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날이 급격하게 추워졌다. 고작 이틀 사이에 기온은 3도까지 떨어졌고, 강원 지역엔 첫눈이 내렸다는 예보가 진종일 계속되었다.
해서는 앞에 놓인 디저트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진하게 내린 커피 잔을 들었다. 그러자 색색의 가죽 칩을 테이블 가득 늘어놓은 모친 정지숙이 옆자리를 두드리며 해서를 부른다.
“너도 이리 와. 지금 오더 넣어도 석 달은 걸려.”
“가방 필요 없어요. 엄마는 여기 가방 색깔별로 다 갖고 있으면서, 또 주문해?”
“색이 다르잖니, 재질도 다르고. 너한테는 흔한 기회 아니야. 그러니까 감사히 생각하고 와서 골라. 어차피 너희 아빠 때문에 이미지 관리하느라 들고 다니지도 못하잖아.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지.”
한숨을 내쉰 해서는 모친 앞에서 생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는 숍 매니저를 보며 소리 없이 혀를 내둘렀다. 모 가죽 브랜드의 VIP 라운지엔 외부에선 볼 수 없는 고가의 상품들이 가득했다.
웃돈을 준다 해도 어지간한 VIP 고객이 아닌 이상 판매 자체를 하지 않는 브랜드라나 뭐라나. 사람들은 구매의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 브랜드를 찬양했지만, 해서의 눈에는 입구 쪽에 서 있는 이두이만 못해 보였다.
보고를 받는 건지 귀에 건 이어 마이크를 지그시 누른 그가 두 눈을 치켜뜬다. 눈이 마주친 것뿐이건만 해서는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두이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전날 마신 술 때문에 목이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어쩌면 새벽, 아무리 잘 봐줘도 오전 7시가 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건 그녀 혼자였다. 대체 언제 일어난 건지, 전날과 다른 정장을 갖춰 입고 소파에 앉은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앞에는 차가운 커피와 태블릿 그리고 검정 쇳덩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아도 총이었다.
그 총이 가짜가 아니란 건, 그 방면으로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증이 치밀었다고 해야 하나.
경호원이어서? 아니면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하는 걸까.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관찰하던 해서는, 불쑥 일어나는 그의 기척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막, 잠에서 깨어난 척하던 제 곁으로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났으면, 씻어야지. 윤해서.”
마치 지난밤의 일들은 모두 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구김 없이 완벽한 슈트와 간밤의 방종함을 떠올릴 수 없는 표정, 청량한 향수 냄새까지. 짓누르듯 파고들던 몸짓과 이따금 초연함을 잃고 흔들리던 눈빛 같은 것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해서야, 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멍하니 이두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서는 모친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바로 앉았다.
“네? 아, 조금 잠을 설쳐서.”
“그러게 함부로 외박하지 말랬지. 이 팀장, 쟤 그저께 정말 클럽에서 밤샌 거 맞아요?”
정지숙의 질문에 이어 마이크에서 손을 뗀 이두이가 담담히 웃는다.
“예, 클럽에 계셨습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건만, 해서는 가슴이 심각하게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그건 직원도 마찬가지인 듯, 고객인 지숙보다 입구를 지키는 이두이를 더 자주 흘깃거렸다.
“어쨌든 지난번에 말해 놓은 옷 있죠? 그거 얘한테 좀 입혀 줘요. 가방은 선물할 거니까 포장해 주고, 향수도 챙겨 놨죠?”
“그럼요, 고객님.”
생글거리며 다가온 직원이 공손한 자세로 해서를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직원을 따라 일어난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투피스 정장을 발견했다.
제법 화려한 블라우스와 H라인으로 똑 떨어지는 스커트는 이번 시즌 메인으로 나온 상품이었다. 구하고 싶어도 사이즈가 없어서 구하지 못한다며 투덜거리던 윤희 때문에 알고 있었다.
“이걸 입으라고요? 왜요? 오늘 어디 가요?”
그러자 진열된 스카프 링을 살피던 지숙이 엄한 표정으로 인상을 쓴다.
“전에 말했지. 오늘 멜리사 김이 초대했다고.”
“피아니스트 김연주 씨요?”
“그래. 지난주에 청담으로 이사 온 거 알지? 그래서 집들이한다고 그러더라. 성규 엄마랑 재희 엄마도 올 거야. 오랜만에 멜리사 연주도 듣고 겸사겸사, 얼굴도 보는 거지 뭐.”
“집들이 선물치고 좀 과한 거 아닌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엄마가 돈 쓸 때는 시원하게 쓰잖니. 어쨌든 갈아입어.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레깅스는 좀 그래. 꼭 등산 다녀온 애처럼 그게 뭐니?”
그거야 연습을 마치고 바로 왔으니까요.
하고 싶은 변명이 혀끝을 맴돈다. 해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직원이 건네준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설마, 이두이가 그곳에까지 동행하지는 않겠지.
피팅 룸 안으로 들어간 해서는 셔츠를 벗은 채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쇄골 아래에 난 흔적을 시작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이틀 전, 그가 남긴 흔적들이었다.
더운 숨으로 살갗을 데우며 이로 긁고, 손으로 움켜쥔 자국들이다. 쾌락에 젖어 커다랗고 강한 팔에 무기력하게 안겨 있던 순간을 떠올리자, 배 안쪽에서 열이 끓었다. 해서는 레깅스도 벗은 뒤 허벅지 안쪽에 난 자국을 문질러 보았다.
꿈이 아니다. 정말로 이두이와 섹스를 했다. 그것도 열렬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연인처럼 몸을 섞었다. 불현듯 고개를 든 해서는 빨갛게 익어 버린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꿈이 아니었다.
***
“해서 씨는 파리에 오래 계셨다고 했죠? 그럼, 센강 동쪽도 가봤어요?”
제법 넓은 평수의 주택 응접실은 유난히 높은 천장이 시원하게 뚫린 구조였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고급 천연석으로 마감된. 아치 안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까지, 부를 상징하는 것들로 채워진 곳이었다.
해서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상체를 반 이상 기울이는 남자의 질문에 미소로 대답했다.
“아마도 가 봤을 거예요. 벡시 공원이 있던 곳 같아요.”
멜리사 김이 연주하는 피아노 곡조가 두 사람의 대화 켜켜이 스며든다. 남자의 인상은 말끔했다. 조금 더 후하게 쳐주자면 제법 훤칠했고 목소리도 괜찮았다.
남자는 김연주의 외종질이자, 태성중공업 회장의 장손인 박인호였다. 하지만 박인호는 잘나가는 프로 골퍼였고 가업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프로 리그에서 받는 연봉과 상금만 해도, 대한민국 갑부 순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으니 가업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돈, 돈. 노래를 부르시더니.’
해서는 멜리사 김의 피아노 아래 놓인 주황색 쇼핑백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모친 정지숙은 호텔에서 보는 선 같은 건,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지 않은 소문만 돌 뿐이라며 꺼렸다. 그건 해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재벌가에 소속된 또래들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오픈된 선 시장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들의 맞선 장면은 모두 헛소리라며 혀를 찼다.
실제로 재벌가의 사교 모임은 조심스럽고 비밀리에 마련되었다. 크고 유명한 호텔 같은 곳이 아니라, 그중 누군가 소유한 개인 빌라 같은 곳에서 열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들만이 안다. 그들이 호텔처럼 공개된 장소에 얼굴을 내비칠 땐,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가 필요할 때뿐이었다.
결국, 그들만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아닌가? 접점이 없던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지는 경우는 손꼽을 듯 적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짝이 정해지는 경우가 오히려 허다했다. 해서는 여전히 그들의 세상을 동경하는 지숙의 태도에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재벌도 아니고,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정치인 가족이라며 사실을 말해 줘도 통하지 않았다. 지숙은 박인호와 함께 있는 딸의 표정을 간간이 살피며 모임의 여자들과 음악 감상에 빠져 있었다.
해서는 골프 선수답게 까무잡잡한 피부와 균형 잡힌 체격이 돋보이는, 최고급 슈트와 액세서리로 휘감은 남자의 도전적인 눈빛을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그 무심함이 남자의 승부욕에 더욱 불을 지폈다는 건 몰랐던 일이었다.
“발레리나라고 하시던데. 저도 운동하는 거 아시죠?”
박인호의 질문에 해서는 탄산수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해외에 자주 나가는 편이라, 문화생활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추천해 주실 공연 있으세요?”
“글쎄요.”
“발레라면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이 정도밖에 몰라서요.”
“네….”
남자는 사교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 갔지만, 그녀는 불편했다. 이렇게 이벤트와 다름없는 만남을 원한 적이 없었다. 해서의 단답이 부끄러움 때문인 줄 착각한 남자가 자리를 옆으로 옮겨 왔다.
“잘 안 들려요, 해서 씨. 목소리도 몸처럼 가느시네요.”
‘가느시네요’는 또 뭐야.
딱 붙어 앉는 남자의 태도에 억지웃음을 지은 그녀가 고개를 틀었다. 입구와 가까운 창 측에 서 있는 이두이가 보인다.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미동도 없이 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가만히 직시하던 까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박인호를 향한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두 눈을 가늘게 접는 모습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죄송한데, 혹시 제가 올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 해서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눈가를 부드럽게 휜 남자가 연주 중인 멜리사 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시다시피 제가 운동을 하잖아요. 그래서 진지한 연애는 어려운 게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잘 맞을 것 같은 여성분을 소개해 주시고 싶으셨나 봐요. 발레리나 윤해서 씨라는 소리 듣고, 바로 승낙했습니다.”
남자는 순진한 눈빛을 하곤, 옆에 앉은 그녀를 차분하게 훑어 내렸다. 오르내리는 소문에 걸맞게 윤해서의 외모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게다가 반듯한 자세하며 군살 없이 우아한 몸매, 솜털조차 보이지 않는 도자기 같은 피붓결이 남자의 소유욕을 들끓게 했다.
박인호는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 아래 흐트러진 잔머리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해서 씨는 연주회 좋아하세요? 저는 제 이모라서 듣습니다.”
“저도 연주회를 찾아다니지는 않아요. 공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뿐이에요.”
“우리 나이엔 사실 저런 고리타분한 것들보다 좀 더 자극적인 맛을 더 원하죠.”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자, 살짝 상기된 박인호의 얼굴이 보였다. 애프터 신청이라기보다 떠보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해서는 들고 있던 탄산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박인호의 방향으로 몸을 조금 틀었다.
“박인호 씨, 실은 저기 있는 남자가 제 경호원이에요.”
마치 밀담을 늘어놓듯 진지해진 말투에, 박인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경호원이요? 매니저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와, 마스크 죽이네요.”
“그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저한테 경호원이 왜 필요한지 아세요?”
눈치는 제법 빠른지, 박인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린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알고 계실 것 같고….”
“예, 압니다. 윤홍주 장관님이신 거요.”
고개를 끄덕인 해서는 박인호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곤 손으로 가린 채 소곤거렸다.
“그런데 어떤 미친놈이 절 죽이려 한대요. 그 미친놈이 전 약혼자일 가능성이 크고요.”
“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박인호 씨. 제가 기회 드릴 때 저 차 버리세요.”
박인호의 낯빛이 바뀌는 걸 보자 해서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숨기고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거야말로 사기 결혼이 될 테니까.
“와, 이거 너무 스케일이 큰데요?”
“박인호 씨, 큰일 날 뻔한 거 제가 살려 드린 거예요. 그쪽의 미래를 구한 거죠.”
장난스러운 해서의 말투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박인호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남자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호감의 신호로 인지한 지숙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윤해서 씨, 매력 있네. 확 끌려요.”
“네?”
“끌린다고, 그쪽한테. 내가 말했죠. 난 자극적인 맛을 원한다고. 경호원이 있으니 다른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우리 만나 볼래요?”
불시에 받은 고백에 해서의 표정이 굳어 갔다. 마른 입술을 축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두이의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창 앞에 선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직선으로 찔러 넣는 눈빛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 어딘가가 따끔거린다. 해서는 어느새 제 어깨를 감싸기 직전인 박인호에게서 슬쩍 떨어졌다.
“죄송해요, 저는 이런 식의 만남엔 관심이 없어요.”
“만나 보지도 않고 차는 겁니까?”
“그러니까,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 같은 건….”
“누가 결혼하재요? 만나 보자는 거지. 혹시 모르죠. 한 번 만나 보면, 두 번 만나고 싶고. 그러다 붙어먹고 싶을지도.”
질 낮은 농담을 자연스럽게 흘린 박인호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다. 어느새 해서의 뒤엔 이두이가 서 있었다. 윤해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쥔 그가 박인호를 내려다보며 싱긋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제 클라이언트와 해야 할 대화가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부탁이었지만, 박인호는 자신을 적으로 간주한 남자의 눈빛을 읽었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와 끌로 깎아 낸 듯 섬세한 이목구비가 서늘하다. 만약 이곳이 야생이었다면, 거침없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살의가 피부를 베었다.
하지만 박인호는 노련하게 감정을 숨기곤, 소파 등받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다녀와요, 해서 씨. 기다릴 테니까.”
***
이미 이 집의 구조는 모두 머릿속에 있었다.
윤해서를 데리고 1층 응접실을 빠져나간 두이는 주방과 연결된 반 층 아래 팬트리(pantry) 구역으로 향했다. 창문이 없고, 출구는 하나뿐인 곳.
- 팀장님, 놈 움직입니다.
누군가 창문 너머로 집 안을 관찰 중이었다. 집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으니, 윤해서를 타깃에게서 멀어지게 해야 한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말없이 앞장서는 그의 재킷을 잡아챈 해서가 물었다. 목적지인 팬트리 문을 연 두이가 들어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내부를 훑으며 울상이 된 해서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여기 들어가라고? 나 어두운 거 싫어.”
“센서 등이 들어올 거야. 불 꺼지지 않게 춤이라도 추든지.”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근데 왜 들어가라는 거야?”
“10분이면 돼.”
그는 해서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바짝 긴장한 그녀가 두이의 옷깃을 움켜쥔다. 어둠을 무서워한단 말이 사실이었는지, 핏기 없이 창백해진 입술이 떨렸다.
“그렇게 무서워?”
두이는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자 허리춤을 끌어안은 윤해서가 센서 등이 들어온 팬트리를 돌아본다. 창문 없는 밀실이 필요해서 데리고 왔건만, 당사자가 1분도 버티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응, 무서워.”
“이렇게 움직이면 불 켜지잖아. 무서울 거 없어. 아니면 화장실에 들어가 있든지.”
“화장실에서 10분 넘게 안 나가면, 무슨 창피야 그게.”
“그러니까 여기에 있으라는 거야. 오래 안 걸려.”
“그럼, 키스해 줘.”
마치 거래를 제안하듯,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말했다. 두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허리춤을 끌어안은 해서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박인호와 나란히 앉아 시시덕거리는 모습에 걷잡을 수 없게 짜증이 치밀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박인호에게 제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두이는 윤해서의 가늘고 둥근 어깨를 조심스레 움켜쥐어 보았다. 이쯤이었나? 박인호의 손이 닿은 곳이.
“업무 중에는 자제해.”
손을 뗀 그는 제 허릴 감싸 안은 윤해서의 팔을 풀었다. 그러곤 팬트리 안으로 그녀를 살짝 밀어 넣은 채, 이어 마이크를 다시 켰다. 야속하다는 눈빛으로 두이를 째려보던 그녀가 한쪽 팔을 감싼 채 팬트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곤 식료품으로 가득한 장을 훑으며 말했다.
“파리에서 입맞춤은 그냥 인사 정도야. 발정 나서 달려드는, 그런 거 아니란 소리라고. 어쨌든 다녀와. 얌전히 기다릴게, 경호원 씨.”
멋쩍은 얼굴로 슬쩍 돌아본 그녀가 생긋 웃는다.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변명하듯 벽을 치는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딴에는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윤해서는 다 티가 난다. 숨기려 할수록, 다른 감정으로 덧칠할수록 상처와 터부는 더욱 선명한 형태를 드러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정말로 누가 날 죽이고 싶대? 왜?”
장에 기댄 해서는 말 없는 두이를 올려다보며 입술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이상하지 않아? 날 죽여서 뭘 얻겠어. 돈이 나오기를 해, 명예를 얻기를 해? 넌 이유를 알아?”
“글쎄.”
“하긴. 이유를 알면, 이미 경찰이 범인을 잡았겠지.”
해서는 유난히 색상이 다양한 쇼트 파스타가 담긴 상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의미 없는 활자를 읽어 내렸다.
“최우재는 아닌 거지?”
최우재의 이름을 들은 그의 눈빛이 삐딱해진다.
“왜 그렇게 생각해.”
“최우재는 나 못 죽여. 걘 나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거니까.”
이두이는 최우재와의 관계에 관해 물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궁금했다. 물어볼 기회가 많았으면서도 왜 궁금해하지 않는 건지, 어째서 묻지 않는 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과거를 캐묻지 않는 것으로 선을 지키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그날은 제 고집에 휩쓸려 어울려 준 걸까? 밤을 보낸 우리는 어떤 사이가 된 걸까. 섹스하는 친구 사이? 그런 걸 뭐라고 하더라….
최악이네, 윤해서.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설 때였다. 커다란 손에 그녀의 어깨가 불쑥 잡혔다.
헛바람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친 그녀의 허리춤을 감싼 그가 거칠게 입술을 포갰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훑은 혀가 틈새로 파고들어 와 질척하게 얽혔다. 해서는 짧은 숨을 들이켜며 그의 가슴을 짚었다.
고개를 기울여 각도를 틀자 더욱 깊숙하게 밀려드는 살덩이가 그녀를 사납게 몰아붙였다. 키 차이 때문에 발뒤꿈치를 들어야 했지만, 해서는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짓씹는 듯한 키스였다. 신경 써 칠한 립스틱이 번지고, 부딪친 선반의 물건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을 앗듯이 아랫입술을 물고 빨다가 혀를 넣어 질척하게 뒤섞었다.
까치발을 든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저릿한 열이 머리끝까지 번져 오른다. 센서 등이 몇 번이나 꺼졌다가 켜진 뒤에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떼어졌다.
어둠을 가르고 번들거리는 눈빛엔 두 사람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났다. 두이는 그녀의 번진 입술을 문질러 닦아 준 뒤, 자신의 입술도 손등으로 문질렀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헛웃음을 흘린다.
“키스했는데, 섹스한 기분이야.”
“그 입 좀 잘 닫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싫어. 네가 좋아. 좋아해서, 잘 숨겨지지 않아.”
“세뇌라도 하는 거야?”
세뇌라는 말에 해서는 애써 웃었다.
“함부로 흘리지 마. 인내심 시험도 하지 말고.”
두이는 힘겹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윤해서의 모습이 사뭇 우스웠다. 바들바들 떠는 초식 동물인 주제에, 범 앞에서 당당히 가슴을 펴고 덤비는 꼴 같아서 자꾸만 손이 먼저 나간다.
“다녀와.”
까치발을 든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기다릴게.”
***
- 놈 인상착의만 확인하면 됩니다. 압구정에서부터 따라붙은 놈입니다. 흰색 SUV 44**, 시동 걸고 대기 중인 것부터 확인할까요?
“신호 줄 테니 대기해요.”
세현의 말에 두이는 자연스럽게 담뱃불을 붙인 뒤 저택을 나섰다. 마당을 가로지르며 주워 든 주먹만 한 돌을 가볍게 움켜쥔 채 대문 앞에 서자, 육중한 철문이 내는 쇳소리가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조금 전 윤해서와 닿았던 입술이 아려 왔다.
며칠 동안 윤해서와 함께 지내며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서 부장이 지목한 대로 이정수가 KING이라면 어째서 놈은 윤해서를 노리는 걸까. 지금껏 잠잠하다가 이제 와 윤해서를 건드리려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어긋난 톱니바퀴를 지켜보는 것처럼 불편한 예감이 들었다.
3년 전 일로 이정수는 구속되어 현재까지 수감 중이었다. 그것도 윤해서를 살인 청부한 죄로.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위험을 감수하고 또다시 같은 대상을 노린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두이는 서 부장과 했던 대화를 한마디도 빠짐없이 곱씹었다. 따지고 보면, 서 부장은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적 없었다. 이정수를 KING이라고 특정할 증거가 필요한 이유도, 어째서 윤해서를 노리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설마, 서 부장의 말장난에 휘둘린 건가?
만약 서 부장이 확신 없는 상태로 정보를 얻으려 요원들을 이용하는 거라면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었다. KING은 이정수가 아니고, 윤해서를 노리는 범인 또한 KING과는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개인 통화 가능합니까?”
두이의 말에 이어폰 너머로 세현이 대답했다.
- 녹취 중단했습니다, 말씀하세요.
“따로 윤홍주 음성 따 놓은 거 있죠?”
- 예, 있죠. 팀장님께서 설치한 도청 장치 외에도 전화 회선을 따로 잡아 두었습니다.
“그럼, 지난 보름간 수집한 윤홍주 관련 녹취 파일 제게 다 보내 놓으세요.”
- 예? 갑자기요?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KING이 이정수라면, 이제 와 윤해서를 노릴 이유가 없잖습니까. 굳이, 구속 중인 상황에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 그럼, 팀장님은 청부업자와 KING은 별개라고 생각하십니까?
“높은 확률로.”
키보드를 두드리는지 세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사이 이두이는 불법 주차된 차들로 빼곡한 골목을 무심하게 훑었다. 타깃은 담장 아래 세워진 고급 SUV였다. 루프톱 박스까지 설치한 차의 천장은 담장 꼭대기에서 고작 1.5m 아래에 닿아 있었다.
성인 남성이 저 위에 올라가면, 어려움 없이 담 너머를 관찰하거나 넘어 들어올 수 있는 높이다.
그는 담배를 태우려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단단한 돌멩이는 손안에서 굴렀다.
빙고.
두이는 차 안에 앉은 누군가가 담장 위를 노려보는 걸 발견했다. 그때였다. 가까이 다가서는 그를 발견한 SUV가 급히 헛바퀴를 돌리는가 싶더니, 공격적으로 핸들을 꺾는다.
끼이이익.
요란한 소릴 내며 급발진한 SUV는 그대로 두이에게 내달렸다.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주차된 차량 사이로 가볍게 몸을 피한 그는 도망치는 SUV를 향해 손에 든 돌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퍽, 소릴 내며 산산이 부서져 버린 뒷좌석 창문. 동시에 차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없이 비틀거리는 SUV를 향해 뛰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세 명의 괴한이 앞을 막아서더니, 다짜고짜 흉기를 휘두른다.
“지켜보던 놈들이, 이놈들입니까?”
두이는 가뿐히 상체를 뒤로 젖혀 놈이 휘두르는 칼날을 피했다.
- 예. 놈들입니다.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셋이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인상착의 보낼 테니 신원 조회하세요.”
태연하게 공격을 피하는 모습에 당황한 놈들의 숨소리가 격해진다.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시각, 대담하게 칼을 휘두를 놈들이라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
목을 좌우로 비틀어 푼 그가 달려드는 놈들을 보며 비스듬히 웃었다.
“뒤통수 조심해야지.”
허리춤에서 3단 봉을 꺼낸 두이는 선두에서 내달리던 놈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그러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놈의 턱 아래를 무서운 힘으로 움켜쥔 뒤, 마스크를 뜯었다. 힘없이 칼을 놓친 놈이 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가!”
- 1번 면상 스캔 완료.
쌍꺼풀이 짙게 잡힌 놈의 눈이 커다래진다. 두이는 반항하는 놈을 더러운 하수구 쪽으로 처박은 뒤, 뒤에서 달려드는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뒤로 날아가 구른 놈의 모자가 벗겨진다. 균형을 잃은 놈의 머리통을 구둣발로 걷어차자, 이번엔 오른쪽 뺨에 화상을 입은 얼굴이 드러났다.
- 2번 접수. 팀장님, 차에서 기어 나옵니다. 여잡니다.
여자?
그가 담벼락을 들이받은 차로 시선을 옮기는 사이, 세 번째 놈은 흉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사고 난 차와는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선택은 여자였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쓰러진 놈들을 지나, 골목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여자를 뒤따랐다. 붉은빛이 도는 코트에 굽이 낮은 플랫 슈즈를 신은 단발머리의 여자.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여자의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돌아본 여자가 그를 향해 스프레이건을 쏘았다.
“젠장!”
간발의 차로 몸을 낮춘 그는 정통으로 뿌려지는 가스를 피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피하진 못했는지, 피부가 화끈거리며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가스를 쏜 여자의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키가 170에 가까운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전속력으로 도망친다.
- 3번 인상착의 확인했습니다. 팀장님, 놓아주셔도 됩니다! 괜찮으세요?
“잡습니다.”
- 네?
“잡는다고.”
씹.
묘한 승부욕이 그를 자극했다. 두이는 여자가 큰길로 나서기 전 앞을 막아설 목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노련하게 빠져나가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호신용 스프레이를 가진 것으로 보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비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제가 한 추론의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듯 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억을 되감던 그는 불현듯 떠오른 이름에 실소하며 대로변으로 발을 내디뎠다.
“꺅!”
탁 트인 대로변. 순식간에 두이가 앞을 가로막자 다친 팔을 움켜쥔 여자가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이두이를 향했다. 그는 쓰라린 뺨을 손등으로 문지른 뒤, 패닉에 빠진 여자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여기서 뵙네요, 서 단장님.”
“무슨 소리예요! 당신 누구야?”
왜 이제야 알아봤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여자는 서승현, 제너럴 발레단의 단장이자 윤해서가 입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멘토였다. 두이는 쓰라린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구면입니다. 윤해서 경호원입니다.”
“겨, 경호원? 그쪽이? 아, 이제 기억나네요. 그런데….”
서승현의 날카로운 눈빛이 두이의 전신을 천천히 훑었다. 조금 전 달리는 차에 돌을 던진 사람이 저라는 걸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뻔뻔하게 웃으며 어깨를 폈다.
“해서 경호원이 왜 날 쫓아와요?”
“집 앞에 이걸 떨어트리셨습니다.”
다가간 두이가 손을 내밀자, 흠칫 놀란 서 단장이 뒷걸음질 친다. 두이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쥔 손을 폈다. 그것은 차 앞에 떨어져 있던 키였다.
갈색 가죽 케이스에 든 스마트 키를 보며 헛웃음을 흘린 서 단장이 떨리는 손을 내민다. 두이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서승현의 손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마른침을 삼킨 여자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두이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이미 한쪽 눈은 제대로 뜨기도 힘든 상황, 서승현이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미안해요. 그런데, 그게…. 오해하지 마요.”
두이는 겁에 질린 여자가 내민 손수건을 거절하곤, 재킷 소매로 뺨을 문질렀다.
“단장님인 거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어차피 다시 만날 테니까요.”
“그게 무슨…. 저기, 오해하지 마요. 나 나쁜 짓 하러 간 거 아니에요.”
“글쎄요, 그 기준은 피해자가 결정하는 거라서요.”
“진짜, 아니라고요! 그냥, 해서가 걱정되어….”
“칼을 든 사람까지 쓰셨던데요? 일단 지금 할 대화는 아닌 것 같으니 보내 드리겠습니다.”
서승현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꼬치꼬치 캐물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연신 마른 입술을 축였다. 두이는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승현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은 뒤, 까딱 인사했다.
돌아선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다. 우연과 필연, 욕심과 탐욕이 뒤섞여 만들어진 우스꽝스러운 졸작이.
“힌트 하나를 주자면, 결국 윤해서를 죽이는 건 윤 의원입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죠.”
최우재의 경고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려온 길을 걸어 올라가는 그의 시야에 사고 처리를 위해 출동한 견인차가 보인다. 모두 본부에서 출동한 사고 처리반이었다.
“파악 끝났습니까?”
보일 듯 말 듯 하게 눈인사하는 이들을 지난 그는 다시 대문을 열었다.
- 확인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아까 그 여자, 서승현입니다. 제너럴 발레단 단장이자 이사장입니다. 그러니 제너럴 발레단 재무 관련해서 파 보세요. 답, 알 거 같으니까.”
- 재무 쪽이면…. 예, 알겠습니다.
“그럼 아까 그놈들은 뭡니까?
- 용역 건달입니다. 부천시 일대에서 활동 중인 놈들이고, 주로 떼인 돈이나 받으러 다니는 놈들입니다.
“그놈들까지 정리해서 보내 놓으세요.”
더는 버티기 힘든 통증이 이어진다. 세수를 해야 했다. 벨을 누르자, 바빠 보이는 사용인이 문을 열다 말고 두이를 보며 화들짝 놀란다.
“어머, 다치셨어요?”
“뭐에 쓸려서요. 욕실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네, 그럼요. 응접실 끝에 있는 공용 욕실 사용하시면 돼요. 어머나, 바를 약이 있나 찾아볼게요.”
그렇게 흉한가? 하긴, 가스를 제대로 맞았으니 눈의 실핏줄이 견딜 리가 없었다. 두이는 욕실로 향하는 척, 주방에 난 계단을 내려갔다.
“윤해서 씨,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아무리 넓어도 가정집인데, 방향을 잃으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돼서 찾으러 나오길 잘했지.”
하지만 팬트리 방향에서 들려온 박인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네…. 제가 실은 심각한 방향치거든요. 덕분에 신기한 식재료 구경 잘했어요. 버섯이 천만 원이 넘는 건, 처음 봐요.”
“송로버섯이 그렇죠, 뭐. 다음에 제가 대접할 테니, 식사합시다. 괜찮은 요릿집을 알거든요.”
“네에, 그럴게요. 저 그럼 욕실 좀….”
팬트리를 나온 윤해서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두이는 방향을 틀어 사용인이 알려 준 욕실을 향해 걸었다. 좁은 복도 왼편에 난 거울에 서늘하게 벼려진 옆얼굴이 비친다. 천연석으로 만든 손잡이를 돌리자, 다섯 명이 사용해도 충분할 만큼 넓은 세면대가 나왔다.
문을 닫은 뒤, 재킷을 벗어 벽에 건 그는 거울을 보며 물을 틀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왼쪽 광대와 눈가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빨갛다.
두이는 차가운 물을 손으로 떠 세수를 했다. 얼음장처럼 시린 물이 닿자, 가스에 노출된 피부가 칼로 베는 것처럼 쓰라리다. 하지만 용액을 닦아 내지 않으면, 처치해도 소용이 없었다.
등신같이 스프레이건 하나를 못 피하고.
욕설을 속으로 삼키며 찬물로 세수 중인 그의 뒤로 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들자, 하얗게 질린 윤해서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상처를 보고 놀랐는지, 입술을 달싹이며 바르르 떨던 그녀가 다짜고짜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어딜 가려고.”
두이는 해서의 팔을 잡아챘다. 그러자 탄식하며 문을 잠근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다.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이 왜 이래!”
“좀 다쳤어.”
“다쳐? 왜!”
그는 페이퍼 타월을 뜯어 해서의 손을 먼저 닦아 준 뒤, 자기 얼굴을 꾹꾹 눌렀다. 페이퍼 타월이 상처에 스칠 때마다 오싹한 통증이 뇌까지 번지는 기분이다.
“누굴 좀 쫓다가.”
“뭘 어쨌기에 얼굴이 이래? 하, 미치겠네. 누가 그랬어!”
누가 그랬냐니. 그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가에 힘을 주며, 또다시 뺨을 감싸려는 윤해서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내가 애야? 누가 그랬는지 일일이 일러바치게.”
“애만 일러? 어른도 일러!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이르면. 네가 혼내 주기라도 하게?”
“못 할 게 뭐 있어? 폭행죄로 신고해 버리면 되지!”
미치겠네.
지금껏 대테러 관련 위험 임무를 수행하며 양다리에 총을 맞은 적도 있었고, 칼부림에 휘말려 30바늘을 꿰매야 했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 폭탄 테러가 발생해 20층 건물이 통으로 내려앉은 곳에서도 살아남은 그였다. 조직에서 배당하는 임무는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했다. 그리고 그는 목숨값이 가장 높은 요원 중 하나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스쳐 지나가는 통증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제가 생각해도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아파.”
눈썹을 늘어트린 그의 말에 윤해서의 눈에 순식간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인다.
“어디 봐 봐. 얼마나 아파? 많이 아파? 우리 병원 가자. 응? 이거 그냥 두면 안 될 거 같아.”
“키스해 봐. 그럼 괜찮아질 것도 같은데”
두이는 상체를 기울여 윤해서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그녀의 동공이 떨린다. 해서는 이내 눈꺼풀을 내리뜨더니 씩씩하게 눈물을 훔치고는,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두이는 해서의 허리 뒤를 받쳐 맞닿은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피를 본 것도 아니었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림이 두드러기처럼 전신에 번진다.
도톰한 윗입술을 깨물어 당긴 그가 욕실 문 방향으로 그녀를 몰았다. 숨이 막혔는지, 고개를 젖힌 그녀가 달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욕실 문에 기대선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두이의 입매가 느른하게 휘어 오른다.
“하란다고 해?”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너 좋아하잖아.”
“다른 남자들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런 적 없거든?”
짓궂게 웃어 보인 그가 고개를 숙이자, 젖어 버린 까만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며 쏟아졌다. 다시 입술이 겹쳐지며 혀가 뒤섞였다. 부드럽게 파고든 혀끝이 단맛이 나는 어금니를 훑으며 농밀하게 움직인다.
“해서 씨, 아직 멀었어요?”
순간, 문밖에서 들려온 박인호의 음성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입맞춤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대담하게 이두이의 벨트를 풀어 버린 그녀가 드로어즈 안으로 손을 넣는다.
그러자 이미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가 손에 잡혔다. 여전히 맞닿은 입술은 서로의 타액을 핥고 삼키며 점점 흥분을 고조시켰다.
“하.”
그녀의 머리 위를 짚은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당겼다. 시선을 내려 작은 손에 잡힌 성기를 보며 실소한 그가 두 눈을 치켜뜬다. 해서는 그 흑암처럼 까만 눈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 미친 거 맞지?”
달뜬 숨을 몰아쉬며 까치발을 든 그녀가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당겼다. 그러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는 성기를 천천히 페팅했다. 탁한 신음을 흘린 그가 그녀의 뒷머릴 감싸 쥐더니, 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하듯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두이는 주먹을 쥐어 욕실 문을 강하게 때렸다. 그러자 쾅, 소리와 함께 놀란 박인호의 외침이 들려온다.
“해서 씨! 괜찮아요?”
두 눈을 크게 뜬 그녀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젓는다.
“부딪친 거뿐이에요. 스타킹 올이 나가서요. 먼저 돌아가세요.”
그러자 문 너머의 박인호가 도움이 필요하면 문을 열라는 헛소릴 지껄였다. 미친 거 아니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H라인 크림색 스커트를 허리까지 걷어 올린 그의 손이 스타킹 안으로 들어온다. 속옷을 들치고 음부까지 단번에 파고든 손이 미끄러운 틈새를 문질렀다.
“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두이의 짓궂은 속삭임에 입술을 축인 그녀가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흣, 너랑 같은 생각.”
지지 않고 받아친 해서의 손을 떼어 낸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스타킹을 이로 당기며 돌돌 말아 아래로 내리자, 하얀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투명해진 게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속옷을 젖히곤, 얼굴을 가져다 댔다. 탐스러운 틈새를 벌려 파고드는 혀의 물컹함에 그녀가 움찔하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비명을 내지를 뻔한 탓이었다.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애액이 그의 입술을 적신다. 그는 아예 속옷을 무릎까지 내려 양손으로 음순을 벌렸다.
“흐응, 하.”
아무리 힘을 써도 신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그녀가 경련했다. 틈새로 혀를 밀어 넣은 그가 엄지로 클리토리스를 둥글게 문지른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살점이 손끝에서 뭉개질 때마다, 그녀는 왈칵대며 애액을 흘렸다. 엉덩이를 뒤로 빼 보았지만,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할 뿐이었다. 날렵하게 솟은 콧날이 음부에 파묻힌 모습이 지독하게 야하다.
문밖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올 때마다 몰래 하는 나쁜 짓을 들킬까 겁이 났다. 해서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녀는 두이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두이야, 더…. 흣.”
애원하는 그녀의 음성에 부드러운 살점을 쯥, 하고 빨아들인 그가 입술을 떼더니 불쑥 몸을 일으켰다. 입 안이 사탕이라도 녹여 먹은 것처럼 달고 끈적였다. 미칠 듯이.
“원래 이렇게 달아?”
턱을 움켜쥐며 몸을 붙여 온 그의 질문에 울상이 된 해서가 대답했다.
“미쳤어, 너. 하아…. 이제 어쩔 거야? 나 못 멈출 거 같은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욕망에 취해 본 적 없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갈급하게 찾아본 적 또한 없었다. 게다가 사랑은 더더욱.
물론, 그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단어는 교활한 데다가 한없이 가벼운 말장난일 뿐이다. 지금 이 감정은 행위에 익숙해지면 휘발될 호기심을 기저로 한 충동이고, 욕구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해서가 미치도록 예뻐 보이는 건, 처음으로 제 마음을 뒤흔든 상대이기 때문이겠지.
“콘돔이 없어.”
“나한테…. 나 있어.”
바닥에 떨어트린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집어 든 그녀가 그 안에서 콘돔을 꺼내 그의 손에 다소곳이 놓아 주었다. 지난번에 쓴 것과는 색부터가 다른 콘돔을 내려다본 그가 삐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샀어?”
“응. 네가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인터넷으로. 제일 큰 사이즈래.”
진짜, 돌겠네.
그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윤해서의 뺨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말랑하고 따뜻한 살결이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그녀를 세면대에 엎은 채 축축한 속살에 자신을 파묻고 싶었지만, 이곳은 그의 구역이 아니었다. 불시에 방문한 탓에 CCTV를 통제하지 못했고, 박인호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곳에서 윤해서를 벗기고 싶지 않았다.
“핑계 댈 거 있어?”
“응? 핑계?”
“그래, 핑계. 난 너랑 아무 데서나 붙어먹을 생각 없거든.”
벨트를 채운 그는 발목 방향으로 떨어진 그녀의 속옷을 입혀 준 뒤, 어설픈 손길로 스타킹까지 올려 신겨 주었다. 그다음 흐트러진 블라우스를 정돈해 주고는 입가에 번진 립스틱을 문질러 닦았다. 립스틱이 모두 지워졌음에도 붉은 입술을 내려다보던 그는 잠시 고개를 내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염에 들떠 문란하고 난잡하게 뒤엉키던 기분에서 벗어났다. 마치,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해서가 먼저 팔을 뻗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역시, 난 네가 너무 좋아.”
벌써 세 번째 고백인가?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제가 좋다는 그 말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폭 안겨 온 그녀의 뒷머릴 감싼 그가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나가자.”
***
윤해서는 당당히 배탈이 났다는 핑계를 댔다. 스타킹의 올이 나갔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지금도 계속해 배가 아프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자 일행들 보기에 난처해진 정지숙이 차가운 타월로 눈가를 감싼 두이를 불렀다.
“이 팀장, 얼굴이 왜 그래요?”
“정원에서 뭔가에 쏘인 것 같습니다. 진정제 먹었으니 괜찮아질 겁니다.”
“어머나, 쏘인 것치고 심한데요? 그러지 말고 해서 데리고 병원 가는 김에 이 팀장도 치료받아요. 쟤는 하필, 이 타이밍에 배탈이 났다네?”
배탈이란 말에 고개를 주억인 그가 윤해서를 돌아보았다. 윤해서는 벌써 현관 앞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급히 배가 아픈 사람처럼 복부를 감싼 채 몸을 웅크린다.
연기력 하난 인정해 줘야 하나. 두이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지숙에게 인사한 뒤, 현관으로 걸어갔다.
“우리 엄마 눈치 빠른데. 아마 꾀병인 거 아실걸?”
“알면서도 속아 주시는 건가?”
“박인호랑 잘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지은 거겠지. 이 자리, 엄마가 만든 선 자리였거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는 태연히 신발에 발을 넣는 그녀를 부축했다.
“결혼, 생각 있어?”
사용인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선 그가 먼저 물었다. 그러자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녀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잘 모르겠어.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가 되긴 했는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아.”
“최우재와는 하려고 했잖아. 그래서 약혼한 거 아닌가?”
해서의 걸음이 느려진다. 오한을 느낀 건지,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꽂아 넣은 그녀의 입꼬리가 한쪽만 조금 올라갔다.
“맞아. 주위에선 결혼하기 좋은 나이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게다가 그 남자 잘생겼거든. 너도 얼굴 알지? 키도 크고, 돈도 많고, 목소리도 좋은 데다가 매너도 좋았어. 미안한데 내가 얼빠야.”
“말 안 해도 알아.”
그제야 가벼운 표정이 된 윤해서가 정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차분하고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결혼해도 나쁘지 않은 상대. 모든 조건이 적당한 데다가, 부모님도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 굳이 버틸 이유가 없었어. 내가 거래 물품처럼 여겨졌다고 해도, 나도 상대를 그렇게 생각했고. 원래 조건 따지는 결혼은 다 그런 거니까 뭐….”
“그런데 왜 파혼했어. 결혼할 마음이 있었으면, 그때 했어야지.”
“그 새끼가 사이코패스라는 걸 알아 버렸거든. 아니, 소시오패스던가?”
여전히 윤해서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이 떨리는 건 숨겨지지 않았다. 어깨가 경직되고 입꼬리에 경련이 인다. 그녀의 뺨으로 남자의 찍어 누르는 듯한 눈빛이 닿는다. 해서는 마치 오래된 일을 기억해 낸 사람처럼, 헛헛한 미소를 지었다.
“내 발에 상처 있는 거 알지. 아빠가 말했을 텐데.”
“봤어.”
“그거 내가 직접 낸 상처야.”
마른 풀이 버석대는 정원을 가로지르던 그는 처음으로 동요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의 걸음이 느려지는 걸 본 윤해서가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아당긴다.
“3년 전에 이정수라는 미친놈이 있었어. 아빠한테 원한을 가진 놈이었는데, 내가 복수의 대상이 된 거야. 이런 말은 좀 거창한데, 그때 살려 달라고 했어. 내가…. 내 발레 인생을 끊어 버리면, 죽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직접 끊겠다고. 그래야 놓아줄 것 같아서, 너무너무 무서워서 칼 받아서 내가 직접 찌른 거야. 그랬더니 정말로 보내 주더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의 결정이 잔열에 끓어오른다. 그가 느끼는 건 날 선 분노였다. 직접, 찌르게 했다고?
정면을 노려보며 자동으로 열린 대문을 나설 때였다. 두 사람의 뒤편으로 빠르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기척이 가까워졌다.
“해서 씨!”
따라 나온 사람은 박인호였다. 할 말이 남은 건지, 해서의 팔을 잡아채려던 남자의 손이 두이에게 붙들렸다. 골프를 했기에 팔과 허릿심은 누구에게도 져 본 적 없던 박인호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이봐요.”
“죄송합니다만, 클라이언트의 몸에 손대는 건 자중해 주십시오.”
“아, 미안합니다. 그래도 나 운동하는 사람인데 자존심 좀 상하네요? 경호원 씨, 힘 좀 씁니까?”
“하실 대화가 남으신 거라면, 약속을 따로 잡아 주십시오. 지금은 병원에 가야 해서.”
싱긋 미소 지은 그가 박인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아릿한 손목을 좌우로 꺾은 박인호의 얼굴에 희미한 열패감이 드리운다.
“많이 아프세요?”
박인호는 두이를 무시하고 해서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인상을 쓰며 배를 움켜쥔 그녀가 두이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이 팀장님, 나 부축 좀….”
정말로 윤해서는 연기자가 되었어야 했다. 미간을 구긴 두이는 보란 듯 해서의 허리춤을 감싸 품으로 당겼다. 그러곤 박인호에게 까딱 눈인사한 뒤, 저택의 경계석을 넘었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안긴 윤해서를 차량 뒷좌석에 태운 그는 얄밉게 웃는 그녀의 콧날을 잘근 깨물었다.
아직은 서 단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믿고 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의지하던 누군가가 실은 자신을 이용 도구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심정은 그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다.
“집으로 가, 내 방. 나 급해, 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