

- 예, 기대하십시오. 아마 제 꼴을 보시면, 제이든 리 역할 맡은 걸 천운으로 여기실 겁니다.

두이는 어깨를 으쓱 올리곤 내비게이션 화면을 터치했다.

그러자 윤해서의 위치를 표시하는 붉은 점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경로였다. 그것도 제가 가야 하는 곳과 같은 방향으로 윤해서가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최우재도 지금 김포 갑니까?”

- 좌표를 보니 그렇네요.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선글라스 필수, 모자도 쓰시고. 요즘 마스크는 기본인 거 아시죠?

“김세현 씨, 나랑 작업 치는 김에 발포 허가도 받아 와요.”

- 예? 설마, 직접 나서실 건 아니죠?

“호신용이라고 해 둡시다. 끊습니다.”

무전을 끊어 버린 두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공항으로 향하는 붉은 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일 열리는 디너 크루즈의 호스트는 KING이었다.

정확하게는 KING을 사칭한 누군가였고, 최우재가 가장 큰 용의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윤해서가 최우재와 함께 이동하는 걸까.

그녀는 열흘 내내 연습실을 나선 적이 없었다. 자신의 해지된 휴대 전화에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고, 직접 아파트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런 윤해서 앞에 나서고 싶었지만, 그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지금, 윤해서를 제 삶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제가 모든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그래서 윤해서가 진종일 몸을 혹사하고 새벽잠에 들었을 때, 연습실 벽 너머에 서서 그 밤을 지켰다. 소리 없이 펑펑 울 땐 부러 이어폰의 볼륨을 최고치로 올렸다.

당장은 윤해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족들마저도 속이며 살아가야 하는 삶. 사랑하는 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이 바로 제가 선택한 길이었다. 후회해 본 적 없는 길 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

서울에서 고작 30분도 걸리지 않아 김해 공항에 도착한 해서는, 대기 중인 차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바다는 대체 얼마 만이더라….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건물에 바다 빛이 넘실댄다. 해서는 창문에 붙어 서서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겨울 바다 특유의 강한 바람과 쨍한 서늘함이 두꺼운 창문을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연습실에서 곧장 온 탓에 두툼한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얼핏 예쁘장한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서는 창문에 이마를 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몸에 손대면 죽어 버릴 거야.”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 말에 최우재가 코트를 벗어 걸며 냉장고에 들어 있는 맥주를 꺼냈다.

“무섭네, 윤해서 죽을까 봐 손 하나 까딱 못 하겠어.”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 지금 이두이한테 집착 중이거든. 건드리지 마.”

돌아선 해서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최우재를 또렷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세 치 혀가 만든 거짓말에 휘둘린 거라면, 이 자리에서 저 남자의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집착하는 여자 매력적인데.”

“그 매력, 다른 남자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됐고, 일단 그 옷부터 어떻게 해. 근처에 백화점 있으니 쇼핑이라도 다녀올까?”

“내 옷이 어때서.”

“내일 초대받은 디너가 있는데, 우리 거기 가야 하거든.”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최우재를 따라나섰다. 저 남자가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닌데, 이두이가 어떤 사람인지 네 눈으로 직접 보게 해 준단 말에 발이 움직였다.

미쳐 버린 것 같다. 이 마음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쩌면 최우재도 저와 비슷한 감정의 폭풍을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요하게 찾아 헤매고, 집착하는…. 상대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마음만을 중요하다고 여기며 강요하는.

“시간 늦었어. 백화점 닫을 시간이야….”

그녀는 최우재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벌써 맥주 한 캔을 비운 그가 빈 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그런 게 문제 될 리 없잖아.”

아아, 그래. 최우재에게 돈이 문제 되었던 적은 없었지.

4년 전, 엄마가 기를 쓰고 최우재와 자신을 결혼시키려 했던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엄마에게 최우재가 어떤 사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와 매년 그가 내는 세금액으로 증명되는 재력이 중요했을 뿐이다.

“그 디너에 이두이도 참석해? 박인호가 말했던 크루즈 행사…. 그날인 거 같은데.”

날이 추워질수록 해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한눈판 사이, 바다엔 벌써 밤빛이 밀려들고 있었다. 한쪽 팔을 감싸 움켜쥔 그녀가 대답해 보라는 듯 턱 끝을 까딱였다.

“이두이 만나면, 할 말은 생각해 봤어?”

최우재는 고작 이두이라는 이름 석 자에 굳어 버린 윤해서의 반응이 불쾌했다. 고작, 이두이 때문에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혹사하는 윤해서라니. 그 어떤 순간에도 독하게 버티며 무너지지 않던 윤해서답지 않았다.

“생각 안 해 봤어.”

“나라면, 주먹부터 날아갈 거 같은데. 널 망쳤잖아. 뭐, 그쪽에선 상황을 이용한 거겠지만. 결론적으로 윤해서만 다 잃었네.”

“내가… 뭘 잃었는데.”

“전부.”

전부란 말에 해서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동요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억누르려 노력하는 모습에 최우재는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다.

“씻고 나와, 해서야.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

태연자약하게 화제를 돌린 최우재의 말에 장식장 유리에 비친 운동복 차림의 제 모습을 훑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갈아입을 옷은.”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말고.”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 그녀는 응접실을 중심으로 왼쪽에 배치된 침실로 향했다.

“미쳤나….”

문을 잠근 후 모자를 벗고 욕실 거울 앞에 선 그녀가 탄식했다. 한심하리만치 몰골이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은 정돈하지 못해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셔츠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이 져 있었다. 게다가 열흘 동안 물로만 버틴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한 데다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졌다.

한숨을 내쉬며 세면대에 기댄 그녀는 연습실에서 나올 때까지 말이 없던 박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예.

“저예요. 죄송한데, 집에는 보고하지 말아 주세요.”

- 윤해서 씨, 저는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박대희 씨가 곤란해지는 일은 없으셔야죠. 알겠습니다. 저 잘 있어요. 서울 올라가면 연락할게요.”

혹시 이두이에게 연락 온 건 없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 가루처럼 바스러진 자존심을 긁어모아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비행기에서 최우재는 믿을 수 없는 말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공연장의 총성을 조작한 게 이두이야. 이두이는 윤홍주 장관을 끌어내리려 너한테 접근한 거고, 성공하기 직전이었어. 그런데 서승현이 잡혀 버린 거지.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으니, 철수해야 하지 않겠어? 듣자 하니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던데…. 너, 설계 당한 거야, 윤해서.”

설계? 웃기지 마.

두 눈을 질끈 감았던 해서는 옷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마감재와 창가에 놓인 욕조를 보는데,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닐라와 라벤더라니….

“연락이 잘 안 될 거야. 못 볼지도 몰라. 무조건 기다리라고는 안 해, 윤해서. 힘들면 그냥, 나 버려도 되고.”

버리라니. 솔직히 말해서 이두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 봤자 하루겠지. 새벽엔 전화를 걸어올 테고, 야근이 없는 날엔 자신을 보러 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연락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했던 이두이는 번호를 바꿨고, 거처까지 옮겼다. 불시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잠수 이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안 한 연인 사이에, 잠수 이별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두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최우재의 말마따나 그 자식이 희대의 개새끼거나.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 연애한 우리가 정말로 이별을 했거나….

두이를 믿어 보고 싶었다. 최우재는 이두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적어도 자기 일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이용할 사람은 절대 아니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호텔은 욕실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게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하지만 욕조에 몸을 담글 만큼 마음의 여유를 찾은 건 아닌지라, 해서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나왔다. 고작 샤워만 했을 뿐인데 진이 빠진다. 해서는 가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며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은근한 조명이 내려앉은 파우더 룸 콘솔 위, 새 속옷과 태그도 제거하지 않은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평소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정확하게 파악한 선택이었다. 핏감 좋은 청바지에 가벼운 소재의 셔츠, 그리고 부담 없이 걸칠 수 있는 보통 길이의 카디건을 하나씩 들춰 본 그녀의 입술 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해서는 최우재가 가져다 놓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앉아.”

다시 응접실로 나간 해서는 다이닝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냅킨에 싸인 커트러리까지 세팅한 최우재가 의자까지 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 그 앞에 놓인 테이블과 잘 차려진 음식. 그리고 와인이라니. 너무 노리는 거 아닌가?

해서는 자리에 앉는 대신 테이블 중앙에 놓인 과일 접시에서 포도 한 알을 툭 떼어 입에 넣었다.

“이거면 돼. 옷이나 사러 가.”

해서는 소파에 걸쳐 둔 점퍼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쯧, 하고 혀를 찬 최우재가 옷장을 열더니 본인의 코트를 꺼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뭐 하는 거야?”

“그 점퍼 더러워서. 뭐가 많이 묻었더라.”

“창피해?”

“네가 창피하겠지.”

그때, 최우재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해서는 최우재의 코트를 돌려준 뒤, 카디건 차림으로 방문을 열었다.

“통화하고 나와. 나는 로비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있을 테니까.”

짙은 월넛색 카펫이 깔린 복도에 들릴 듯 말 듯 한 클래식 음악이 둥둥 떠다닌다. 해서는 휴대 전화만 움켜쥔 채, 최우재를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아무리 넓은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끝이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녀는 승강기를 타고 로비로 향했다. 여행 가방을 끌고 회전문을 통과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로비 한편에 아담한 라운지가 있었다.

식사도 거른 상태로 정신없이 움직여서인지,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태로 음식물을 섭취했다간, 모두 게워 낼 게 뻔하다. 과일이나 우유가 들어간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라운지로 향할 때였다.

“하!”

누군가 헛웃음을 흘리며 해서의 어깨를 잡아챘다. 강한 힘에 돌아선 해서는 기가 찬 표정의 박인호를 발견했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박인호 씨, 이것 좀….”

“미치겠네. 사람을 갖고 노네, 윤해서.”

“네? 무슨 소리예요, 그게. 일단 놔요, 이거.”

박인호는 마치 놓쳐 버린 사냥감을 다시 발견한 사람처럼 까만 눈을 번뜩였다.

“무슨 소리? 나 엿 먹여 놓고 여기서 뭐 합니까?”

“이봐요, 내가 뭘 했다고 박인호 씨를 엿 먹여요?”

“엿 먹인 게 아니면 뭔데?”

“박인호 씨,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여기가 크루즈 행사 지정 호텔인 거, 몰랐다고? 행사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이 여길 드나들어? 내가 등신인 줄 아나! 누구랑 왔습니까? 나보다 돈 많은 새끼 찾았어요?”

박인호는 윤해서의 상대를 찾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내둘렀다. 이미 크루즈에서 만날 친한 놈들에게 윤해서와 함께 간다는 말을 자랑처럼 떠벌린 상태였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윤해서의 위치도 대단했지만, 몇몇은 이미 윤해서의 팬이었고 몇 명은 외모와 몸매 따위를 논하며 흥분해 마지않았다.

윤해서는 그에게 일종의 트로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윤해서를 데리고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제게 쏠릴 시선과 시기 질투를 상상할 땐 마치 홀인원을 했을 때처럼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그런데 일부러 행사 하루 전날, 그것도 제 연락 수십 통을 씹어 가면서 사람 피를 말리더니 파투를 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목소리 좀 낮추죠. 박인호 씨 유명인이잖아요. 나 얼굴 팔리는 거 싫어요.”

“그쪽이 팔릴 얼굴이나 있어? 다 망해 먹은 발레리나 주제에, 내가 좋다고 실실대니까 호구처럼 보였나 보지?”

“박인호 씨…. 미안해요. 그래, 약속 어긴 거 내 잘못 맞아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이것 좀 놓죠.”

숨을 고른 해서가 침착하게 박인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침착함과 차분함에 박인호는 더욱 흥분해 속이 뒤집혔다.

“사과한다고 다인가? 사람 우습게 만들어 놓고, 사과로 끝내겠다? 난 그렇게 못 하겠는데.”

박인호는 이 가는 팔을 부러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엉엉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이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아서 해서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아!”

“사과해. 다시 사과해 봐. 빌어 보든지.”

“아, 아프다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잖아? 울고불며 빌든지, 사과하든지.”

“이것 좀…!”

정말로 뼈가 부러질 것 같은 끔찍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돈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상대가 유명한 프로 골퍼 박인호인 데다가, 두 사람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여 쉽게 나서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아픔을 참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해서를 노려보던 박인호가 결국 고함을 내질렀다.

“씨발, 사과하라고!”

“너나 해, 사과.”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박인호의 손목이 불시에 잡혔다.

“악!”

강한 악력에 손목이 뒤틀려 버린 박인호가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박인호의 손목을 잡아채 해서의 팔에서 떼어 낸 사람은 이두이였다.

얼얼한 팔을 감싼 해서는 고요한 분노를 드러내는 이두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삽상한 겨울 냄새가 난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치고 마스크까지 꼈지만, 해서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박인호는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 발버둥 쳤다. 팔을 비틀어 보기도 하고 주먹도 날려 보았지만, 이두이에겐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놔! 너, 누구야! 이 새끼가 미쳤나! 아악!”

“질질 짜면서 빌어 봐. 아니면 사과를 해도 되고. 뭐든 해, 입으로 하는 건 다 잘하지 않아?”

“아아, 아프다고! 야, 너 이거 폭행이야!”

“진짜 폭행이 뭔지 궁금한가 보네.”

“에이씨, 야! 아악! 미안, 미안하다고! 놔, 빨리! 뼈 부러져!”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지금껏 의식하지 못한 이두이의 동행인이 박인호를 몰아붙이던 그를 가로막더니 확 끌어안았다.

해서는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두이를 끌어안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늘씬하고 가느다란 몸에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싸움을 말린 여자가 해서를 돌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해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두이를 만나면 하려 했던 말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주위의 산소가 고갈된 것처럼 숨이 차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머릿속이 멍해져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굳어 버린 그녀 쪽으로 이두이가 돌아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서에게 닿았다. 여전히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아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해서의 얼굴이 담긴다.

“이런 씨발! 너희들 고소할 거야!”

그때,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박인호가 시뻘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직원들의 손을 뿌리치곤 도망치듯 승강기 방향으로 뛴다.

그 소란에 정신이 든 해서는 저도 모르게 두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소란스럽네요. 무슨 일입니까?”

최우재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해서의 어깨를 감싸 안은 최우재가 이두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묻는다.

“우리 해서한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얌전히 최우재의 품에 있는 해서를 바라보는 이두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물을 말입니다.”

노골적인 불쾌함이 그득한 이두이의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든 최우재가 해서의 어깨 위에 부드러운 숄을 걸쳐 준다.

“나야, 우리 해서가 춥게 입고 나가서 이거 챙기느라.”

구역질이 날 만큼 다정한 최우재의 속삭임을 들으며 해서는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여자가 미간을 구기며 두 눈에 힘을 준다. 그러더니 두이의 팔을 당기고 이번에도 귓속말했다.

새로운 클라이언트? 하지만 클라이언트라기엔, 둘의 관계가 모호하다. 오히려 이두이가 여자보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면서…. 저렇게 태연할 거면서.

꼴도 보기 싫어, 이두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최우재의 방향으로 돌아선 그녀가 애써 말을 뱉어 냈다.

“쇼핑은… 나중에 할래.”

“힘들면 그렇게 해. 괜찮으니까.”

해서는 어깨를 감싸 안으려는 최우재의 팔을 뿌리치고 걸음을 내디뎠다.

승강기 방향으로 걸어가는 내내 카페인에 중독된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은 붕 뜬 것 같았고, 몽롱한 머릿속은 너무 많은 생각들이 엉켜 괴로울 지경이었다.

보고 싶었다. 걱정했고, 충격도 받았다. 이두이를 직접 만나야지만, 이 답답함과 괴로운 마음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뭐야.

나는 하루하루 죽을 것 같았는데, 넌….

허탈한 마음이 든 그녀는 아픈 팔을 감싸 쥔 채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억울한 마음과 함께 울컥, 화가 났다. 무시하고 돌아서기엔 이두이에게 쏟아 낼 마음이 아직도 너무 많이 남았다.

우린 어디까지 걸음을 내디뎠던 건지, 그 짧았던 시간에 너는 잠시나마 진심이었던 적이 있는지.

그리고 너는 정말 개새끼인지, 마음이 통했다고 느낀 건 나의 오해인지. 열흘 넘게 마음을 앓아 놓고, 고작해야 묻는다는 소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차갑게 자조했다.

해서는 승강기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활짝 열렸던 승강기의 문이 닫히기 전,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닫히려는 문을 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해서를 승강기 안으로 떠밀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서늘한 불꽃 같은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빠른 걸음이 다다르기 전, 이두이는 승강기의 문을 닫아 버리곤 꼭대기 층을 눌렀다. 해서는 그대로 벽을 보며 서 있었다.

여자와 함께 있는 이두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발아래로 떨어졌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는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하얗게 번진다.

“아무래도 넌… 희대의 개새끼인 거 같아.”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작은 승강기 안을 울렸다. 해서는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되레 울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손을 가져와 희미하게 떤다. 그러나 차마 닿지 못하고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대체 넌….”

잠긴 목소리로 말끝을 흐린 그가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빠른 속도로 꼭대기에 다다른 승강기 문이 열렸다. 해서는 이두이를 밀어내고 도망치듯 걸음을 내디뎠다.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왜, 왜 그런 표정을 해? 네가 뭔데!

그녀의 뒤로 따라붙는 빠르고 묵직한 발소리에 간신히 유지하던 평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이 끝이 제가 가야 할 곳이 맞는지도 알지 못했다. 막막한 마음에 문이 열리는 어디든 몸을 숨기고 싶었다.

“여기야.”

어떠한 전조도 없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는 강한 힘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등 뒤로 현관문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그는 해서의 가는 허릴 휘감은 채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옴쭉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에 해서는 두이의 팔을 움켜쥐었다.

“읏!”

뜨거운 혀가 단단하게 맞물린 입술 틈을 집요하게 벌려 파고든다. 해서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그가 제 손을 잡는 순간 느껴진 건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리움이었으며 안도감이었다.

놀랍도록 빠르게 심장 박동이 잦아든다. 해서는 심장을 좀먹는 듯한 달콤함에 진저리 치며 그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어냈다.

“하! 너 뭐 하는 새끼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아 쥔 주먹으로 그의 팔과 가슴을 힘껏 때렸다.

“너 뭐 하는 거냐고!”

“내가 할 말이야.”

사납게 내뱉은 그가 다시 눈가를 일그러트리더니 어깨를 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체 왜….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그 새끼랑…!”

“너는 왜 여기에 있는데?”

울먹이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볼품없는 흐느낌이 섞여 나왔다.

“너는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거야, 이두이.”

무의미한 질문을 이어 나가며 그를 밀쳐 내고, 다시 당겨져 안기기를 반복했다. 애정을 갈구하듯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다가 가슴을 때리며 밀어냈다.

“네가 뭔데! 사람을 왜 바보로 만들어! 네가 정말… 날 설계했어?”

“설계?”

“다 들었어…. 네가 왜 나한테 접근했는지.”

순간 희번덕대고 눈을 빛낸 두이가 해서를 번쩍 들어 안았다.

“무슨 개소린지는 천천히 들을게.”

“놔!”

“윤해서!”

그때였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여자는 두이의 어깨에 포대 자루처럼 안겨 있는 해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저 나가 있어야 합니까?”

이어 들려온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 해서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문 앞에 선 여자, 아니 여자처럼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싫으면 눈이라도 감아요, 김세현 씨.”

“귀도 막겠습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김세현이 이어폰을 귀에 꽂더니, 들고 온 캐리어를 테이블에 올렸다.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보통의 무게가 아니란 걸 짐작한 해서의 두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넋 나간 해서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한 그가 기가 찬 표정으로 실소하며 왼편에 놓인 침실 문을 연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알겠고, 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알겠는데…. 나 왜 억울하냐.”

“어…?”

“나, 왜 억울하냐고. 내가 왜 미칠 것 같은지, 네가 설명 좀 해 봐.”

그녀를 침대 위에 고이 앉힌 그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더니, 젖어 있는 뺨을 어루만졌다. 해서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숨만 간신히 내쉬다 말을 내뱉었다.

“난 이미 미쳤어, 너 때문에.”

“그래서 버리라고 했잖아….”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해서야, 윤해서.”

재차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시간이 멎는 기분이었다.

“네가 나 버릴 생각 없으면…. 이제 못 물러. 멈출 방법이 없어.”

“뭐…?”

“좋아해.”

마땅한 말을 하듯 태연하게 고백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지금 너한테 최악의 통보를 하는 거야.”

***

박인호에게 잡혔던 부위에 붉은 멍이 짙게 올라왔다. 해서는 사납게 일그러지는 두이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침실을 나갔던 그는 제법 구색을 갖춘 구급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해서는 그가 건네준 근육 진통제를 삼킨 뒤,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멘톨 향이 나는 연고를 상처 위에 문지르는 그의 미간이 움찔대며 구겨진다.

“밖에 계신 분, 여자인 줄 알았어.”

“종종 오해받아.”

“누구야…?”

“팀원이야.”

“그럼 넌. 넌… 누구야?”

해서의 질문에 그의 시선이 짙어졌다. 해서는 이번에도 답을 듣지 못할 거란 걸 예감했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아직은.”

“그럼 언제 물어볼 수 있는데…? 이번에도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나, 정말 궁금해. 너…. 왜 내 경호원이 된 거야?”

“네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거든.”

“누가.”

“네 아버지가.”

“우리 아빠는 네가 누군지 알아?”

“어쩌면.”

연고를 모두 발라 준 그가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고개를 든다. 그에 해서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이곳에 오는 동안 겪었던 감정의 변화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뭉쳐 놓은 핵폭탄 같은 것이었다.

이두이라는 남자는 알면 알아 갈수록 신기루 같았다. 이렇게 숨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도, 그는 여전히 멀다.

해서의 턱 끝에 그의 손이 닿았다. 선선히 고개를 들자, 가만히 들여다보는 까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격렬한 감정을 지그시 억누른 눈빛에 해서의 가슴이 아프게 지끈거렸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내가 어떨 거라고 생각했어? 간신히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어. 이제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즐거웠어. 널 마음껏 좋아할 수 있어서 행복했는데…. 결국 또 제자리야.”

맥없이 고개를 떨구며 해서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자리 아니야.”

단호하게 대꾸한 그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다. 차마 팔을 둘러 안지는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이런 내가 처음이라서…. 내 일 위에 누구를 올려 둔 것도 처음이라…. 갖거나, 버리는 거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버리려 그랬어…?”

버린다는 말에 번쩍 고개를 든 그의 두 눈이 커다래진다. 해서는 처음으로 이두이의 눈동자가 젖어 드는 걸 보았다. 지금껏 그 어떤 상황에도 동요한 적 없던 눈동자에 일어난 뜨거운 일렁임에 해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버리려 했냐고!”

“아니. 납치라도 해서 너 어디로 데려가고 싶었어. 그냥 널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두어 놓고, 씨발…. 미친 새끼처럼 나만 보게 하고 싶었어. 네가 경멸하는 최우재 그 개새끼랑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했다고.”

마른 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상체를 세웠다. 어딘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러니까…. 네가 날 버려. 내가 네 다리를 부러트리기 전에….”

담배가 필요했다. 속이 꽉 막힐 만큼 독한 연기로 이 감정을 지워 내고 싶었다.

창가에 선 그를 얼어붙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그녀가 벌떡 일어난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갈 거로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허리춤을 감아 오는 감촉에 얼굴에서 손을 뗐다.

뒤에서 끌어안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네가 내 다릴 부러트린다고 협박해도…. 나 도망 안 가.”

셔츠를 꽉 움켜쥐는 손등 위로 하얀 뼈가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너도 못 가….”

해서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불쑥 돌아서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숨을 내뱉는 찰나, 서로의 입술이 포개진다. 놀랍도록 부드럽게 파고든 혀가 입 안 곳곳을 헤집고 아득하게 휘저었다.

“안 버려.”

온몸의 세포에 새겨진 감각이 하나둘 깨어나며, 서로의 향기에 반응했다. 뒷걸음질 친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그는 하체를 짓누르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배가 드러났다.

“겁도 없이 윤해서….”

해서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움켜쥔 그가 혀를 밀어 넣으며 체중을 실을 때였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아….”

해서는 매트리스와 두이 사이에 낀 채로 팔만 뻗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화면에 뜬 최우재의 이름을 본 해서의 얼굴이 굳었다.

“받아.”

“정말…?”

“응, 받아.”

하지만 두이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셔츠를 걷어 올리더니 옆으로 퍼진 가슴을 모아 입에 물었다. 젖꼭지를 이로 긁는 간지러움에 허벅지를 모은 그녀가 당황한 듯 말했다.

“통화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냥 해.”

“정말 해?”

“응.”

해서는 두 눈을 치켜뜬 그를 빤히 쳐다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받….”

- 이두이 바꿔.

최우재는 감정을 거세당한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투로 명령하듯 말했다. 해서는 제 위에 올라탄 남자를 응시하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한테 말해.”

- 충격받을 텐데.

“말해. 더 받을 충격이 남았어?”

해서는 제 가슴을 물고 빠는 두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매트리스 끝까지 밀려나 거꾸로 바라보는 부산 앞바다가 어쩐지 낯설다.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이 된 거꾸로 세상에 저 혼자만 똑바로 서 있는 기분도 들었다.

- 윤해서…. 내가 한 말, 잊었어? 이두이는 널 이용해서 윤홍주를 치려 한 거라고 했잖아. 빨리 그 방에서 나와.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 뭐?

“내가…. 이두이랑 같이 있는 거, 그쪽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최우재, 미안한데 난 너 이용한 거야. 이두이 만나려고…. 방법이 없었거든. 썩은 동아줄인 거 알면서도, 네 손 잡았어. 미안.”

해서는 무섭게 침묵하는 최우재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최우재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이두이는 의도적으로 제게 접근했고,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크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도, 가슴이 죽을 것처럼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슬프기만 할 뿐.

가만히 바다를 거꾸로 응시하던 그녀가 휴대 전화를 떨어트리며 물었다.

“여기서 해도 돼?”

“김세현 때문에?”

“소리 낼 거 같아.”

“걱정하지 마, 같은 방 안 쓰니까.”

그녀의 청바지를 벗겨 버린 그는 매트리스를 짚으며 올라와 도톰한 입술 새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커다란 몸에 파묻혀 체중에 짓눌리는 압박감이 좋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욕구와 충동에 기반한 관계였다.

첫사랑, 혹은 첫 키스 따위의 감상적인 단어에 휩쓸려 무언가 특별하게 느껴졌을 뿐. 우습지 않나. 나이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첫사랑에 가슴이 떨려 안절부절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호구에 천치, 세상에서 저보다 쉬운 여자는 없을 거라며 해서는 자조했다.

다른 생각에 빠진 그녀의 턱 아래를 누른 그가 깊게 파고들어 와 입 안의 점막을 부드럽게 핥았다. 숨이 막힐 듯하면 떼어졌다가, 다시 맞붙는 입맞춤에 살갗 위로 진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손이 얇은 속옷 위를 문지르자, 갈라진 틈새에서 나온 물이 그의 손을 적셨다. 팬티를 옆으로 젖힌 그는 도톰한 음부를 문지르며 구멍을 건드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가락 두 개가 쑥 들어와 바짝 조여드는 내벽 안쪽을 툭 건드렸다. 해서는 흠칫거리며 허릴 떨었다.

“하아, 그만. 손가락은 싫어.”

싫단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포갠 그가 말했다.

“싫어?”

“응….”

하지만 그는 계속해 그녀의 내벽을 문지르며 턱과 목덜미를 차례로 깨물었다. 손으로 하는 자극은 쾌감이 너무 빠르게 찾아온다. 하지만 충만한 쾌감이 아닌, 얕은 절정에 몸이 떨리는 것뿐이었다.

이런 거 말고, 진땀이 나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이내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빼낸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그가 입은 드레스 셔츠를 어깨 뒤로 벗겨 내곤,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축축하게 젖어 가기 시작한 선단을 손톱으로 긁자, 탁하게 탄식한 그가 벨트를 풀었다.

“뭐 하려고.”

“전부터 먹어 보고 싶었어.”

“하, 나를 갖고 놀지, 아주.”

짜증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말투에 해서는 그의 어깨를 불쑥 밀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은 그가, 충혈된 눈을 치켜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사실…. 날 갖고 노는 건 이두이, 너야.”

해서는 허벅지 사이로 내려가 드로어즈의 밴드를 당겼다. 그러자 배꼽 방향으로 발기한 성기가 툭 튀어나오며 그녀의 뺨에 닿는다. 눈을 감은 해서는 그대로 뿌리부터 선단 끝까지 혀로 감싸 핥아 올렸다.

“하…, 젠장.”

반곱슬에 가까운 그녀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제 손목만 한 두께의 살덩이를 입 안에 다 넣지도 못하고 간신히 선단 끝을 물자 탄식한 그의 허리가 들썩였다. 입천장과 혀를 누르며 쑥 파고든 성기가 목구멍에 닿는다.

고무공처럼 단단한 성기가 입 안을 긁을 때마다 오심과 함께 오금이 저릿했다. 해서는 턱이 얼얼하도록 입을 벌린 채 쭙, 하고 선단을 빨았다. 도톰하게 살이 오른 귀두 아래를 혀로 간질이며 양손으로 성기를 움켜쥐자, 그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애무 받는 건 그였건만, 거센 해일이 밀려드는 기분을 느낀 건 해서였다. 한쪽 손으로는 그녀의 뒷덜미를 누르고 다른 손으론 침대 헤드를 움켜쥔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선다.

“윤해서, 나 쌀 거 같아.”

드물게 애타는 목소리로 말한 그가 흥분으로 빨개진 눈을 내리뜨며 헐떡였다. 그제야 해서는 기둥을 혀로 핥으며 성기를 뱉어 낸 뒤, 그 위에 올라갔다. 복직근 위로 울퉁불퉁하게 핏대 오른 피부를 어루만지다가, 가슴 방향으로 쓸어 올리며 가슴을 맞댔다. 그러자 귓불을 깨문 그가 그녀의 속옷을 젖혔다.

질구에 닿은 성기 끝이 꿈틀댄다. 그 크기를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했다.

“이따가 빨아 줄 거지? 하….”

해서는 축축하게 젖은 구멍으로 그의 성기를 야금야금 삼켰다. 선단부터 뿌리까지, 천천히 엉덩이를 내리자 내벽이 꽉 맞물리며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디가 성감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쪽을 꽉 채운 성기는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해서는 덜덜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하, 더 내려가.”

탁해진 목소리가 머리에서 웅웅 울린다. 해서는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목을 핥아 올린 그가 골반을 움켜쥔 채 허리를 쳐올렸다.

“하!”

순식간에 꿰뚫린 해서는 헛바람을 흘리며 숨을 참았다. 온몸의 신경이 결합된 곳에 집중되었다. 몸을 섞을 때만큼은 그를 오롯하게 가진 것처럼 지독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그가 허리를 밀어붙이거나 어깨에 잇자국을 새길 때마다 짐승처럼 치받히는 쾌락에 취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격하게 차오른 쾌감에 생각이 뚝뚝 끊어진다. 멍하니 이어지는 쾌감에 취해 있을 때, 불쑥 몸이 뒤집혔다. 매트리스 위로 털썩 눕혀진 그녀의 다리가 벌어진다. 무릎을 잡아 벌린 그는 더운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파고들었다. 오므라들었던 질구가 벌어지며 두툼한 살덩이를 쑥 집어삼켰다.

묵직한 부피감에 긴장한 해서는 발끝을 꽉 오므렸다. 오늘따라 지나치게 감각이 예민해져 날뛴다. 왜인지 몰라도 이두이 역시 평소보다 더 거칠고 흉포하게 굴었다. 흥분에 잠식된 그의 얼굴을 감싸 시선을 맞춘 그녀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하읏, 아아!”

퍽퍽, 치받을 때마다 젖가슴이 흔들리고 그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쥔 손등 위로 새파랗게 힘줄이 돋아난다. 점점 더 깊고 아득한 세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흥분하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해서는 절정에 취해 갔다.

***

싸늘한 냉기에 눈을 떴다. 창백한 빛이 밀려들어 침실 곳곳을 물들이고 그녀의 속눈썹 위에 맺혔다.

두이는 몸을 조금 움직여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밤새도록 거칠게 나눈 정사의 흔적이 소파 주변에 엉망으로 널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과 옷가지, 콘돔과 티슈 같은 것들이 호텔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우선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고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 날을 기울인 뒤,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해서가 힘겹게 눈을 뜨더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다리에 쥐가 났어. 으….”

“쥐? 밤새 추웠나.”

다가간 그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발을 잡아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제 손바닥만 한 발에는 돌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가득했다. 두이는 그녀의 뒤꿈치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쓸어 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발이 차다. 지난번 상처를 끝으로 상처는 더 늘어나지 않았지만, 언제 봐도 윤해서의 발은 노력이 엉겨 붙은 못생긴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이 울퉁불퉁한 발이 좋다. 제 몸에 난 상처는 돈에 목숨을 건 흔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정의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돈.

과거의 거지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발버둥 같은 거였다. 그런 점에서 윤해서의 상처는 저와는 결이 다르고, 이유가 다르다.

“혹시, 아침이야?”

코맹맹이 소리로 해서가 물었다. 두이는 해가 드는 창문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그녀의 발바닥 우묵하게 팬 곳을 꾹 눌렀다.

“바다에서 해가 뜨네.”

“진짜?”

“못 믿어?”

“아니, 믿을게.”

피식 웃으며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실루엣이 도톰한 이불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발과 종아리를 주무르던 그가 무릎 뒤를 어루만지며 올라가 허벅지를 주물렀다. 은밀한 부위까지 타고 올라온 손길에 두 눈을 가늘게 만든 그녀가 물었다.

“넌 지치지도 않아?”

해서는 일부러 허벅지를 모아 그의 손을 꽉 조였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그가 이불을 걷어 버리더니, 그녀의 골반을 확 끌어당겼다.

“꺅!”

“직접 확인해.”

몸이 반으로 접혀 버린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의 고개가 처박힌다. 이두이는 망설임이라는 걸 모르는 남자 같았다. 뜨거운 숨결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거웃 사이로 스며들어 와 미끈거리는 틈새에 닿았다.

“빨아 달라고 했었나.”

“그건….”

“싫어?”

“그게 아니라.”

어쩐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방 안이 밝아졌기 때문인지,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틈새를 혀로 핥아 올리며 예민해진 살점을 건드리는 그 때문에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흥분이 차올라 가늘게 몸을 떠는 그녀의 허벅지를 결박하듯 움켜쥔 그는 꿀처럼 흘러내리는 물을 삼키고, 혀로 펴 발랐다.

허벅지를 잘근대던 그가 상체를 세우더니 해서의 머리맡으로 손을 뻗는다. 그곳엔 남은 콘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을 가리고, 따뜻한 피부가 코끝을 스친다.

“꿈꾸는 거 같아.”

이로 비닐을 벗겨 콘돔을 씌운 그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상체를 기울였다.

“오늘, 정신없을 거야. 그러니까 절대 여길 벗어나지 마. 전화 꼭 받고.”

해서의 허벅지를 움켜쥔 그가 천천히 몸을 묻었다. 그는 한숨 같은 탄식을 흘렸다. 데운 크림처럼 뜨겁게 감기는 온기가 좋다. 내부를 콱 조이며 바르르 떤 그녀가 그의 팔을 움켜쥔다.

“하아, 미치겠어….”

“대답해야지. 절대, 나오면 안 돼.”

“응….”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 떨리는 눈가의 습기 같은 것이 좋다. 비단 외모가 마음에 드는 것을 넘어서, 눈길이 닿은 모든 곳이 예뻤다.

쾌감이 차오를 때마다 윤해서의 미간엔 날카로운 주름이 생겨난다. 윤해서는 순도 높은 볕처럼 깨끗한 분위기를 가진 듯도, 아무도 찾지 않은 길 위에 소복하게 쌓인 흰 눈 같기도 했다.

두이는 잠시나마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깊게 들어가. 밤새 괴롭혀서 그런가?”

속도를 올려 치받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하!”

“줄줄 흘러. 내 다리까지 젖을 거 같아.”

“그런 말 좀…!”

“아, 지금 조였어. 미치겠네….”

“읏!”

그녀가 부끄러운지 허리를 휘며 시선을 피한다. 상체를 맞붙인 그는 입술을 삼키듯 베어 물며 강하게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해서는 깊숙하게 들어오는 그를 막지도 못한 채 그 아래에서 헐떡였다.

미친 듯이 치받다가, 사정할 것 같은 고양감에 뒤로 빠져나와, 다시금 다리 사이를 빨았다. 미끈거리는 살점을 거칠게 이로 물고 빨아들일 때마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울먹임이 이어졌다.

새벽과는 다른 또 다른 쾌감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미쳤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감각에, 그녀를 숫눈처럼 희게 기억하는 이 머릿속을 긁어내고 싶었다.

그는 흥분에 잠식되어 열띤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턱을 타고 흐른 땀이 툭 떨어진다. 드러난 피부는 서늘한 것 같은데, 이 속은 왜 이리 뜨거운지. 윤해서의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마저도 사랑스러워, 더없이 설익은 이 감정을 고조시킨다.

미친 것 같다, 이두이.

절정의 순간, 그는 해서의 몸을 으스러트릴 듯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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