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흑석동, 윤 장관의 집 앞에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을 열고 내린 윤홍주가 피곤한 표정으로 보좌관의 인사를 받으며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추운 날씨에 정원을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던 지숙이 남편을 발견하곤 뛰어왔다.
“고생했어요, 여보.”
“고생은 무슨. 근데 왜 나와 있어. 해서는?”
“해서, 아침에 나가서 지금까지 안 왔어요. 이 팀장이 같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는 했는데, 내가 오전에 실수한 게 있어서….”
실수라는 말에 윤홍주는 굳은 얼굴로 어금니를 사리물며 걸음을 내디뎠다.
“말해 봐. 무슨 실수를 했는지.”
“그게…. 갑자기 서 단장 얘기가 나왔거든요. 그런데 내가 좀 욱해서, 해서한테 돈 얘길 해 버렸어요.”
집 안으로 들어선 윤홍주의 손이 떨렸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집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지만, 그는 엄동설한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돈이라니.”
“왜, 우리가 지금까지 해 준 거요…. 빚 갚아 준 거.”
윤홍주는 실소하며 무서운 표정으로 지숙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서 단장을 도운 것은 그저 발레단을 이끄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딸을 잘 봐 달라는 일종의 성의랄까. 해서가 정상에 서기 전까지는 방해 없이 탄탄대로를 걸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저, 자식의 앞날이 무탈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약점이 되어 버렸다.
“이번 공연엔 해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다른 친구를 주연으로 세우려 해요. 이해하시죠? 근데 너무 아쉽긴 해요…. 해서가 정말 하고 싶어 했던 역할이었는데.”
정치에 발 들인 이후, 아니, 그 전부터 해서는 모든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 내려는 악바리였다. 제 역량 밖의 일이라도 일단 들이박고 보는 진취적인 아이였다. 연습량이 늘어나 발을 땅에 디딜 수 없을 만큼 다쳐서 돌아온 날에도, 해서는 우는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날이면, 밤새도록 끙끙 앓는 소리에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 딸을 위해서라면 후원금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해서의 노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굴러떨어지지 않게 뒤를 받쳐 주고 싶었을 뿐. 그렇게 역할을 얻은 해서가 행복해할 때, 윤홍주는 모든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똑똑한 애야. 누구보다 노력했고. 후원금 좀 줬다고 특혜받은 거 있어? 해서는 자기 비난 같은 거 하는 애 아니야.”
“근데 알잖아요. 해서 성격….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예요.”
“나 참, 그러게 왜 갑자기 서 단장 얘기가 나왔는데. 돈 끊은 지 오래됐잖아!”
화를 내는 남편에게 지숙은 멜리사 김의 집 앞에서 본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남의 집 벽을 들이박은 뒤 도망쳤다는 운전자를 경찰들이 찾아 헤맸다고. 그러던 중 어디선가 서승현이 나타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과한 뒤, 경찰들과 함께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해서는.”
“해서는 배탈이 나서 이 팀장이랑 먼저 집으로 갔고요. 아, 여보…. 이건 좀 내 직감인데. 우리 해서, 이 팀장 좋아하나 봐요.”
서 단장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보다 윤홍주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해서가?”
어디선가 귀 기울이고 있을 사용인을 의식한 지숙은 남편과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그냥 제 생각일 뿐이긴 한데, 해서 욕실 휴지통에서…. 콘돔이 나왔대요.”
“허.”
“아주머니가 너무 놀라서 말해 주셨는데, 이 팀장이 나쁜 짓을 한 거 같진 않고…. 둘이 분위기가 묘하다고. 여보, 나는요.”
윤홍주는 손을 들어 아내의 말을 막았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두이는 경찰청장에게 소개받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딱 봐도 경찰이나 형사 쪽의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안정적으로 정치권에 자리 잡은 윤홍주는 어렵지 않게 이두이의 정체를 짐작했다. 이두이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국가가 보낸 정부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제 편일 땐 그 누구보다 든든하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을 윤홍주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오해한 걸 거야. 해서가 집에 사내새끼 들인 적 있는지 확인해 보든지. 이 팀장이 그럴 리 없어.”
“여보.”
“그만해! 해서한테 말실수한 것도 모자라서, 이 팀장이랑 무슨 관계냐고 캐묻기라도 할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이 팀장 나쁘진 않은데, 고아라면서요. 쌍둥이 누나는 외국에서 일한다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둘이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되어서요.”
“거참, 해서 우리 딸이야. 만약 이 팀장이랑 연애한다고 해도 그냥 둬. 그러다 말 테니까…. 이두이 쪽에서 우리 해서 끊어 낼 테니,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지켜만 봐.”
윤홍주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뒤,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넥타이도 풀지 않고 손을 닦는데 비누를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잠한 고요 속, 태풍이 몰아칠 것 같은 불안이 느껴졌다.
***
“일기 예보가 바뀌었어. 비가 아니라 눈이 온대. 오늘은 여기에 있어.”
땀이 고인 목덜미에 그의 숨이 흩어졌다. 해서는 진이 빠진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눈이 온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세상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회색과 주홍, 사막의 모래색과 감청색의 푸른빛이 어지러이 섞인 하늘이었다.
“우리 술 마실래?”
“술?”
“응. 와인이나, 소주도 괜찮고.”
해서의 말에 나신의 그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끈적하게 땀이 난 몸이 떨어지자, 그 틈으로 서늘한 기운이 닿는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 훔쳐보듯 잘록하게 조각된 허리와 두툼한 흉통, 몸 곳곳에 난 상처들을 살폈다. 두 번의 사정을 마치고도, 반쯤 발기한 성기가 꺼떡이며 허벅지에 부딪혔다. 남자의 몸이 제 안을 가득 채웠을 때의 고양감을 떠올린 그녀는 묘한 자책감을 느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이 딸린 운동복 바지를 꺼내 입은 그가 냉장고와 싱크대 장을 열더니 부산하게 움직인다. 이어, 작은 쟁반에 와인과 치즈 몇 종류를 챙겨 온 그는 흐트러진 침대를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흘리지 마.”
“안 흘려,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칠칠찮지 않거든?”
해서는 두이를 투덜이라고 놀리며 와인부터 잔뜩 따랐다. 붉은빛 액체가 잔 가득 찰랑거린다. 와인 애호가인 서 단장이 보면 기함하다 못해 화를 낼 정도로 엉망인 매너였다.
불시에 떠오른 서승현의 다정한 표정이 가슴을 후벼 판다. 차라리 취하기라도 해 버리면 의심과 조급함으로 엉망인 마음속이 정리될까 싶어서, 한시라도 빨리 취하고 싶어졌다.
“와인을 그렇게 마실 거면, 차라리 맥주를 먹지 그래.”
“맥주는 너무 배부르단 말이야. 나 은근 술 세거든.”
해서는 넘치려는 와인을 꿀꺽꿀꺽 삼킨 뒤 IPTV의 영화를 틀었다. 둘이 함께 고른 영화는 판타지 액션물이었다. 흔한 키스 장면 하나 없이 열심히 치고받으며 긴 러닝 타임을 소화하는. 와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지만, 지금껏 보아 왔던 그 어떤 영화보다 재미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오늘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영화 대신 조용한 노래를 틀어 놓고 밤새 창문 방향으로 누워 자다 깨길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찬 기운에 눈을 뜨고, 하얗게 잠겨 가는 세상을 보며 울어 버렸겠지. 외로움에 취약해 항상 시끌시끌한 소음 속에 부러 몸을 묻고 살아가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와인을 연거푸 세 잔이나 마신 그녀는 제 오른쪽 어깨에 닿은 두이의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둘 다 시간은 확인하지 않았지만, 하늘이 어둑해서인지 낮술을 마신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무릎을 모은 채 앉은 그녀와 달리, 그는 편안해 보였다. 베개를 높이 쌓아 포개어 몸을 묻더니, 이따금 그녀의 어깨에 머릴 기대 왔다. 해서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진 평온을 해칠 질문 같은 건….
***
깜빡 졸았던 건지, 그녀는 와인 잔이 기울어지는 걸 느끼며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몇 시지?’
온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도로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과 이따금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량 후미등의 붉은 궤적만이 빛날 뿐이다. 창문과 붙어 있는 침대맡으로 냉기가 흘러든다. 대체 언제 영화가 끝난 건지. 제 어깨에 기댄 그는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해서는 와인 잔과 치즈가 올라간 쟁반을 사이드 테이블에 옮긴 뒤,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맨몸에 커다란 셔츠만 걸쳐서인지 손끝 발끝, 코끝까지 모든 신체 말단이 차게 식은 것만 같다. 이불 속으로 파고든 그녀가 몸을 웅크리자,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던 그가 팔을 뻗어 왔다.
자신을 뒤덮은 남자의 체온이 뜨겁다. 그 따뜻한 열기에 몸이 녹으며 자잘한 소름이 일어난다. 이 온기에 위로받았다. 어깨를 덮어 주던 코트의 온기보다, 맨살이 닿았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뜨거움이 더 좋았다.
해서는 약 오른 마음에 그의 셔츠 안으로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그러자 반듯한 미간을 찌푸린 그의 입술이 언뜻 휘어 올라간다.
“차가운데.”
“따뜻해서.”
“내가 난로야?”
“지금은.”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잠결이겠지만, 좋았다. 해서는 그의 쇄골께에 입술과 이마를 묻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몸을 데우는 따뜻한 체온 때문인지, 움찔하며 눈을 떴을 때는 세상이 조금 더 환해진 상태였다. 새벽 어스름이 밀려드는 창 너머, 온 세상이 희게 변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여 삭막했던 도심의 풍경을 보기 좋게 만들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해서는 자신을 꽉 끌어안은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림 액자처럼 거대한 창문 너머로 하얗게 변해 버린 한강 변이 보인다. 해서는 적막에 사로잡힌 도시를 응시했다.
이 풍경을 보고 싶어서 이맘때쯤이면 항상 담양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잠에서 깼을 때 선물처럼 눈 내린 세상을 마주하고 싶어서. 하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함께 첫눈을 본 사람이 이두이여서겠지.
찬 기운이 내려앉은 새벽. 그 고적함에 마음이 이상해진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뻗어 온 손이 허리를 감싸 다시금 품속으로 당겼다. 잠결인지 목덜미에 입술을 맞붙이며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봉긋한 젖가슴을 움켜쥔다.
해서는 몸을 뒤척였지만, 허벅지 틈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막지 못했다. 갈라진 틈새로 들어온 손가락이 야릇하게 움직였다. 소변이 마려운 듯한 감각이 느껴져 도망치고 싶었지만,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제 몸의 두 배가 넘는 남자의 품에 파묻히는 건, 맹수의 품에 안긴 기분이 들게 했다.
그녀는 목덜미에 이를 세우는 감각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뭉근하게 침입한 손가락이 손톱만 한 틈을 찾아 서서히 파고든다. 허리를 비틀었지만, 엉덩이에 닿은 묵직한 부피감에 헛숨만 들이켰다. 당장에라도 다리를 벌리고 들어설 것처럼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잠에 취한 남자의 열띤 숨이 뒷덜미로 쏟아진다.
그녀는 시트를 움켜쥐며 허벅지를 모았다. 하지만 긴 다리가 제자리인 것처럼 자리를 잡자 그녀의 무릎이 벌어졌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음핵에 손톱이 스친다. 전신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르르해 몸이 튀었다. 해서는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눌러 물며 그의 가슴팍에 뒷머릴 기댔다.
“…흣, 그만!”
지나친 자극에 폭 젖은 아래가 소변이라도 본 것처럼 엉망이었다. 미끈거리는 애액을 음부 전체에 펴 바르듯 문지르던 그가 눈을 뜬다. 조금 전까지 잠에 취해 있던 남자의 눈빛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날 선 눈빛에 솜털이 곤두섰다.
그녀를 엎드리게 한 그는 땀에 젖은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손을 빼, 테이블을 더듬어 콘돔을 찢었다.
“너, 몽유병 있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소변이 급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네가 옆에 있잖아.”
하얗고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쥔 남자가 틈새를 벌리더니, 그대로 코를 묻는다. 혀끝이 훑고 지나가는 간지러움에 결국 해서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으응!”
“윤해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웅크리듯 모았다. 그녀의 얼굴 옆을 짚은 남자의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위협적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풀어진 질 입구에 닿은 뭉툭한 선단의 감촉. 그녀의 복부 아래 손을 넣은 그가 배를 누르며 천천히 들어왔다.
“아아! 자, 잠깐!”
해서는 빡빡한 내부를 채워 오는 부피감에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눈도 뜨지 않은 채 파고든 그는 처음부터 빠르고 강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말랑한 둔부에 단단한 하복부가 치대어 올 때마다 눈앞이 번쩍이며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뜨겁다.
오금이 저릿저릿하고, 무언가를 쏟아 낼 것처럼 아래가 간질거린다. 해서는 시트를 움켜쥔 채 어떻게든 앞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내벽을 건드리는 성기의 방향이 바뀌어 더욱 자극이 심해졌다.
“줄줄 새, 윤해서.”
어떻게든 자극을 참아 내려 이를 악문 그녀의 귓가에 야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해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허벅지를 모아 배배 꼬았다.
“하, 그러면 금방 싼다고. 미끄럽고, 깊어서.”
“제발, 빨리 싸. 하아, 미치겠어.”
“진짜, 빨리 싸?”
“으응, 빨리 싸.”
후우, 하며 숨을 내쉰 그가 그녀의 골반을 움켜쥐더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거센 움직임이었다. 퍽퍽, 밀어 올리는 속도와 힘은 해서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탈색시켜 버렸다. 발끝에서 두피까지 아찔한 쾌감이 내달리자 해서는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아! 아아, 흣! 그, 그만! 너무…!”
“빨리 싸라며.”
“하, 흐응, 이두이!”
“싸야지, 너도.”
귓바퀴를 깨무는 자극이 더해져, 시트를 짚은 그녀의 허리가 아래로 휘었다. 긴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흘러내리고, 교접된 틈에서 말간 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음모 끄트머릴 타고 떨어진 물을 보며 해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서 너…. 오줌 쌌어?”
“아니야! 이거, 아니라고. 나도 처음이라 몰라! 근데… 아니야. 하!”
성기를 빼고 울먹이는 그녀의 몸을 돌려 반듯하게 눕힌 그가 밭은 숨을 몰아쉬더니, 젖은 눈가에 입술을 누른다. 그러곤 다시 그녀 안으로 삽입했다. 살과 살이 빈틈없이 맞물리며 아까와는 다른 자극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예쁘네.”
그의 나직한 속삭임에 해서의 눈가가 더욱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해서는 그의 입술을 찾아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곤 코끝을 교차하고 입술을 맞붙이며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살이 부딪칠 때마다 물이 튀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되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이 뜨거운 순간이 끝나고 몸이 떨어질 때, 틈으로 스며들 냉기가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목숨 걸고 사랑하는 연인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내려놓았다. 매일매일 건네는 좋아한다는 고백에 웃음으로 넘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고작 연인이란 관계에 집착하지 않겠다.
지금, 이렇게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하니까.
해서는 그의 체온을 꽉 움켜쥔 채로, 취기를 핑계 삼아 엉엉 울었다.
이른 새벽, 펑펑 내리는 눈 그림자가 그의 등 위로 흩어진다.
***
“일어나.”
두이는 숙취로 인한 두통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술이 약한 것도 아니건만, 고작 와인 몇 병에 드문드문 필름이 끊어진 기분이 드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두이는 침대 아래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자신을 보는 윤해서의 코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장면에 분명 윤해서는 울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처럼, 제 품에서 눈 대신 눈물을 흘렸다.
“너 눈 빨갛다.”
“네가 막무가내로 굴어서 그래.”
“내가?”
“응. 뭐야, 기억 안 나? 와…. 나쁜 놈.”
“나쁜 놈?”
그녀의 말을 따라 한 그는 얼굴을 받친 손목을 당겨 품으로 끌어들였다. 얼결에 침대 위에 올라오게 된 그녀가 두이의 가슴팍을 누르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야야, 너 그만해. 오늘은 더 안 해. 너 완전…. 새벽에 짐승 모드였거든?”
“흠, 기억 안 나. 그냥, 박을 때마다 네가 울었다는 것 정도?”
얄밉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는 그가 미워서 입술을 깨문 그녀는 가슴을 툭 때린 뒤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꽉 끌어안은 그가 몸을 웅크리며 따끈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샤워했네.”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우디 향이 짙게 풍겼다. 제가 쓰는 샴푸 냄새였다.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성적인 향기가 느껴지자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오전이라 그런 건가.
“간지러워. 자국 좀 그만….”
“내가 언제.”
“밤새!”
발끈하며 상체를 뒤로 빼는 윤해서가 귀여워,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아 몸 아래 가두었다.
해서는 목덜미에서 시작해 셔츠를 걷어 가슴을 빠는 남자를 보며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애였어, 이두이.”
“뭐,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니까.”
“아니, 넌 개는 아니야. 그냥 애일 때가 많은 남자지.”
그 말에 피식 웃은 그가 싱크대 쪽에서 풍기는 냄새에 고개를 틀었다.
“왜 우리 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
“해장해야지. 냉장고에 술이랑 물밖에 없어서 1층에 내려가서 사 왔어. 여기 근처에 나 잘 가는 해장국집 있거든.”
그녀의 태연한 말에 실소한 그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얇은 셔츠를 당기며 물었다.
“이러고?”
“당연히 점퍼 입었지.”
“속옷은 어디에 있는데.”
“세탁기. 아, 진짜 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 배고파.”
해서는 그를 밀어내곤 후다닥 주방으로 가 바글바글 끓인 우거지 해장국을 그릇에 덜었다. 그러는 동안 두이는 그녀가 모아 놓은 포장 용기와 영수증을 확인하곤, 현관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준 김치를 작은 접시에 옮겨 담느라 분주한 윤해서의 모습을 확인한 뒤, 벽과 신발장 사이를 예리하게 살폈다. 다행히 실내는 누군가의 손 탄 흔적이 없다. 이 거처는 외부에 노출된 적이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두이, 밥 먹어!”
“어.”
그는 해서의 말에 심상하게 대답한 뒤, 문에 달린 작은 렌즈 너머로 현관 밖을 살폈다.
“잠깐만, 먼저 먹어.”
그는 소리 없이 현관 옆에 놓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장전된 총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소음기가 붙은 그것을 손에 든 그가 속으로 숫자를 센 뒤,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싸늘한 정적 사이로 조급한 발소리가 희미하게 뒤섞여 멀어진다.
빌어먹을.
손바닥만 한 초인종 아래, 1cm도 되지 않는 틈새를 더듬자 새끼손톱만 한 렌즈가 손에 닿았다. 두이는 욕설을 흘리며 그것을 그대로 짓눌러 으깨 버렸다. 가루가 된 유리가 바스스 떨어진다. 유리를 으깨느라 상처 난 손끝에 피가 맺힌다.
그것은 방문객을 수집하려는 카메라였다. 누가 설치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알아낼 수조차 없겠지. 정보부 내부자의 짓일 수도 있었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위치가 오픈되었다는 것. 더불어 윤해서를 위험에 노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이는 경계를 풀며, 현관문을 닫았다.
윤해서가 혼자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벌어진 실수다. 다른 이의 목숨 줄을 쥐고 흔드는 일을 하는 만큼, 그만한 위험이 뒤따른다는 걸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윤해서에게만은 두려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본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잘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며 목덜미를 따라 핏대가 선다. 윤해서와 저 사이에 그어졌던 선 위로, 너저분한 발자국이 가득하다. 그 선이 흐려지며 관계 또한 엉망으로 변했다.
끌어들여선 안 되었는데.
현관문을 닫은 그가 돌아서자, 물컵을 든 윤해서가 보였다. 두이의 손에 들린 총을 발견한 그녀가 주춤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한다. 창가까지 물러난 해서의 반응에 한숨 쉰 그가 서랍을 열어 총을 제자리에 넣었다.
“가짜야. 가스총.”
“거짓말. 내가 바본 줄 알아…?”
“내 일이 이래. 위험한 일투성이야, 윤해서.”
그제야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윤해서가 얼굴을 감싸더니 꽉 막힌 한숨을 쏟아 냈다.
마른세수를 한 그는 성큼성큼 해서에게 다가갔다. 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경험해 본 이의 공포는 더 큰 법이었다. 해서의 얼굴을 뒤덮은 공포를 지우려는 듯, 두이는 마주 앉아 뺨을 감쌌다. 그러곤 넋 나간 시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놀랐어?”
“아니, 안 놀랐어.”
“근데 왜 다리에 힘이 풀렸어.”
“놀란 게 아니라…. 겁나서.”
올곧은 눈동자에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온기가 찾아든다. 안도한 두이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쪽, 쪽. 몇 번 입 맞춘 뒤 어깨를 감싸며 품으로 끌어안았다. 경직된 등을 몇 번 토닥이자,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그녀가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식기 전에 먹자. 엄청 배고파졌어.”
그러곤 황당해하는 두이의 손을 잡아끌며 애써 웃었다.
“빨리, 이두이.”
***
식사 내내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식사 매너를 보여 주었고, 음식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그런데도 묘하게 둘 사이에 선이 그어진 기분이 든다. 해서는 커피를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어제 오전 집을 나선 이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은 전화엔 온갖 전화번호가 다양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모친의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순간부터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했다.
“혹시, 엄마한테 나 외박하는 거 말했어?”
“응. 같이 있다고 연락드렸어.”
“뭐라셔?”
“그냥, 잘 부탁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는 막 내린 커피를 잔에 따르고는 한 잔은 뜨거운 물을, 다른 한 잔에는 얼음을 잔뜩 들이부었다. 휴대 전화를 가방 안으로 툭 던져 넣은 해서는 얼음이 든 커피 잔을 집어 드는 그의 뒤로 다가가 불쑥 허릴 끌어안았다.
그러자 찰랑이며 넘친 커피가 손등을 적시며 싱크대 상판 위로 떨어졌다.
“미안해. 허락받고 나갔다 왔어야 했는데…. 나 때문이지?”
먼저 사과하는 쪽은 약자가 아니다. 죄인도 아니다. 그저 상대보다 먼저 용기를 낸 것뿐이다.
해서는 말없이 주방 벽을 노려보며 서 있는 그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네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랬어. 지금도 몰라. 그러니까 하나씩 알려 줘. 하면 안 되는 거, 해도 되는 거. 말 안 하면 나는 몰라.”
커피 잔을 내려놓은 그가 키친타월을 한 장 뜯어 커피를 닦아 낸 뒤, 복부를 감싸 안은 그녀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윤해서,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네 탓 하지 않을 거고, 너한테 책임지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러지 않아도 돼.”
“눈치 보거나, 책임지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냥, 사과하고 싶었어. 너… 화났잖아.”
“내가?”
본인이 화가 난 걸 모르는 경우도 있나?
내리뜬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고, 입술 사이로는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이는 해서의 팔을 푼 뒤 돌아섰다. 긴장으로 떨리는 여자의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 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앞에만 서면 하찮아지고 쉬워지는 윤해서.
두이는 싱크대에 기대서서 그녀의 팔을 당겨 제 허리춤을 감싸게 했다.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피식 웃더니 힘주어 팔을 모은다.
“너무 좋아, 이두이.”
그는 한 모금 삼킨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갸름한 턱 끝을 어루만졌다.
“내가 왜 좋아.”
고작 품 한 번 내어 줬다고.
“이유를 말하려면 오늘 하루 종일 걸려.”
눈 맞추고 몇 번 웃어 주었다고.
“눈 와서 어디 못 나가.”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것뿐인데….
“그래서 좋아.”
“좋을 것도 많다, 넌.”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왜 이렇게 좋을까….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데, 실은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아.”
당장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환하게 웃는 여자가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걸까. 왜.
두이는 그녀의 뺨과 턱을 어루만지다가,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틈만 나면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자신을 놀려 먹는 입술이다. 얄밉고 거슬려야 하는데….
그는 솜털이 느껴질 만큼 보드라운 피부를 타고 올라가 붉은 눈가를 꾹 눌렀다.
“일주일이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두이는 다시 커피 잔을 집어 들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일주일 뒤부턴, 어제 봤던 박대희가 네 경호 계속할 거야.”
“…넌?”
“복귀해야지.”
“왜? 싫어. 네가 해야지, 내 경호를 왜 다른 사람이 해.”
“걱정 마. 일주일 안에 다 해결할 테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버럭 화를 낸 해서는 두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두 걸음 물러섰다.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이 떨린다. 털을 바짝 세운 초식 동물 같은 눈을 하고, 동요 없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말투마저도 태연한 태도에 부아가 치민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그녀도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화가 나는데, 서운하고 울고 싶은데. 단 한 마디도 합리적인 이유를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가쁘게 토해진 호흡만 가다듬으며 입술을 꾹 깨문 그녀를, 이두이는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해서는 심장이 발끝까지 툭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또다. 힘겹게 행복의 끄트머릴 움켜쥐었다고 생각할 때, 끝도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마는….
“커피 식으면 맛없어. 그리고…. 애초에 계약된 날짜가 있는 일이었어.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하긴.”
두이는 윤해서가 손도 대지 않는 커피 잔을 집어 들다 말고 고개를 틀었다. 양손을 모아 쥐고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본다. 해서의 얼굴에 초연하면서도 담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랬지….”
너한테 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지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잡을 것도, 디딜 곳도 없는 막막함과 당혹감에 숨이 차는 것도 모른 채 잠겨 갔다.
“미안해, 내가.”
***
요즘의 서울은 눈 쌓인 것을 볼 수 없는 도시라고 하는 말이 사실이었다. 도로는 이미 완벽하게 제설이 끝나 쌩쌩 달리는 차들로 가득했고, 인도 역시 상인들이 나서서 눈을 쓸어 내고 걷어 낸 덕에 보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정형외과에서 받은 처방전을 약으로 바꾼 해서는 누군가에게 짐 정리를 부탁하며 통화 중인 이두이를 지나 차에 올랐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뒷좌석에 오르는 해서를 돌아보는 이두이의 미간이 굳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름진 미간을 문지른 뒤, 뒷좌석 창문을 두드렸다.
막 휴대 전화를 꺼내 든 해서가 창문을 조금 내리며 ‘왜?’ 하고 물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집으로 갈 거야.”
“응, 알아.”
“너.”
“응? 아, 잠깐만. 윤희한테 톡이 와서.”
대체 왜 화가 났냐고 물으려 했던가. 하지만 윤해서는 화를 낸 적이 없다.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고개 숙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운전석에 오를 때였다.
“아, 이두이. 미안한데 내가 잘 가는 미용실 있거든. 나 거기 갔다가 집으로 갈게.”
“미용실?”
“어.”
“어딘데.”
“가로수 길에 있어.”
그녀에게 미용실 주소를 받은 그는 지하 주차장을 나와 압구정동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평소였다면 조수석에 탔을 그녀는 뒷좌석에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창밖만 응시했다.
눈이 내려 희뿌연 세상이 창밖 가득 펼쳐진다. 하지만 사람들의 걸음도, 차들의 속도도, 불 밝힌 상점들의 하루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눈이 아름다운 건, 하늘에서 쏟아지는 순간뿐인가 보다. 바닥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그 아름답던 눈송이들은 애물단지로 전락해 짓밟혀 더러워졌다.
어느덧 미용실 앞에 도착한 해서는 두이에게 차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규모가 커서, 안 돼.”
“지루할 텐데.”
“그래도 버텨야지.”
버틴다는 말은 참 묘하다. 긍정적이기도, 때로는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니.
해서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려 숍 안으로 들어갔다. 3층 건물 전체를 쓰는 유명 헤어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헤어 숍 본점이었기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어머, 해서 씨.”
“안녕하세요. 저 예약 안 하고 왔는데….”
“어휴, 괜찮아요. 원장님한테 직접 할 거죠?”
“네, 시간 괜찮으시면요.”
“원장님 오늘 한가하셔서, 바로 가능하실 거예요.”
실장이 뒤따라 들어온 이두이를 흘긋대며 동행이냐 물었다. 힐금 돌아본 해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머리는 저만 할 거예요.”
실장은 곧장 해서를 안내했다. 단골 고객들, 혹은 조용히 시술받길 원하는 유명인들에게만 오픈되는 1인실에 들어간 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이두이가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곤, 그녀의 뒤에 섰다.
다소 굳은 얼굴로 거울에 비친 이두이를 보았다. 저는 기어코 병원에 밀어 넣어 온갖 검사를 다 받게 하더니, 본인은 손에 난 상처에 연고 하나도 바르지 않는 남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건 저뿐만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 있기도 잠시, 산뜻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원장이 들어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어머머, 너무 오랜만이야!”
“원장님, 더 예뻐지셨네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해서는 생긋 웃으며 원장과 악수했다. 그러자 그녀의 풍성하고 결 좋은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원장이 물었다.
“우리 해서 씨만 하겠어? 오늘은 뭐 할까. 영양?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펌이 있는데….”
“잘라 주세요.”
“응? 왜, 머리끝이 상했어? 얼마나 자를까. 상한 거 없는데…. 5cm 정도만 자를까?”
“아뇨.”
숨을 크게 들이켠 그녀가 멋쩍은 표정으로 자기 목덜미를 내보였다.
“목덜미가 다 보이게요. 아주 짧게, 커트 머리로 잘라 주실 수 있죠?”
***
엉덩이뼈에 닿을 만큼 긴 머리카락이 싹둑 잘리는 순간에도 윤해서는 담담했다. 원장과 실장은 분명 후회할 거라면서 해서를 만류했지만, 지금 그녀는 한 터럭의 무게도 견디기 힘들 만큼 버거웠다.
안절부절못하며 잘려 나가는 머리카락을 지켜보던 실장이 물었다. 대체 왜 이 긴 머리카락을 잘라 내려 하냐고. 그 질문에,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다니던 답이 하나로 모여 문장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묶일 만큼 자랄 때까지, 공연에 안 나갈 거예요. 연습이 더 필요해서요.”
그 대답을 들은 실장과 원장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간혹, 단발머리를 한 발레리나도 있었지만 대체로 편하고 단정하게 묶을 수 있는 긴 머리를 선호했다.
게다가 윤해서는 프리마 발레리나였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대단한 칭호를 가진 댄서가 공연하지 않겠다니. 원장은 편안해 보이는 해서의 얼굴을 살피며 살가운 질문을 종종 던졌다. 그럼 그녀는 틀에 박힌 답을 했고, 숍 직원들은 방청객처럼 반응했다.
서걱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이어지고, 점점 몸이 가벼워졌다.
“이 정도 길이 어때요? 우리 해서 씨는 얼굴이 조막만 해서 짧은 것도 너무 잘 어울리긴 하네. 역시, 헤어스타일도 얼굴발을 받는 거였어.”
커트보를 걷어 낸 해서는 샴푸 실로 향하기 전, 말없이 서 있는 두이의 앞으로 갔다. 그러곤 생긋 웃으며 물었다.
“어때? 잘 어울려?”
깊은 호수처럼 잠잠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코끝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준다.
“예쁘네.”
해서는 눈을 흘기며 샴푸 실로 걸어 들어갔다. 뒤로 넘어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자, 스팀 타월이 목 뒤를 감싸고 아로마 향기를 품은 타월이 눈을 덮었다. 그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는 자신의 다짐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어설픈 꼴로, 어설픈 합리화에 넘어가 무대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다짐일 뿐이다.
적당한 수압의 미지근한 물이 두피를 적신다. 온도가 어떠냐는 질문에 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집 안으로 들어가는 윤해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두이는 박대희에게 연락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자정까지만 윤해서 커버해.”
- 지금요? 알겠습니다. 팀장님은 어디 가십니까?
“논현동에 볼일이 있어서.”
- 이동하겠습니다.
한때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을 감나무 아래 서자, 2층 윤해서의 방에 불이 켜졌다. 간간이 정지숙의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고, 윤홍주의 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지만, 윤해서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제 귀에 들리지 않는 건지….
아직 쏟아 낼 게 남은 건지, 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얼룩진 하늘이 마치 제 머릿속 같다.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흐릿한 세상을 천천히 훑었다. 대체 이 기분을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이 생경하고 낯선 분노는 몹시도 불쾌하고 자꾸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윤해서와 함께 있을 때는 손대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만 하루 만에 맛본 텁텁한 연기가 폐부를 찌른다. 신기하리만치 금단 현상조차도 겪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을지도.
그는 담배가 짧게 타들어 갈 때까지 윤해서의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툭 떨어진 재가 바닥에 닿기도 전 먼지처럼 흩어진다.
“어때? 잘 어울려?”
본 적 없던 짧은 머리를 하고 제 앞에 서서 잘 어울리냐고 묻던 순간, 확 끌어안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거울에 비친 하얀 목덜미에 시선을 빼앗겼고, 샴푸 실로 걸어 들어가던 가벼운 걸음을 붙들고 싶었다.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은 점점 잦아지는데, 자꾸만 윤해서는 저를 볼 때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왜.
왜.
“젠장….”
그는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가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끈 뒤,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들을 밀어내며 숨을 가다듬자, 어느새 박대희가 차창을 두드리곤 꾸벅 인사하는 게 보인다.
두이는 고개를 까딱인 뒤, 차를 몰았다.
***
양손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던 서승현은 대표 이사실 문 열리는 소리에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경영 지원 팀 수행 비서 박아름이 난처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오후 7시가 훌쩍 넘은 시각. 야근이 예정된 공연 사업 팀을 제외하곤 모두 퇴근했어야 한다. 가뜩이나 생각할 일이 많아 예민해진 승현은 우물쭈물하는 박 비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박아름 씨, 뭐 하는 거냐고.”
“손님이 오셨어요, 대표님.”
“손님? 지금 이 시각에?”
“네. 사전 접견 예약 없이는 만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말끝을 흐리는 박아름의 뒤로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불쑥 나타나 반쯤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연다. 서승현은 이두이를 발견하곤 스프링이라도 단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퀴 달린 의자가 뒤로 밀려나 장식장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두이의 예의 바른 인사에 안절부절못하던 박 비서가 승현의 지시를 기다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이두이를 노려보던 승현이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분은 괜찮아. 어서 퇴근해요, 아름 씨.”
“그, 그럴게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난히 굳은 박 비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본 뒤, 문을 닫고 물러났다. 그제야 서승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두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두이는 그런 서 단장을 무시하곤 가까이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또 뵙네요, 서승현 씨.”
짙은 색의 캐시미어 코트 안으로 질 좋은 슈트를 차려입은 이두이는 절대 평범한 경호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차 사고가 있던 그날 일 때문에 서승현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름이….”
“이두이라고 합니다. 앉으시죠.”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오늘은 간단한 확인만 하려고 왔습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두이의 눈빛엔 조금의 적의도 묻어나지 않았다. 대체 이 자식은 뭘까?
하지만 무서운 놈이란 건 확실하다. 그날, 위험한 예감에 동행했던 심부름센터 직원들을 반사 상태로 만든 사람은 이두이였다. 승현은 제 앞에서 이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놈들을 보며 오금이 저린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깨달았다.
서승현은 애써 산뜻하게 웃으며 제 몫의 텀블러를 들고 이두이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았다.
“확인? 뭘 확인해요.”
“서승현 씨의 안부.”
“하, 내 안부. 난 잘 있어요. 해서는 좀 어때요. 요즘 얼굴 보기 통 힘들던데.”
“사고가 났습니다. 차량이 뒤에서 들이박은 바람에, 죽을 뻔했고요.”
“네? 그래서요? 병원에 있어요?”
“아뇨.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걱정되세요?”
“당연하죠!”
승현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해서는 여기서 망가지면 안 된다. 사실, 윤해서의 실력이라면 자신의 도움 없이도 세계 무대에서 최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 정상에 서기에, 그 애는 너무 착하고 정이 많았다. 냉랭한 성격처럼 보이는 이유는 말을 아끼는 태도 때문이었지, 본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준 만큼만 보답받으려 했다. 지금껏 밀어주고 이끌어 준 공이 있는데 그만한 대우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홍주는 제 딸이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자마자 지원을 끊어 버렸다. 괘씸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해서를 이용해 윤홍주의 지갑을 다시 열 셈이었다.
스토커를 이용해 해서를 압박하고, 업계에서 매장해 버린다면…. 발레가 인생의 전부인 그 아이는 결국 손 내미는 제게만 의지할 것이다.
물론, 범죄라는 건 안다. 악마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었고, 자칫 잘못했다간 영영 매장당할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서승현은 가난한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해서가 무사하면 됐어요. 요즘 가뜩이나 심란하고 마음 안 좋을 텐데….”
해서를 걱정하는 승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두이는 무심하게 실내를 훑었다.
“그런데 상이 많으시네요. 단장님도 유명한 발레리나셨다고요.”
무릎을 가볍게 두드린 그가 일어나더니 서승현과 발레단이 받은 상패로 가득한 장식장 앞에 섰다. 서 단장은 이두이의 뒷모습을 흘끔대며 아무렇지 않은 척 텀블러를 열었다.
“지도자의 길을 걸으려면, 나 자신부터 당당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쪽, 우리 해서랑 무슨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경호원 말고 사적으로. 혹시, 둘이 연애해요?”
“오늘은 제가 질문하러 온 겁니다. 질문은 차례가 오면 해 주시죠.”
“하, 이두이 씨 굉장히 무례한 건 알죠?”
두이는 승현의 말에 코웃음 치며 정면에 놓인 사진 속 윤해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사진이었다. 시상식에 참석한 건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윤해서는 제가 모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한테만 쉬운 게 아니라, 그저 웃음이 쉬운 거였네.
그리고 그 아래 보란 듯 놓인 금고 하나. 두이는 방문의 목적이었던 금고 앞에 몸을 낮춰 키패드를 눌렀다.
텀블러에 든 뜨거운 커피를 마시려던 서승현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와 두이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봐요! 무슨 짓이에요, 이게!”
하지만 이미 금고의 문은 열린 뒤였다. 가벼운 기계음을 내며 열린 금고 안으로 손을 넣은 그는 무언가로 가득한 지퍼 백을 꺼내어 몸을 일으켰다.
서승현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두이의 손에 들린 물건을 멍하니 응시했다.
“필로폰부터 엑스터시, 이런, 잘 보니까 껌도 있네. 취향이 참 다양하시네요, 서승현 씨.”
두이는 손에 든 물건을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비닐 팩 안에서 필로폰이 담긴 작은 병이 깨지며 주사기와 약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이제, 우리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봅시다. 앉아요, 서승현 씨.”
그는 퇴로를 모색하느라 덜덜 떨며 뒷걸음질 치는 서승현에게 마지막 경고처럼 말을 이었다.
“문밖에 누가 있는지 궁금한 거 같은데, 당신이 모르는 남자가 서 있을 겁니다. 정 궁금하면 열어 보든지.”
“당신 누구야.”
“서승현 씨가 고용한 삼류 심부름센터 직원은 아니니 걱정 마시죠.”
“KING이 보냈어…?”
마치, 자결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뜻밖의 이름을 듣게 된 두이는 대답 대신 맞은편 소파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오해를 사게 되었지만, 덕분에 예상외의 단서를 잡을 느낌이었다. “이제 대화를 좀 할 의향이 생깁니까.”
그 말에 목숨 줄 같은 휴대 전화를 움켜쥔 채 주춤주춤 다가온 서승현이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는다.
“KING이 아직도 윤해서를 감시하는지 몰랐어. 미안, 실수했어. 죽이려 한 거 아니라고 전해 줘. 응?”
“죽이려 한 게 아니다?”
“절대! 그냥, 겁만 주려 했어. 그래야 걔 아빠한테서 돈이 나오니까. 나 요즘 힘들어, 자기.”
서승현은 핏기 없이 창백해진 손을 내밀었다. 두이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려는 듯한 태도에 인상 쓴 그가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그러자 눈빛이 뾰족해진 서승현이 기세를 바꾸고 얇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대금은 분명 허우성을 통해 전했잖아. 늦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 너무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저기 있는 다른 물건은 일본에서 거래한 거야. 너희 거 아니니까, 덮어씌우려 하지 마.”
“허우성 죽은 거 압니까?”
“뭐?”
“허우성이 죽었다고.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헛웃음을 흘린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제법 독한 연기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미친 거 아니야?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우성이랑 통화했어. KING을 만나서 대금을 낸다고도 했고, 운 나쁘게 공연 전날 짭새한테 걸렸다고도 했어. 못 믿겠어? 녹취라도 들려줘야 해?”
“좀 들어 보죠.”
서승현은 기가 막힌단 표정을 하곤 휴대 전화를 꺼내 자동 통화 녹음된 목록을 뒤졌다. 그러곤 허우성의 이름을 찾아 최상단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이거야. 진짜, 일 처리 거지같이 하네.”
두이는 테이블에 놓인 서승현의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파일명에 뜬 날짜를 자신의 휴대 전화로 찍은 뒤, 녹음 버튼을 활성화했다.
“아, 죄송해요. 미친 짭새 새끼들이 함정 수사해서. 그래도 아빠가 변호사 써 줘서 운 좋게 나왔어요.”
“조심 좀 해. 그럼 공연장에 왔던 남자는 누구야? 우성 씨가 보낸 사람 아니었어?”
“저요? 아뇨. 누가 그 자리에 앉았어요?”
“응. 분명…. 어디야, 지금?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아, 지금 KING이랑 만나기로 했어요. 대금 날짜 늦어지면 안 되니까, 일단 물건부터 받고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근데 나 궁금한데 윤해서는 왜 죽여요?”
“죽이긴? 자기가 움직이는 무용수를 총으로 맞힐 수나 있을 거 같아? 그냥 겁만 주려는 거라고 했잖아.”
“질투 같은 건가?”
“아니, 돈이야. 어쨌든 대금 치르고 연락해 줘.”
“그럴게요. 아! 온다.”
녹음된 파일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허우성과 서승현이 통화한 날과 사망한 날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는 건, 그날 허우성을 찾아간 최우재가 KING을 사칭한 배후일지도 모른다는 뜻.
두이는 서승현의 폰에 든 모든 녹취 파일을 자신의 휴대 전화로 전송했다. 남자의 재킷이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드러난 건 벨트를 발견한 서승현은 차마 말리지도 못한 채 애만 끓였다.
“다 썼으면 줘. 너희도 떳떳하게 사는 거 아니면서,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리고 돈은 조금 더 기다려.”
녹취 파일 전송 완료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든다. 이두이는 윤해서 앞에서 천사처럼 굴던 서승현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입술을 열었다.
“이제 곧, 윤홍주가 지갑을 열 거라는 소린가?”
“제 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간이니까. 이대로 몇 번만 더 압박하면….”
“어떻게 압박할 겁니까.”
“소란 좀 피우면 돼. 윤해서 무대에 못 서게 하고, 언론 이용해서 언플 좀 하면…. 애가 심성이 약하고 착해서, 그렇게 해도 조용히 참고 넘어갈 거야. 그때 되면 걔 아빠가 가만히 있겠어?”
“그럼, 지금까지 나온 거래 자금은 모두 그쪽에서 나온 건가?”
“70% 정도는.”
한숨을 내쉰 그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흘렸다. 구겨진 미간을 누르는 손끝에 분노가 실린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던 밤공기, 붉은 벽돌 벽에 기댄 윤해서의 얼굴과 등 뒤를 스쳐 지나가며 내뱉던 사람들의 비수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담담하고 태연하게 제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말하던, 상처 받은 마음을 새빨간 입술을 오물대며 삼키던 여자의 얼굴 역시.
“충분합니다. 쓰레기 인증도 잘 받았고.”
고개를 주억이며 일어난 두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미소에 실린 서늘한 기세에 서승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저, 저기.”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대표 이사실의 문을 닫자마자 끓어오르는 분노에 정면을 노려보는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된다.
이두이는 가까이에 놓인 책장을 대표 이사실 방향으로 있는 힘껏 넘어트렸다.
쾅! 소리와 함께 그 안에 정리되어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부서진다. 놀란 서승현의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책장을 밀어 문을 막았다.
“이봐요! 야!”
쾅쾅, 문을 두드리며 길길이 날뛰는 서승현의 발악이 쩌렁쩌렁 복도를 울린다. 두이는 그 앞에 서서 전유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이고, 이두이! 너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 어?
“여기, 제너럴 발레단 서초동 본사입니다. 여기, 허우성 대타 있으니까 체포하세요. 그리고… 이번엔 무조건 구속입니다. 윤해서 살해 협박 및 살인 청부 용의자이기도 하니까요.”
- 뭐? 야! 야야, 야! 당장 출동해! 서초동!
전화를 끊은 이두이는 깃에 달린 마이크를 켰다.
- 팀장님!
곧장 튀어나온 박대희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 윤해서 씨가 당장 논현동으로 가시겠답니다. 진짜, 말 안 들으시네. 팀장님이 오셔서 좀 말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오랜만에 차에 시동을 건 해서는 앞을 막아선 박대희에게 소리쳤다.
“비키세요, 좀! 다쳐요, 그쪽!”
“내리십시오. 제가 운전합니다.”
“오늘은 경호원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런 건 윤해서 씨가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해요? 우리 아빠가 해요? 돈 내는 사람이 하는 건가?”
버럭버럭 소리친 해서는 주먹으로 핸들 중앙을 내리쳤다. 그러자 날카로운 경적이 늦은 저녁 시간의 골목을 울린다. 어디선가 개들이 짖고, 몇몇 집은 창문을 열고 골목을 확인했다.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비켜요. 빨리.”
지금 당장, 서승현을 만나야 이 화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집을 나온 건 충동적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본 지숙은 바닥에 주저앉았고, 윤홍주는 욕설부터 내뱉었다. 유치한 반항은 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방으로 올라온 그녀에게 윤홍주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고함을 내질렀다.
“너…! 머리 꼴이 그게 뭐야. 윤해서, 이리 와서 설명해!”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무슨 소리야!”
“돈 쓰셨다면서요, 제 무대에…. 그래서 저도 돈 썼어요. 그 무대에 올라가기 싫어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그러게 왜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시냐고, 당신의 자식이기 이전에 엄연한 한 명의 사람이고, 나도 이제 서른이라고. 충분히 어른스러운 척해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며 조곤조곤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수치스러운 뺨 한 대였다. 고작 뺨 한 대….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와장창 무너트린 한 대이기도 했다.
“안 됩니다. 팀장님 거의 도착하셨을걸요.”
박대희는 아예 보닛 위에 반쯤 드러누운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서는 핸들을 움켜쥔 손등 위로 이마를 내렸다. 눈을 질끈 감자 뺨을 맞았을 때처럼 눈앞이 빛났다.
“나 좀, 가게 해 달라고요. 나도 들어야겠다고.”
입술을 아프게 깨문 해서는 울먹임을 참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서승현에게 연락해 보았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서승현은 자신의 전화를 무시했다. 계속해 수신 거부로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얼마 남지 않은 자존감마저 가루가 되어 가는 충격을 맛보았다.
정말로 피하는 걸까?
아니, 아니겠지. 바쁜 일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찾아와 걱정을 늘어놓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피할 리는 없었다.
피해망상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서승현과 직접 대화하고 싶을 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서승현을 믿어 보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정도로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다. 그리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는 너를 이용한 적 없다.’라는 위로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차창을 열어 놓은 탓에 차갑게 얼어붙은 손으로 마른세수한 그녀는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잠시 하얗게 번진 시야 너머,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인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걸어 내리는 한 남자도.
“내려, 윤해서.”
이두이는 뭐라고 말하는 박대희를 지나치며 그대로 다가왔다. 해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차 문을 잠가 버렸다.
“싫어.”
그러자 차창 안으로 손을 넣은 그가 열림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문손잡이를 당겼다. 그녀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운전석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찾아든 무력감에 해서의 눈가가 붉어졌다.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한 걸음도 제 의지대로 내디딜 수 없다는 것이 비참했다.
물론 비약이란 걸 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엉망이었다.
“내리라고 했어.”
고압적인 어투에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린 해서가 두이의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강제적으로 그녀를 끌어내려던 그의 미간이 굳는다.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뽀얗던 뺨에 생긴 울긋불긋한 자국은 실핏줄이 터졌을 때 생기는 흔적이었다. 누군가에 의한 폭력, 혹은 강한 마찰 때문에 생겨난 흔적에 두이의 턱 근육이 불거진다.
“너…. 맞았어?”
그의 손끝이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닿았다. 해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격양된 감정을 짓눌렀다.
“손 치워.”
해서의 싸늘한 반응에 굳은 표정이 된 그가 턱을 잡아 돌렸다. 양쪽 뺨을 누르자, 뺨을 맞을 때 찢어진 입 안에서 다시 통증이 일어났다.
“하지 마!”
“누구야. 대체 누구냐고!”
이두이의 격한 반응에 해서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쳐 냈다. 평소답지 않은 해서의 태도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둘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박대희가 슬그머니 인사하더니 자리를 뜬다.
“어딜 가려는 건데, 이 시간에.”
맞은 흔적이 역력한 뺨에 관한 건 더 이상 묻지 않을 생각인지, 이두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해서는 이번에도 윤홍주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를 무시하곤,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논현동. 단장님 만나러 가려고 했어.”
“이 시간에 왜.”
“지금 가야 만날 수 있으니까. 이두이, 난 확인하고 싶은 거야. 고작해야 질문 몇 개 하고 돌아올 거라고!”
“없어. 지금 가 봤자, 서승현 없으니 힘 빼지 마.”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이두이의 태도에 해서의 눈동자에 경계가 어린다. 습관적으로 한쪽 팔을 감싸 움켜쥐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퍼부으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해서가 짧게 실소하며 차에서 내려섰다. 이두이에게 서승현을 공식적으로 소개한 적은 없었다. 스쳐 지나가며, 혹은 지나가는 길에 몇 번 입에 올린 것이 다였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분다는 느낌이 들더라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빗금을 긋듯 빠르게 떨어지는 싸라기눈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두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또…. 또, 나만 모르는 거야? 대답 좀 해 봐요, 이두이 팀장님.”
“윤해서.”
“이름만 부르지 말고! 너 내 경호원이라며. 그런데 이게 날 지키는 거야? 아니! 너는 날 고립시키고 망치는 중이야. 나는 나한테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모르는 천치에 멍청이고.”
화풀이라는 걸 안다.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두이가 클라이언트인 자신을 무시하려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 감정적으로 쏟아졌다.
힘주어 뜬 눈으로 이두이를 노려보던 해서는 큰길 방향으로 홱 돌아섰다. 그러자 다급히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챈다.
“어딜 가려고.”
해서는 이두이에게 잡힌 팔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어딜 가려는 건데, 이 시간에.”
“하, 말했잖아. 논현동 간다고, 서승현 만난다고!”
“나도 말했지! 없다고, 서승현 없다니까 왜 이래!”
결국, 이두이도 감정적으로 소리쳤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정수리와 어깨, 발등 같은 곳을 차례로 적신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지만, 둘은 미동조차 없었다.
“없으면 기다릴래.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상대가 날 무시하고, 관심 없다고 해도…. 등신같이 원망 한번 안 하고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린다고 해결될 일 아니야. 애처럼 굴지 마.”
손대지 말라고, 놓으라고 했건만 이두이는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툼한 점퍼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때문인지, 서승현을 향한 의심과 배신감이 현시되었다는 충격 때문인지 눈앞이 흐려진다.
해서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이두이를 빤히 응시했다.
“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서승현 경찰에 체포됐어.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죄를 지었거든. 제너럴 발레단은 압수 수색에 들어갈 테고, 적어도 네 머리카락이 자랄 때까지는…. 제너럴 발레단이 무대에 오르는 일도 없어.”
눈가를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넘치기 직전의 물 잔에 기어이 물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뺨을 따라 떨어지는 눈물이 멎지 않는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을 꽉 채우고 흘러넘치는 건, 허망함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변명 같은 걸 들을 기회도 없이 사람 한 명을 잃었다.
가끔은 송곳 같은 진실보단, 무딘 칼날 같은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놔….”
얼어붙은 코끝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떨어트리는 그녀를 그는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이 손을 놓으면 무너져 버릴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그래서 놓지 못했다.
끌어안아 주지도 못하면서, 윤해서를 아무것도 못 하게 잡고만 서 있었다.
“놓으라고, 이두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팔을 빼낸 그녀가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말고 두이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가의 모래성처럼 위태로워 보였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무언가로 꽉 찬 얼굴로 해서가 입술을 열었다.
“선, 넘지 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통제하게 허락한 거 아니야. 나는 실수도 하고, 멍청한 결정을 내리기도 해. 네 눈엔 그런 내가 한심하고 어린애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게 나야. 나는… 그런 사람이야.”
철컥하며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두이는 조금 전 해서가 서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주변으로 눈이 쌓여 그 자리만 검다. 흔적처럼 남은 두 개의 발자국을 응시하는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갔다.
두이는 담배를 꺼내 문 뒤,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였다. 메케한 연기를 흘리며 휴대 전화를 꺼낸 그가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 표시 중 하나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뒤, 서명택의 고함이 쩌렁쩌렁 새어 나왔다.
- 야! 이두이, 이 새끼야! 나한테 보고도 없이 곧장 서승현부터 치러 가면 어쩌자는 거야! 그거 경찰에 넘어가면, KING을 어떻게 잡으라고!
담담히 연기를 흘리듯 서명택의 욕설도 흘려 낸 그는 담배 연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서승현, 워싱턴행 항공권 끊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미국 시민권까지 가진 여자가 편도로 항공권을 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잖습니까.”
- 야, 이두이.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너 윤해서 경호원 아니고, 국가 정보부 블랙이야.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이번 일, 저한테 맡기신 진짜 이유가 뭡니까.”
- 무슨 헛소리야?
“KING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윤홍주를 끌어내리시려는 겁니까? 지금 상황, 누가 봐도 설계입니다.”
KING이 이정수라는 결정적 증거를 얻기 위해 윤해서의 공연을 망치고, 경호를 가장해 윤홍주의 집 안을 감시했다. 윤해서를 노리는 범인이 KING의 지시를 받는 이라면 그를 잡는 데 중요한 증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해서를 노리는 범인은 서승현이었다. 그것도 단독 범행.
세현이 보내온 녹취록을 취합해 본 결과, 본부에서 가장 주력했던 건 윤홍주의 자금 흐름이었다. 본부에서는 윤홍주가 1년 전까지 자금을 댄 상대가 KING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다 자금줄을 끊어 버린 현재, 잠잠했던 KING이 수면으로 기어 나와 윤해서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 증거로 가장 중요한 증인이었던 허우성이 사망했음에도 본부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아니, 허우성의 사망을 숨기고 은폐하였다.
서명택은 현장에서 검거한 허우성을 놓아준 뒤, 역으로 감시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우재라는 변수가 등장했고 허우성은 사망했다.
“윤홍주가 자금을 댄 건 서승현입니다. 물론, 서승현은 윤홍주에게 받아 낸 자금을 약을 구입하는 데 쓴 것 같지만…. 유통업자인지는 지금부터 밝혀내야겠죠. 허우성 때처럼, 어떤 미친 새끼가 일부러 풀어 주지 않는 한은 밝힐 수 있을 겁니다.”
- 허, 미친 새끼? 야, 너 말 다 했어?
“아뇨. 아직 다 안 했습니다…. 서명택, 이 개새끼야!”
서슬 퍼런 욕설을 내지른 이두이는 거칠게 담벼락을 후려쳤다.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담장에 쌓인 눈가루가 흩어진다.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서명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두이의 핏발이 선 눈동자는 번들거렸다.
“허우성만 풀어 주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어. KING을 사칭한 새끼가 누군지… 그 자리에서 밝혀낼 수 있었다는 거, 인정하십니까?”
- 이, 이 새끼 진짜.
“저 두 번 말 안 합니다. 윤홍주를 치든, 서승현을 치든, 최우재를 죽이든 살리든 관심 없습니다. 단, 이번 일에 윤해서 엮어 들어가는 날엔 이번에야말로 사표 쓰고 본부 뜰 테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 뭐? 본부를 떠? 야 이, 미친…!
이두이는 서명택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 휴대 전화를 담벼락으로 내던졌다. 네모반듯한 기계의 액정이 순식간에 금이 가더니 쩍쩍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초가 짧아질 때까지 그는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 느껴 보는 시큰함이 심장 근처를 맴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무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막 눈이 내리기 시작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그 고운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기 전, 품으로 당겨 안아 주었을 텐데.
예쁜 윤해서가, 제 앞에서만 환하게 웃는 윤해서가, 저만 아는 표정을 지어 주는 윤해서가 젖어 들기 전에….
담배를 비벼 끈 그가 고개를 들어 불이 꺼진 해서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