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낮은 조도의 조명, 들릴 듯 말 듯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은 사람들의 말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한 해서의 얼굴 위로 미세한 실금이 생겨났다. 그녀는 와인 잔이 넘치도록 소비뇽 블랑을 따른 뒤,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윤해서답다고 혀를 차며 각자의 잔을 든다. 1.5층 높이의 건물 밖으로 이태원을 찾은 사람들이 풍경처럼 스쳐 지나간다.
검은색 파이프와 투명한 유리, 대리석 테이블로 꾸며진 이곳은 그들이 평소 즐겨 찾던 식당이었다. 테이블 간격은 좁고, 천장도 낮았지만 캐주얼한 프렌치 음식과 가성비 좋은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 해외에 나온 듯한 인테리어 때문인지, 유난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가벼운 뒤풀이를 위해 찾았겠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였다.
“윤해서, 너 지금 꼬박 열흘째 술판인 거 알지? 인제 그만 털어. 응?”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세빈이 립스틱을 고쳐 바르며 말했다.
“그래. 이참에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너 너무 달렸어. 3년 동안 배역 들어오는 거 닥치는 대로 다 하지 않았어?”
“과하다, 과해. 윤정이 말대로 좀 쉬어. 까놓고 말해서 스토커가 미친 거지, 네 문제는 아니잖아.”
그래, 벌써 세 번째였다. 그간 크고 작은 스토커의 경고를 받아 왔지만, 본 공연을 망친 것은 처음이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까지 경찰 조사를 받았고, 동료들과 단장님의 지친 얼굴을 마주했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공연을 망친 것에 대한 원망, 불안, 강박 그리고 억울함으로 힘들어 보였다.
그런 동료들의 눈빛은 그녀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다.
만약, 진짜 총격이 일어났었다면.
저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입었다면.
해서는 울렁거리는 속을 차가운 와인으로 누르며 으깬 과일을 깨작거렸다.
어쩌면 업계에서 매장될지도 모른다. 공연마다 스토커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무용수를 누가 써 주려 할까. 제가 아무리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고 해도, 미래까지 보장해 주는 건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뭐래. 잡을 수 있대?”
“아무것도 들은 거 없어. 기다리래, 집에서.”
“웃기네, 진짜? 이 정도면 TF라도 꾸려서 범인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는 대답 대신 올리브를 오물거리며 진동이 울린 휴대 전화를 꺼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른 아침 아버지가 말한 상대였다.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30분 안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경호원이라고 했던가?
해서는 상대의 메시지를 무시하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잔을 채웠다. 취하고 싶었다. 단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어딘가가 망가져 버렸다.
소비뇽 블랑을 맥주처럼 들이켜는 그녀를 흘끔대는 남자들의 눈길이 적나라하게 들러붙는다. 하지만 해서는 익숙하게 시선을 무시했다.
성인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자그마한 얼굴과 늘씬하면서도 길게 뻗은 몸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첫인상에 상대를 홀릴 만큼 매력적인 껍데기를 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유난히 눈동자가 맑은 탓에, 사람들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너 우는 거 아니지?”
창문으로 스며든 냉기에 콧물을 훌쩍이자 어김없이 윤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나를 몰라? 나 안 울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 날 이후로, 안 울었다고.”
“오구오구, 그랬어요? 우리 윤해서, 울릴 남자 어디 없나?”
“오윤정, 미쳤나 봐. 남자가 날 왜 울려?”
“으휴, 그런 게 있다. 애들은 모르는.”
윤정은 매끌매끌한 해서의 뺨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가 놓아주었다. 인상을 찌푸린 해서가 아픈 뺨을 문지를 때였다.
2차로 클럽에 가고야 말겠다며 화장을 고치던 세빈이 창밖을 내다보며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야… 저 남자 미쳤다.”
“왜. 이상한 남자라도 있어?”
세빈이 넋을 놓은 방향으로 고개를 튼 해서는 익숙한 SUV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연예인 아니야?”
남자를 발견한 건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라인에 자리한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길을 가던 사람들 역시 한 번씩 돌아보며 남자를 흘긋댄다.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여다보던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든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남자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뚝뚝 흘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해서는 그를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이두이다.
바람에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휴대 전화를 귀에 댔다. 그러자 조금 전 테이블에 엎어 둔 그녀의 전화기가 울린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해서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30분 안에 내려오시라고 했습니다.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
이두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 해서는 제 눈이 잘못된 것이길 바랐다. 창문에 이마를 붙여서인지 코끝이 시리다. 통화가 끊어진 것도 모른 채, 창밖의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들의 말소리도, 은은하게 흐르던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올려다보던 이두이가 외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서는 그가 식당 출입문을 연 뒤에야 창밖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오르던 취기가 단번에 물러난다. 지금껏 제가 마신 것이 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야, 저 남자가 왜 와?”
맞은편에 앉은 세빈과 윤정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고개가 들렸다. 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해서의 뒤로 다가선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해서.”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 안쪽을 쿡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해서는 소리의 방향으로 천천히 상체를 틀었다.
“맞네, 윤해서.”
제 눈을 빤히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삽상한 기운이 묻어난다. 그는 기억 속에 자리한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변한 거라면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그리고 머리카락이 길어졌고 전과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서는 자신을 데리러 온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네가 여기 왜 있어.”
그녀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으로 눈 앞머리를 문지른 그가 답했다.
“메시지.”
“어?”
“30분 내로 내려오라고 메시지 보낸 거 나라고.”
살짝 일그러진 미간의 균열까지도 하필 근사했던 예전 그대로였다. 해서는 가슴이 너무 뛰어 눈물이 날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의 팔에 커다란 손이 감긴다.
두이는 너무도 가볍게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핸드백과 코트를 팔에 걸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두이의 인사를 받은 세빈과 윤정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코트.”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해서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 준 그가 턱 끝을 까딱인다. 크림색 코트에 양팔을 끼워 넣는 그녀는 마치 애인의 보호를 받는 사람 같았다.
머리 하나 이상 작은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핸드백까지 쥐여 준 뒤에야 걸음을 내디뎠다.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 그에게로 식당 내부의 시선이 드문드문 쏠린다. 해서는 제 손목을 움켜쥔 힘에 이끌리듯 그를 따라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제 눈앞에 이두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그에게 잡힌 하얗고 가는 손끝이 떨리고, 때아닌 막막함이 찾아와 마음을 헤집었다.
식당을 나선 뒤에야 찬 바람이 폐부 가득 채워져 숨이 쉬어지고 긴장이 풀어졌다. 물감이 번진 듯한 네온사인, 어수선하게 뒤섞이는 소음 속에서 이두이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회색의 외부 계단을 내려간 둘은 조금 전 그가 끌고 온 차 앞에 섰다. 해서는 뒷문을 열어 준 두이를 올려다보았다.
길고 깊은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15분 남았습니다. 타시죠?”
“나한테 왜 존댓말 해?”
“클라이언트니까.”
해서는 두 눈을 치켜뜬 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동요 없이 담담한 눈빛과 그녀의 혼란한 눈빛이 강하게 맞붙었다.
“정말로 아빠가 말한 사람이 너라고…?”
“불편하면 교체 요청해도 됩니다.”
그는 재차 차에 오르라는 듯 눈짓했다.
너른 뒷좌석을 노려보던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보닛을 둘러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기 탈 거야. 그리고 존댓말 하지 마.”
뒷문 가장자릴 움켜쥐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문을 닫는다. 해서는 운전석에 오르는 그의 옆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때, 제 모든 것을 주고 싶었던 남자였고, 그의 전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뭇 첫사랑이 그렇듯 그녀의 첫사랑 또한 무참하게 끝났다.
***
이두이를 처음 만난 건, 열일곱.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그렇다고 이두이가 예술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아니다.
해문은 사립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그래서 해문 예고와 해문 과학고, 해문 국제고가 한 부지 안에 있었고 다양한 학생들이 어우러졌다.
3월의 봄.
유난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하는 재단 이사장의 입학 환영사를 듣기 위해, 모든 1학년들이 대강당으로 향했을 때였다.
오페라 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대강당의 중심에 이두이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무심한 표정으로 농구 골대 아래 서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가 있는 곳만 공기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졌다.
가늘지만 분명한 선, 무심한 듯 차가운 이목구비와 가까이하기 어려울 만큼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는 나이답지 않은 기품까지 흘렀다. 이두이는 또래의 남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부류였다.
그 순간, 이두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한 건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단번에 해문의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가진 인맥을 끌어모아 이두이에 대해 알아내려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그는 흔히 생각했던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었다.
이두이가 극빈층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장학생 전형으로 해문에 입학했다는 걸 알게 된 아이들의 흥미는 급격하게 식었다.
“쌍둥이라더라.”
“누나 있대. 이란성.”
“존잘인데, 아깝다.”
“배치 고사 1등이라며? 돈 없어서 학원도 안 다닐 거 아냐. 와, 독한 새끼.”
사는 아파트, 부모님의 직업, 일주일 용돈 따위로 패를 나누던 시기였다. 많이 어렸고, 그녀 역시 휘둘렸다.
그럼에도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 홀로 수돗가에 서서 세수하던 그를 볼 때, 이어폰을 꽂은 채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곁에 설 때마다 남몰래 숨죽여 떨림을 참아 냈다.
그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짧은 15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두이는 몰랐을 것이다.
그를 눈에 담을 때마다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 몸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세 번의 첫눈을 모두 함께 맞았다는 것도. 저 홀로, 지독한 짝사랑을 했다는 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었다.
“한국대학교 무용과 수석, 윤해서! 이야, 잘했어!”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 후, 무용수의 길을 걷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래서 주위의 요란한 축하에도 딱히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틀에 박힌 연습, 감당하기 힘든 통증, 과도한 경쟁과 이따금 찾아오는 무력함이 즐거움을 갉아먹을 시기였다.
그 정도로 최악이었다.
아신 은행 총재인 아버지의 권세가 드높아질수록, 죄어드는 압박감은 강해졌고 감시의 눈이 많아졌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던 그때, 기적처럼 이두이를 다시 만났다.
프랑스어 실용 회화를 신청하려다 실수로 선택한 교양 과목에서였다.
고전 문학을 통해 배우는 범죄 심리학 강의 시간, 그는 한 칸 떨어진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현실 같지 않아서,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자 시선을 맞춘 그가 담담히 눈인사했다. 반가운 마음과 놀라움이 뒤섞여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통증까지 느껴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3년 내내 말 한 마디 섞어 본 적 없던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서로를 소개했다.
“윤해서라고 해.”
“어.”
“넌?”
“이두이. 우리 같은 학교 다닌 거 아니었나?”
“너도 해문 다녔어? 그랬구나… 몰랐어.”
처음 들어 본 이름인 양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평소답지 않게 뻔뻔해졌고, 창피함을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만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의 자리를 맡아 두었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멀어진 기분이 드는 건, 이두이의 주위를 에워싼 수많은 사람 때문이다.
그는 학교의 인기인이었고, 철없는 잣대 따위엔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가난을 숨기지 않았으며, 언제나 당당했고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다.
학과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두이에 대해 떠들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고백도 못 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실은, 두려웠다. 제게 주어진 7일 중 단 하루마저도 잃게 될까 봐 친구라는 이름을 자처했다.
“윤해서! 야야, 윤해서! 미쳤어! 누가 왔는지 알아?”
막 연습을 끝내고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를 벗을 때였다. 먼저 연습실을 나섰던 윤희가 뛰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제 팔을 때리며 발을 굴렀다.
“이두이가 너 찾아왔다고, 너! 야, 이두이가 왜 와? 왜? 둘이 무슨 사인데? 너 이두이랑 어떻게 알아? 응?”
워낙 목소리가 큰 탓에 멀리 있던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흘끗거렸다.
“친구야, 고등학교 동창. 교양 같이 듣는데, 오늘 조 과제가 있어서.”
“야!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응?”
“굳이 왜. 이두이가 그렇게 유명해?”
안다. 알면서도 뻔뻔하게 모른 척 물었다.
“와, 얘가 뭘 모르네. 얼굴 천재 이두이를 몰라? 와, 미치겠다. 배가 불렀네, 불렀어. 해서야! 나 이두이 소개해 주라. 응?”
윤희는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릴 것처럼 굴었지만, 두이를 소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샤워를 마친 뒤 연습실을 나서자, 현관 계단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휴대 전화 속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애들이 너 소개해 달라고 난리야.”
“그럼 소개해 줄 거야?”
“응?”
“나, 소개해 달라고 했다며. 소개해 줄 거냐고.”
그의 매끄러운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얄미우리만치 너무 예뻤다. 그래서인지 맹렬한 거부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욕지기가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싫었다.
하지만 등신처럼 생긋 웃었다. 같잖게 쿨한 척, 좋은 친구인 척.
“제일 예쁜 애로 소개해 줄게.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말해.”
그렇게 말해 놓고 도망치듯 이두이를 끌고 무용과 앞을 벗어났다.
학교나, 학교 근처나 모두 지뢰밭이었다. 과제를 하기 위해 찾은 카페에서도 이두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도 흘끔대며 궁금해했다.
머릿속이 진흙탕이라 도무지 과제를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지랄 맞은 짝사랑이다.
그나마 애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이두이가 애인이었다면 여자들을 견제하다가 노이로제에 걸려 단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으로, 고백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 이두이! 여기 있었어? 계속 찾았잖아.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그때, 한 무리의 남녀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다 말고 이두이를 발견했다.
“선배.”
두이는 그들을 선배라고 불렀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앞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이 새끼가 빠져선. 야, 너 때문에 애들 다 술집에서 대기 타고 있잖아. 빨리 가자. 우리도 커피 사서 갈 거야.”
“친구랑 과제 하고 있었어요.”
“과제는 너만 하냐? 친구도 같이 가. 너 때문에 만든 자린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 저기, 괜찮죠? 이 자식 학기도 안 마치고 군대 가잖아요. 그래서 한잔하려고 하는데.”
군대라니?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과정이라지만,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말이 자신도 모르게 먼저 튀어나왔다.
“괜찮을까요? 저는 경영학과 아닌데.”
“당연히 되지! 윤해서 온다고 하면 애들 자지러질걸?”
이두이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지만, 사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 않고 말했던 것 같다.
“소개받는 자리 생길 줄 알았으면, 예쁘게 하고 올 걸 그랬어요.”
실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두이는 굳은 얼굴로 어금니를 지그시 사리물었다. 이후로는 그는 더 이상 제 의견을 묻지 않았다.
이두이가 너무 화나 보여서 근처 술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고 돌아설까 고민했다.
여기서 실수했다고 말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일주일에 한 번. 그가 입대하기 전까지 우린 계속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을 마무리하기엔 술집까지의 거리가 지나치게 짧았다. 학교 근처 싸구려 안주로 유명한 호프집에 들어가자, 이미 반 이상 취해 버린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았다.
새빨갛고 노랗고, 파란 조명. 냉동식품을 데운 듯한 질 낮은 안주와 덜어 먹은 흔적 없이 뒤섞인 찌개들이 보인다.
평소 남이 손댄 것엔 눈길도 주지 않는 이두이가 최악으로 생각하는 광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두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역시, 못마땅하게 술자리를 내려다보던 이두이가 제 손목을 움켜쥐었다.
“괜찮겠어?”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와 닿았으니까. 우연히 부딪치거나, 스친 게 아닌…. 잠시나마 꽉 움켜쥐었다는 것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와! 무용과다!”
“호옥시, 윤해서?”
“와와! 나 알아! 반갑습니다!”
“근데 뭐야. 둘이 왜 같이 와? 야, 이두이. 너 우리 해서 씨한테 무슨 짓 했어!”
이미 거나하게 취해 목소리가 커진 누군가가 짓궂게 소리쳤다. 한숨 쉰 두이는 자리에 앉으며, 선배가 내민 잔에 술을 따랐다.
“얘랑 무슨 짓을 해요. 저도 술이나 주세요.”
“진짜 둘이 아무 짓도 안 했어? 전부터 둘이 붙어 다니는 거 이상했다니까? 응? 둘이 이 시간까지 뭐 하다 왔냐!”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교양 같이 듣는 거라고.”
“그럼, 내가 해서 씨 옆에 앉아도 되냐?”
“마음대로 해요. 관심 없어요.”
관심 없어요.
새 술잔을 건네받던 손끝이 떨렸다.
이두이의 말 한 마디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의 대화는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쓴맛이 목구멍을 적실 때마다 심장이 지끈거린다. 관심 없다는 말이 생각보다 충격이었나 보다.
“와, 우리 무용과 잘 마시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들자, 모르는 얼굴들이 제법 늘어나 있는 게 보였다. 아는 얼굴이라고는 이두이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던 이두이는 어느새 맞은편에 가 있었다. 낯선 여자가 그의 옆에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속에서 무언가 확 끓어올랐다.
“너무 마셨나 봐요. 죄송해요, 제가 낄 자리가 아닌데. 저 통금이 있어서요, 이만 일어나 볼게요.”
급히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데 이두이의 고개가 들린다. 민망함이 밀려와 멋쩍게 손을 흔든 뒤, 총무라고 소개했던 사람에게 지갑에 있던 현금을 꺼내 쥐여 주었다.
“제가 분위기 망쳐 놓았으니, 많이 낼게요. 두이 잘 부탁드려요.”
“어? 그래도 이렇게 많이?”
“안녕히 계세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도망치듯 술집을 빠져나온 시각은 밤 11시가 넘은 때였다.
미쳤지, 윤해서.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네가 껴?
학과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 눈치 없이 뭐 하는 짓이야. 이래서 이두이 얼굴 다시 볼 수 있겠어?
취기와 함께 개념도 돌아오는 걸까?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리에 서서 습한 밤바람을 삼키고 쏟아 내고, 또다시 삼켰다. 뒤늦은 취기가 오르는지, 눈앞이 핑 돈다. 정신없이 반짝거리는 전광판의 불빛들이 시야에 흩어질 때였다.
“이리 와.”
누군가 팔을 잡아채는 느낌에 돌아보자, 술집에서 나온 이두이였다.
“어? 왜 나왔어…?”
“너 운전기사 있잖아. 아저씨한테 전화해. 여기 주소 알려 줘.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 거야.”
“아, 오늘은 퇴근시켰어. 나 택시 타고 가면 돼.”
실소한 그가 힘이 들어간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바로 옆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벤치에 앉히곤 담배를 꺼내 문다.
“주소 불러. 바래다줄 테니까.”
“우리 집?”
“그럼, 어디로 가게.”
“연습실.”
“이 시간에?”
“개인 연습실 있거든. 거기 가면 침대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그의 손안에서 라이터가 켜졌다. 이두이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멍하니 올려다보자, 인상 쓴 그가 상체를 숙여 왔다.
“윤해서. 집으로 가. 부모님한테 혼날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같이 가 줄게.”
“네가 같이 가면 안 혼나?”
“내가 대신 혼나 주면 되잖아. 나 때문에 억지로 마셨다고 할게.”
네가 왜?
어째서?
관심 없다며, 왜 자꾸 사람 착각하게 해….
“두이야.”
“응.”
“나도 담배 한 번만.”
눈동자가 어쩜 이렇게 검을까.
“너 담배 안 피우잖아.”
“그래도 한 모금만 줘.”
“안 돼.”
붉은 입술이 야속하게 움직이는 순간을 참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가까이 하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술김이었다. 그 어떤 것도 계산하지 못한 채로, 이두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져 불티가 튀어 오른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그의 입술이 벌어진 건, 최소한 3초가 지난 뒤였다. 부드러운 혀가 얽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먼저 시작한 충동적인 키스였지만, 되레 잡아먹을 듯 구는 건 그였다.
해서는 가까스로 이두이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입술을 떼어 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무섭도록 사나운 눈빛이 쏟아져 내린다.
“좋아해.”
용기를 내 마음을 고백했을 때, 서서히 경멸이 들어차는 그의 눈빛에 더럭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좋아한다고, 이두이.”
대답 없이 상체를 세운 그가 떨어진 담배를 비벼 끄더니, 새것을 꺼냈다.
“택시 불러 줄 테니까, 집으로 가. 그리고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해. 실수였어.”
“거짓말.”
“성가셔.”
“내가?”
“그래, 너. 사람을 너무 귀찮게 해.”
차갑게 읊조린 그의 말투가 단단했던 마음 어딘가를 휘저었다.
***
첫사랑의 종말은 그렇게 찾아왔다. 최악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게 종말을 선언한 첫사랑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과거보다 훨씬 더 근사해진 모습으로.
“나, 하나만 물어도 돼?”
해서는 아론 테일러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낮추며 말했다.
이두이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핸들을 돌린다.
차창 밖으로 화려했던 네온사인이 멀어지고, 대로를 가득 채운 차들이 엇비슷한 속도로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이 복잡한 거리를 빠져나갈 때까지는 속도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내가 왜 네 클라이언트가 됐냐고.”
“질문이 이상한데.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상관에게 윤해서를 경호하란 지시를 받은 것뿐이라서.”
옅게 쌍꺼풀진 깊은 눈매가 언뜻 구겨졌다. 해서는 핸들을 움켜쥔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두이는 투박한 선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다. 부드러움 속에 강한 면을 숨긴 남자랄까. 그를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나라는 거 알면서도 승낙한 거야?”
“거절할 이유가 있나?”
“우리 친구 사이였잖아.”
“그래서.”
“좀 당황스럽다고.”
이만 시선을 떼어 내며 해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저 혼자만 못 견디게 의식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장을 들쑤시는 감정들과는 별개로, 이두이가 제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해서는 낮게 울리던 볼륨을 확 올려 버린 뒤,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
조수석 문이 열리는 느낌에 눈을 뜨자, 익숙한 광경과 함께 이두이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직접 문을 열어 주고, 안전벨트까지 풀어 준 그의 옆얼굴이 그녀의 코끝을 스친다.
“도착했으니, 내려.”
두이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녀가 떨어지기 직전의 핸드백을 팔에 걸고 차에서 내렸다.
술이 과하긴 했나 보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벌써 집 앞이라니.
“데려다줘서 고마워. 넌?”
해서를 대문 앞에 세운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옆집을 가리켰다.
“임시 숙소. 네 방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도 돼.”
“무슨 일…?”
“스토커한테 시달린다던데.”
“아, 그거… 그럼 스토커 잡을 때까지만 일하는 거야?”
“아마도.”
“나랑 항상 붙어 있을 거고?”
“그럴걸.”
“괜찮겠어?”
그녀가 질문을 덧붙일수록 이두이의 대답은 점점 짧아졌다. 낡은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음영 진 눈매가 사뭇 차갑게 느껴졌다.
“미안, 궁금한 건 아빠한테 물어볼게. 내가 좀 취한 것 같거든. 정신 차리고 얘기 좀 해. 나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이 안 가.”
그녀는 대답 없는 그를 뒤로하고 대문을 열었다.
세 식구가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주택 현관까지는 고작해야 스무 걸음 남짓이었다. 90년도 초반에 지어진 낡은 주택의 형태가 해서에겐 여전히 낯설었다.
아버지가 아신 은행 총재였던 시절엔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 으리으리한 고급 저택엔 일하는 사람만 여섯이 넘었고, 고급 차와 고급 의류, 모든 것이 최고가 아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정치권에 몸담은 뒤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국정 감사에 대비하듯 모든 재산을 정리, 처분하고 개발 지역에 투자해 놓은 기금 역시 모두 회수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순식간에 부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은 가난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주위에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집은 더욱 초라해졌고 차의 연식은 올라갔다.
청렴결백을 증명할 방도가, 정말로 가난밖에 없었을까? 그렇다고 정말로 가난한 것도 아니잖아.
부를 움켜쥐고도,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껍데기뿐인 가난.
다른 그 무엇보다 이 가식적인 상황이 해서는 버거웠다. 아버지의 존재는 불편한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발레리나 윤해서가 아닌, 윤홍주 장관의 발레리나 딸로 불리는 것이 싫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행동을 의심받았고, 자신의 노력은 폄훼되어 아버지의 그늘에 갇혔다.
아버지의 능력 없이는 무엇도 이루지 못했을 거라며 몰아가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발톱 열 개가 모두 빠질 때까지 연습해 이룩한 쾌거조차, 아버지의 입김으로 얻어 낸 가짜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1선에 성공한 그날, 아버지의 딸이란 걸 숨겨 달라는 부탁을 했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그날까지, 아버지의 딸로 불리고 싶지 않다며 가슴에 못을 박았다.
이기적인 결정이었지만,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가려 온 노력도 무색하게 스토커가 생겼다.
그 스토커가 누구 때문인지 뻔히 알면서…. 이제 와 경호원 같은 걸 붙인 아버지의 의도에 헛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나 2층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창가에 섰다. 이두이가 말한 임시 숙소는 그녀의 방 창문 대각선 아래 보이는 빈집이었다. 오랫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비어 있던 집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맞은편 창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 번을 곱씹어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
준비된 임시 숙소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와 옷장, 스틸 프레임의 대형 책상이 전부인 곳이었다. 삭막하리만치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운 곳.
두이는 코트를 벗은 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열었다. 휴대 전화를 어깨와 귓바퀴 사이에 끼운 그가 세현에게 말했다.
“보고하세요.”
- 식사는 하셨습니까?
세현의 질문에 간이 냉장고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때우면 됩니다.”
- 팀장님, 음식 못하시죠.
“예.”
- 라면도요?
“끓여 본 적 없습니다.”
-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적당히 살았죠. 됐고, 허우성 어떻게 된 건지 물었을 텐데요.”
두이는 스피커폰으로 돌린 휴대 전화를 책상에 내려 둔 채,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 기소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귀가 조치 되었다고 합니다. 약물 반응 검사도 통과했고요.
“그래서 투신했다?”
- 예. 그런데 유서도 없고, 술을 마신 흔적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독하면, 맨정신으로 뛰어내릴까요?
“전 형사님은 숟가락에 반찬까지 얹어 줘도 못 씹어 먹네요.”
기소에 실패했으면, 증인으로라도 법정에 세웠어야 하는 놈이다. 게다가 허우성에게는 아직 얻어 내야 할 정보가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귀가 조치 한 그날, 기다렸다는 듯 투신을 해?
무언가 석연찮다.
“타살 가능성은 없습니까.”
-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증거가 없습니다. 제가 직접 파는 중이고요.
“최우재 쪽은요.”
- 평범합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얼굴을 비치고, 출근도 합니다. 지시하신 대로 P7과 P3가 꼬리로 붙었는데,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 봤자 깡패 새끼지.
“그날 총격이 일어날 걸 알고 있던 놈입니다. 그러니 확실하게 마크하시고, 특이 사항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
- 예, 그리고 윤해서 씨 말입니다. 3년 전에 제법 큰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무슨 사고였습니까?”
- 그게 자료가 없습니다. 저희도 우연히 알아낸 건데, 윤 의원이 사고 자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료가 모두 삭제된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것도 알아봐야겠네. 어쨌든 수고. 또 연락합시다.”
- 예, 뭐라도 드십시오. 도시락이라도 넣을까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노트북을 닫다 말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고개를 조금 틀자, 커다란 창문 밖으로 불 켜진 건너편 창문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잎이 무성한 나무 때문에 서로의 창문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앙상해지는 계절, 시야를 가리는 건 없었다.
윤해서가 3년 전에 당한 사고는, 어쩌면 이정수에 의해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대체 왜였을까. 어째서 윤해서는 윤홍주의 약점이 된 걸까. 게다가 최우재는 누군가 윤해서를 노리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사적인 물음이 늘어날 때마다 퍽 성가시고 불쾌한 감각이 가슴 안쪽을 할퀴었다.
“좋아해.”
그 새벽, 입술을 떼고 한 번 더 속삭이던 음성이 불현듯 떠올랐다.
“좋아한다고, 이두이.”
하필,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