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전국에 대설 주의보가 내렸다.
30년 만의 한파가 몰아닥쳤고, 눈이 내린 그대로 얼어 버린 세상은 얼음 왕국처럼 온통 위험투성이였다. 숨만 쉬어도 폐가 얼 것 같은 한파가 지속되는 4일 내내 윤해서의 스케줄은 일정하다 못해 미련하리만치 단조로웠다.
오전 7시 기상, 연습실 출근 후 밤 10시 귀가, 수면 후 다시 연습실로 향하는 4일간, 그녀는 이두이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걸지 않았다.
세상이 얼어 버린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 또한 빙판이었다. 두이는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껏 자신은 일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에게 가족이란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이하나였고,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하나를 생각하는 일보다, 윤해서를 눈에 담는 일이 더 잦았다.
게다가 나흘 전 느낀 그 시큰한 감정의 정체를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목구멍 안쪽이 무언가로 꽉 막힌 기분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여전한 시선으로 윤해서를 좇고 있었다.
- 팀장님, 자택 이사 끝냈습니다. 짐은 말씀 주신 것만 옮겨 뒀어요. 주소 보내 드릴게요.
세현의 말에 상념을 환기한 두이는 자동차 시트를 비스듬히 눕히며 대답했다.
“수고했습니다. 감청 장치 설치한 쪽,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 워낙 적이 많으시잖아요. 나쁜 놈들 행적 일일이 대조 중인데, 다섯 정도로 좁혀 놓았습니다. 3일 내로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적이 많은가?”
- 어휴, 말도 마십시오. 팀장님 이름이 너무 귀에 확 박히는 편이라, 개명을 추천해 드립니다.
헛웃음을 흘린 두이는 다시 한번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 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차량 천장을 응시했다.
서승현의 구속 소식은 약속한 대로 24시간 동안 언론사 헤드라인을 달군 뒤, 구석으로 밀려났다. 전유철에게 서승현을 넘기며 당부한 부분이기도 했다.
수사는 조용히, 마약 스캔들에 대해서만 떠들 것. 뇌물 수수 혐의와 추가적인 범죄 혐의점은 비공개로 수사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래야 윤해서가 덜 상처 받을 것 같았다. 저 스스로 한심한 어린애처럼 보인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무엇 때문에 제게 그토록 화가 난 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사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두이는 윤해서의 마음을, 윤해서 자체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서승현이 윤해서를 수단 삼아 더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
서승현이 자신을 이용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윤해서가 받게 될 상처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윤해서 씨를 노리던 사람은 최우재가 아니라, 서승현이었습니다. 목적은 후원금이었고, 윤해서를 업계에서 매장해 의원님을 협박할 생각이었답니다.”
그가 한 보고에 윤홍주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며 물 잔을 몇 번이고 떨어트렸다.
“허! 어디서 그런 못된 짓을…!”
“그래서 제 업무는 이번 주까지입니다. 범인을 특정했으니, 남은 일은 경찰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단, 변수가 남아 있을 수 있으니 일주일간 더 지켜볼 생각이고요.”
“고맙네, 이 팀장. 우리 해서…. 괜찮은 거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해서가 서 단장을 많이 따랐거든. 어려서부터….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데, 저 녀석은 아비 마음도 모르고.”
윤홍주는 얇게 주름진 입술을 꾹 다물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마음을 몰라준다고, 손찌검으로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손찌검으로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해서, 다시는 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윤홍주는 화를 내는 대신 생각이 많아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두이는 윤홍주의 서재를 나서며 설치해 둔 도청기를 회수했고, 김세현은 클리어 표시를 했다.
하나씩 정리가 되어 간다. 이제 3일만 지나면, 이렇게 주차장에 앉아 윤해서를 기다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
답답한 마음에 상체를 세운 그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생각을 털어 낼 때였다. 윤해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오늘 박인호 씨랑 식사해. 그러니 이만 퇴근해.
***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해서 씨.”
박인호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해서의 곁에 앉았다. 늦은 시각 둘이 함께 찾은 곳은 종로에 있는 퓨전 다이닝이었다. 모 유명 셰프가 한옥을 개조해 만든 퓨전 다이닝은 독특한 인테리어 덕을 톡톡히 보는 SNS의 핫 플레이스였다.
“너무 늦게 온 건 아닐까요?”
“셰프랑 친분이 있거든요. 아, 늦은 시간이라 식사가 부담스러우면 가볍게 와인 한잔하셔도 됩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연습을 오래 해서 밥 생각이 없거든요.”
연습 때문이 아니라, 요즘은 입맛이 평소의 절반으로 뚝 떨어진 상태였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흥이 나지 않는다. 지난번보다 힘을 뺀 박인호는 능숙하게 해서의 몫까지 주문한 뒤, 직접 와인까지 꺼내 왔다. 편안해 보이는 피케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는 필드 위의 박인호를 연상하게 했다.
“이놈이 로마네 콩티를 숨겨 놨네요. 이거 제법 좋은 빈티지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이건 디캔팅 하면 한 병 다 마셔야 합니다.”
“아,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래도 비싸면 맛있겠죠.”
“맞아요. 비싸서 맛있는 거죠.”
박인호가 시원하게 웃으며 와인 코르크를 연다. 둘은 가회동 한옥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바 테이블에 앉았다. 기와지붕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겨울 바다에 하얀 파도가 이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묘했다.
박인호가 고른 와인이 디캔팅 되는 동안 식전주로 소비뇽 블랑과 소량의 문어 가스파초가 나왔다. 해서는 적은 양의 음식과 박인호를 번갈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인호 씨가 드시기엔 양이 너무 적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오늘은 해서 씨한테 맞추려고요. 저 혼자 돼지같이 먹어 대면 분위기 좀 깨질 거 같은데.”
“잘 드시는 게 어때서요.”
“관리해야죠, 관리.”
그녀는 애써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박인호에게 온 연락에 답장을 한 건, 사실 실수였다. 하필 윤희에게 온 메시지와 헷갈려 버린 해서는 식사하자는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어 몇 시가 좋겠냐고 묻는 말에 상대가 박인호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번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하필 이두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자신을 태워다 주고, 주변에서 기다리는 얼굴이.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굳이 박인호의 이름을 언급하며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한 뒤, 그의 반응을 살폈다. 심술을 부려 봤지만 이변은 없었다.
이두이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대답한 이후 연락이 없었다.
해서는 밤물결 같은 풍경을 응시하며 달콤쌉싸래한 맛을 음미했다.
“그런데 머리는 왜 자르셨어요? 엄청나게 길지 않았었나?”
허락 없이 머리카락 끝에 박인호의 손이 닿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은밀하게 느껴졌다.
“그냥 자르고 싶었어요. 이상한가요?”
“아뇨, 잘 어울려요. 얼굴도 작은 데다가 이목구비도 선명해서 뭐든 안 어울리겠어요? 개인적으로는 긴 머리가 더 좋긴 한데, 어차피 자라잖아요.”
“맞아요. 언젠가는 자라겠죠.”
해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연스럽게 박인호의 손을 떼어 냈다. 이두이가 뱉었던 짧은 감상이 귓가를 스친다.
“예쁘네.”
미사여구를 듬뿍 넣은 호화로운 문장보다, 그 한마디가 좋았다.
그 무심한 듯한 한마디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해서는 씁쓸하게 입술을 당겨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어 가지의 가벼운 안주와 디캔팅을 마친 와인이 나왔다. 음식도, 와인도 완벽했다. 분위기 또한 손에 꼽을 만큼 괜찮은 식당이었고 박인호와의 대화는 부담 없이 자연스러웠다.
둘 다 운동을 해서인지 승부욕이 넘쳤고, 콩을 싫어한다는 것도 닮았다.
하지만 비슷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와 정반대인 남자가 계속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박인호가 웃을 때마다 지금 이 옆에 있는 남자가 이두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그럴 때마다 해서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이제 3일도 남지 않았다. 서승현이 구속된 이유는 마약 때문이었고, 그 어디에도 뇌물 수수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걸 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그랬다. 양심의 가책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심장과 머리가 보내는 최초의 신호라고. 하지만 그 신호에 무뎌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신호는 통증과도 같아서,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자각하지 못하는 단계에 빠진다. 그럼, 양심은 어느덧 두꺼운 철면피를 쓰게 되는 것이다.
해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피식 웃었다. 와인을 아무리 마셔도 정신은 맑았고, 주위의 소음 또한 또렷하게 들렸다.
“우리 종종 만나죠. 연애하자고 안 할게요. 내가 해서 씨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친구부터 시작해요, 우리.”
기다렸던 순간인 듯, 박인호의 손이 그녀의 조붓한 어깨에 닿았다. 감싸듯 상체를 기울여 온 남자가 감흥 없는 해서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이 무심함이 좋다니까.”
“무심한 게 아니라, 정말로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만나죠. 데이트도 하고, 좋은 곳도 가고, 이렇게 술도 한잔하고,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재지 말고.”
아, 누구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인데….
항상 보이던 사람이 눈앞에 없어서인지, 벌써부터 이상한 금단 증세에 시달리는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박인호가 하는 말과 행동마다 이두이를 대입하고, 혼자 서글퍼했다.
나 이렇게 중증이었나? 이렇게…. 진심이었던가?
해서는 뜨거워진 심장을 가만히 눌러 보았다. 제 것이 아닌 듯 뛰어 대는 심장 박동이 고막을 울린다. 냉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보고 싶다. 안기고 싶었고,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제가 아무리 냉정하게 손을 놓으라 했을지라도 확 끌어안아 주었다면, 마지못한 척 품에 안겨 울어 버렸을 텐데.
“무슨 생각을 이렇게 진지하게….”
“박인호 씨.”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박인호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기다리던 남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다음 달 초에 진짜 괜찮은 와인 행사가 있어요. 부산에서 출발하는 크루즈에 초대받았는데, 같이 가요. 재밌을 겁니다. 아무나 초대받지 못하는 행사이기도 하고.”
술 때문인지 살짝 얼얼해진 혀를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락해 주세요. 크루즈는 살면서 딱 한 번 타 봤어요. 아니, 그건 크루즈가 아니었나?”
“이번 행사는 정말 커요. 제 지인들도 초대받았는데, 어지간해서는 꿈도 못 꾸는 행사니까 꼭 같이 가는 거로 해요.”
결국 와인 한 병을 거의 혼자 마셔 버렸다. 둘은 셰프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섰다. 이미 영업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 뒤늦게 자정이 넘었다는 걸 알게 된 해서는 급히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표시 세 건이 눈에 띈다. 하나는 엄마였고, 두 개는 이두이였다.
“왜요, 집에서 걱정하세요? 아, 제가 어머님께 연락드릴 걸 그랬네요.”
“아뇨, 괜찮아요.”
“제 매니저가 곧 올 테니까 차에서 기다릴까요? 한파라서 그런지, 날씨 엄청 춥네요. 해서 씨는 안 추워요?”
그러며 어깨를 감싸려는 듯 팔을 뻗어 온 박인호에게서 해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아, 저는 추위를 잘 안 타요.”
“으흠, 그래요? 그럼 체온이 좀 높은 편인가?”
“그런 거 같기도 해요.”
“오, 좋다. 제가 좀 체온이 낮은 편이거든요. 딱 좋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박인호의 화법에 익숙해진 해서가 한숨 쉬듯 웃으며 좁은 가회동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또다시 울리는 휴대 전화. 이번에도 전화를 건 사람은 이두이였다. 걸음을 멈춰 선 해서는 제발 실수하지 않길 바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여보세요.”
- …지금 가회동 주민 센터 앞이니까 그쪽으로 와.
“어? 나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
- 춥다, 빨리 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묘하게 가시가 느껴졌다.
해서는 매니저와 통화 중인 박인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점퍼를 좀 더 꽉 조였다.
“그러게, 춥네.”
- 비상등 켜고 있으니까, 바로 찾을 거야.
“차 뭔지 알아.”
수화기 너머 바람이 불어 드는 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간, 같은 밤길에 서 있다니….
마땅한 타이밍을 찾지 못한 해서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박인호도 통화를 마쳤는지, 불쑥 해서의 손을 잡는다.
“아, 춥다. 매니저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네요. 다행이죠.”
“네, 다행이에요. 추위 많이 타시는데. 그런데 저도 이 팀장이 데리러 왔대요.”
이 팀장이란 말에 박인호의 입가가 어색하게 비틀렸다.
“이 팀장이라면, 그 경호원 씨요? 아쉽네. 데이트의 끝은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데.”
“다음에 신세 질게요.”
“그럼, 경호원 씨한테 인사라도 해야겠어요. 차 어디 있대요? 같이 가요, 거기까지라도 바래다줄 테니까.”
박인호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남자의 뒤에 붙어 걷게 된 해서는 멀리 이두이의 차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상상과 현실은 이렇게나 다르다. 그렇게 보고 싶다가도, 막상 얼굴을 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희게 비워졌다.
“멀리서도 눈에 띄네요, 해서 씨 경호원. 진짜 저 피지컬로 왜 연예인을 안 하는 걸까요.”
“관심 없대요.”
“위험한데,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잘생긴 남자랑 붙어 다니는 거. 질투도 나고요.”
헛기침하며 박인호의 말을 한 귀로 흘린 해서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아예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에 잡아넣어 버린 박인호가 이두이를 크게 부른다.
“경호원 씨!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차량 앞에 서 있던 두이가 고개를 틀었다. 당황한 해서는 손을 빼내려 꼼지락거렸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이두이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몇 걸음 다가온 이두이가 속도 없이 싱글벙글한 박인호에게 까딱 인사한 뒤, 해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타.”
두이가 뒷문을 연 뒤에야, 박인호는 해서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박인호는 해서에게 말을 놓는 두이의 태도를 슬그머니 지적했다.
“우리 경호원 씨, 해서 씨랑 동갑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부로 클라이언트에게 말 놓고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요. 아, 해서 씨 잘 가요. 제 꿈 꾸고요.”
박인호는 차에 타려는 해서의 어깨를 털어 준 뒤 가볍게 손을 들었다. 당황한 얼굴로 돌아본 해서가 두이 대신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불편해서 말 놓으라고 했어요. 저도 그래서 편하게 말 놓는 중이고요.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 박인호 씨가 나서실 필요는 없어요.”
뾰족하게 대꾸한 뒤 차에 오르는 그녀를 두이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박인호가 담배를 꺼내더니, 두이에게 권한다.
“한 대 하시죠.”
“클라이언트가 귀가한 뒤에 태웁니다. 성의만 받죠. 감사합니다.”
조금도 감사하지 않으면서 입꼬리만 올려 웃는 수준 높은 가면에 박인호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아무리 눈앞의 남자가 압도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해도, 윤해서는 최종적으로 결코 샐러리맨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애프터 신청을 수락한 거겠지.
“어쨌든 종종 뵐 겁니다. 저, 해서 씨랑 좋은 관계 만들어 보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데이트할 때마다 따라 나오시면 곤란해요, 아시죠? 저와 있을 땐, 내 여자 내가 지킬 테니 경호원 씨는 마음 편히 퇴근하세요.”
살짝 취기가 돈 박인호는 중세 시대의 귀족처럼 차에 탄 해서에게 과장된 포즈로 인사한 뒤, 담배 연기를 흘리며 걸어갔다.
멀어지는 박인호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이두이의 미간에 짜증스러운 실금이 그어졌다. 보닛을 빙 둘러 운전석으로 향한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해서를 돌아보았다.
등받이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오른쪽 차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옆얼굴이 붉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집으로 가. 피곤해. 굳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됐는데.”
해서의 말에 냉랭하게 실소한 그가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가회동을 빠져나와 광화문 방향으로 차를 움직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기에, 평소였다면 꽉 막혀 답답했을 곳이 뻥 뚫려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웅장하게 빛을 밝힌 성곽과 담장, 24시간 빛을 내는 전광판 따위의 불빛이 조용한 차 안으로 스며든다.
“자정 지났으니 이틀이네.”
차가운 성에가 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던 해서가 고개를 튼다. 신호 대기 중인 두이와 룸 미러를 통해 시선이 부딪쳤다.
“언제 그만두는지 세고 있는 건가?”
두이의 말에 해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는 송별회 안 해?”
“그런 게 왜 필요해.”
“왜, 엄연히 이것도 이별인데. 그리고 나 좀 알 것 같거든…. 너처럼 책임감 강한 사람이 일을 그만둔다는 건, 그 일이 마무리되어서 아닌가? 누가 날 죽이려 한다며. 내 생각에 그거 해결된 거 같은데.”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뒤차의 경적을 들은 뒤에야 두이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본 해서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문다. 연습에 집중하며, 서승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마약 때문이라면, 돈줄이 끊어진 상황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가설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켰다.
평소 서승현의 행동들을 의심해 보기도 하고, 제게 한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리고 제게 일이 생겼을 때의 상황들을 교집합처럼 엮었다.
그랬더니 어렵지 않게 답을 낼 수 있었다.
“서승현이 날 죽이려 했다는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배신당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니까.”
“배신당했다는 걸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배신당한 것도 모르고, 허허실실 다니는 것보다는.”
뻥 뚫린 서울 길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해서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한강을 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니까 우리 송별회 하자. 아니, 나랑 섹스해 줘.”
말투는 잠잠했지만, 머릿속은 요란한 해일이 일어난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래서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튀어나왔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그것뿐이잖아.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썸도 아니었지만…. 섹스는 했으니까. 나, 너랑 하는 섹스 좋았어. 넌 어땠는지 몰라도.”
위악을 떨듯 생긋 말아 올리는 입꼬리가 바르르 떨린다. 술 때문이다. 홀짝홀짝 마신 와인에 취해 건드리면 터질 듯 눈물 보가 차올랐다.
“이두이, 자꾸 사람 무시하지 말….”
“입 다물어.”
순간, 직선으로 내달리던 차의 핸들이 우측으로 확 꺾였다.
***
좁은 뒷좌석 끝까지 밀려난 해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을 파고든 혀를 깨물고 다리를 좀 더 벌렸다. 그가 빠듯한 질구를 드나들 때마다 그녀의 뒷머리가 차창에 부딪혔다. 그러자 손을 뻗어 그녀의 뒷머릴 감싼 그가 품으로 꽉 끌어안으며 몸을 묻어 왔다.
키스에 섞인 와인 향, 젖가슴을 움켜쥐는 손바닥의 거친 감촉과 오롯하게 뒤섞인 내벽의 감각이 두 사람을 미치게 했다.
“하아, 위로 올라와.”
탁하게 속삭인 그가 그녀를 안아 단번에 허벅지 위에 앉혔다. 자세를 바꾸느라 빠져나간 성기가 애액에 젖어 번들거린다. 해서는 젖은 성기를 움켜쥔 채, 질 입구에 끝을 맞췄다. 귀두부터 천천히 채워지는 감각에 그녀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린다.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쥔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뿌리까지 삼켰다. 녹진해진 내벽이 뜨겁고도 부드럽게 성기를 휘감는다. 깊이가 보통이 아닌지라 조금 힘들었다. 천천히 엉덩이를 들썩이는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던 그가 결국 골반을 잡아 허릴 쳐올렸다.
퍽, 소릴 내며 선단 끝이 강하게 치받힌다.
“하! 아, 흐읏….”
그가 들어올 때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좋았다. 마치 이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내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콱콱 치고 들어오는 감각에 피부 위로 아스스한 소름이 돋는다. 솜털이 바짝 곤두서고, 열기 어린 실내에는 습기가 가득 찼다. 그녀의 셔츠를 걷어 올린 그가 동그랗게 영근 젖꼭지를 이로 깨물고 빨았다. 쾌감에 혼몽해진 그녀라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내벽을 조이자, 젖가슴 위로 더운 숨이 흩어진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못된 도발에 이 남자가 차를 세우고 제게 달려들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흐트러지길 바랐고, 정신 못 차릴 만큼 엉망이 되길 원했다.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빠듯하게 들어찬 붉은 내벽이 쓸리고 욱신거렸다. 묵직한 둔통이 어느새 쾌감이 되고 희열이 될 때까지. 서로의 피부에서 일어난 열기가 땀이 되어 온몸을 축축하게 적실 때까지. 해서는 셔츠를 벗어 떨어트리며,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단단해 보이는 가슴팍에 입술을 누르며 아래에 물린 성기를 깊숙하게 삼켰다가 천천히 뱉어 냈다.
“하, 미치겠네….”
간드러진 감각 때문인지, 그의 입술 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해서는 제가 좋아하는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빨았다. 어둠 속에서도 이두이의 모든 것은 선명했다. 그가 얼마나 근사하고 완벽한 피조물인지는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
해서의 뒷머릴 부드럽게 움켜쥔 그가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어 내더니, 그대로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작고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이면서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더 깊게 들어갈 틈이 없을 줄 알았건만, 해서는 눈앞이 번뜩이는 쾌감에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밭은 숨을 턱턱 흘리며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온몸이 지끈거리고 해서의 몸이 열 때문에 새빨개졌다.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시트를 애액으로 흠뻑 적셨다. 절정에 치달은 내벽이 바짝 조여들어 경련한다. 해서는 울음 같은 신음을 흘리며 허벅지를 떨었다. 오금이 저릿해지는 극도의 쾌감에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서로를 씹어 삼켰다.
피부를 맞대어 서로를 부둥켜안았지만, 허상을 움켜쥔 기분이었다. 해서는 자신을 하염없이 더듬고 파고드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시작이 잘못되어서일지도 모른다.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오만함이, 그저 제 마음에 쏙 드는 피조물에 열광하는 것뿐이라 생각한 어리석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두이야…. 하아, 좋아해.”
해서는 울음을 삼키며 마지막이 될 고백을 했다. 좋아한다는 말에 그가 반응하지 않기를, 항상 습관처럼 쏟아 내는 일상적인 인사 같은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빡빡하게 맞닿은 내부가 흥건하게 젖어 갔다.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댄 해서의 뒷머릴 가만히 잡아 누른 그가 사나워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도 좋아…. 나도, 좋아해. 너.”
***
날연한 기분에 꼼짝도 않고 해서와 두이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시트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해서는 멍하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그는 헤드 레스트에 뒷머릴 댄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몸에서 흘러나온 체액으로 몸이 끈적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두이는 천천히 해서의 뒷머릴 쓰다듬었다.
성적인 흥분에 취해 쏟아 낸 고백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드러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란 후회가 밀려든다.
‘그래도….’
좋아한다는 말에 울음을 터트려 버린 윤해서가 사랑스러워서 고백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고작 좋아한다는 그 한 마디에 이토록 예쁘게 울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두이는 제게 폭 안겨 있는 해서를 꽉 끌어안았다.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
어리광 섞인 그녀의 말에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해.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이런 거 할 거 같아? 말했지, 처음이라고. 모든 게 다, 네가 처음인 걸 어쩌란 거야.”
“정말…?”
여전히 불안 섞인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누른 그가 잘게 입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제발 너 자신을 혹사하는 것 좀 그만해. 너 때문에 내 머릿속에 폭탄이라도 든 기분이야.”
“내가 왜? 뭘 어쨌다고.”
“위태롭고, 안쓰럽고, 손대면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것도 같고.”
“내가 그렇게 약한 이미지였어? 아닌데, 나.”
“내가 봤을 때는 그렇다는 거지.”
두이는 시트에 떨어트린 셔츠를 주워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 준 뒤, 물티슈를 꺼내 질척하게 젖은 다리 사이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부끄러운지 허벅지를 모은 그녀가 옆자리로 후다닥 물러나 속옷을 올리고 레깅스에 발을 넣었다.
벨트를 채운 그가 뒷문을 열고 내리려다 말고 잠시 멈추었다. 그러곤 돌아서 땀에 젖은 앞머릴 손끝으로 털어 내는 해서의 팔을 당겼다. 그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가까이 당겨진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메마른 듯 부드럽고 푹신한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열린다. 둘 다 시선을 내리깐 채 젤리라도 되는 듯 서로의 입술을 잘근잘근 빨고 깨물었다.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달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혀끝으로 여린 살을 훑으며 잘근 깨물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팔을 놓아준 그가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떼더니 더운 한숨을 길게 흘렸다.
“…가자, 일단.”
***
정적이 내려앉은 골목, 하얀 SUV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마주 섰다.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양 뺨을 붉힌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힐긋 살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카메라가 너무 많아. 대체 감시 카메라를 이렇게 많이 설치한 이유를 모르겠어.”
“장관님이니까. 세상엔 미친 사람들이 많거든.”
“감시당하는 기분이야.”
“익숙해져.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해서는 하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천천히 묻기로 했다. 서로에게 한 번씩 선을 넘지 말라며 상처를 주었으니, 다음 단계는 신중하게 내딛고 싶었다.
게다가 좋아한다는 마음을 확인했을 뿐, 사실 아직은 얼떨떨한 마음이 더 컸다. 해서는 걸음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돌아서서 대문을 열었다. 그러곤 두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두이는 마치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따금 윤해서를 집 앞까지 바래다줄 때, 고급스러운 아파트 조형물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재밌게도 지금은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느꼈던 위축감이 고급 아파트의 조형물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이봐요, 이 팀장님.”
해서가 들어간 대문을 응시하던 두이는 뒤에서 들려온 정지숙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두툼한 실내복에 코트를 걸친 지숙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아니, 여기 있었어요. 내 차에. 그런데…. 둘이 뭐 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지숙은 해서가 들어간 대문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술을 꽉 다물곤, 윤해서와 닮은 얼굴로 두이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박인호 씨가 두 사람 한참 전에 출발했다고 했는데, 왜 이제 와요?”
“차가 막혔습니다.”
“차가 막혀? 하, 날 바보로 아나. 둘이 무슨 사이예요? 집 안에 일하는 사람 있는 거 알죠? 그분이 끔찍한 걸 봤대요…. 이 팀장이 해서한테 콘돔을 썼다면서요? 미쳤어? 해서가 어떤 앤데, 이 팀장 같은 사람이…!”
“콘돔을 쓰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린애들도 아는 상식인데, 콘돔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어머, 어머머!”
정지숙이 비명을 내지르며 두이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은 그가 두 눈을 내리떠 정지숙과 눈을 맞추었다. 지숙은 아픈 손을 움켜쥔 채 목소릴 낮췄다.
“이봐요, 이두이 씨….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우리 해서 어떻게 키웠는데…. 알아요, 해서가 꼬셨겠지. 우리 해서, 본인이 예쁜 거 알거든. 이 팀장도 얼굴 반반하니까 끌렸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이 팀장이 밀어냈어야지. 본인 처지 생각하면, 먼저 선 그을 줄 알아야지. 안 그래요?”
두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지숙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두이의 눈빛에서 희미한 경멸을 읽었다. 이토록 노골적인 눈빛은 처음이라, 지숙은 되레 기가 죽었다.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봐? 나 당신보다 어른이에요. 어른이 자식 같은 사람한테 충고하는 게 우스워요?”
“아닙니다. 충고는 충고대로 듣겠습니다.”
흠잡을 곳 없이 단정한 말투와 순식간에 변해 버린 잠잠한 눈빛에 지숙의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어쩐지 남편이 이두이는 건드리지 말라며 학을 떼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고리타분한 소리 해서 미안한데, 우리 해서…. 이 팀장이 먼저 밀어내요. 해서 진심 되면 위험한 애예요. 젊은 사람들이 가볍게 만나는 거면, 나 상관 안 할게. 이두이 씨가 더 이성적인 것 같으니까 부탁하는 거예요. 이해하죠?”
정지숙은 조심스럽게 두이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이 팀장, 미국에 누나가 있다면서요. 여자 혼자 타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입국하면 한번 봐요. 내가 한국에 일자리 하나 마련해 줄 테니까, 그쪽 벌이 시원찮으면 언제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가족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성의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아니! 그냥 말할게. 나 이 팀장한테 해서 시집보내기 싫어. 이 팀장도 누나가 있으니 알겠지. 이 팀장 같으면, 금쪽같은 누나를 아무 남자에게나 시집보내고 싶겠어요? 쟤 하는 짓 보니까, 진심인 거 같아서 무서워서 그래. 나 돈 많고 집안 좋은 남자한테 해서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해. 이 말 하려고 기다렸어요.”
본인이 말해 놓고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대놓고 ‘나 속물이오.’ 하며 광고라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웃어 보인 그는 꾸벅 인사한 뒤 돌아설 뿐이었다. 별다른 대답 없이 숙소로 돌아가는 그가 못 미더웠지만, 적어도 뻔뻔하게 대드는 스타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휴, 갑갑해.’
지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겠지. 저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치사하고 고까워서라도 해서에게 오만 정이 뚝 떨어질 것이다.
지숙은 해서를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여자가 되어도 좋았다.
끼익, 탁.
지숙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릴 들으며 숙소 앞 간이 의자에 앉은 두이가 담뱃갑을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한여름 담쟁이와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을 담벼락은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잔해들이 들러붙어 볼품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담배와 라이터를 한 손에 움켜쥔 그는 마른세수한 뒤, 드문드문 액정이 깨진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손에 익어 전화번호부를 뒤질 필요 없는 이하나의 번호를 눌렀다.
한 달 만인가?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감도가 먼 신호음이 이어지는 걸 묵묵히 들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던 쌍둥이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엔 함께 있는 날보다, 이렇게 먼 곳에서 목소리만 듣는 날이 더 많아졌다.
돈 때문에.
남들처럼, 남들만큼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이하나는 특전사 제대 후 영국의 PMC로, 자신은 UTD 제대 후 국가 정보부에 귀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었다. 이 한 몸 뉠 집 한 채면 충분했다.
- Ciao.
생각에 잠겨 있던 두이는 수화기 너머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줄리오. 하나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줄리오 파렌티로 2년 전, 이하나의 남편이 된 이탈리아 사업가였다. 대대로 파렌티 가문은 유럽을 휘어잡은 마피아 가문이었지만 지금은 거물 사업가 집안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정확했다.
- 두이?
특유의 나른한 저음을 가진 줄리오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내 목소리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이하나 어디 있어.]
- 흠, 하나는 지금 샤워 중이야. 우리 지금 휴가 왔거든. 추운 건 질색이라, 뜨거운 곳으로.
[팔자 좋네. 하나 바꿔. 샤워하는 중이면, 욕실로 전화기 던지면 알아서 받겠지.]
- 목소리가 안 좋은데? 무슨 일이지?
[너 말고, 이하나가 필요해.]
- 아무리 너라도, 내 아내는 안 돼. 가뜩이나 요즘 빌어먹을 어린놈이 하나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짜증 나는데. 젠장!
[어린놈? 어떤 새낀데?]
- 있어. 우리 레이싱 팀 에이스.
줄리오는 이를 갈며 알아듣지 못할 이탈리아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두이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2년 전,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부터, 무언가 소중한 걸 지키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그것을 알게 해 준 상대가 이탈리아 마피아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줄리오 파렌티가 이하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사랑.
자신의 쌍둥이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었다.
- 줄리오! 당장 내놔, 누가 네 멋대로 내 전화 받으래! 내가 한 번만 더 그러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이렇게 과격한 언사가 오가는 사이라 해도 사랑은 사랑이다.
- 이두이! 너 이 새끼,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누나, 휴가라며?”
- 휴가가 아니라 일이야. 그런데 넌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귀신같긴.”
웃음을 흘린 두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이 휘발되는 걸 느꼈다.
- 한국 가서 잘 있나 했더니…. 일 더럽고 거지 같으면,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와. 온갖 곳에서 다 너만 찾아 대는데, 굳이 그런 썩어 빠진 조직에 붙어 있을 이유가 뭐야?
“그러게.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 결혼한다고 할 때 파렌티 쪽 가족들이 신경 안 긁었냐?”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이하나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 그걸 말이라고 해? 밀로 영감이라고 있는데, 그 영감은 날 죽이려고까지 했어. 동양인이라 싫었대. 그래서 그 노인네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으려다가 참았지.
이하나는 이미 지난 일이라고 말하며, 지금은 오히려 생일마다 엄청난 선물을 보내온다고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고 나면 사실 다 별거 아니라고.
- 그런데 이두이, 너 연애해?
“아니.”
진짜 귀신같네.
두이는 그제야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하나의 쾌활한 목소리 때문인지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 아닌데, 연애하는구나?
“안 한다고.”
- 줄리오! 두이 연애한대!
하나의 외침에 수화기에 대고 줄리오가 말했다.
- 식은 이탈리아에서 올려. 내가 준비해 줄 테니.
[시끄러워. 안 해, 연애.]
- 누구 닮아서 고집은. 어쨌든 이곳으로 오라는 제안은 진심이야. 두이, 하나 혼자서는 버거워.
[생각해 볼게.]
두이는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목소릴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괜히 했나? 이미 사랑에 허우적대는 것들과의 대화는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더럽던 기분은 제법 나아졌지만.
그는 정적이 내려앉은 주위를 둘러보다 담뱃불을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해서의 방 창문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창문을 벌컥 연 윤해서가 그를 불렀다.
“이두이!”
현관 앞에 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해서가 자신의 휴대 전화를 톡톡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 올린다. 자리에서 뛰기도 하고, 양손으로 원을 만들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왜, 저런 바보 같은 행동도 예뻐 보이는 건데.
두이는 온몸으로 말하는 윤해서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돌연 높은 담장 위를 단번에 타고 올랐다.
“어어! 야!”
담장 꼭대기에 올라선 그가 씩 웃더니 해서의 창문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그러곤 검지로 입술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그에 해서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두 눈만 크게 떴다.
제법 거리가 되지만, 닿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담장 위에 서서 굳은 어깨를 푼 그가 가볍게 점프해 그녀 방의 2층 난간에 매달렸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뿐한 몸짓이었다.
헛바람을 들이켠 해서는 사방을 살피더니 방문을 잠갔다.
그러고 다시 창가에 돌아왔을 땐, 이미 이두이는 창틀 위에 올라앉은 뒤였다.
“야, 너… 뺨이 왜 이래?”
“정신 차리려고 때렸어.”
“직접?”
“응. 담장 넘을 거 같아서. 그런데 결국 넘어 버렸네?”
해서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두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완전 멋있어. 왕자님 같아, 이두이.”
“왕자님 아니야.”
“알아, 이두이인 거. 왕자님보다 네가 더 좋아.”
그는 해서의 허리춤을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말랑한 살을 깨물고 혀로 핥자,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린 그녀가 키득대며 웃는다.
“그런데 이러다가 걸리면, 우리 둘 다 쫓겨나는 거 아니야?”
해서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두이의 신발을 벗겨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곤 창문을 닫은 뒤, 그의 코트를 벗겼다.
“쫓겨나면, 나랑 멀리 나갈래?”
두이의 말에 해서가 셔츠 단추를 풀다 말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로?”
“장난이야.”
“장난 아닌 거 같은데?”
“장난이라고.”
두이는 캐묻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든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욕조, 빌려도 되지?”
그의 질문에 바로 옆에 있는 장을 연 그녀가 배스 밤을 꺼내 들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라벤더랑 바닐라. 어떤 거로 할까?”
***
동쪽 창을 통해 새벽의 냉기가 밀려든다. 어둠 속에서, 밤새 잠들지 못한 두이가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었다.
셔츠에 팔을 넣고 단추를 잠근 다음 벨트를 채우고, 넥타이는 대충 감았다. 그러곤 이불을 걷어차고 숙면 중인 윤해서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온몸이 울긋불긋하다. 제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한 피부를 보자, 못된 소유욕과 끈적한 정염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정지숙의 말은 궤변이면서, 궤변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제안도 아니었다. 윤해서를 볼 때마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과도한 사랑에 허덕이는 윤해서. 그 사랑에 숨 막혀 죽기 직전 제게 손 내민 윤해서…. 그 넘치는 사랑을 윤해서는 제게 퍼부었다. 비워진 독을 채우듯, 윤해서에게 사랑을 배운 것 같다.
좋아한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용기는 그녀의 삶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자네.
두이는 해서의 몸에 이불을 덮어 준 뒤, 다시 창문을 열었다.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망설임 없이 숙소가 있는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는 마른 풀이 묻은 바짓단을 털고서 숙소로 들어갔다.
“현장 마무리합니다. 저 나가면 곧장 박대희 투입해요.”
- 하암, 예. 수고하셨습니다. 아! 팀장님.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물건들을 가방에 넣은 뒤, 서류 몇 개를 세면대 위에서 태웠다.
“말해요.”
두이는 자신의 흔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 드나들던 이두이란 존재는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다. 아마 윤해서는 놀라겠지.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었고,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 위에서 오더가 내려왔습니다. 보름 뒤, 부산에서 크루즈가 출항합니다. 초청장 돌려졌고, 어마어마한 거물들 위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껌을 유통할 거라는 첩보입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침투해 증거 수집 마치면 기동대가 출동할 겁니다. 제법 큰 오더라 팀장님이 지목됐고요.
“쉴 틈을 안 주네요.”
- 팀장님이 너무 능력자여서 그렇죠.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합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 그럼 일단 휴대 전화 신호부터 끊겠습니다. 현장에서 폐기해 주세요.
김세현과의 대화를 마친 두이는 휴대 전화를 반으로 부순 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타 버린 휴대 전화를 챙긴 그는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7분. 평소였다면 5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늑장을 피운 기분이었다.
차에 오른 그는 미련 없이 골목을 빠져나가며, 하수구 안으로 망가트린 휴대 전화를 툭 던졌다.
“폐기 완료.”
- 신호, 차단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