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03

비스듬히 엎드려 잠든 옆얼굴에 밝은 빛이 쏟아진다.

곤히 잠들었던 해서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아, 머리….”

하지만 이내 눈앞이 핑 돌더니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과음이 문제였다. 그것도 열흘이나 이어진 끝도 없는 술자리에 평소에도 별로 튼튼하지 않았던 간이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눈두덩을 누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해서는 어젯밤 일들을 떠올렸다. 술이 과하긴 했지만, 취하진 않아서인지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침대 끝에 앉아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려 숨을 고르는데, 베개 아래 넣어 둔 휴대 전화가 몇 번씩 짧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휴대 전화를 꺼낸 해서는 도착한 메시지들을 하나씩 읽고 지워 나갔다. 이제 남은 건 어제 함께 술자리를 했던 세빈과 윤정이 보내온 메시지들뿐이다. 두 사람은 어젯밤 자신을 데리러 온 이두이에 대한 궁금증을 나열하는 것으로 메시지 창을 가득 채웠다.

동창이야. 나중에 말해 줄게.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친구들의 질문은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았다. 결국 해서는 대충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복숭아 이모티콘을 전송한 뒤,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곧이어 울리는 알람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내려놓은 휴대 전화로 향했다.

지젤, 라스트 공연. 3시까지 청담.

미처 삭제하지 못한 알람의 내용을 본 그녀는 속이 확 뒤집히는 걸 느꼈다. 해서는 설정해 둔 알람까지 꾹꾹 눌러 삭제한 뒤 쓰린 명치를 문지르며 침실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지난밤 술을 마시고 귀가한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닌지, 칼칼한 콩나물국 냄새가 거실에 가득했다.

“엄마, 나 밥 말고 국만 줘요.”

폐인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주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미 식당엔 손님이 와 있었다.

“너 그렇게 술만 마시다가는 큰일 나. 어서 앉아.”

아주머니와 함께 음식을 차려 내던 모친 지숙의 말이 왼쪽 귀를 거쳐 오른쪽 귀로 빠져나간다.

해서는 아버지의 대각선에 앉아 식사 중인 이두이를 발견하곤, 두 눈을 깜빡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비즈니스 정장 차림의 그가 굳어 있는 그녀에게 까딱 눈인사한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제 등장이 불편했는지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서려 하자, 아버지가 손을 내두르며 두이를 다시 앉혔다.

“음식 남기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자네. 식사는 마저 끝내지. 윤해서 너도 앉아.”

해서는 슬그머니 돌아서서 장식장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귀신처럼 산발한 머리카락은 대충 돌돌 말아 올려 묶었고, 잠옷 대신 입는 헐렁한 셔츠와 반바지는 추레하다는 단어가 딱 어울렸다.

“아, 저는… 씻고 먹을게요.”

도망치려 대뜸 돌아섰지만,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에 움찔하며 멈췄다.

“앉으라고 했다.”

눈을 질끈 감은 해서는 셔츠 끝을 움켜쥔 채 슬금슬금 주방으로 들어섰다. 4인용 세라믹 식탁 위는 평소엔 보기 힘든 반찬으로 가득했고, 오늘따라 지숙의 화장이 곱다.

엄마 역시, 손님이나 다름없는 이두이를 의식한 게 분명했다.

“어제 만났지? 이두이 팀장이야. 원래 직접 경호는 안 하는 친군데, 내가 사정사정해서 네 뒤봐주는 거니까 잘해.”

의자를 꺼내 앉은 해서는 맞은편에 앉은 두이를 흘끔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윤해서예요.”

“이두이입니다.”

부모님 앞에선 모른 척하기로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존댓말이 술술 나온다. 민낯을 보였다는 창피함과 이두이가 제 앞에 있다는 신기함이 공존했다.

이어 해서의 앞에는 밥 없는 콩나물국 한 그릇이, 식사를 마친 두 남자 앞에는 뜨거운 커피가 놓였다.

쟤, 뜨거운 거 못 마실 텐데.

제 기억에 이두이는 라면조차도 식기를 기다리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저 커피를 입에 댈 리 없지.

“해서 너, 공연에서 빠지기로 한 게 그렇게 충격이냐.”

해서는 국물을 한 모금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잘 모르겠어요.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제 자신한테 진 거 같아서 억울하기도 해요.”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어찌할 거냐.”

“또 생길 거 같으세요? 그러면 안 되죠. 경찰은 뭐 하는데, 스토커를 안 잡아요?”

쯧, 혀를 찬 아버지가 두이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쉽게 잡힐 놈이었으면 경찰이 진작 잡았지. 그러지 말고 이참에 춤추는 거 그만두지 그러냐.”

고작 한 모금 삼킨 국이 얹히는 기분이다. 해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고정되어 있던 두이의 눈동자가 제게로 움직였다. 속을 읽어 낼 수 없는 그 눈빛을 마주하자 불현듯 창피함이 밀려든다. 부모님에게 대거리하는 제 모습이 창피해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그만두면 뭐 할까요. 결혼이라도 해요?”

탄식처럼 흘린 말에 윤홍주는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자리 마련할까?”

“아빠.”

“최우재 입국했다. 놈이 너 아직도 혼자인 거 알면, 이번엔 무슨 수를 쓸 줄 알고. 나는 이번 스토커도 그놈이 아닐까 생각해. 그러니까 해서야.”

짧은 숨을 삼킨 그녀가 윤홍주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그래서 경호원 붙이셨어요?”

“그래.”

“아빠, 결혼은 언젠간 해요. 그런데 최우재 때문에 서두르는 건 너무 웃기지 않아요? 저 괜찮아요, 아빠. 겨우 이런 거로 다 포기하고 결혼할 만큼… 그렇게 아쉬운 상황 아니라고요.”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딸을 야속하다는 듯 노려보던 윤홍주가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없이 일어난 이두이가 꾸벅 인사하곤, 재킷 단추를 여민다.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를 피해 주는 매너까지. 그는 이미 어른이었다.

해서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이두이를 애써 모른 척하며, 콩나물국을 떴다.

“독립할래요. 진작 해야 했는데, 너무 오래 미뤘어요. 걱정 끼치지 않을 테니까, 경호원까지만 해요.”

“그놈의 독립 타령은…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니.”

역시나 이두이의 자리엔 뜨거운 커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뜬 뒤, 대충 식사를 마친 해서는 두이가 마시던 커피에 얼음을 잔뜩 부었다.

“어머, 그거 이 팀장이 마시던 거잖아.”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내가 마실게.”

“그래도 그렇지, 추운데 아이스를 먹니? 그리고 독립은 안 돼. 엄마는 허락 못 하니까, 그렇게 알아.”

모친의 잔소리를 뒤로한 해서는 차가운 커피를 들고 집을 나섰다. 갑자기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대문을 살짝 열자, 바로 옆집 문 앞에 이두이가 보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팀장님.”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셋이 이두이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 정차해 둔 차에 오른다. 서류 봉투를 들고 담뱃불을 붙이려던 그가 해서를 발견하곤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그는 여전히 괜찮은 피조물이었다. 솔직히 괜찮다 못해 완벽에 가까운 남자다.

내로라하는 무용수들의 몸에 익숙한 그녀의 눈에도 대단해 보일 만큼, 비율이 너무도 완벽해 허구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자신을 향하는 눈빛에 들어찬 묘한 짜증과 성가심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해서는 남자들을 태운 차가 출발하는 걸 확인한 뒤, 두이에게 다가갔다.

“커피, 두고 가서.”

“겉옷은.”

“응?”

“겉옷.”

뒤늦게 제 차림을 의식한 그녀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자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케이스에 넣은 그가 재킷을 벗더니,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 준다.

어깨를 덮는 묵직한 원단의 무게에 해서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지난밤 차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향기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 마실게.”

커피를 건네주는 손끝이 스친 것뿐이건만, 몸 전체가 떨린다. 싱긋 입꼬리만 올려 웃는 저 얼굴이 지독하게 가식적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자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어른이 되었지만, 자신은 아직 스물 초반의 철없는 어린애처럼 구는 기분이 들었다.

“스케줄 알려 줘야 해?”

“공유해 주면 편하지.”

“한 시간 뒤에 연습실 갈 거야. 오후에는 친구랑 성수동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

“선은 어디까지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두이가 미간을 찌푸린다.

“선이라니.”

“네가 개입하는 선이 어디까지냐고. 나 경호 받고 그런 거 처음이라 잘 몰라. 친구랑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황당하다는 웃음을 흘린 그가 입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선은 클라이언트가 긋는 거야. 내가 아니라.”

“그럼…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

“의미는 좀 다르지만, 그래 줬으면 좋겠어?”

말투에서 묻어나는 여유와 노련함이 그녀를 자꾸 건드린다.

해서는 꽉 움켜쥐고 있던 그의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 고작 재킷 한 장 벗었다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이따가 봐.”

돌아선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묵직한 대문을 연 뒤에야 옅은 담배 연기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친다. 하지만 문을 닫으며 돌아본 자리에 이두이는 없었다.

***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춘 희생의 춤사위가 거침없이 이어진다.

연습실 곳곳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해서는 멈추지 않았다.

조막만 한 얼굴, 긴 팔다리와 여성스러움이 극대화된 우아한 굴곡. 윤해서는 동양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비율과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무용수였다.

살굿빛 레깅스에 하늘하늘한 셔츠를 걸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지켜보던 서 단장이 감탄사를 쏟아 낸다. 하지만 해서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연 마지막 날, 다른 동료들은 모두 공연장에 가 있었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자신은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동료들의 공연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숨 막혀.

“해서야!”

춤에 몰두해 있던 그녀는 순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짓을 멈추었다. 스피커 앞에 서 있던 서 단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해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꼿꼿하게 세웠던 발등을 내렸다.

“단장님, 언제 오셨어요? 오늘 공연 있지 않아요?”

“언제? 얘, 너 곡 시작할 때 왔어. 그리고 공연은 진작 끝났고.”

“아….”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훔친 해서는 창백하게 질린 서 단장의 얼굴과 연습실 바닥 곳곳을 물들인 핏자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토싱도 안 했니?”

핸드백을 내려놓은 서 단장이 질린다는 투로 물었다.

“했어요.”

“그런데도 피바다를 만들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연습할 때는 적당히 하라고 했지!”

서 단장이 구급약 통을 찾는 동안, 해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포인트 슈즈를 벗었다. 발끝을 감싼 젤 토싱 위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발톱 하나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익숙한 통증이었다. 발톱 몇 개가 빠지거나 깨지는 것쯤은 웃으면서 흘려보낼 수 있는 내공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아프고, 남들처럼 고통스럽지만 이 정도로는 유난 떨고 싶지 않달까?

“씻고 올게요. 테이핑하려면, 피를 좀 닦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어, 그래. 근데 밖에 누구야?”

“복도에요?”

“응. 마스크 장난 아니던데, 너 애인 생겼어?”

서 단장이 말하는 사람은 이두이였다.

차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계속 복도에 있었던 걸까? 아직은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낯설고 기분이 이상했다.

“애인 아니에요. 그냥, 친구요.”

“하긴, 저런 남자가 애인이면 골치 좀 아플 거 같더라. 친구만 해. 애인 하지 말고.”

“하고 싶어도 못 해요, 애인.”

벽을 짚으며 일어난 해서가 절뚝거리며 연습실 문을 열 때였다. 정면에 서 있던 이두이의 시선이 뚝 떨어져 그녀의 발끝에 닿았다.

“어떻게 된 거야.”

새카만 그의 눈동자에 걱정 비슷한 감정이 차올랐다. 말릴 새도 없이 한쪽 무릎을 굽힌 그의 손이 그녀의 발목에 닿는다. 화들짝 놀란 해서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냥 다친 거야. 연습하다 보면 종종 이래.”

“종종?”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응, 고질병 같은 거야. 나 씻고 올게.”

연습으로 인한 땀 냄새도, 굳은살이 잔뜩 박여 엉망인 발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몇 걸음 내딛기도 전, 그녀의 몸이 붕 떴다.

놀란 해서는 저를 안아 든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짚었다.

“야, 이두이!”

“그 꼴을 하고 어떻게 걸으려고.”

“아니, 정말 아무렇지 않다니까?”

그녀의 만류에도 이두이는 들은 체도 안 했다. 당당히 욕실 문을 여는 행동에 기가 막히면서도 웃음이 나고, 당혹감 때문인지 심장도 빠르게 뛰어 댔다.

“이두이, 너 왜 이래?”

“다친 클라이언트를 모른 체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은은한 테라조 타일로 마감된 세면대 위에 그녀를 앉힌 그가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튼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물을 묻혔다.

핏물이 씻겨 내려가며 엉망이나 다름없는 발이 드러났다. 해서는 신중한 표정으로 제 발을 씻겨 주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발이 너무 못생겨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둥글게 휜 발등과 우묵하게 팬 발바닥을 움켜쥔 그의 손이 멎었다. 해서는 다치지 않은 무릎을 세워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 이렇게 여자 발 아무렇지 않게 만지고 그러면 안 돼.”

두 눈을 치켜뜬 그가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발가벗는 것보다 맨발을 보이는 게 더 부끄러울 수가 있거든. 지금 내가 그래.”

해서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했다.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떨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자, 페이퍼 타월을 뜯어 물기를 닦아 준 그의 손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든다.

그러곤 다시금 번쩍 들어 안는 그로 인해 해서는 달아오른 얼굴을 이두이에게 들켜 버렸다.

자신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이유 없이 웃으며 걸음을 내디딘다. 부끄러움은 결국 혼자만의 것이었단 생각에 이상한 용기가 났다.

경호원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이두이는 의뢰인의 일이라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안아 주고, 그러는 걸까? 업무의 연장선이니까…?

고작, 스무 걸음 남짓.

해서는 힘주어 버티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목덜미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이른 아침 제 어깨를 덮었던 재킷에서 맡았던, 은은한 머스크 향기가 난다.

지금껏 의식한 적 없었던 발끝의 통증이 시작되는 건지, 몸 어딘가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기 시작했다.

***

결국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온 해서는 창가에 앉아 불 켜진 이두이의 숙소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대문 앞에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음식 봉투를 들고 벨을 누른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배달 기사는 음식을 대문 앞에 놓고 돌아갔다.

‘설마, 저게 저녁이야?’

시간을 확인한 해서는 도톰한 카디건을 걸친 뒤, 방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와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신경 쓰여 미치겠지만, 이두이는 할 일만 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주방에 들어간 해서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는 아주머니를 붙들었다.

“밖에서 먹고 올게요. 음식 하지 마세요.”

“어머, 갈비찜 하려고 했는데.”

“내일 해 주세요. 저 체중 관리해야 해서 어차피 많이 못 먹어요.”

“그래, 그럼. 조심히 다녀와요.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해서는 지갑을 꼭 움켜쥔 채 대문을 열었다. 한낮에는 제법 따뜻했던 공기가 금방 차가워져 코끝을 얼린다.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른 그녀는 조용한 골목을 좌우로 살핀 뒤, 두이의 집 앞으로 뛰었다.

검고 육중한 대문 앞, 배달 기사가 두고 간 음식이 여전히 그대로다. 봉투를 집어 든 그녀는 고기 위주의 반찬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힘주어 꾹 다문 입꼬리 끝에 보조개가 잡힌다. 지금도 혹시 반찬 투정을 하는 걸까? 유난히 채소를 싫어해, 햄버거 안에 든 양상추도 경멸하듯 쳐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서는 옆집 대문에 붙은 초인종을 꾹 눌렀다. 새 울음소리를 닮은 벨 소리가 집 안으로 길게 퍼진다. 하지만 몇 번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배달까지 시켜 놓고 어디 갔나…?”

대문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른 그녀가 돌아설 때였다.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해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손에 든 봉투를 떨어트렸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검은 그림자는 이두이였다. 이 추운 날 얇은 트랙 셔츠 한 장만 걸친 그가 땀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푹 젖은 어깨와 머리카락에서 흰 김이 오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가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흘깃 보곤 재차 물었다.

“뭐 하는 거냐고, 윤해서.”

“하, 심장 아파….”

“뭐?”

“놀라서 심장 아프다고!”

울컥한 마음에 버럭 소리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쓴 그가 손에 든 생수병을 열었다.

몸에 붙는 얇은 셔츠 위로 조각조각 균형 있게 갈라진 근육이 도드라진다. 두툼한 흉통 아래로 늘씬하게 좁혀지는 허리와 배꼽 방향으로 울퉁불퉁하게 솟은 복근이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미쳤나 봐.

해서는 물을 삼키느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응시하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심한 듯 내리깐 시선과 끌로 깎아 내린 듯 섬세한 이목구비, 움직일 때마다 꿈틀대며 변하는 남자의 선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근사하다. 결을 더듬어 형태를 확인하고 싶을 만큼.

“윤해서.”

그가 앞에 놓인 박스에 빈 페트병을 구겨 던져 넣고는 대문을 연다. 그제야 정신이 든 해서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뺨이 홧홧해진다.

“멍하니 서서 뭐 해. 들어올 거야?”

“어?”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설마, 들어오라는 소린가?

“이두이.”

해서는 현관문을 여는 그를 불렀다.

“저녁, 먹었어?”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튼다. 그걸 왜 묻냐는 듯한 표정에 해서는 떨어진 봉투를 가리켰다.

“이거, 네가 시킨 거 아니야?”

“아, 그거. 아니야. 내가 시킨 거.”

“그럼, 밥은…?”

“왜, 배고파?”

질문과 답이 조금 이상했지만 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두 눈을 가늘게 만든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턱 끝을 까딱인다.

“문 닫고 들어와. 씻고 밥 먹으러 가게.”

“정말?”

“안 들어올 거야?”

“아니! 갈 거야.”

혹여, 그의 마음이 바뀔까 봐 해서는 야무지게 대문을 닫고 이두이가 서 있는 현관으로 뛰었다. 그에, 마뜩잖은 표정을 한 그가 발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뛰어도 되는 건가? 다쳤잖아.”

“괜찮아. 치료 잘해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회복 빠르네.”

“누가 치료를 잘해 줘서.”

답의 의미를 이해한 그가 픽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안 만져. 누굴 도둑으로 아나.”

그녀가 2인용 소파에 다소곳이 앉은 뒤에야 두이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참았던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뭐에 홀려서 여기까지 온 걸까. 왜, 좋아하는 남자애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애처럼 철없이 구는 걸까.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데, 자꾸만 눈이 간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그가 들어간 욕실 문에서 힘들게 시선을 떼어 냈다.

***

이유한이 너 소개해 달래. 콜?

해서는 어렵사리 이유한이란 이름의 주인공을 상기했다. 얼마 전, 제법 술에 취한 날 친구와 동행했던 남자였다. 직업은 개인 자산 관리사라고 했던가? 머리 어깨 무릎 발, 멀쩡하지 않은 곳이 없는 남자였지만 해서의 취향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빠른 거절의 답을 보내자 황당해하는 이모티콘이 메시지 창을 가득 채운다.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든 그녀는 샤워 후 셔츠를 입지 않은 두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 씻었어?”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겠지?

면 팬츠 한 장만 걸친 채 젖은 머릴 수건으로 턴 그가 테이블에 올려진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확인했다.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알아?”

휴대 전화 화면을 천천히 넘기는 그에게서 은은한 샴푸 향이 난다. 찬물로 마무리한 것인지, 옅게 냉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단단해 보이지만 매끄러운 살결과 청량하면서도 달큼한 체향, 살짝 다운된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갉작거리며 신경을 긁는다.

해서는 몸을 좀 더 웅크리며 부러 무심히 굴었다.

“어디든 동네 맛집은 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내가 살게.”

“글쎄. 가리는 거 없는데.”

거짓말.

너 원래 채소는 입에도 안 대잖아.

멍청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입을 간신히 꾹 다문 그녀의 곁으로 두이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상체를 숙여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는다.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에 해서는 숨을 참았다.

“옷. 네가 깔고 앉은 거 같아.”

“미안, 몰랐어.”

슬쩍 몸을 들자,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는 뺨, 원치 않아도 눈이 가는 말끔한 외양이 사람을 홀렸다.

해서는 두이의 가슴팍에 붙은 머리카락을 충동적으로 떼어 주었다. 살갗에 닿은 손끝으로 시선을 내린 그가 읽기 힘든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그때의 표정과 목소리, 제 팔을 아프게 쥐었다가 놓았던 감각이 살아났다.

머릿속이 뿌예져, 해서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머리카락이 붙어서…. 빨리 셔츠 입어. 근처에 연탄갈비 집 있는데, 괜찮지?”

아주 오랜만에 함께 식사했다. 공연 준비를 위해 먹었던 방울토마토와 시리얼에 질린 탓에, 제대로 된 밥이 반가웠다.

이두이는 식성이 까다로운 대신 식욕이 왕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식성도 까다롭지 않고, 식욕도 왕성하다.

별다른 대화 없이 연탄 냄새 풀풀 나는 곳에서, 경쟁하듯 고기를 먹었다. 한 점 씹을 때마다 몸이 붓는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젓가락이 갔다.

결국, 한계치를 넘어선 포만감에 해서는 주인이 내어 준 믹스커피를 들고 먼저 가게를 나섰다. 날이 추워질수록 밤이 길다. 해서는 하나둘 꺼지는 거리의 전광판을 보며 입김을 흘렸다.

쨍하게 차가운 바람을 맞아도 몽롱한 머릿속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지독하게 앓았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탓일까?

그때는 너무 어렸다. 상대를 가늠할 줄 몰랐고, 눈길 하나, 손길 하나까지 모두 진심이었다. 속을 숨기지 못해, 결국 전부 잃었다.

그럼, 지금은.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건데?

해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달아오른 뺨을 찬 바람으로 식히며 커피를 머금을 때였다. 이두이의 차가 세워진 입구 쪽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추어 선다.

상대는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검게 선팅 된 차창 너머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해서는 낯설지 않은 차종을 보며 묘한 불안에 휩싸였다.

‘최우재?’

놀란 눈을 크게 뜬 해서는 가만히 서 있는 차량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만일 저 차의 주인이 최우재라면 그날 공연장에 나타난 사람도 최우재가 맞다는 뜻이다.

선팅 된 창문을 노려보던 그녀가 주먹을 말아 쥔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지금껏 멈춰 있던 차가, 급히 출발하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저기요!”

다급히 부르며 뛰었지만,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를 잡아챘다.

“달리는 차를 왜 따라가. 미쳤어?”

해서가 돌아보자, 팔을 움켜쥔 이두이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차에 누가 탄 줄 알고 따라가냐고.”

“아.”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서.”

“누구.”

“아니야, 잘못 봤어.”

차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던 그가 잡은 팔을 놓아주며 담배를 꺼냈다.

“커피 다 흘렀다, 너.”

그제야 식어 버린 커피가 손등을 적신 걸 깨달았다. 갈색으로 얼룩진 셔츠와 손등이 보인다. 민망해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남은 커피를 쏟아 버렸다.

“어차피 너무 달았어.”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이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자, 아직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그가 소매에 묻은 얼룩을 응시하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잘 흘리고 다녀?”

***

커튼을 조금 걷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밤바다처럼 펼쳐졌다. 골목의 가로등은 새벽 두 시를 기해 모두 소등되었다. 두이는 어두운 숙소 안을 둘러본 뒤, 풀어 둔 총을 꺼내 뒷주머니에 넣었다.

윤해서는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었다. 2층 방 불이 꺼졌던 시간이 그쯤이었으니, 지금쯤이면 제법 깊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커튼을 걷은 그가 검정 마스크를 올려 쓴 뒤, 점퍼 지퍼를 채웠다. 모자까지 눌러쓴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며 빛난다.

누군가 숙소의 담을 넘었다.

마당에 몸을 숨긴 놈들은 다섯. 윤해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깃집 앞에 나타났던 놈들은 새벽 1시를 기해 이곳을 찾았다.

상대가 공연장에서 만난 그놈인지, 윤해서를 노리는 청부업자인지 몰라도 영역을 침범한 자를 눈감아 줄 생각은 없다.

현관을 나선 그는 굳은 목을 좌우로 움직여 근육을 풀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놈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느릿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그가 삽시간에 방향을 틀어 손을 뻗었다. 포막을 씌워 둔 장작더미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의 머리채가 잡혔다.

“헉!”

헛바람을 들이켜는 놈의 얼굴을 그대로 담벼락에 찍어 버린 두이는, 뒤에서 달려드는 다른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거친 타격음과 함께 뒤로 구른 사내의 손에서 날붙이가 떨어져 나와 미끄러졌다.

이제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다른 놈이 뛰어든다. 하지만 가뿐하게 피해 버린 그는 놈의 손목을 잡아 반대 방향으로 꺾어 버렸다.

우두둑, 근육이 파열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려던 놈의 입에 꽂혀 버린 주먹. 앞니가 몽땅 나가 버린 놈이 피 흘리며 뒷걸음치더니 굳게 닫힌 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두이는 놈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굳이 뛸 필요조차 없었다. 이곳의 지리는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새겨진 상태.

미친 듯이 도망치던 놈이 좌측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자, 두이는 바로 옆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술래잡기하듯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놈을 쫓던 그는 한적한 공사장 앞에 세워진 세단을 발견했다.

두이를 발견하고 헛바람을 삼킨 놈이 멈춰 선 차량으로 뛰어가더니 굳게 닫힌 창을 미친놈처럼 두드린다. 하지만 선팅이 짙은 창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사님! 이거 미친놈입니다! 이사님!”

쾅쾅, 차창을 두드리며 애원하던 놈의 뒷덜미를 잡아 구석으로 내동댕이친 두이는 허리춤에 달려 있던 총을 꺼냈다.

“이, 이런 미친!”

주위에 포진해 있던 놈들이 총을 발견하곤 기함하며 납작 엎드렸다. 두이는 소음기를 장착한 총으로 창문을 조준한 후, 망설임 없이 격발했다. 언뜻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연이어 울린다. 하지만 창문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내려.”

서늘한 경고와 함께 내려앉은 정적. 이번엔 총의 개머리판 모서리로 있는 힘껏 창을 내리찍었다.

찌걱, 두꺼운 얼음이 깨질 때 나는 파열음이 정적을 깬다.

“분명, 내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의 경고 뒤에야 열리는 뒷문. 열린 문 안쪽에서 날렵한 스트레이트 팁의 구두와 함께 독한 담배 연기가 빠져나온다. 구겨졌던 상체를 세우며 마주 선 남자의 눈빛엔 짙은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또 보네요, 우리.”

여유로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우위에 설 줄 아는 남자의 오만한 음성. 두이는 최우재의 이마를 겨누고 있던 총을 내리곤,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게요. 이상한 데서 또 만나네요, 최우재 씨.”

최우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띤 얼굴로 담배를 꺼내 권했다. 두이는 그가 건넨 담배를 받아 보란 듯 툭 떨어트렸다.

“범죄자 새끼와는 맞담배 안 합니다.”

“범죄자라니. 나같이 사업 깔끔하게 하는 범죄자도 있었나? 그나저나… 경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남자는 두이가 들고 있는 총을 살피며 새로 꺼내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간 불씨가 기세를 일으키며 흰 연기를 낸다.

“공포탄 없이 즉각 실탄이라… 그쪽 누굽니까. 누군데, 윤해서랑 같이 있는 거지?”

말투는 여유로웠으나, 경찰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최우재의 눈빛에 희미한 의심이 깃든다.

조소를 흘린 두이는 가까이에 있는 부하 놈을 조준하며 물었다.

“범죄 혐의 벗고 어렵게 귀국하셨으면, 곱게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니는 겁니까? 최우재 이사님.”

조준 당한 부하 놈은 조금 전 앞니가 모두 나가 피를 흘리는 놈이었다. 딸꾹질하며 한 걸음씩 물러선 놈이 겁먹은 얼굴로 양손을 들고 벽에 기댄다.

그런 부하를 보는 최우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야 당연히 어렵게 돌아왔으니,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중이죠. 그쪽은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그쪽 이름을 모르네. 불공평하게.”

“대한민국에 공평한 게 어디 있습니까. 난 원래 공평한 거 싫어합니다. 그럼, 여기서 그쪽이 잃어버린 건 뭡니까.”

“사람.”

“그 사람이 윤해서입니까?”

픽 웃으며 돌아선 최우재가 머릴 쓸어 넘기자,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타들어 가며 재를 흩뿌렸다.

“혹시, 둘이 잤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을 하며 고개를 튼 최우재의 눈빛이 광기에 젖어 번들거린다.

“왜 둘이 아는 사이 같지?”

“경고하는데, 이 시간 이후 근처에서 얼쩡거리면 경고 없이 발포합니다. 나, 그런 권한 가진 사람이거든.”

“안 잤구나?”

“원래 맛있는 건 끝까지 남겨 두는 성격이라.”

“그러지 말고 우리 거래합시다. 원하는 정보를 줄 테니, 윤해서 나한테 넘겨요.”

여유를 털어 낸 최우재의 말투에 두이는 보란 듯이 느긋하게 웃으며 총구를 내렸다.

“싫은데? 내가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알고.”

“허우성이라는 마약 브로커 똘마니가 그러더라고요. 껌을 찾는 놈들이 있다고.”

점점 낮게 가라앉는 최우재의 음성. 두이의 눈빛에 이채가 돈다.

“그런데 그놈들 말입니다. 경찰보다 악랄하고 잔인한 놈들이라고 하던데. 아는 거 있습니까?”

“아는 게 있어야 하나?”

“아니, 그 자식이 그러더라고. 그놈들이 자신을 대신해 공연장에 갔다고. 그 바람에 자신은 윤해서를 죽이지 못했으니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더군요. 질질 싸면서.”

“너냐? 허우성 죽인 거.”

“그쪽이 맞나 보네. 허우성이 말한, 경찰보다 더 악랄하고 지독한 놈 중 하나.”

두이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일 멀쩡해 보이는 놈의 어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망설임 없는 격발에 사방으로 비명이 흩어졌다.

“으악!”

불시에 당한 놈이 피가 튀는 어깨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이는 이어 다른 놈들의 팔과 허벅지에도 총알을 박아 넣었다.

“으악!”

“악!”

놈들의 피가 무심하게 일그러진 그의 눈가에 튀었다. 모자를 벗은 두이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곤, 감정 없이 건조한 표정의 최우재를 향해 말했다.

“저 새끼들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꺼져. 그리고 당신은 이 시간부로 허우성 살해 용의자로 수배 내릴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이래도 나랑 거래할 생각 있어?”

“미친 새끼였네.”

“하도 들어서 새삼스럽지도 않아.”

소리 죽여 앓는 소리와 고통에 겨운 신음. 그리고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치는 부하들을 지켜보는 최우재의 주먹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담배 필터를 짓씹듯 뱉은 최우재가 이두이의 새카만 눈을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윤해서를 살인 청부한 놈.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겁니까?”

“알면 잡아 처넣었겠지.”

“힌트 하나를 주자면, 결국 윤해서를 죽이는 건 윤 의원입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죠.”

최우재는 차에 탄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라이트도 켜지 않은 차가 부상자를 비롯한 부하들을 태우고 능숙하게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조만간 윤해서가 담양으로 가려 할 겁니다. 그 전에 우리 자주 봅시다. 그리고 다음엔 나 말고 다른 새끼를 쏴요. 무서운 양반.”

최우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두이는 놈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만간 윤해서가 담양을 간다고?

“마당 정리가 필요합니다.”

나지막한 말에, 귀에 건 이어폰 너머로 세현이 답했다.

- 병원으로 사람 보냈습니다. 그리고 정리할 네 명 이동합니다.

“수고.”

- 팀장님.

“연결 끊습니다. 관리인이 나올지도 모르니.”

- 예, 알겠습니다.

두이는 피 묻은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린 뒤, 점퍼도 벗어 뒤집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공사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윤 장관의 대문이 열려 있는 걸 보았다.

젠장.

놀란 그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이두이?”

막, 잠에서 깬 목소리로 현관을 열고 나오는 윤해서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네가 이 시간에 여기 있어?”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좀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려서.”

“나도 들었는데. 도둑 같은 거야?”

“아니, 고양이들인가 봐.”

잠에서 막 깬 윤해서는 무방비하고 나른하며, 말랑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힘이 들어간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잘근잘근 깨물어 씹어 먹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피를 보아서인지,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어 대고, 피가 역류한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갈게. 다시 자.”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녀를 뒤로한 그는 곧장 대문을 나가 숙소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그는 피와 먼지가 묻은 옷을 벗고, 챙겼던 총을 매트리스 아래 다시 넣었다.

거울 앞에 선 그는 묵직해진 하반신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피를 본 직후 윤해서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힘이 들어간 손으로 거울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할수록, 말간 얼굴이 아른거린다.

“젠장할….”

애새끼도 아니고.

차라리 찬물 샤워라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걸친 뒤, 욕실 문을 열었다. 몸 전체에서 탄약 냄새가 난다. 최우재가 피웠던 담배 냄새가 들러붙은 듯도 해 진절머리 났다.

하지만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두이, 너 문 좀 열어 봐.”

대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던 걸까?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구급상자를 든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 해.”

두이는 당황한 기색 없이 수건을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빤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눈썹에 피가 나. 상처 난 거 같은데….”

놈의 피가 튀었나.

“잘못 긁어서 그래. 씻고 나면 괜찮아.”

“그래도 상처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 피가 많이 나잖아.”

그녀는 두이의 얼굴 방향으로 까치발을 들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 넘어가 드러난 뽀얀 얼굴이 가까워진다. 두이는 제 얼굴에 닿으려는 그녀의 손을 간발의 차로 잡아챘다.

불시에 닿은 체온 때문인지, 몸 어딘가가 불편해졌다.

“뭐 하는 거야, 너.”

사나워진 음성이 그대로 그녀에게 쏘아진다.

“뭐?”

“또 키스하게? 그때처럼?”

“야, 이두이.”

“함부로 선 넘지 마.”

거친 기세에 놀란 해서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낸 뒤, 현관 옆 콘솔 위에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대놓고 과거 이야기를 꺼낸 그로 인해 그녀는 민망하다 못해 얼굴이 홧홧해졌다.

“여기 둘 테니까, 그럼 알아서 치료해.”

눈썹만 비스듬히 추켜세운 그가 서서히 턱을 들고 어깨에 걸친 수건을 잡아 내렸다.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지도 말고.”

그에, 암팡지게 입술을 깨문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피가 나서 걱정한 것뿐이야.”

“네가 왜 날 걱정해.”

“그래, 이제 걱정 안 할게. 피를 흘리든, 팔이 부러지든. 너 알아서 해.”

단호하게 돌아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마지막으로 대문을 닫기 전 멈춰 선 그녀를 보는데 갑갑한 짜증이 치민다.

진창에 구른 기분으로 욕실에 들어간 그는 뜨거운 샤워기 아래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화풀이를 해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라도 된 듯이.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찬물을 틀어야 했지만, 어쩐지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

해서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뜨거워진 얼굴을 묻었다. 좀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두이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근사한 남자였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고, 이상형에 가까운 껍데기에 흔들릴 때도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지그시 파고들 땐, 그의 몸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모두 흥미 본위의 충동이었다.

수건을 어깨에 걸치느라 팔을 든 그의 단단한 상체 아래 노골적으로 드러난 욕망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체 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놓고도, 이두이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되레, 선을 넘지 말라며 못된 소릴 했다.

‘아, 그만, 그만.’

해서는 잔상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야간 산책을 다녀온 그가 흥분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산책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얼굴을 문지른 그녀는 담장 너머 이두이의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둠 때문인지, 커튼을 열어 두어서인지 창가로 다가온 그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였다.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그가 수건으로 머릴 턴다. 집 안의 노란 불빛이 남자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 같았다.

해서는 관객이 된 심정으로 제 공간을 차지한 그를 오래도록 관찰했다.

이두이는 마치, 근사하게 포장된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겉 포장이 너무도 화려해 흔들어 보지 않고는 내용물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트리 아래 놓인 선물 상자 같아서 자꾸만 눈이 갔다. 할 수만 있다면, 꼼꼼하게 포장된 저 껍데기를 벗겨 알맹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창문을 연 그가 고개를 내밀었다.

해서는 놀라는 기색 없이 부러 창가에 기대어 그를 응시했다. 밤빛과 어우러진 어둠을 가르고 은근한 시선이 맞붙는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머리카락을 몇 번 더 털어 내더니 창문을 닫았다.

해서는 그의 방 불이 꺼질 때까지, 창가에 머릴 기대곤 간질거리는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날 밤, 꿈에 이두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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