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

06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문을 열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해서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드는 그를 보며 긴장 섞인 숨을 삼켰다. 벌어진 드레스 셔츠 안으로 드러난 근육들이 도드라진 몸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입술이 말랐다.

여전히 상처 입은 그의 눈가는 붉었다. 불현듯,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는 걸 떠올린 그녀는 팬티 하나만 입은 상태로, 서랍을 열어 구급상자를 꺼냈다. 직업적 특성상 자신도 제법 상처를 자주 입는 편이기에, 그녀의 구급상자에는 온갖 상처 치료제가 가득했다.

해서가 바닥에 주저앉아 피부를 진정시킬 만한 연고를 찾아 상자 안을 뒤적거릴 때였다.

“뭐 해.”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이가 등 뒤를 감싸 안더니, 쪼그려 앉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어어, 연고!”

“이따가.”

“아프다며.”

“거짓말이었어. 안 아파.”

그는 몸을 웅크린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뒤, 핸드백에서 빠져나온 콘돔을 집어 들었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녀는 비닐을 벗겨 콘돔을 씌우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번과 다르게 이번엔 사이즈를 제대로 골랐는지, 그의 콧등에 기분 좋은 주름이 잡힌다.

“딱 맞지.”

“그래.”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실소한 그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 덕에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눕게 된 그녀는 곧이어 찾아올 쾌감을 기대하며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빨리.”

젖은 음부에 뭉툭한 귀두를 댄 그가 몇 번 느릿하게 문지르자, 금방 성기 전체가 젖었다. 해서는 열띤 눈빛으로 서서히 삽입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떨었다.

빠듯한 구멍이 벌어지고, 기다려 왔던 압박감이 내벽을 채웠다. 전희 없이 이루어진 삽입이어서인지 그 자극은 더욱 컸다. 해서는 제 얼굴 옆을 짚으며 깊숙하게 몸을 묻는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뿌리 끝까지 치받힌 감각은 고통에 가까운 쾌감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질이 경련을 일으키며, 침범해 온 성기를 콱 물었다. 그러자 소름 끼치게 적나라한 감각이 피부를 할퀴었다.

“빨리?”

“아, 흑…. 아니, 조금만 천천히 해.”

울퉁불퉁한 그의 등 근육을 쓸어내리며 해서는 애원했다. 그러자 이마에 핏대를 세운 그가 여유를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허리를 뒤로 뺐다가, 퍽 하고 거세게 파고들었다.

“악!”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운 그녀가 신음을 내지르며 복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미간을 구긴 그가 낮고 긴 숨을 흘리며 말했다.

“이 정도 속도면 돼?”

“너, 진짜 성격 별로야.”

“나도 알아.”

여유롭게 웃음을 흘린 그가 해서의 허리 뒤에 손을 넣으며 발끝으로 시트를 밀었다. 그러자 바르르 죄어드는 내벽 안쪽의 도톰한 살이 눌리며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읏!”

“여기가 좋아?”

해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음성이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들려온다. 심장에서 내뿜어진 뜨거운 피가 빠르게 흐르며 몸을 데웠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던 그가 소담한 젖가슴을 움켜쥔 채 상체를 숙였다. 뾰족한 혀로 둥그스름한 형태를 덧그리더니 흥분 때문에 꼿꼿해진 젖꼭지를 빨았다. 젖가슴에서 시작된 콕콕 쑤시는 듯한 간지러움이 순식간에 하반신을 향해 번진다. 해서는 부들부들한 그의 머리카락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

“두이야, 더….”

조금 더,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보채지 마.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어째서 얘는 뭘 해도 이렇게 능숙하고 완벽한 건지. 하긴, 허둥대는 이두이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육중한 성기가 콱 찍어 내릴 때마다 오금이 저릿하고 내벽에서 물이 질금질금 흘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해서의 가느다란 양다리를 어깨에 건 그가 체중을 실어 몸을 겹쳐 온다.

“흣!”

“하….”

너무 깊었다. 그만큼 뜨거운 열이 접합부를 달군다. 둘은 동시에 탁한 숨을 내뱉으며 진창 같은 쾌감 속에 허우적거렸다. 해서는 그가 치받는 대로 흔들리며 마음껏 신음했다.

섹스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단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데, 고작 쾌감 따위에 홀려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없이 저를 탐하는 그에게 말해 보고 싶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번에도 성가시다며 밀어낼까?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열이 차올라 이성이 날아갔다. 창문을 열지 않아 점점 열기가 차오른 실내 온도가 40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의 코끝에 맺힌 땀이 툭툭 떨어지고, 보송보송했던 머리카락이 젖어 갔다. 해서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 하아…. 너무 좋아.”

그는 세뇌라고 했지만, 그녀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그저 알아만 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자, 어처구니없게 눈물이 고였다.

“내가 좋은 거야, 섹스가 좋은 거야? 정확하게 해.”

“흐으, 둘 다 좋아. 아니, 너라서 좋아. 이두이, 좋아해.”

굳게 다물어진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의 안이 조여든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놓아준 뒤, 말랑한 귓불을 씹으며 천천히 내벽의 형태를 음미했다. 질척한 애액에 젖은 성기가 처음보다 수월하게 그녀 안을 드나든다. 거칠게 밀어붙였을 때보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어쩐지 더욱더 자극적이었다.

그는 해서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뺨에 입 맞추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여기, 만져 줘….”

입맞춤이 간지러웠는지 어깨를 움츠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 음부로 가져갔다. 그러곤 직접 살점을 벌려 빨갛게 부어오른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문지르게 했다. 혀로 맛보던 곳이었다. 그는 쾌감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부풀어 오른 돌기를 손톱으로 긁고 느릿하게 문질렀다. 자극이 더해질수록 그녀의 내벽은 더욱 뜨거워졌고, 투명한 액을 줄줄 흘렸다. 쾌감에 젖은 얼굴이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야한데…. 예쁘네.”

나직한 그의 말에 젖은 눈가를 떤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성기를 박아 넣을 때도 멀쩡했던 얼굴에 말도 안 되는 부끄러움이 넘치도록 차올랐다. 해서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내 얼굴 터지면 책임질 거야?”

“하, 또 뭐라는 거야.”

“네가 말할 때마다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윤해서.”

그가 짓궂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양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그제야 키가 큰 그에게 맞는 각도가 나왔다. 두이는 그 상태로 거칠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살이 치대어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그녀는 시트를 움켜쥔 채 막무가내로 허리를 휘었다.

“아아, 그만! 흣, 자, 잠깐!”

그녀의 애원에도 이제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더는 이겨 낼 수 없는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를 내리찍는 것만 같았다. 그 선연한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람을 돌게 만드는 쾌감에 젖어 제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두이는 이를 사리물며 더듬더듬 생각을 이어 나갔다.

딱 한 번이었던가.

고작 한 번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것뿐이다. 하지만 처음 맛본 선악과는 지독하게 달콤했고, 참을 수 없이 유혹적이었다. 윤해서는 제게 선악과나 다름없는 여자였다.

점점 빨라지는 삽입과 드높아지는 교성. 침대 프레임이 과격하게 흔들리고, 매트리스 한쪽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든다. 멈추지 않고 치받을 때마다 찾아드는 강렬한 쾌감과 충격에 해서는 경련하며 그의 팔을 할퀴었다.

그 시큰한 통증을 느끼는 순간, 그는 해서의 깊숙한 내부에 사정했다. 몇 번이고 허리를 치대며 길고 긴 절정에 몸을 떨었다. 욕설을 내뱉지 않고는 감당하기 어려운 절정이었다.

***

방에 딸린 욕실을 이용하고 나온 그는 조금 전 섹스한 사람 같지 않게 말끔했다. 반면,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해서는 간신히 속옷만 챙겨 입은 상태였다. 제 방에 이두이가 있다니.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기분이 이상하다.

접었던 셔츠 소매를 풀어 내린 그가 커프스 링크를 채운 뒤,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침대 헤드에 대충 걸려 있던 그녀의 셔츠를 머리 위에 씌워 주며 픽 웃는다. 해서는 아이처럼 머리와 팔을 넣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숨겼다.

“왜. 대체 뭐가 부끄러운데.”

두이의 질문에 입술을 축인 그녀가 직접 반바지를 입더니 여전히 뚜껑이 열려 있던 구급상자를 뒤진다.

“아, 몰라. 그냥 다 부끄러워. 아, 여기 연고 찾았다.”

해서는 두이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힌 뒤, 하얀 연고를 손가락에 짰다. 모든 피부용, 광범위 치료 연고라고 쓰여 있으니 응급 처치에 써도 될 것 같았다.

상처 입은 자리에 연고를 발라 주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불쑥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작게 비명을 지른 그녀는 두이의 허벅지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연고를 다 펴 바르지 않아서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은 상태로 그가 말했다.

“계속해.”

미치겠네, 진짜.

해서는 둘만 있을 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두이의 다정함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럴 때면 꼭 연인 사이라도 된 것 같아서.

해서는 능청스럽게 눈을 감는 그를 흘겨보며, 손에 남은 연고를 마저 펴 발랐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끝이 간질이듯 스칠 때마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진다. 입술 끝이 살짝살짝 올라가는 듯도 했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쫓다가 다친 걸까?

아까보다는 제법 가라앉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처였다. 단순히 긁힌 게 아니라 마치 뜨거운 물에라도 덴 듯한 상처라고 해야 하나. 연고를 다 바른 뒤, 그의 어깨에 양팔을 뻗어 걸친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줘.”

“뭐가.”

긴 속눈썹을 든 그가 담담히 대꾸했다.

“대체 누굴 쫓아갔고, 그 사람은 어떻게 됐으며, 네 얼굴은 왜 이렇게 된 건지.”

“내가 보고할 상대는 네가 아닌데.”

“보고하라는 게 아니잖아. 내 일이잖아. 그러니까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당돌하게 받아치는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올려다보던 그가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마른 등을 쓸어 올렸다.

“너야말로 아까 하던 말 계속해 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 발목을 이 꼴로 만든 건지.”

“아, 그거….”

그녀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등을 쓸어 올리던 손을 뺀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나 보고.”

시선이 맞닿자 그녀의 턱을 잡았던 손이 떼어졌다. 해서는 순간적으로, 비누 향이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자신의 허벅지 위로 떨어진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다잡은 듯 말문을 열었다.

“사실 발목을 찌른 건 중요하지 않았어. 그때는 그 방법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거든. 그리고 나도 약은 게… 발레에 진심이라서 아킬레스건은 건들지 않았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발목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의 시선이 흔들린다. 그날을 떠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선득해지곤 했다.

본능적인 두려움. 게다가 공포를 심어 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정수가 아니라 최우재였다.

“하얗게 질린 이정수가 나더러 미친년이라더라. 너 같은 년은 처음 봤다면서 혀를 내두르기에, 그 칼을 목에 대니까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꺼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길로 도망쳤어. 내 발로 응급실 가서 처치 받은 다음에 택시 타고 집에 왔어. 그때 집에 최우재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진 건 착각일까? 해서는 두이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절뚝거리면서 들어오는 날 보더니, 약혼자라는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우리 해서. 그러잖아도, 도망 못 가게 발목을 끊어 놓으려 했는데….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다고. 자기였으면, 발목을 잘라 버렸을 거래.”

당시를 떠올린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투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두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이 부담스러워진 그녀가 고개를 틀어 그를 보자, 새카맣고 서늘한 눈동자가 상처 난 자신의 발목에 닿아 있는 게 보였다.

“이두이.”

해서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눈꺼풀을 치켜뜬 그가 ‘응?’ 하고 담담히 대답했다.

“난 솔직하게 말했어. 이제 네 차례야.”

“…그래서 소시오패스라는 걸 알게 되어 파혼했다?”

“응. 무서웠거든. 그런 새끼한테 잠시나마 설렜다는 게 치욕스러웠고, 후회가 밀려들었어.”

“뭐가 그렇게 후회됐는데.”

“그냥…. 최우재와 연관된 모든 것들, 다.”

상처가 남은 발목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두이가 그녀를 침대 위에 앉히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구겨진 바지를 털고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들어 팔을 넣는다.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 주려 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해서의 표정이 굳어 갔다.

“넌 아무것도 말 안 해 줄 거야?”

재킷의 소매를 탁탁 당겨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느른하게 입술 끝을 휘어 올린다.

“미안한데, 중요한 계약 조항이라서.”

“뭐?”

“연고, 고맙다.”

산뜻한 말투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벼려진 칼날처럼 뾰족하게 느껴진다. 커튼을 닫지 않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집 앞에 멈춰 선 모범택시에서 내린 정지숙이 해서의 창문 방향으로 고개를 든다. 두이는 어처구니없어하는 해서의 머릴 가볍게 쓰다듬은 뒤,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기막힌 타이밍에 현관문이 열리더니, 정지숙이 들어섰다.

“사모님 오셨어요?”

이어,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주머니가 지숙의 코트를 받아 들며 뒤따랐다.

“아, 아줌마. 해서 왔죠?”

“네네, 그럼요. 아까 오셔서 방에 들어가셨어요. 주무시는 것 같던데요?”

“진짜 아픈가 보네…. 오늘 저녁은 죽으로 할게요. 녹두 불려 두시고, 닭 다리 살 좀 준비해 주세요.”

“네네.”

피곤한 표정으로 막 침실로 들어가려던 지숙이 고개를 든다. 두이는 계단참에 서서 눈이 마주친 지숙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던 지숙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짧은 순간, 이두이는 정지숙에게서 의심과 불신을 읽었다.

역시, 어머니란 사람의 촉은 남다른가?

지숙이 침실로 사라지고 난 뒤, 두이는 재킷 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세현이 보내 놓은 파일들이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해서. 그러잖아도, 도망 못 가게 발목을 끊어 놓으려 했는데…. 수고를 줄여 줘서 고맙다고. 자기였으면, 발목을 잘라 버렸을 거래.”

담담히 늘어놓던 해서의 목소릴 떠올린 그가 굳게 닫힌 방문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리에 서서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방문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

TV를 켜자 6개월 전 국회에서 열린 질의에 참석했던 윤홍주의 얼굴이 나왔다. 하지만 딱히 정치적 이슈로 인한 등장은 아니었다. 민생 방안을 발표하는 대통령의 연설 장면이 나오기 전, 윤홍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 것뿐이었다. 정치권은 여전했고, 연예계도 평소와 다름없이 새로운 소식들이 넘쳐 난다.

이른 아침, 크림색의 실크 잠옷을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지숙이 계단을 내려오던 해서를 발견하곤 고개를 들었다.

“연습실 가는 거니?”

“네, 엄마는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빠가 안 계시니 잠이 와야지. 몸은 어때. 병원은?”

“어제 그 집 나오니까 괜찮아졌어요. 약 먹고 푹 자니까 멀쩡해요.”

“너.”

지숙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제 박인호 씨가 네 연락처 물어보더라. 알려 줬어, 괜찮지?”

“아, 그분이요. 뭐, 연락 오면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한다는 말에 지숙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힘들게 자리를 만들어 밀어 넣었더니, 요령 좋게 빠져나간 딸이 못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서 단장은 요즘 잘 지내니? 어제 멜리사 집 앞에서 서 단장을 본 것 같은데.”

“정말요? 나는 못 봤는데…? 뭐, 단장님이야 똑같으시죠. 잘 계세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지숙은 찻주전자에 남은 차를 모두 잔에 따랐다.

“서 단장도 그러는 거 아니야. 예전에 네 아빠가 있는 돈 탈탈 털어서 후원할 때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더니, 이제는 얼굴도 안 비치더라?”

“발레단 어려울 때 도와주신 거, 단장님도 고맙게 생각하고 계세요. 뭐, 그때 한 번 도와준 거 아닌가? 다 갚으셨다고 들었는데.”

“한 번? 돈을 갚아? 하, 웃기는 여자네? 서 단장한테 집에 한번 오라고 해. 밥이나 먹자고.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아버지 너한테 진심이셨어. 서 단장이 돈 필요하다고 연락할 때마다 한 번도 거절 안 하고 다 해 주셨어. 너한테 안 좋은 일 생겼다고 이렇게 모른 척하는 거, 엄마는 그냥 못 넘어가겠다.”

채널을 바꾸는 모친의 리모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서의 미간이 구겨진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돈을 자주 해 줬어요?”

“자주 해 주다뿐이니? 네 공연 있을 때마다 연락해서, 돈 돈 돈. 어찌나 돈타령을 하는지 질리더라.”

해서의 어깨에 걸린 운동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해서를 향해 고개를 튼 지숙은 금세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서야, 그게 아니라.”

윤해서의 얼굴은 창백해져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막 물에서 건져 낸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길게 흘린 그녀가 떨어진 가방을 집어 든다.

“당혹스럽네요, 엄마.”

지숙은 벌떡 일어나 해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버석하게 마른 들풀처럼 건조해진 그녀의 표정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오해하지 마. 너 잘 봐 달라고 돈 준 거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서 단장하고는 원래 잘 알던 사이고, 돈 빌린 것도 승현이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거야.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된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을 의심하는 게, 이상한 생각이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 능력 있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힘쓰는 게 뭐가 문제니!”

문제가 뭐냐고? 해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친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지금껏 제 뒤에서 입이 아프도록 욕하던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용서하고 무시했는데…. 그들이 토해 내는 거짓보다, 노력으로 일궈 낸 진실이 더 중요하다며 도도하게 그들을 경멸했다. 그렇게 자위해야만, 나약함을 숨긴 채 살아 낼 수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제힘으로 알아볼게요.”

해서는 팔을 잡는 지숙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은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지숙이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까. 서 단장은 지금껏 제게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고뭉치인 자신을 프리마 발레리나의 자리까지 올려 준,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잘못되었다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딱히 특혜를 받은 기억도 없었다. 아니, 받았던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특혜 속에 살고 있진 않았을까?

급격한 혼란이 찾아와 운동화에 발을 넣는 그녀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만약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모르는 뒷거래가 있었다면 벌을 받겠지. 비난받거나, 손가락질에 시달릴 것이다. 자신은 몰랐다고 변명해도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해서는 멍하니 정면을 노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하늘이 흐리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그렇다고 여기기엔 지나치게 어둑해서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차가운 공기 중에 은근한 따뜻함이 스며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연습실에 갈 수 있을까?

“좋은 아침입니다. 박대희입니다.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막 두이에게 연락하려던 해서의 앞으로 산뜻한 분위기의 남자가 다가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다. 그녀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히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팀장님은 오늘 본부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셨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팀장님이 업무 보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

남자는 묻지 않았음에도 해서가 머릿속에 떠올린 질문들의 답을 해 주었다. 그래도 이두이가 직접 말해 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불현듯,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떠올린 해서가 걸음을 내디디며 물었다.

“혹시, 병원에 간 건가요?”

“예? 병원이라뇨?”

“어제, 얼굴에 상처를 크게 입었잖아요.”

해서가 설명을 덧붙인 뒤에야, 남자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었다.

“그 정도를 상처라고 하기엔, 팀장님 몸에는 더한 상처들도 많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아니,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예, 뭐. 근데 팀장님은 워낙 저희 같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라서요. 괜찮으실 겁니다. 조금 전에 뵈었을 때도 멀쩡하셨고요.”

멀쩡했다? 그래, 멀쩡했겠지.

해서는 더 이상 남자와 말을 섞지 않았다. 박대희의 말마따나, 이두이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칼에 베이거나 찔린 자국은 애교고, 허벅지에는 두 개의 총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번 호텔에서 총을 본 이후로,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 몰랐다. 어쩌면 이두이는 평범한 경호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사 여유롭고 태연한 태도는 지금껏 그가 겪어 온 일들을 가리기 위한 가면일지도.

그래도, 사람인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무뎌졌다고 해도, 고통과 통증은 언제나 생경한 법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연습실로 가십니까?”

평소 그가 몰던 차의 운전석에 오른 남자가 뒷좌석을 돌아보며 목적지를 물었다. 차창 밖의 눅눅한 날씨를 응시하던 그녀가 말했다.

“아뇨, 논현동 트라제리움이요.”

***

윤해서의 목적지가 서승현 단장의 아파트라는 보고를 받은 두이는 문이 열리는 회의실 앞을 막아섰다.

“설명해 주시죠.”

그가 찾은 곳은 서초구 내곡동, 국가 정보원 본관 4층이었다. 막 브리핑을 마치고 회의실을 나온 서 부장은 불쑥 나타난 이두이를 발견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와.”

두 남자는 건물에 단 두 개뿐인 야외 흡연실로 향했다. 서 부장은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만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이두이는 아니었다.

본관엔 보고할 때 빼고는 드나들 일 없는 현장직인 그가 본관을 찾아올 정도라면, 치밀하게 짜 놓은 설계를 변경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간부의 등장에 흡연 구역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앞뒤 자르지 말고 제대로 말해.”

서 부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그 얼굴을 무심하게 응시하던 두이가 보고하듯 말했다.

“서승현이었습니다. 윤해서의 스토커.”

“서승현이라면 제너럴 발레단 단장인가? 단장이 뭣 하러 자기 발레단 돈줄을 스토킹해.”

특유의 찌푸린 얼굴 위로 독한 연기가 흩어진다. 두이는 오늘도 면도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서 부장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돈줄이니 스토킹한 겁니다. 서승현 단장의 개인 채무액은 올해 들어 4억 증가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금전 압박을 받을 때마다 윤홍주를 찾아가 돈을 요구했다는 것도 알아냈고요. 그럴 때마다 윤홍주는 후원금 명목으로 3천에서 1억까지 다양하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작년까지만이라고 하는 걸 보니, 지원이 끊어졌나 보지?”

“윤해서가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에 오른 직후였습니다.”

“흠, 그럼 지원이 끊어진 것에 대한 복수다? 그래서 윤해서를 노린다? 이상한데?”

“아뇨. 서승현은 윤해서를 이용해 다시 돈을 얻어 내려 하는 거겠죠. 일종의 보호비 명목으로요. 계속 윤해서와 연관된 사고가 생긴다면, 윤해서는 업계에서 매장되고 말 겁니다. 그걸 서승현이 막아 줄 수만 있다면, 윤홍주는 다시 지갑을 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비밀리에 말입니다.”

확신으로 가득한 말투에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른 서 부장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우리 쪽에서 분명 확인했어. 허우성이 KING과 연결되어 있는 거.”

“KING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날이 흐리다. 하늘도, 공기도 텁텁해 시야를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서 부장은 KING이 한 명이 아니란 말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계속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서 부장을 따라 인내를 곱씹는 두이의 걸음이 이어졌다.

“정확하게는, 이정수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누군가 KING을 사칭해 시장을 움직였을지도 모릅니다. 대외적으로 KING은 이정수니까요. 게다가 재작년 강무호 사건과도 닮아 있습니다.”

강무호 사건이란, 국회 의원 강무호가 캄보디아 지역에서 불법 마약을 유통하고 관련자들을 처리하면서 일어났던 희대의 마약 스캔들을 뜻했다. 그때, 강무호는 이탈리아 마피아를 사칭해 약을 유통했고, 이두이가 직접 잡아들였다. 당시를 떠올린 서 부장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씨발, 어떤 미친놈이 사칭을 해? 제 발로 잡혀 들어가겠다는 뜻 아니야?”

“하지만 허우성이 받은 티켓은 공연장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만이 찾아낼 수 있던 저격 포인트였고, 그날 경호원들의 통제를 제너럴에서 했습니다. 서승현이 직접이요.”

“허우성과 서승현은.”

“모릅니다. 허우성은 죽었으니, 서승현을 파야겠죠. 발레단의 메인 댄서인 강재겸도 관련이 있으니, 둘을 엮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윤해서를 노리는 놈은 KING이 아니다?”

그늘진 복도를 빠른 속도로 가로지른 두 남자는 곧장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대기 중이던 서 부장의 차량 앞에 섰다.

“지부로 돌아갈 건데, 넌.”

“논현동으로 갈 겁니다.”

“설계 다시 짤 거야. 넌 본부로 복귀해. 윤해서 경호 업무에서 손 떼고, 박대희 넣어.”

“싫습니다.”

거절은 짧고 간결했으며, 버르장머리 또한 없었다.

실소한 서명택은 속을 읽을 수 없는 이두이의 담담한 눈빛에 치가 떨렸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현장 상황, 실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단연 톱인 이두이가 윤해서의 경호 따위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명령 불복종이 습관인 건 아냐?”

“납치될 겁니다, 윤해서.”

“감겼냐? 윤해서한테. 둘이 구면이라며. 동창이랬나?”

“감겼으면, 이러고 있지 않겠죠.”

상명하복이 통하지 않는 놈이다. 이두이는 지시를 내리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릴 굽히는 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만하고 제멋대로이거나, 윗선을 제 아래로 보는 놈도 아니다.

이두이는 하필, 아주 정의로운 편에 속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지키고, 자신의 신념을 믿는 고집불통.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런 성격이었다면, 답답하고 미련하다 하겠지만 이두이의 기준은 그 누구보다 높고 견고한 편이었다. 그가 행하는 정의에 토 달 수 없을 만큼.

“금방 끝납니다. 업무엔 차질 없을 테니, 일주일만 시간 주시죠.”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그의 말투에 서명택은 절로 신을 찾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뒤에는. KING이든, 사칭한 놈이든 잡으러 가는 거고?”

“일주일 안에 윤해서 일 해결되면, 그렇게 할 겁니다.”

“하, 넌 뭘 믿고 이렇게 제멋대로야?”

서명택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이두이의 얼굴에서 제가 모르던 조급함을 읽었다. 더불어 자신을 향한 짜증과 성가심까지. 미친놈. 감기지 않은 척하더니, 제 눈깔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서명택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오케이. 이두이, 곱게 봐주는 건 여기까지. 일주일 뒤에 본부로 복귀해. 이번에도 명령 불복하면, 다시 미국으로 보내 버릴 줄 알라고.”

***

막 현충로에 진입한 박대희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대형 세단을 발견하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세단을 피한 것도 잠시, 놀란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 강한 충격이 뒤쪽에서 가해졌다.

쾅!

비명도 지르지 못한 해서는 안전벨트에 눌린 갈비뼈를 감싼 채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골이 울릴 만큼 강한 충격에, 지나가던 차들이 속력을 줄이며 방향을 튼다.

“윤해서 씨! 괜찮으십니까?”

박대희는 다급히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트렁크가 반 이상 찌그러질 만큼 큰 사고였다. 다행인 건 안전벨트를 했고, 뒤쪽 에어백이 터져서 골절상은 입지 않은 것 정도였다.

해서는 박대희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반쯤 끌어안은 박대희의 재킷 안쪽으로 건 벨트가 보인다. 이두이의 후임이라더니, 이 사람도 평범한 경호원은 아니었다. 해서는 기민하게 자신을 안전 구역으로 옮기고, 주위를 경계하는 남자를 응시했다. 이런 남자를 부리는 이두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이두이, 뭘까, 너는….

그때였다. 앞뒤에서 해서가 탄 차를 박아 버린 세단에서 내린 사람을 발견한 해서는 치밀어 오른 욕설을 나직하게 흘렸다.

“개새끼….”

이마에 흐른 피를 닦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최우재와 그의 기사였다. 갈비뼈 부근을 감싼 해서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접은 그가 박대희에게 곧장 다가선다. 박대희는 최우재를 알아보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쪽 실수입니다. 안 다치셨습니까?”

하지만 최우재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일부러 들이받아 놓고, 실수라고? 그 지독한 뻔뻔함에 돌담에 기댄 해서는 대놓고 실소했다.

“나, 다쳤는데요.”

그러자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던 최우재의 눈빛이 직선으로 꽂혀 든다. 박대희는 자연스럽게 해서의 앞을 막아섰다.

“경찰 불렀습니다. 깔끔하게 보험 처리하시죠.”

“경찰까지 부르셨어요? 음, 보험으로 간단히 해결될 일을 크게 만드시네.”

“제가 팀장님과는 다르게, 쪽수 불리한 거에 좀 예민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일관하던 최우재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색소가 옅어 색이 연한 갈색 머리카락 끝에 맺힌 피가 툭, 툭 떨어져 뺨과 입술 끝을 타고 흐른다. 기괴하면서도 최우재를 설명하기에 너무 완벽한 모습이라, 해서는 대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는 분이에요. 경찰은 돌려보내시고, 보험 회사 부르죠.”

그에 당황했는지 휴대 전화를 움켜쥔 박대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는 분이시라고요?”

“네. 얘기 좀 하고 있을게요. 보험 회사 올 때까지.”

“윤해서 씨.”

“알아요. 박대희 씨, 그렇게 걱정되시면, 내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윤해서의 단호한 태도에 박대희는 침묵을 택했다. 그러곤 옆으로 조금 물러서서 최우재가 다가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제야 손수건을 꺼내 피 흐르는 상처 부위를 누른 최우재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띤 채 다가와 옆에 섰다. 해서는 사고 수습은 뒷전인 듯한 최우재의 부하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아침에 보는 건 3년 만인가?”

“아침부터 운이 없네. 꼴같잖은 얼굴을 다시 볼 줄 몰랐는데.”

해서는 갈비뼈를 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고로 인한 통증이 아니었다. 마치 본능처럼 최우재를 보면 근육들이 경직되어 숨쉬기가 힘들곤 했으니까.

“아팠어?”

“날 죽이고 싶으면 말로 해.”

“너무 예민하게 날 세우지 마. 네 경호원 씨의 경계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

여전히 최우재는 뻔뻔했다. 사고가 난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서가 그제야 최우재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일부러 박은 거야?”

“사고야. 서두르다가 벌어진 실수.”

“뭐 하자는 거야, 대체? 대체 나한테 뭐가 더 남아서 따라다녀? 받아 갈 거라도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빚쟁이 같네. 난 약속 지키러 온 것뿐인데. 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난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해서는 3년 전 도망치듯 항공기에 오르던 최우재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당시 최우재는 이정수의 개로 불리며, 그 남자가 저지른 죄를 덮어쓰고 처벌받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이 정리될 때까지 한국을 떠나게 된 최우재는 이륙을 기다리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기다려. 데리러 올 테니까.

“최우재 씨가 왜?”

- 왜긴. 결혼해야지, 해서야.

“미친놈.”

그는 웃었고, 그녀는 휴대 전화를 집어 던졌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잔상처럼 남아 괴로웠다. 그런데 뭐라고?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정신 나간 사이코의 오만한 태도 아닌가? 해서는 고개를 젖혀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비든, 눈이든. 뭐라도 쏟아져 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반항하고 예민하게 굴수록 최우재 씨는 더 잔인하게 구는 거 같아.”

“과녁 앞에 자리 잡은 사냥감은 재미없는 법이잖아.”

“내가… 사냥감이야? 난 사람이야. 그쪽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그거 오기고 집착이야. 사랑 아니야.”

“사랑. 흠, 그 사랑이 존재하는 감정이긴 한가?”

최우재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젖힌 해서는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최우재의 얼굴을 빤히 보며 혀를 찼다.

“배배 꼬여선. 그때 제대로 못 들었나 본데…. 우린 그날 파혼했고, 끝났어. 나, 최우재 씨랑 뭐 안 해. 아무것도.”

“그럼, 그 경호원이랑은.”

“뭐?”

그녀의 눈동자에 환멸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본 최우재의 눈빛이 돌연 서늘해졌다.

“해서야.”

한숨을 쉰 그가 창백하게 굳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싱긋 웃는다.

“그 경호원이랑은, 사랑해?”

마치 답을 아는 사람처럼 최우재는 여유로웠다.

“아무리 고파도, 아무하고나 붙어먹으면 쓰나. 그 경호원에 대해서 아는 건 있고?”

“그쪽은…. 뭐 알아?”

“너보다는 많이?”

당신은 이두이에 대해 조금도 모른다며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해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걸어 준 그가 손에 묻어 있던 피를 그녀의 뺨에 쓱 문질렀다. 비릿한 쇳내가 기분 나쁘게 코끝을 스친다. 해서는 버석하게 메마른 눈빛으로 최우재를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랑 어떻게 붙어먹든, 지나간 똥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할 말 끝났으면 인제 그만 돌아가. 사고 처리는 각자 알아서 해. 그게, 한 번이라도 덜 보는 길인 거 같으니까.”

“…조금 변했네, 우리 해서.”

“그쪽 해서 아니야. 정신 차려.”

뺨에 묻은 최우재의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려 했지만, 이미 말라 버린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뺨을 문지르던 그녀는 경광등을 밝히며 달려오는 순찰차를 발견하곤, 기대 있던 담장에서 등을 떼어 냈다.

그러자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최우재가 팔을 불쑥 잡아챈다.

“내가 무서워?”

“응. 무서워.”

“떠네.”

움켜쥔 해서의 팔을 내려다보는 최우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진다. 내리깔았던 두 눈을 치켜든 최우재는 점퍼 안에 숨겨진 그녀의 팔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말랐고.”

해서는 숨을 길게 흘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최우재에게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약점을 내보이는 것도 싫었다.

“그쪽이 날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바람에 못 먹어서 그래.”

해서는 최우재에게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태연히 대꾸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최우재를 떠올렸다. 이 남자의 사랑법이라면 자신을 죽이진 못할 거라고 믿으면서도, 두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최우재가 자신을 죽이려는 누군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도록.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피가 멎은 상처 부위를 손수건으로 누르며 싸늘하게 실소한다.

“내가 널? 하긴…. 죽이고 싶을 때도 있지.”

“그쪽 아니야? 난 그쪽밖에 생각 안 나던데. 나 죽이려는 사람.”

“걱정 마. 내가 널 죽이고 싶은 건 맞지만, 적어도 이렇게 예쁠 땐 아니니까.”

역시, 최우재는 미친놈이었다.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최우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 해서가, 절뚝대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낯선 SUV 차 한 대가 사고 차량 뒤에 멈춰 서더니, 운전석에서 이두이가 내렸다. 본부에 간다더니…. 이두이를 보자마자 찾아온 묘한 안도감에 해서의 입술 끝이 떨렸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그는 윤해서밖에 안 보이는 사람처럼, 사고 현장을 지나쳐 그대로 다가왔다. 그러곤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해서의 어깨를 덮어 준다.

“박대희, 윤해서 씨 데리고 응급실로 가.”

“예, 팀장님.”

괜찮냐라든가, 어디 다친 곳은 없냐라든가, 다행이란 말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냥 한번 꽉 안아 줬으면 좋겠다. 이런 코트의 온기 따위에도 안도하는 나를, 말하지 않아도 있는 힘껏 꽉. 해서는 어깨에 걸친 커다란 코트를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논현동으로 가던 길이야. 거기로 갈래.”

“치료가 우선이야.”

“다친 곳 없어! 나는…,”

욱하는 마음에 고개를 든 해서는 분노에 잠겨 잔잔하게 끓어오르는 그의 눈빛에 할 말을 잃었다.

이두이는 해서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천천히 문지르며 조용히 소름 끼치는 욕설을 흘렸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서늘한 눈빛에 해서는 피가 어는 기분이 들었다.

“박대희.”

그가 대기 중인 박대희를 돌아본다. 박대희도 마찬가지였다. 사고 치기 직전인 이두이의 얼굴을 발견한 박대희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윤해서를 부축했다.

“어디로 갈까요, 팀장님.”

“내 집으로.”

“예?”

“내 집으로 데려가. 비밀번호는 P2가 알고 있으니, 그쪽에 물어보고.”

“아, 네. 그런데…. 정말로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박대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윤해서를 부축했다. 사적 공간을 외부에 노출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이두이였다. 지금껏 그 어떤 요원도, 친분이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이두이의 공간에 발 들여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강박증이나 결벽증 때문이 아니었다. 이두이가 살아온 시간을 알고 있는 박대희는 윤해서라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예…. 알겠습니다. 가시죠, 윤해서 씨. 지금은 저 해서 씨 편 못 들어 드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해서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기 집으로 가라는 그의 말에 알량한 서운함이 사그라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에게만큼은 항상 가볍고 쉬운 제가 일순, 한심하게 느껴졌다.

해서는 절뚝거리며 조금 전 이두이가 끌고 온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채우며 최우재와 가까워지는 이두이를 보는데 가슴이 이상한 소릴 내며 두방망이질 친다.

“출발하겠습니다.”

박대희는 룸 미러를 통해 윤해서의 넋 나간 얼굴을 살피며 P2에게 연락을 넣었다.

“저 지금 팀장님 댁으로 갑니다. 좌표와 비밀번호 주십시오.’

- …예? 무슨 소리예요? 팀장님 댁으로 가신다고요?

“지시가 있었습니다. 확인은 팀장님께 하시고, 윤해서 씨와 동행합니다.”

수화기 너머 김세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헛웃음을 몇 번 흘리고는 말없이 차량 내비게이션에 좌표 하나를 띄웠다. 박대희는 팀장의 주소를 머릿속에 새긴 뒤, 삭제했다. 그러곤 마뜩잖은 마음을 숨긴 얼굴로 거울에 비친 윤해서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

“여긴가요?”

해서는 주상 복합 아파트의 꼭대기 층 앞에 섰다.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교차 설계된 S 건설의 유명 주상 복합 빌딩은 그녀도 종종 지나쳤던 곳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이두이가 살고 있었단 사실을 확인하자, 이상하게 그와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들어가 계시면 됩니다. 팀장님이 연락하실 겁니다.”

박대희는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선 해서는 박대희를 돌아보며 꾸벅 고개 숙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럼, 무슨 일 있으면 문 두드리십시오. 제가 밖에 있을 테니.”

“아, 안 들어오시고요?”

“저는 못 들어갑니다. 팀장님은 윤해서 씨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해서는 툭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비워 둔 것인지, 정체된 공기 속에 이두이의 향기가 배어 있다. 기둥과 가구로 나뉜 아늑한 공간이었다. 평수는 넓지 않아도 수변 산책로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에, 해서는 창가에 놓인 침대 끝에 앉았다. 하얀 벽에 스테인리스와 유리, 작은 사진 액자 몇 개가 전부인 느낌이 드는 깔끔한 곳. 마치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다정한 이두이를 닮은 공간이었다.

차가운 유기질로 채워진 곳에서 느껴지는 아늑함은 알량한 단어로는 잘 설명되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코트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두이가 사용하는 제품들이 라벨을 정면으로 향한 채 그녀를 맞는다. 해서는 오늘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두이답다. 저 혼자 제멋대로 상상했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집 안에 묻어 있었다. 해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미지근한 물을 틀어 세수했다. 얼굴에 말라붙어 있던 핏자국을 닦아 내기 위해 몇 번이고 힘주어 문질렀다.

세면대를 움켜쥔 채 고개를 들자, 한결 혈색이 돌아온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해서는 젖은 앞머릴 쓸어 넘기며 제 손에서 나는 향기를 킁킁거렸다.

이두이의 향기다.

따끔따끔하고, 뜨끈한 감각이 전류처럼 번져 간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온 해서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두이의 침대라 안정되는 느낌 때문인지 애써 묻어 뒀던 상념들이 떠오른다.

만약,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에라도, 서 단장이 제 커리어에 조금이라도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 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서 단장이 그랬을 리 없다는 잔털 같은 희망이 그녀를 괴롭혔다. 지금껏 해 온 공연과 희열의 순간들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해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손끝이 따끔거리고 숨이 차는 이 기분은 두려움인가.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거짓된 낙인이 찍히는 것을 난 이겨 낼 수 있을까?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한 건지, 꼭대기에 올랐다 싶으면 고꾸라지는 삶이 버겁다. 해서는 몸을 좀 더 웅크렸다. 고요한 공간이 잡음으로 가득 찬다. 그것은 제 안의 감정이 내는 소음이었다.

***

승강기에서 내린 두이는 현관 앞에 선 박대희를 발견하곤 저벅저벅 다가왔다.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박대희가 두이의 기척에 놀라 자세를 바로 한다.

“팀장님.”

“수고했어. 복귀해.”

“저기, 팀장님.”

박대희는 현관 키패드를 누르려던 두이의 손을 보곤 기가 차 실소했다. 가죽 장갑도 없이 사람을 얼마나 뭉개 놨으면, 그의 주먹은 너덜너덜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두이의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표정 또한 잠잠했다.

“이게 뭡니까? 하, 왜 이러세요. 팀장님,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왜.”

“지난번엔 네 명을 골로 보내실 뻔했잖습니까. 아무리 개새끼여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은 총기 제재가 엄격한 나라고요. 외국에서 아무리 오래 계셨어도, 격발된 실탄 개수 하나까지 다 윗선에 보고 들어가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럼, 총기 회수해 가. 필요 없으니.”

“아, 팀장니임! 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윤해서 때문입니까?”

키패드에서 손을 뗀 두이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진창 같은 기분을 애써 눌렀다.

“박대희, 너는 안 다쳤어?”

뜬금없는 두이의 질문에 귀 끝을 붉힌 박대희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습니다. 최우재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이진 않았어. 살려서 법정에 세워야 할 놈이라.”

“조금 전에 부장님한테 연락 왔습니다. 아시죠? 일주일인 거.”

“그 안에 잡아 넘기면 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돌아가. 너야말로 쉬어. 수고했다.”

마지못해 물러선 박대희가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 뒤, 승강기에 오른다. 그제야 두이는 무심하게 키패드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센서 등이 켜진 현관에 윤해서의 운동화 한 짝이 뒤집힌 게 보인다.

신발 하나 제대로 벗지 않는 저런 여자가 어디가 예쁘다고….

집 안으로 들어선 두이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와 커프스 링크를 풀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허리 높이의 모듈 가구를 지나 창가에 놓인 침대로 다가가자, 작은 액자 하나를 움켜쥔 채 잠든 그녀가 보인다.

그 사진은 군 복무 시절, 이하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해군 제복을 입고 이하나를 꽉 끌어안은 사진은, 그의 보물 1호나 마찬가지였다. 인생에 후회 없는 두 가지를 고르라면, 이하나와 쌍둥이로 태어난 것. 그리고 중3 겨울, 농구에 미쳐 버린 한때였다.

소매를 접어 걷어 올린 그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윤해서가 끌어안은 액자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러자 흠칫 놀라며 눈을 뜬 그녀가 멍하니 그와 눈을 맞춘다.

“깼어?”

잠에 취한 여자의 무방비한 얼굴과 흔들리는 속눈썹, 가을볕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제 얼굴을 가만가만 응시했다.

“두이야….”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부른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두이는 오른손을 허벅지 옆으로 내리며 상처를 숨겼다.

“미안, 잠들었어.”

머리가 아픈 건지 잠이 덜 깬 얼굴의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두이는 보송보송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그러자 옅게 한숨 쉰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안기듯 얼굴을 파묻는다.

“네 누나 엄청 예쁘더라. 너랑 똑같이 생겼어.”

“이하나가 좀 예뻐.”

“이 집에서 네 향기 나. 그래서 잠들었나 봐.”

“몸은.”

“아까는 좀 아팠는데, 괜찮아졌어. 근육이 놀랐나 봐.”

“벗어 봐.”

그녀의 어깨를 잡아 똑바로 앉힌 그가 셔츠 아래에 손을 넣어 머리 위로 단번에 빼냈다. 덕분에 만세 하듯 올렸던 손을 툭 떨어트린 그녀의 눈길이 상처 가득한 그의 손을 향했다. 대충 피를 닦아 내기만 한 듯, 너덜너덜 으깨진 피부가 보인다. 갈비뼈 부근을 누르는 통증에 얕게 신음한 그녀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너 손 왜 이래?”

해서는 그의 손목을 움켜쥔 채 떨었다. 누가 봐도 폭력으로 인해 생긴 상처였다. 최우재와 마주 서 있던 이두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그녀가 불쑥 얼굴을 감싸더니, 혼란한 눈동자로 상처를 찾아 더듬었다.

“안 다쳤어, 난. 너야말로 누워서 제대로 보여 줘. 갈비뼈 아래에 멍이 든 거 같은데.”

“안전벨트 때문이야, 그건. 이두이 너 혹시 최우재 때렸어?”

다급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새끼와 대체 뭘 했기에, 두둔하거나 걱정하는 듯한 태도에 두이는 짜증이 났다.

“궁금하면 그 새끼한테 연락해 봐. 어디에 있는지.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의도치 않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러자 그녀의 둥글고 마른 어깨가 떨린다. 난방을 하지 않아 집이 좀 싸늘했다. 난방기를 켜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그의 손목이 잡혔다. 한껏 굳어 버린 윤해서의 얼굴이 찌르듯 시야를 파고든다.

“가지 마.”

가지 말라니. 혹시 화가 난 줄 아는 건가.

“보일러만 틀고 올 거야.”

“아.”

그제야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은 상처 난 그의 손을 계속해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보일러를 가동한 그는 서랍을 열어 진통제 두 알과 생수를 꺼내 침대로 왔다. 한 알은 그녀에게, 그리고 한 알은 제 입으로 털어 넣은 그가 물과 함께 꿀꺽 삼키며 인상을 썼다.

“너도 먹어 둬. 그리고 내일은 병원에 갈 테니 그렇게 알아.”

생수와 알약을 받아 든 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삼켰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힌 그가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듯 타고 올라와 갈비뼈 아래 피멍 든 피부를 살짝 눌렀다.

“아!”

“아파?”

“그게 아니라….”

해서는 말끝을 흐리며 빨개진 얼굴을 왼쪽으로 틀었다.

“간지러워서.”

“아프지는 않고?”

“아프긴 한데, 그냥 멍든 거 같아. 뼈가 잘못되진 않은 거 같아.”

“다행이네.”

누군가를 자신의 공간에 들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처음이 또 윤해서라니. 그는 모든 처음을 공유한 윤해서를 담담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뺨을 감싸듯 목 뒤를 잡고 상체를 숙였다.

최우재가 해서가 탄 차량을 들이받았단 보고를 접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윤해서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GPS 신호가 가리키는 곳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멀쩡하게 최우재와 마주 서 있는 윤해서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퓨즈가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선연한 분노였고, 살의였다.

만약 최우재의 부하들이 먼저 달려들지 않았었다면 그놈의 숨통을 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자신을 말리는 경찰들의 수갑이 손목에 채워진 뒤였다. 최우재의 부하들은 사고 처리를 위해 대기 중이던 구급차에 실려 갔고, 놈은 승자라도 된 것처럼 피투성이가 된 채 웃었다.

그래, 패자는 나였다.

온전했던 마음이 어딘가 망가진 것 같다. 고장 난 회로가 과부하를 일으키듯, 윤해서란 이름에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윤해서와 지금 무엇을 하는 건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숨 막히게 예쁜 눈을 빛내며 습관처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그 목소리가 좋다. 고작 입맞춤 한 번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는 그 모습도 좋았다. 고작 손짓 한 번, 미소 한 번에 자신을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해 오는 고백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이 지나 무뎌지는 통증처럼, 그 미소가 아무렇지 않아진다면. 윤해서가 더는 제 입맞춤에 행복해하지 않을 때가 온다면.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는 이 마음은 결국 저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잔혹한 칼날이 되리라.

고약한 감상주의자가 된 듯한 기분에 두이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와 입술을 포갰다. 침대 위의 그녀를 짓누르며 목덜미를 힘주어 당겼다. 입술을 열어 혀를 밀어 넣으며 몸을 붙이자, 달아오른 게 분명한 그녀가 혼란한 눈동자를 떨며 가슴을 밀어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줘. 나한테 숨기지 말고, 어떻게 최우재가 너를 아는지….”

그녀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검은 눈동자 안에 욕망이 번들거리며 형태를 드러낸다.

“내가 네 옆에 있으니 궁금했나 보지. 너한테 집착하는 놈이니까.”

“무서운 놈들이 너한테만은 쩔쩔매. 최우재도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 처음으로 그 인간 눈에서 두려움이 보였어. 너 누구야. 누군데 총 같은 걸 갖고 다녀? 왜, 왜 너는….”

말을 이어 나가던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는다. 그녀의 눈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두이는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누르며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말랑거리는 부드러운 살이 손바닥에 감겨든다.

“말해 봐, 윤해서.”

“…그냥 나 좀 안아 줘. 안아만 줘도 될 것 같아.”

“정말 안아만 줘?”

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치켜뜬 그녀가 발끈한 얼굴로 고개를 튼다.

“네가 벗겨. 난… 안 움직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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