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04

“요즘, 해서 주위에 이상한 놈들이 붙지는 않나?”

윤홍주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물었다. 이두이가 윤해서의 경호를 시작하고 일주일 만의 독대였다. 윤홍주의 대각선에 선 그가 평범한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며 대답했다.

“아직은 눈에 띄는 접근이 없었습니다. 단, 최우재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놈이 어쩔 것 같나?”

“예측은 힘듭니다.”

두이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생각에 잠긴 윤홍주를 내려다보았다. 윤홍주는 외부인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일반 업무 자료는 관청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는 모두 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집 안의 CCTV는 얼핏 보이는 것만도 자그마치 13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부부 침실과 욕실, 윤해서의 침실 정도였고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었다. 겁이 많거나, 두려운 것이 있거나.

“오늘 저녁 6시 30분, 한남동 H 호텔 근처에서 공연 뒤풀이가 있습니다. 윤해서 씨도 참석하실 예정인 것 같습니다.”

“공연 뒤풀이? 하, 이 시국에?”

윤홍주는 불안한 표정으로 찻잔 표면을 문질렀다.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윤홍주가 보이는 건 꾸며 낸 감정이 아닌 진심이었다. 낯선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숨을 내쉰 윤 장관이 고개를 들며 머쓱하게 웃는다.

“이 팀장, 자네는 부모님이 이렇게 유난스럽지 않으시지?”

“두 분 다 계시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담백한 대답에 되레 난처한 표정을 지은 건 윤홍주였다.

“미안하네. 그럼 형제는?”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이란성이면 여동생인가?”

“제가 동생입니다.”

“이 팀장과 닮았으면 아주 미인이겠어.”

윤홍주는 고개를 주억이며 책상 위에 놓인 윤해서의 대학 졸업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이는 그 눈빛에서 짙은 애정과 염려를 읽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겪어 왔다.

자식을 소유물 취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해물 취급하는 이도 있고 하물며 성적 대상으로 보는 쓰레기도 있었다. 그럼, 탯줄도 마르지 않은 핏덩이를 낳자마자 여관 침대에 버리고 간 자신의 모친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모친에 대해 알아보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떠한 연유로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것인지 캐내지 않았다. 그의 생물학적 모친은 만삭인 채로 여관을 찾아와 아이를 낳은 뒤 도망쳤다고 했다. 그것도 두 아이의 입에 들러붙은 핏덩이조차 떼 주지 않은 채.

여관의 주인 할머니가 남매를 보육원에 맡긴 날, 둘은 원장의 성을 따 이두이, 이하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버려진 아이들 사이에서, 혹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두 사람은 부모의 부재를 느낄 새 없이, 하루하루 살아 내기 위해 발악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 여자도 누군가를 사랑했겠지.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끝은 찬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에너지를 쏟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너도 해문 다녔어? 그랬구나…. 몰랐어.”

그런데 고등학교 3년 내내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여자애를 대학에서 다시 만났다.

“어? 나도 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탔는데. 왜 못 봤지?”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도 뻔뻔하게 모른 척하며 생글생글 웃을 때, 처음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다. 뻔뻔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윤해서라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제가 가장 허무하다고 느꼈던 감정의 단면을 엿보았다.

“난 오늘 경남에 내려가 봐야 하니까, 자네만 믿네. 우리 해서, 속을 알 수 없어서 더 신경 쓰이는 애야. 사내놈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이틀 뒤에 집사람이랑 외출할 테니까, 그때도 잘 좀 부탁해.”

“예.”

주의를 환기하는 듯한 윤홍주의 말에 두이는 짧게 대답하곤 서재를 나섰다. 그러자 얼음이 잔뜩 든 커피를 가져온 아주머니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이거 가져가서 드셔요. 해서 씨가 팀장님은 꼭 얼음 든 거만 드신다고 해서 일부러 만들었어요. 어휴, 이 시릴 텐데.”

“감사합니다.”

윤해서는 별거 아닌 자신의 식성 같은 걸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그는 아주머니가 내민 커피를 들고 윤 장관의 집을 나섰다. 일회용 컵 표면으로 하얀 냉기가 맺힌다. 얼음 가득한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삼키자, 머릿속까지 쨍한 통증이 번졌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상념이 순식간에 밀려나 사라지는 것만 같다.

두이는 마당을 가로지르며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 잡히는지 확인하십시오.”

- 이미 확인했습니다. 신호 빵빵하고요, 위치 안정적입니다.

“혹시 모르니 3일 안에 회수합니다. 이후, 위치 이동해서 재설치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 역시, 우리 팀장님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팀장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저는 남자 안 좋아합니다.”

세현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그가 대문을 열자,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인지 봉지를 든 윤해서가 움찔하며 멈추었다. 두이는 대외용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해서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몸에 딱 붙는 레깅스에 커다란 셔츠, 두툼한 점퍼를 걸친 그녀가 귀 끝을 붉히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뭐야. 밖에서 누굴 만나기라도 한 건가?

두이는 도망치듯 뛰어가는 윤해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분한 표정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오늘, 약속 장소 보내 드릴 테니 작업해 놓으세요.”

***

“그러니까…. 이두이가 왜 여기 있어?”

윤희의 목소리에 힘이 풀렸다. 이럴 줄 알았지. 해서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재킷을 고쳐 입으며 입가에 묻은 와인을 닦았다.

“왜, 있으면 안 돼?”

한남동 H 호텔 근처, 제너럴 발레단 뒤풀이가 열리는 이곳은 간판조차 없는 스패니시 파인 다이닝이었다. 고급 주택을 개조해 만든 야외 테라스와 빈티지풍으로 꾸며진 실내엔 제너럴 발레단 외에도 제법 많은 손님이 좌석을 채웠다. 다들 자유롭게 좌석을 옮겨 다니며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에서 해서는 구석진 자리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야, 그게 아니지. 너희 대학 다닐 때 헤어진 거 아니었어?”

헤어져? 누가 헤어져? 손에 힘이 풀려 떨어트린 포크가 요란한 소릴 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서버가 새 포크를 내려놓곤 돌아간다. 해서는 유난을 떠는 윤희를 흘끔 보며 고개를 저었다. 윤희는 대학 동기로 학창 시절의 이두이를 저 못지않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귄 적이 있어야 헤어지지. 나 이두이랑 사귄 적 없어.”

“진짜? 애들 다 너희 둘 사귄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딜 봐서?”

“맨날 붙어 다녔잖아. 완전 소울메이트. 둘이 해외여행도 다녀왔다고 들었거든?”

헛웃음을 흘린 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헛소문이 돌았는데, 나는 왜 몰랐지?”

“아니야?”

“아니야. 최악의 남사친이었지, 애인인 적 없어. 결국 그것도 별로 안 좋게 끝났지만.”

“최악의 남사친? 그건 또 뭐야. 그럼 왜 같이 왔는데?”

“경호원. 내 경호원이야, 이두이가.”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윤희는 넋 나간 표정으로 헛웃음만 지었다. 실소가 나오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도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차라리 사귀다가 헤어진 거라면, 나았게?

그와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관계였다.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키스할 수는 있지만, 연인은 될 수 없었던. 그래서 멀어졌다. 가망 없는 상대에게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데….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다시 만나다니. 이 정도면, 정말이지 최악의 재회나 다름없지 않나.

해서는 이두이가 있는 2층 난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2층에는 제너럴 발레단이 아닌, 다른 단체의 모임이 한창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고? 기둥 옆에 선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1층 어딘가를 응시한다.

이두이는 옅게 쌍꺼풀진 긴 눈매 때문에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게다가 색이 짙은 슈트에 푸른빛이 도는 넥타이에 오늘따라 재킷과 같은 색의 베스트까지 받쳐 입어서인지 경호원이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의 느낌마저 짙게 풍겼다.

‘저렇게 눈에 띄니 꿈에 나오지.’

며칠 전, 이두이와 관련된 꿈을 꾼 이후로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꿈속에서 그와 별다른 대화를 나누었다거나, 낯부끄러운 야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이 많이 내렸고, 함께 길을 걷다가 넘어질 뻔한 제 손을 잡아 준 것이 다였다.

하지만 꿈이라는 무의식의 힘은 대단했다. 마치 저 혼자만 병에 걸린 사람처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도 누가 스토킹해서 이두이가 경호해 줬으면 좋겠다.”

윤희가 유리 머들러로 칵테일을 저을 때마다 예뻤던 색이 흐려진다. 해서는 기분을 환기하며 피식 웃었다.

“친구야, 그런 말은 속으로 해야지.”

“그럼 스토커 핑계 대고 쟤한테 막 안겨 보고 그럴 텐데.”

“그거 성추행이야.”

“상상만 할 거야, 상상만. 부러워서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두이잖아!”

“그래, 하필이면 이두이지.”

두 여자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자, 이번엔 이두이와 눈이 마주쳤다. 윤희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지 한쪽 눈가를 찡그린 그의 뒤로, 40대의 남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다. 정중하게 인사까지 하며 이두이에게 귓속말하는 남자를 해서는 유심히 눈에 담았다. 남자가 가리킨 곳을 가볍게 돌아본 그가 다시 해서와 눈을 맞추더니 입술을 움직인다.

가만… 있어?

왜? 그녀의 미간이 움찔하며 굳었다.

“윤해서, 너 여기서 뭐 해.”

그때, 누군가 불쑥 나타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해서는 파트너 댄서인 재겸의 품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반대편 자리로 갔다.

“사람 구경해요. 선배는 며칠 사이에 살이 좀 빠졌네요?”

그녀가 자릴 옮긴 게 기분 상했는지, 잠시 표정이 굳은 재겸이 앞에 놓인 얼음물을 삼키며 말도 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갑자기 파트너 바뀌었는데, 너 같으면 멀쩡하겠냐? 다시 맞추느라 진짜 돌아 버릴 뻔. 나 허리 나간 거 같다.”

“미안해요. 뭐, 죄인은 입 다물고 석고대죄하겠습니다.”

“퍽이나. 아무 일 없다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스토커는 어떻게 됐냐?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네, 뭐….”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윤희뿐이었다. 그래서 해서는 경호원이 있다는 유난스러운 설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윤해서 경호원 있어요, 경호원. 완전 연예인이라니까요?”

하지만 대뜸 윤희가 나서서 대답을 해 버렸다. 당황한 해서의 눈빛이 윤희에게 닿았다.

“진짜?”

“네. 아버지가 걱정이 좀 많은 편이세요.”

“그럼 경호원을 쓸 게 아니라, 경찰이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계속 남한테 피해 주면서 살 거야?”

재겸은 불쾌한 티를 내며 주머니에서 은색 틴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옆으로 밀자, 껌 한 알이 톡 튀어나온다. 재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 안으로 털어 넣곤 천천히 씹었다.

“당연히 경찰에 신고도 했어요. 다음 공연엔 문제 일으키지 않을게요.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까놓고 말해서 스토커가 문제지. 안 그래?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재겸의 비아냥조에 해서는 담담한 시선으로 일관했다. 모두가 제게 화를 내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도.

“저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재킷을 어깨에 걸친 해서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윤희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재겸은 눈도 맞추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단원들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 적나라한 경계의 눈빛에 속이 울렁거린다. 괜히 참석했다는 후회도 밀려들었다. 해서는 단장과 공연팀장이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채 밖으로 나 있는 문을 열었다. 겨울도 가을도 아닌 계절. 낮에는 점퍼가 필요 없을 날씨지만, 해가 저문 뒤로는 살갗이 아릴 만큼 추웠다.

가까이 보이는 호텔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었다. 오늘 굳이 거절해도 되는 행사에 참석한 이유는, 떳떳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스토커 같은 거엔 휘둘리지 않는 건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정신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괜히 왔어, 괜히.”

한숨 쉰 그녀는 타워형 난로가 설치된 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또 보네요, 이두이 씨.”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스카치 잔을 내려놓은 최우재가 싱긋 웃는다. 2층은 1층과 다르게 프라이빗한 분위기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와인보다는 위스키, 스탠딩 테이블이 아닌 부피감이 큰 가죽 소파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이두이를 이곳으로 안내한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한 뒤, 물러난다.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니, 제법 노력하셨네요, 최 이사님.”

두이는 채워져 있던 재킷 단추를 풀며 최우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빈 잔을 그 앞에 놓아 준 최우재가 스카치를 반쯤 따른다.

“한잔해요. 좋은 술입니다.”

“임무 중엔 술 안 합니다.”

“경호가 임무입니까? 듣자 하니, 윤해서의 경호원이라고 하시던데요.”

최우재의 섬세한 눈매가 부드럽게 휜다. 등받이에 몸을 묻은 두이는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며 턱을 괴었다. 최우재가 제 이름을 알아낸 이상, 직업과 나이, 소속까지 밝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해 이중 삼중으로 커버한 정보였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뢰인에게 집중해야 할 저를 굳이 불러 앉히신 이유나 들어 봅시다, 최우재 씨.”

“실은, 이두이 씨가 총질할 수 없는 상황이 필요했습니다. 워낙 무서웠거든요.”

“죽진 않았을 텐데요.”

“물론, 아주 깔끔한 솜씨였습니다. 죽지 않고 치료 가능한 부분만 골라 쏘셨더라고요. 반대로 말하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 이건가요? 일개 경호원이라고 하기엔 좀….”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최우재는 주위 사람들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상류층에 소속된 사업가들의 사교 모임. 그들의 이미지가 대체로 그러하듯, 화려한 슈트에 고급 시계. 테이블엔 지갑과 차 키를 올려 두어 재력을 내비쳤다.

그리고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최우재였다. 그러니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로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본론으로.”

경고 조의 말에 부드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최우재가 스카치 잔을 기울이며 두 눈을 치켜뜬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 윤해서와 저, 3년 전 약혼했습니다.”

두이는 윤해서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최우재의 눈동자에 드러나는 짙은 소유욕을 읽었다.

“그래서.”

“그런데 3년 전, 해서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최우재가 상체를 숙이더니 자신의 발뒤꿈치를 느릿하게 두드리며 말을 잇는다.

“여길 꿰뚫렸어요. 발레리나인데 다리를 다쳤으니,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윤해서는 재활에 성공했더군요.”

지난번 상처를 닦아 주며 확인했던 상흔이다. 폭이 좁고 긴 칼날이 꿰뚫고 지나간 흔적.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주억이는 이두이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잔뜩 들러붙었다.

“본론은 멀었습니까?”

짜증 섞인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던 최우재가 나직하게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그래요, 이두이 씨는 대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3년 전, 윤홍주와 내가 한 거래 때문에 윤해서가 위험해진 겁니다. 그 거래가 놈을 곤란하게 했거든요. 약점인 해서를 건드려서 나와 윤 장관을 치려는 계획이었겠죠.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가 그놈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윤해서 근처에서 그만 퇴장해 줬으면 합니다. 그게 내 본론이에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이었다. 3년 전, 배신당한 최우재와 기회를 틈타 꼬리를 잘라 버린 윤홍주. 하지만 가설을 완성하기에 하나의 걸림돌이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구구절절한 거 아닙니까?”

이두이의 입매가 느른하게 올라가고, 새카만 눈동자에는 옅게나마 흥미가 일렁였다.

“구구절절할 수밖에요. 내 여자를 되찾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윤해서가 누구 여자인지는 관심 없고, 최 이사님이 말한 그놈이 누군지 궁금하다면.”

“미안하지만 내게도 제법 써먹기 좋은 카드라 알려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윤 장관과 한 거래가 뭔지는 알려 줄 수 있는데…. 이래도 나랑 거래 안 합니까?”

최우재의 미소는 습관처럼 만들어진 가짜다. 놈은 자연스럽게 가면을 쓰고 벗을 줄 아는 부류였고, 제 앞에서 보이는 얼굴은 모두 가짜였다. 최우재를 응시하며 관자놀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던 두이는 불현듯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윤해서에게서 시선을 뗐다. 예리하게 1층을 훑은 그가 어디에도 없는 윤해서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개장수 주제에 개 주인인 척하는 쓰레기를 좀 압니다. 그 개장수가 3년 전에 값을 올리려던 개한테 도리어 물렸죠. 이정 건설 대표, 이정수.”

일어난 그를 따라 미소를 지워 버린 최우재의 고개가 들린다. 잔을 단번에 비운 그는 세 번째 술을 따랐다.

“하지만 놈은 지금 구속 수감 중이니, 누군가 개장수의 일을 대신하는 중이겠네요. 어쨌든 좋은 정보 잘 받아 갑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던 정보는 그게 아니라서, 이번에도 거래 제안은 거절하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서에게는 안부 전할 테니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최 이사님.”

산뜻한 표정으로 돌아선 두이의 앞을 최우재의 부하 다섯이 막아섰다. 두이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놈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물러선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뒤로 최우재의 실소가 얼핏 들렸다.

1층으로 향한 두이는 조금 전 해서가 있던 자리로 갔다. 하지만 그곳엔 윤해서 대신, 만취해 버린 남자 한 명과 여자 몇 명이 끈적한 포즈로 엉켜 낄낄대는 게 보였다.

“어어?”

두이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여자를 지나치며 기이하게 헐떡이는 남자를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증상이다. 그저 그런 술주정이라기엔, 날 선 촉이 그를 건드렸다. 두이는 해서를 찾아 밖으로 걸어 나가며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팀장님.

“껌 씹는 놈 발견한 것 같은데, 확인이 필요합니다.”

- 정말입니까? 아, 일단 P5를 보내서 확인하겠습니다. 만약 껌이면 전 형사님께 알릴까요?

“아뇨, 확인만 부탁합니다.”

-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찬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쓸어 넘겼다. 제법 추워진 날씨, 추위에 약한 윤해서가 이 야외에서 향할 만한 데는 타워형 난로가 설치된 곳밖에 없다. 하지만 불안한 예감도 함께 들었다. 이곳에 최우재가 있다는 건, 놈에게도 윤해서의 위치 정보가 넘어갔다는 뜻.

지난번 연탄갈비 집에서 같이 식사한 이후 윤해서가 자신을 피하기 시작한 이유는, 어쩌면 최우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떤 이유에서건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으니까. 감정의 찌꺼기가 남을 수밖에 없다.

타워형 난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빨리할 때였다. 소매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돌아본 두이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는 해서를 발견했다.

‘쉿.’

어깨엔 크림색 퍼 재킷을 걸치고, 일자로 떨어진 슬랙스와 가죽 플랫 슈즈, 우아한 진주 단추가 달린 골지 니트를 입은 그녀는 오늘도 역시나 눈에 띄게 예뻤다. 그런 얼굴에 이해 못 할 곤란함이 가득하다.

“내 말이. 윤해서는 염치도 없나? 미쳤다고 여길 나타나?”

바로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온 화제의 중심은 윤해서였다.

“눈치가 없는 건지, 뻔뻔한 건지. 원래 저렇잖아.”

“근데, 대체 누구 백이야? 이상하지 않아?”

“정 선배 말 들어 보면 재벌인가, 준재벌인가. 어쨌든 그런 쪽이래.”

“그래도 재수 없어, 남한테 피해 주는 거 당연하게 여기는 스타일. 아무리 실력이 좋으면 뭐 해? 인성이 쓰레긴데.”

대화의 수위는 점점 올라가는데 윤해서는 그저 귀만 쫑긋 세웠을 뿐, 딱히 그들을 원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대체 저 대화를 끝까지 들어서 뭘 하자는 건지. 인상을 쓴 그는 엿듣기에 열중인 해서를 내려다보며 차가워진 뺨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벽 너머를 투시하듯 주시하던 눈동자가 그에게로 비스듬히 움직인다.

차갑다. 추위도 잘 타는 주제에, 윤해서는 몸이 얼음장이 되도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 좀 숨겨 줘.’

시선이 마주치자 곧장 피해 버린 그녀가 입술만 간신히 움직였다.

두이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꽂아 넣은 채 그녀를 코너 방향으로 몰았다. 순순히 뒷걸음질 친 윤해서가 장난스럽게 픽 웃는다. 저들의 태도를 기분 나빠 한다든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윤해서는 예전부터 이런 성격이었다. 늘 의도적으로 꾸며 낸 표정을 지으면서, 타인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조심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입술이 윤해서의 가면인가? 그는 붉은 입술을 내려다보며 문질러 닦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해서의 인성이나 평소 행실 따위를 신랄하게 씹어 대던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제야 긴장한 것인지 윤해서의 다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게 한숨 쉰 그녀가 차가워진 손으로 그의 재킷을 움켜쥐곤, 품에 안기려는 사람처럼 가까이 붙어 선다.

“생각해 보면, 그 스토커도 뻥 아니야? 윤해서 관종이잖아.”

“야, 그건 아니겠지. 뭐,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건 불쌍하긴 해. 이쪽에서 아예 손절 할 각이더라. 나 같아도 트러블 메이커는 안 쓸 거 같아. 그렇다고 이슈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귀신같이 기사는 내려가서, 공연 홍보도 안 된다며?”

“그래, 그것 봐. 뒤에 진짜 누가 있는 거라니까? 프리마 발레리나도 그런 식으로 된 거 아니야?”

야야, 설마 그렇게까지 쓰레기겠어? 그럴 수도 있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 탓에 목소린 점점 멀어졌지만, 윤해서는 여전히 그의 재킷을 움켜쥔 채였다. 동그란 이마가 가슴에 닿을 듯 가까워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두이는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 윤해서의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다행히 ‘응?’ 하고 대답한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잠에서 깬 듯 평범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턱을 든 그의 손목을 지그시 움켜쥔 게 다였다.

“울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내가 왜?”

두이는 대답 대신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아아’라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저런 거 일일이 신경 쓰고 살다가는 제명에 못 죽어. 그리고 자격지심이잖아.”

“그래서 감수한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나라는 사람 때문에 쟤들은 피해를 보았어. 화풀이 대상 정도는 해 줄 수 있겠다, 싶은 것뿐이야.”

한심하다는 듯 일그러지는 이두이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던 그녀가 손목을 놓은 뒤,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제법 담담한 척하지만, 터부를 들켰다는 창피함이 고운 얼굴에 묻어났다.

그는 말없이 벽에 기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끌어안는다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윤해서는 가늘었다.

서로를 탐색하듯 파고드는 시선에 미동이 없다. 이제는 험담하는 이들도 없고, 숨어야 할 이유도 없었건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비켜. 쟤네 갔어.”

먼저 시선을 피한 해서가 새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슬그머니 몸을 틀었다. 그러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그가 그녀를 막아선다.

“왜, 할 말 있어?”

두이는 그녀와 마주 서서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와 몸이 닿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뭐가.”

그는 깃에 꽂아 두었던 소형 마이크의 전원을 끄며 비스듬히 웃었다.

“말해 봐. 내가 뭘 어쨌는지.”

고작 마이크 하나를 껐을 뿐이건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해서는 내몰리는 기분에 당황해 입술을 깨물었다.

“장난치지 마, 이두이.”

아래로 향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커다란 손에 잡혀 위로 들렸다. 해서는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쥔 채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담담했던 남자의 눈동자에 짙은 감정이 배어났다. 그것은 성가시다며 자신을 밀어낼 때와도 비슷한 형태였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가만히 응시하는 새카만 눈동자에 홀리는 기분이다. 짓누르듯 파고드는 시선과 드문드문 흘리는 단어들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몰아갔다.

“왜 안 변했을까, 너는.”

10도 이하로 떨어진 날씨인데도 옷에 감긴 피부에서 진땀이 흐른다.

말끝을 흐린 그가 입술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해서는 그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도 하나도 안 변했어.”

애써 웃는 입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 이두이가 태연자약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내 식성까지 기억하고 있어?”

“그거야….”

“말해 봐.”

막을 새도 없이 그가 엄지에 묻은 붉은 립스틱을 본인의 입술에 문질렀다. 남자의 입술에 번진 립스틱은 왜 더 야하고 선정적인 느낌이 드는 걸까. 자세히 봐야지만 티가 나는 정도였지만, 그녀는 충분히 동요했다.

“나는 널 좋아했으니까. 네가 좋아했던 음식, 영화, 향기… 그런 거 다 기억하고 있어.”

담담했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해서는 동요하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 좀 그만 흔들어. 미치겠으니까.”

***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온 해서는 조금 전 이두이가 본인의 입술에 립스틱을 문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두이는 경호원이 아니라 배우를 해야 했다. 그저 문을 열고 제 뒤에 섰을 뿐이건만, 실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살짝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지나 무심하게 다가서는 이두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술에 번진 저 립스틱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여자가 남긴 거였다. 해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신랄하게 물어뜯던 이들의 얼굴에 번진 당혹감을 발견했다. 고작 이런 거로 기분이 나아진다니.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저질이 된 기분이었다. 우월감은 지극히 이기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제 아래 깔아 보는 것. 혹은, 짓밟고 올라섰을 때의 쾌감이라니. 이두이는 우월감을 이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먼저 돌아가기 위해 핸드백을 챙긴 해서는 눈이 풀린 재겸과 술에 취한 윤희를 발견했다. 대체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둘은 구석진 자리에서 서로 밀착해 은근하게 몸을 더듬는 중이었다. 제법 수위가 높다. 공공장소나 다름없는 곳에서 이럴 윤희가 아닌데 이상했다.

“두 사람 취했어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의식한 해서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 때였다. 두이가 그녀의 팔을 잡아채곤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 테이블엔 가까이 가지 마.”

“아니, 그래도 좀 말려야 할 거 같은데….”

“네가 할 수 있는 거 없어.”

두이는 윤해서의 손에 깍지 껴 고쳐 잡았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는 윤해서를 이끌었다. 그러자 입구의 문이 열리고 점퍼에 청바지 차림의 P5가 심드렁한 얼굴로 걸어 들어온다. 두이와 눈을 맞춘 P5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 재겸에게 가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이고, 선생님. 대리 부르셨죠? 아주, 꽐라가 되셨네. 자, 자, 정신 좀 차려 보시고. 차 키가….”

그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재겸의 몸수색을 시작했다. 대리 기사의 등장에 그제야 다들 안도한 얼굴로 관심을 접었다. P5는 재겸의 주머니 안에 든 틴 케이스를 회수한 뒤, 보이지 않게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약 기운을 떨어트리는 약물을 주입했으니, 강재겸은 곧 정신을 차릴 것이다.

P5는 눈이 뒤집힌 강재겸을 부축해 건물을 나갔다. 강재겸은 이대로 본인의 차에 감금을 당할 것이며, 취조는 정신을 차린 뒤 P5가 직접 할 것이었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 해서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던 그는 맞잡고 있던 손이 풀리는 걸 느끼며 멈춰 섰다.

보석처럼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윤해서는 어느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색소 옅은 눈동자를 가득 채운 상대는 최우재. 사람들을 이끌고 2층에서 내려온 최우재도 윤해서를 응시하며 나른하게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거나, 알은체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할 뿐.

일행들과 함께 먼저 건물을 나선 최우재를 응시하는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한이 든 사람처럼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고 입술을 깨무는 윤해서의 낯빛이 창백했다.

“윤해서.”

두이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느다란 목, 우아한 쇄골을 따라 일직선으로 반듯한 어깨가 그의 방향으로 비틀렸다. 윤해서의 눈동자에 담긴 극도의 공포를 마주한 순간, 발밑 어딘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든다.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그녀에게 기대려는 사람처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상체를 숙여 뺨 어딘가에 입술을 묻었다.

“갈까.”

***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팝송이 흘러나오는 외부 스피커 앞,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들이 들러붙어 있다. 아직도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떠다니는 것만 같다. 마치, 야유하듯 쏟아 낸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핸드백을 손에 든 해서는 빠른 걸음으로 야외 테라스를 가로질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건조한 뺨을 날카롭게 할퀸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녀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하, 생각할수록 열받아.”

소리 내 말하고 싶지 않았건만, 결국 터트려 버렸다. 여전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뜨거운 뺨. 생각하면 할수록 몸 안 어딘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대체 뭐가.”

약 오를 만큼 태연한 목소리가 그녀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해서는 불법 주차된 차들로 빼곡한 주위를 빠르게 살핀 뒤, 제 곁에 선 두이에게 따지듯 물었다.

“뭐냐니. 네가 할 말이야? 거기서 왜 나한테, 내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 왜 끌어안았어? 사람들이 한둘이야? 아니지, 그건 문제도 아니야. 내가 분명, 나 흔들지 말랬지!”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낸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해서는 손부채질을 하며 다시 성큼성큼 걸었다.

이건 당혹감이다. 입술이 닿는 순간, 스무 살 풋내 나는 그날로 돌아간 듯 가슴이 뛰어 대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른은 스물과 다르다며 입버릇처럼 대뇌였건만, 결국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면한 것 같아서 창피했다.

“그래서 흔들렸어?”

열심히 걸어도 결국 그와의 간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되레 가까이 따라붙은 그가, 그녀의 손에서 흔들리는 핸드백을 가볍게 낚아챘다. 발끈한 해서는 빼앗긴 핸드백을 빼앗으려 손을 뻗어 보았지만, 키 차이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내놔! 너 같으면 안 흔들릴 거 같아? 아직도 내가 스무 살로 보여?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지 마! 관심도 없는 주제에.”

까치발을 든 그녀가 기어이 핸드백 끄트머릴 잡아채 확 당기자, 가죽 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누가 그래.”

“뭐?”

“누가 그러냐고.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자꾸 옛날 얘기해서 미안한데, 나는 너한테 성가신 여자애였어. 네 입으로 말한 거고.”

두이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무 과민 반응한 걸까? 혹시 나 혼자만 기억하는 거 아닐까? 해서는 뒤늦게 뒷덜미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힘주어 핸드백을 빼앗았다. 그러자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뇌까리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기억력 좋네.”

씩씩대며 흘러내린 재킷을 끌어 올리던 그녀의 손이 멈춘다.

“그런 걸 다 기억하고.”

해서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 그를 돌아보았다. 즐겁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얽히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의 입가로 여유 섞인 즐거움이 번진다. 해서는 한 걸음 다가오는 그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맹견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저었다.

“기억하는 게 아니라, 떠오른 거야.”

“그게 그거지.”

“너 생각보다 성격이 별로인 거 같아.”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나 놀리면 재밌어?”

“놀리는 거 아닌데.”

“그럼?”

“변한 거 같아서. 내가.”

발끈해 퍼부으려던 해서는 가까운 세단 앞에 기대서 있는 최우재를 발견했다. 최우재는 혼자였다. 왕처럼 떠받들어 주던 사람들은 어디로 보낸 것인지, 이두이와 자신을 차례로 훑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둠 속에 몸의 반 정도를 묻은 채 두 사람을 응시하며 연기를 내뱉는 최우재의 눈빛이 거슬렸다. 해서는 그의 발밑에 쌓인 꽁초 몇 개를 훑다가 다가선 이두이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너,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에 입이 얼어 버린 것처럼 자꾸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말해 봐. 너,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이두이의 입가에 조소 비슷한 것이 스친다.

“어디까지 해 줄까. 뭐든 가능할 것 같은데.”

“너 후회할지도 몰라. 나 생각보다 뻔뻔한 데다가 기회라고 생각되면 놓치지 않거든. 네 말대로 나 변했어. 스무 살 윤해서 아니야.”

“잡아먹을 거란 소리로 들리는데.”

“안 돼?”

미쳤다는 경고가 머릿속에서 계속해 울린다. 더 나아가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해서는 재킷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지 못했다.

“궁금하네. 내가 네게 어떤 기회인지.”

저거 때문이었나?

두이의 시선이 향한 곳엔 최우재가 있었다. 짧아진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툭 떨어트린 남자가 구둣발로 그것을 짓이긴다. 윤해서가 의식하는 남자. 둘 사이에 어떤 서사가 존재하는지 몰라도, 윤해서의 행동은 최우재에게 보여 주기 위한 오기나 다름없었다.

이용해 먹겠다?

싸늘하게 실소한 두이는 보도블록 위에 으스러지는 불티를 보며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양손을 빼냈다.

“편의점 들러도 되지?”

***

등 뒤에서 승강기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각 층에 1개뿐인 스위트룸은 하필 건물 복도 끝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앞서가는 이두이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차는 정말 그냥 두고 와도 돼?”

“알아서 할 거야.”

“누가?”

“몰라도 돼.”

근처 편의점에 들른 그는 보란 듯 콘돔 하나와 담배를 계산했다. 그러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이었다. 신기하면서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두이를 유난히 깍듯하게 맞이하는 직원들도, 기다렸다는 듯 키를 내밀던 모습도.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 이두이라는 남자가 누구인지, 제가 아는 그가 맞는지.

“안 들어가?”

어느새 이두이는 봉인지가 뜯겨 나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에스코트하듯 열어 준 방문 너머, 창문으로 들이친 서울의 밤빛이 쏟아지듯 넘실댄다. 중후한 오크톤 가구로 채워진 실내에 들어서자, 등 뒤로 방문이 닫히고 철컥하며 잠겼다. 해서는 담담해 보이려 노력하며 워킹 클로짓(walk-in closet)에 재킷을 벗어 건 뒤, 슬리퍼를 갈아 신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여기 비싼 방인데….”

“내 월급 걱정해?”

“그럼 걱정 안 해?”

“걱정 안 해도 될 만큼은 벌어.”

해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 앞에 선 그를 보았다. 재킷을 벗어 대충 의자에 건 그가 쇼케이스를 열더니 진열된 위스키 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연다. 그 독한 술을 온더록스 가득 따라 차분하게 들이켜는 모습이 낯설다. 불현듯 계속해 자신이 이두이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변한 만큼, 이두이도 변했는데.

소파 끄트머리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서는 불쑥 다가가 빈 잔을 내밀었다.

“나도 줘.”

돌아보는 그에게서 알싸한 위스키 향이 난다. 피식 웃은 그가 해서의 잔을 3분의 1 정도 채워 준 뒤, 술병을 내려놓았다. 얼음도 없이 양주를 마셔 보는 건 처음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독한 술을 꿀꺽 삼킨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지독한 걸, 물처럼 마신다고? 해서는 시원하게 웃는 그 모습에 바짝 약이 올랐다.

“왜 웃어? 웃겨?”

“귀여워서.”

“뭐?”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그가 주머니에 든 휴대 전화와 담배, 콘돔 같은 걸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 후 다시 술잔을 채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해서는 그가 내려놓은 소지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조금 전 마신 술이 역류하는 걸 느꼈다.

콘돔과 담배라니.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남자의 이면을 들여다본 기분이랄까. 반대로, 제 이면을 들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윤해서.”

소파에 앉은 그가 고개를 틀어 까딱인다. 옆으로 와 앉으라는 뜻이었다.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해서는 고개를 젖힌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해서는 기회 운운하며 뻔뻔하게 굴던 때를 떠올리며 그의 앞에 섰다.

그러자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치켜든 그가 옆자리를 재차 가리켰다. 하지만 해서가 선택한 건 그의 무릎이었다.

“내려가.”

“싫어.”

그녀는 두이의 다리 위에 앉아 손에 든 술잔을 빼앗아 한 모금 삼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쓴맛에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게 왜 바보 같은 짓을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애가 타 미칠 것만 같았다.

꿈 때문이다. 평소 아무 관심 없던 사람도 꿈에 나오면 신경이 쓰일 텐데 하물며 그 대상이 이두이라면. 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오늘은 뭐든 다 해 준다며.”

“그래서 원하는 게 이거야?”

“아니. 다른 거.”

“꼭 눈빛이…. 날 씹어 먹으려는 사람 같네.”

그렇게 말한 그가 그녀의 미간을 꾹 누르며 상체를 세우려 했다. 해서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두이.”

“응.”

분명, ‘응’이라고 했다. 그 담백한 투에 심장이 농구공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튕겨 오른다. 이두이는 남녀 관계에 도가 튼 선수가 됐거나, 본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여전히 모르는 거다. 해서는 널찍하게 벌어진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향하는 순간, 충동처럼 그에게 입 맞췄다.

혹시,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에게도 이런 충동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차가운 입술이 부드럽게 눌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드러났다. 키스는 아니었다. 상대의 마음을 가늠해 보려는 듯 가벼운 입맞춤일 뿐.

그녀의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실수를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미안, 싫었어?”

그는 대답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직시하던 그가, 떨리는 손목을 움켜쥐더니 탁하게 속삭였다.

“다시 해 봐.”

“뭐?”

손목을 감쌌던 커다란 손이 팔꿈치 방향으로 올라와 그대로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살을 꼬집듯 살살 문지르다가 불쑥 당기는 힘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다시 해 보라고. 너무 짧아서, 좋았는지 싫었는지 모르겠으니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달리듯 안겼다. 충동이라며 합리화하기엔 지나치게 적나라한 욕망이 들끓었다. 떨어트린 그녀의 휴대 전화 화면이 잠시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슬쩍 맞닿은 입술이 뭉개지고, 숨은 거칠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그의 입술은 델 듯이 뜨거웠다. 벌어진 입술 새로 쏟아져 나온 숨을 삼키고 혀를 밀어 넣자 말캉한 덩어리가 기다렸다는 듯 엉겨든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 발끝부터 아랫배까지 지끈한 열기가 올라와 푹 젖어 든다. 서툴게 비벼지던 혀는 점점 깊숙하게 파고들어 탐식하듯 입 속을 헤집었다. 남자의 체중에 밀려난 그녀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에 뉘어진다. 키스만으로도 몸에서 힘이 빠져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해서는 그의 넥타이를 당겨 푼 뒤, 단추를 모두 풀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시트를 짚은 그에게서 사나운 숨이 쏟아졌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피부가 젖어 든다. 배어 나온 땀, 감당할 수 없는 열. 그리고 흥분으로 단단해진 몸이 아랫배에 맞닿았다.

“으음.”

저도 모를 신음을 흘렸다.

이가 부딪칠 만큼 서툰 키스가 그녀를 더욱 아찔하게 몰아갔다. 해서는 목덜미를 안았던 손을 풀어 그의 대흉근에서부터 복부까지 미끄러지듯 쓸어내렸다. 매끄러우면서도 고무공처럼 탄력 있는 살결이 그녀의 손바닥에 들러붙는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게 조각된 몸이었다.

벨트를 푼 바지 안으로 손을 넣자, 순간 그가 입술을 깨물며 탄식했다. 지난번에 옷 위로 드러났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손에 잡혔다.

“하, 씹….”

믿을 수 없게도, 욕설과 함께 뜨거운 정액이 그녀의 손에 쏟아졌다. 당황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형이상학적인 열에 달뜬 눈이 흔들린다. 해서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대로 그에게 잡혀 버렸다. 발끝으로 바닥을 디딘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성기를 몇 번 문질렀다. 사정한 지 30초도 되지 않았지만 이내 그녀의 손안에서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가 느릿하게 비벼졌다.

해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한 손에 잡히지 않는 성기를 움켜쥐었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부피감이 늘어난 기분이다. 그의 몸이 다시 긴장하는가 싶더니, 까만 눈동자가 번뜩였다. 해서는 달싹이는 입술로 애써 소릴 냈다.

“혹시, 처음이야?”

사정도 빠르고, 다시 세우는 것도 빠르다. 믿기 힘든 투의 질문에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뜬 그가 짐짓 여유롭게 웃었다.

“처음이면 안 돼?”

“경험이 많을 줄 알았어.”

“내 이미지가 그렇게 싸구련가?”

“그게 아니라, 여자들이 가만둘 피지컬이 아니잖아. 대학 때도 인기 있었고….”

해서는 와중에도 손에 닿은 성기의 부피감에 기함하는 중이었다. 미끈거리는 정액 때문인지, 표면의 감촉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야하다는 단어 이상의 외설적인 감각이었다.

“글쎄, 그냥 두던데.”

나직하게 읊조린 그가 상체를 기울이더니 그녀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말캉한 입술로 귓바퀴를 물고 잘근거리는 감각에 배꼽 아래가 단단하게 뭉치는 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속옷이 푹 젖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이 잘록한 허리를 감싸듯 어루만지다, 느릿하게 올라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속옷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손끝으로 긁다가 조심스럽게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린다.

해서는 고조되는 감각에 숨을 몰아쉬며 허벅지를 모았다. 사실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제 안에 들어온다면, 분명 몸 어딘가가 망가져 버릴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충동적인 행위와 이어질 생경한 쾌감 같은 것들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어차피 인스턴트 같은 관계 아니던가?

이 방을 나서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관계다. 술 한 잔에 얼마든지 일탈할 수 있는 관계. 사랑받는 기쁨보다, 당장의 섹스가 가져올 쾌감이 더욱 기대되는 관계가 바로 지금 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이제 스물이 아니었으니까.

“하….”

해서는 작게 신음하며 젖어 가는 허벅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에 뭉개지는 감촉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대로 잡아끌어 제 안으로 파고들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성기를 움켜쥔 그녀의 손을 떼 냈다. 두이가 갑자기 상체를 세우는 바람에 놀란 그녀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차마,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는 당황한 해서의 손을 잡아 일으키더니, 곧장 욕실로 이끌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마감된 욕실 세면대 앞.

깨끗하게 닦인 좁은 거울 앞에 선 그가 물을 틀더니 그녀의 손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자세로, 비누 거품까지 꼼꼼하게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 주는 그로 인해 해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해, 너?”

“나랑 섹스할 거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 이거 뭐 하는 거냐고.”

“자꾸 말 걸지 마. 이대로 박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아이를 대하듯 그녀의 손을 닦아 준 그가 수건을 꺼내 양손을 감싼다. 해서는 시선을 내리뜬 채 그가 감싼 손을 응시했다.

“오늘만이야.”

툭 내뱉으며 고개를 든 해서는 어둠을 씹어 삼키듯 가라앉는 눈길에 숨을 참았다.

“더는 너, 성가시게 안 해.”

다 쓴 수건을 벽에 건 그가 세면대 가장자리를 움켜쥐더니 그녀를 양팔 사이에 가둔다.

“누가 그래, 성가시다고.”

표정과 달리 여유로운 말투로 뇌까리는 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는다.

“겁도 없이….”

움찔한 해서는 곧장 와 닿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신기한 눈이다. 깊이를 알 수 없이 까만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이상하게도 푸른 숲이었다. 꽉 움켜쥔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손가락을 펴게 하더니 그대로 코와 입술을 눌렀다.

“난 오늘만 먹고 버릴 생각 없어.”

***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엉덩이 아래 손을 넣어 가뿐하게 해서를 들어 안은 그의 품은 지금껏 함께해 온 그 어떤 파트너보다도 단단했다. 밝은색의 대리석 세면대 위에 앉힌 그가 흥분으로 달뜬 해서의 입술을 깨물어 당겼다. 셔츠를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리느라 잠시 떼어졌던 입술이 갈급히 겹쳐진다.

해서는 손을 뒤로 돌려 직접 브래지어 여밈을 풀었다. 둥근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끈이 손목까지 내려와 아슬아슬하게 걸린다. 이어 입술을 삼킬 듯 각도를 비틀어 얽자, 입맞춤이 깊어지고 온몸으로 열이 퍼졌다. 믿을 수 없었다. 이두이와 지금 제가 호텔 방에 들어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딴생각해?”

그가 말랑말랑한 그녀의 젖가슴을 손톱 끝으로 긁듯이 어루만지다가, 분홍빛 돌기를 비빈다. 그러자 새끼손톱보다도 훨씬 작은 돌기가 서서히 곤두선다. 해서는 간지러우면서도 고양되는 감각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젖혔다.

입 안 구석구석을 핥던 그가 목덜미에 입 맞추며 내려가더니, 흥분으로 곤두선 젖가슴을 물었다. 물컹한 혀끝이 예민해진 정점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얕게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뒷머리에 거울의 차가운 표면이 닿았다.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릴 끌어안고 젖가슴을 내어 준 모습이 창피할 정도로 야하게 느껴졌다.

“간지러워….”

“참아.”

가슴의 형태를 덧그리듯 혀로 핥던 그가 어느 순간 젖가슴을 크게 베어 물며 양손으로 살덩이를 모았다. 발기한 성기가 가랑이 안쪽에 뭉개진다. 발기한 성기는 드로어즈 밴드 위로 고개를 내밀고 말간 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색이 연한 분홍빛 성기 끝에 동그란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변태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남자의 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어 뜨거운 내벽을 꽉 채우고 싶었다. 이렇게 쌓였었나? 아니면 욕망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동정이란 남자가 생각보다 너무 능숙하게 애무할 줄 알아서?

“벗겨 줘. 하, 빨리.”

해서는 청바지 단추를 풀며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젖은 입술을 핥은 그가 몸에 달라붙은 청바지를 그대로 벗겨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흰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다리 사이는 이미 푹 젖은 채였다. 연한 회색이었던 속옷이 음부에 바짝 달라붙어 야한 형태와 색을 띤다.

그녀의 무릎 뒤쪽에서부터 허벅지 방향으로 어루만지며 올라온 그가 속옷 위를 느리게 문질렀다.

“흣.”

길게 갈라진 틈새를 손톱으로 긁자, 해서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신음을 참았다.

“소변이라도 본 거야?”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 젖었어. 축축해.”

“흥분해서.”

그에 어금니를 지그시 눌러 문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공기가 사라진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열이 잔뜩 오른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둘 다 차분한 숨을 내뱉는 듯 보였지만, 머릿속은 이미 난잡하게 흐트러진 뒤였다. 해서는 허벅지를 움켜쥔 그의 손을 당겨 속옷을 잡게 했다.

“벗겨.”

사나워진 그녀의 음성에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린 그가 떨리는 눈꺼풀에 입술을 누른다.

“네가 나 따먹는 거야, 윤해서.”

“뭐?”

“다 처음이거든. 너랑 한 거 모두.”

뭐라고?

속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동그란 엉덩이를 함부로 주무르다가 질척해진 속옷을 발목 방향으로 끌어 내렸다. 해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과 달리, 그는 아직 바지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창피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대로 강하게 안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눈꺼풀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콧등을 타고 내려와 다시 입술에 닿았을 때, 그의 손이 젖은 틈새로 파고들었다. 해서는 할딱이며 다리를 벌렸다. 미끈거리는 애액을 펴 바르듯 문지르던 그가, 구멍을 찾아 손가락을 깊게 넣었다. 그의 더운 숨이 입술 틈새로 흩어진다.

“여기 맞아?”

“으응.”

“뜨거운데?”

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척하고 미끄러운 내벽을 채웠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가 두 개로 늘어나 파고든다. 그녀는 고개를 젖힌 채 달뜬 숨만 몰아쉬었다.

“손, 말고… 하, 손가락 싫어.”

“싫어?”

“응, 싫어.”

“그래.”

무서우리만치 다정한 말투였다. 하지만 고개를 내려 마주한 남자의 눈빛은 사냥에 나서기 직전의 맹수처럼 열렬했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아무렇게나 잡힌 콘돔을 그에게 내밀었다.

“빨리.”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간 손가락이 야하게 젖어 있다. 해서는 콘돔 비닐을 벗기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작을 텐데…. 자신도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콘돔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첫 번째 콘돔은 선단을 감싸지도 못한 채 찢어지고 말았다. 헛웃음을 흘린 그가 사나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작아, 이거.”

“어떻게 해…?”

“입으로 해 줄까?”

기겁한 그녀는 머리카락이 들러붙는 것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

“억지로 박았다가 콘돔이 찢어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알지?”

그녀의 눈동자가 떨린다. 해서의 색이 연한 홍채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불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그녀의 허벅지를 양쪽 어깨에 올려 당긴다. 해서는 갈라진 틈을 양 손가락으로 벌리는 그로 인해 비명을 내질렀다.

“꺅! 뭐, 뭐 하는 거야!”

“빨아 주게.”

“야, 이두이!”

“예쁘네. 입술 같아.”

숱이 거의 없는 체모를 가르고 그의 입술이 파묻힌다. 입술 같다더니, 정말로 키스를 퍼붓듯 그의 혀가 음부를 헤집었다. 해서는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울음 섞인 신음을 흘려보냈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돌기에 혀가 닿아 뭉개진다. 젖은 점막이 내는 음란한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점점 발끝에 힘이 실리고 무릎이 세워진다. 해서는 어느새 몸을 웅크린 채 밀부를 그의 방향으로 내밀었다. 은밀하게 파고든 혀가 구멍을 핥는다. 수치심과 함께 견디기 힘든 쾌감이 계속해 머리를 때렸다.

“흐읏….”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의 어깨를 아무리 때리고 밀어 보아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부에 키스를 퍼붓듯 빨아 대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몸 안에 차오른 더운물이 구멍을 찾아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혀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짧은 오르가슴이 계속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를 원했다.

“찢어져도 괜찮아. 넣어 줘. 응?”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자, 극도로 흥분해 탁해진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닦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콘돔을 하나 더 꺼냈다. 비닐을 벗기고 최대한 신중하게 선단을 밀어 넣는 모습이 숨 막히게 섹시하다. 땀 때문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입술을 포갰다.

그에게서 비릿한 날것의 냄새가 난다. 혀로 빨고 핥으며 깊숙하게 입 안으로 파고들자, 그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며 당겼다.

“금방 끝내고, 제대로 된 거 사 올 테니까 기다려.”

해서는 헛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벌렸다. 배꼽에 닿을 듯 휘어진 성기는 제 안에 반도 담기지 않을 만큼 컸다. 뭉툭한 귀두를 젖은 구멍에 맞춘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고작 성기 끝이 들어왔을 뿐이건만, 그녀는 비명 섞인 숨을 내뱉었다.

“아!”

빠듯한 감각이 몸을 연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속해지는 순간을 눈으로 담고 형태로 느꼈다. 그저 내벽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절정이 찾아와 말간 물이 질금질금 샌다. 해서는 경련이 일어나는 몸에 힘을 주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으읏.”

“하, 씹…. 더 벌려.”

지금껏 제 몸의 유연성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더 벌리라는 그 말이 두렵게 느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를 움켜쥔 그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단번에 콱 밀어붙였다.

“흣!”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쾌감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흘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간다. 해서는 꽉 맞물린 음부에서 시선을 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물었다.

“아파?”

“응, 아파. 너…. 지랄 맞게 커.”

“그만할까?”

“아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그녀의 얼굴을 몽롱하게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젖히더니, 가쁜 숨을 몇 번 토해 냈다. 작은 콘돔 때문에 피가 통하지 않아 괴로웠지만, 쾌감이 더욱 컸다. 뜨겁게 젖은 내벽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성기를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두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허릴 움직였다. 시선을 내리뜨자, 색이 연한 질구가 한계까지 벌어져 성기를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상상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좋았다. 살을 치댈 때마다 새어 나오는 교성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애액도, 제 팔을 할퀴며 키스해 달라고 칭얼대는 목소리까지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녀의 골반을 움켜쥔 채 뭉근하게 움직이던 그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찌걱대는 소리가 넓은 욕실을 울린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마주치면 키스를 퍼부었고, 살갗을 더듬었다.

작은 점이 난 그녀의 귓바퀴를 깨물고 핥다가, 쇄골 근처에 짙은 잇자국을 새겼다. 주위의 온도가 올라가고, 두 사람의 얼굴은 온탕에 들어간 사람처럼 붉었다.

그가 힘주어 치댈 때마다, 해서는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점점 더 능란해지는 삽입에 그녀가 몸을 바르르 떨며 무릎을 모으려 했다. 선단에 닿은 내벽 어딘가가 저릿저릿하게 경련한다.

그는 속도를 늦추는 대신 깊숙하게 밀고 들어왔다. 치모에 쓸린 클리토리스 아래에서 뜨거운 물이 질금 새어 나왔다. 찌릿찌릿한 전류가 스친다. 머릿속을 혼미하게 만든 쾌감에 해서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

“씹….”

그 눈물이 혀에 닿는 순간, 그에게도 절정이 찾아왔다. 전신의 혈액이 거꾸로 돌아 심장으로 모여드는 기분이다. 쾌감이 손끝 발끝으로 퍼졌다가, 어느 한 점에 모여 왈칵 터져 나왔다. 중둔근이 바짝 조여들었다가 풀어진다.

오래도록 사정한 그는 곧장 그녀 안에서 빠져나와 콘돔을 뺐다. 그러자 농도 짙은 정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정액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가쁜 숨만 몰아쉬던 해서는 그런 두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오나 보지?”

제 뺨을 감싼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조금 삐딱하게 물었다.

“너 처음 아니지.”

“내가 원래 배움이 빨라. 문제 있어?”

“아니, 좋아서.”

“섹스가?”

“네가.”

지그시 내리뜬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거울을 짚은 그가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당겼다. 그러곤 얌전히 몸을 맡긴 해서를 안아 들고 욕실을 나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얗고 푹신한 침대에 눕혀진 그녀는 기진한 얼굴을 했다. 두이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나도 줘.”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린다. 두이는 입에 머금은 물을 그녀의 입 안으로 흘려 주었다. 목구멍으로 삼켜지지 못한 물이 턱을 지나 가슴골 방향으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입술을 오물대며 빨아 대던 그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곤, 몸 위로 올라왔다.

“또 하게?”

“아직 두 개 더 남았어.”

“작다며.”

“그까짓 거.”

성의 없이 대답한 그가 콘돔 비닐을 뜯는다. 해서는 그가 콘돔 끝을 펴는 동안 그의 성기를 움켜쥔 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서서히 사나워지는 숨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몸은 부서질 듯 아팠지만, 흥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이두이는 눈을 감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다. 키스할 때도, 하물며 아래를 빨 때도. 사정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직시하며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았다. 적나라한 시선에 젖꼭지가 빳빳하게 곤두서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자, 역시나 광기로 번들대는 눈빛이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헝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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