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어으, 추워. 여기는 P3. 타깃이 건물에서 나왔다. 카키색 야상, 검은 모자에 마스크. 키 170 후반이고, 신발은… 약쟁이 주제에 명품이네?
귀에 건 리시버에서 쉬지 않고 보고가 이어진다.
금요일 밤, 홍대 거리는 쏟아져 나온 인파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11월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선 수많은 사람이 겹쳐지고 흩어지며 시야를 현혹했다.
- P7, 타깃 확인. 편의점 앞 지나갑니다. 붙겠습니다.
“증거만 확보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촬영하세요.”
제법 추워진 날씨.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4층 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남자의 입술 새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 P7, 타깃 건물 진입. 7층 PC방 이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 PC방?
- 예. 일곱 시간 정액 끊고, 음식까지 주문합니다. 장어덮밥에 치즈 토핑, 아메리카노, 단무지 추가.
- 일곱 시간씩이나? 와씨, 게임이라도 한판 같이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메뉴는 왜 저따윈데? 라면이나 처먹지.
- P2, P7과 합류합니다. 도박 사이트 접속, 아이디 멸치똥대가리. 대각선에 있습니다.
아이디를 들은 이들이 웃음을 참느라 리시버 너머 잠시 소음이 일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보고를 듣던 남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도심을 내려다보며 주머니 안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일곱 시간을 다 버티지 않을 겁니다. 코드 7, 놈들이 캄보디아에서 썼던 신호입니다. 누군가에게 남긴 흔적이고요.”
- 어? 홀덤 세 판 하고 일어납니다. 음식도 그대로 남겼고요. 따라갈까요?
“아니, 지금 붙으면 눈치챌 겁니다. 두 분은 PC방 점거하시고, P3가 따라붙습니다.”
- P3 이미 움직였어요. 그런데… 이놈 눈치챈 거 같은데요, 팀장님. 걸음걸이가 달라졌습니다.
막 담배를 꺼냈던 그는 한숨을 내쉬곤 옥상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에 지어진 낡고 오래된 건물. 대충 시멘트를 발라 만든 계단엔 담배 전 내가 가득했고, 비상구 표시등은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어 녹색 불만 깜빡인다.
“놈이 남긴 음식 밑바닥까지 확인하신 다음, 회수하는 놈 얼굴까지 증거로 남깁니다. 그리고 놈, 지금 어딥니까.”
- 여기는 P3. 그 새끼 지금 팀장님 계신 방향으로 갑니다. 북쪽입니다. 속도로 보아 약 60초 후 건물 앞 지나갈 거 같습니다.
“전 형사 팀은요.”
- 홍대 입구 진입했답니다.
머릿속으로 60초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온 그는 에어컨 실외기가 짐짝처럼 쌓인 주변을 둘러보며, P3가 말한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홍대 뒷골목, 불야성을 이루는 빛무리의 외곽. 건물은 중심에 속하지 못했고,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다른 건물들로 인해 출입구마저 이상한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숨기 좋고, 숨어들기 좋으며, 알아채기 쉽지 않은 곳. 이런 뻔한 곳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놈은 아마추어다.
- 이두이 팀장님, 살살 합시다.
P3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을 돌아 나온 두이의 앞에 카키색 야상을 걸친 남자가 튀어나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예감했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안녕?”
190cm에 가까운 키, 길게 뻗은 팔다리와 일반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를 가진 그가 불쑥 나타나 생긋 웃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산뜻한 미소와 별개로,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주는 은밀함이 그를 위험해 보이게 만들었다.
“뭐, 뭐야 너!”
심기일전한 놈이 겁도 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제법 위협적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두이의 눈엔 애들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
얼굴 방향으로 날아온 주먹을 가볍게 피한 그가 손목을 잡아채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손목이 완전히 돌아갔다.
“으아아악!”
놈은 비명을 지르며 덜렁거리는 손목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그러게 왜 주먹부터 날리고 그럽니까. 속상하게.”
“이, 이런 미친!”
두이는 겁먹고 물러나는 타깃을 천천히 구석으로 몰았다.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에서 네 걸음씩 물러난다. 좁은 골목. 스스로 덫을 향해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것을 타깃은 모르고 있었다.
“호, 혹시 경찰이에요?”
잔뜩 기죽은 놈이 눈물을 참아 내며 애써 물었다.
“아니.”
“그럼? 뭐, 뭔데? 나한테 왜 이러세요?”
“껌을 좀 사고 싶어서. 그쪽, 끝내주는 껌 팔고 다닌다며.”
껌을 언급하자 사색이 된 타깃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동자엔 공포가 그득그득 차오른다. 경찰이 아니란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그런 적 없는데요.”
“내가 뭘 잘못 알았나….”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 껌팔이 아니에요.”
“곤란한데….”
두이는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이는 찰나, 눈치를 보던 놈이 도주를 시도한다.
하지만 조금 전 들어온 골목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기도 전, 두이가 다리를 뻗어 놈의 발을 걸어 버렸다.
“으아악!”
볼썽사납게 균형을 잃고 철퍼덕 고꾸라진 놈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떤다. 손목이 부러진 탓에 고꾸라지며 바닥을 짚지 못해, 입술과 코가 터져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두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놈 앞에 서서 담배 연기를 흘렸다.
“그러지 말고 좋은 건 나눠야지. 멸치똥대가리 허우성 씨, 물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이름이 불린 놈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천천히 치켜든다.
제법 거센 바람이 불어와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과 입고 있던 재킷이 흔들렸다. 몸에 딱 붙는 검정 셔츠를 가로지른 건 벨트를 발견한 놈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 살려 주세요.”
“나 너 안 죽입니다. 조사에 순응하면, 치료도 해 주고. 밥도 주고 할 건데.”
“지, 지지 진짜 죽어요. 저 꼬리 밟힌 거 알면, 진짜…!”
“KA-947A.”
나직하게 읊조린 그의 구둣발이 부러진 놈의 손목을 지그시 밟아 누른다. 놈은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거품을 물고 두 눈을 뒤집었다.
“어디 있어, 물건.”
그가 서늘한 어투로 되물었을 때였다.
- 팀장님, 전유철 형사 진입합니다.
순간,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경찰차 사이렌 소리.
“더럽게 빠르네.”
두이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비벼 끈 뒤, 손목을 밟았던 발을 떼었다.
이어, 사복을 입은 형사 다섯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이두이! 아이, 씨벌. 죽이지는 말랬지!”
소리 지른 사람은 강력부 형사 전유철이었다.
형사가 아니라 조직폭력배 간부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덩치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의 유철이, 기절한 놈을 보며 길길이 날뛴다.
“안 죽였습니다. 일 복잡해지는 거 싫어서.”
“이게 죽인 거지, 살린 거냐? 또 119 불러야 하잖아! 아오!”
“어쨌든 이 새끼 연행할 거면 취조 자료 공유하는 거로 하죠. 우리 덕에 잡은 건데.”
태연자약한 두이의 반응에 실소한 전유철은 119를 부르라고 소리 지르며, 놈의 한쪽 손에 수갑을 채웠다.
“허우성, 너를 마약류 관리법 위반의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뭐, 미란다 원칙은 여기까지만 하자. 7번이나 들었으니 외웠겠지.”
구시렁거린 유철은 기절한 놈을 일으키는 걸 포기하곤, 소지품 확인을 위해 몸수색을 시작했다. 휴대 전화, 버터플라이 나이프, 담배, 라이터, 지갑.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어느 발레 공연의 티켓을 꺼내 든 유철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유철은 멍하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끔찍하게 잘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어우 야! 설레게, 이 새끼가.”
“선배, 그거 나 줄래요?”
“뭐, 이거?”
유철은 발레 공연 티켓을 흔들어 보이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거 압수품이야. 안 돼.”
“그럼 사진이라도.”
“뭐, 그 정도는.”
서초동 이흠 아트홀 오페라 극장 소월관. 제너럴 발레단 <지젤>
“선배는 놈이 이런 거 보러 다닐 성격으로 보여요?”
“그게 뭔데. 유명한 거야?”
티켓 사진을 찍은 두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몸을 일으키고는 골목 입구에 도착한 승용차를 발견하곤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취조 자료 공유하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야야, 대답은 해 주고 가야지!”
“선배 하는 거 봐서 결정할 겁니다.”
“와, 독한 새끼.”
돌아선 두이는 골목을 빠져나가 대기 중인 차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그제야, 현장을 수습하고 사진 찍던 형사들이 유철에게 다가와 은근하게 묻는다. 다들 이두이의 묘한 분위기에 차마 묻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중이었다.
“팀장님, 누굽니까? 낯이 익은데? 정말 저런 후배가 있었습니까?”
“와, 아이돌인 줄. 배우 누구 닮은 거 같기도 하고. 혹시… 그?”
“아! 그?”
멀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쪼그려 앉아 있던 유철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놈. 이두이. 국가 정보원 국제 범죄 대응팀, 팀장. 해외 물 먹던 엘리트 놈인데, 일 거하게 치고 입국했어. 또라이 중에 상 또라이여도, 일은 또 더럽게 잘해. 잘 봐 둬라, 이번에 우리 팀 제대로 도와줄 구세주다, 저놈이.”
***
코발트색 카펫에 떨어진 쿠션 두어 개와 헝클어져 흘러내린 시트만 보더라도, 남자의 잠버릇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가구로만 채워진 침실.
투 매트리스가 겹쳐져 제법 높은 침대에 엎드려 잠든 남자 위로 창백한 빛이 가로지른다.
일직선으로 벌어진 어깨와 달리 남자의 허리는 가늘고 날렵했다. 적당한 구릿빛이 도는 피부. 단단하게 여문 상체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고, 그중에는 제법 깊은 흉터도 눈에 띈다.
오전 6시 30분.
베개 아래 넣어 둔 휴대 전화에서 단조로운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죽은 듯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익숙하게 시트를 더듬어 베개 아래 손을 넣었다. 이내, 망설임 없이 휴대 전화 알람을 꺼 버린 그는 팔 굽혀 펴기 하듯 상체를 번쩍 들었다가, 다시 풀썩 엎어졌다.
등의 중심을 깊게 가르는 척추 선을 따라 양옆으로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이 꿈틀거린다.
다시 잠들어 버린 것인지 그는 한참이나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쉬지 않고 이어지는 휴대 전화 벨 소리에 이두이는 결국, 잠을 포기했다.
“전화 받았습니다, 이두입니다.”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침실의 적막을 흩트린다.
- 팀장님, 13분 뒤에 물건 도착합니다.
스피커폰으로 돌려 둔 휴대 전화에서 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리핑 가능합니까?”
상체를 일으킨 그가 멍하니 눈을 감은 채 보고를 듣는다.
- 예, 시작하겠습니다. 지젤의 캐스트 명단을 모두 살폈는데, 특별한 점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 지젤 역할을 맡은 무용수가 윤홍주 국토부 장관의 외동딸 윤해서라고 합니다. 로열 발레단 출신으로 나이 31세, 현재 제너럴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인 데다가, 그쪽 업계에서 제법 유명한 편입니다. 그런데 윤홍주 장관의 딸이란 건, 극소수의 사람만 아는 일이라고 하네요?
11월의 찬 공기에 부르르 몸을 떤 두이는 떨어진 시트를 집어 들어 어깨에 둘렀다. 극도로 세련된 외모 때문인지, 시트를 질질 끌고 싱크대로 향하는 모습조차도 제법 근사한 광고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커피 머신의 전원을 켠 그는 머그잔을 꺼내 스탠드에 올리고 캡슐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물건은 뭡니까.”
- 차 키, 신분증, 명함, 안경, 초소형 무전기와 커프스 링크입니다.
“티켓은?”
- 아, 티켓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놈이 예약한 자리는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두이는 하나 남은 검은색 캡슐을 찾아 머신에 넣고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리며 하품을 크게 했다.
“언제는 안 위험했나? 어쨌든 혼자 움직입니다. 오늘은 파트너 필요 없어요.”
- 예. 그런데 팀장님. 제가 윤해서에 대해 좀 파 봤는데요, 팀장님이랑 같은 학교 나온 거 아세요? 해문 고등학교 졸업생입니다.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그가 뜨겁게 내려진 커피에 정수기에서 받은 얼음을 왕창 들이붓는다. 그러곤 어깨를 덮었던 시트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 놓은 뒤 창가로 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뭐가 됐든 우린 정보만 긁을 겁니다. 나머지는 한 검사님이 알아서 하실 거고, 현장 서포트는 남부 지검에서 팀 보내 주기로 했으니 몸 사리죠.”
- 이야, 우리 팀장님 죽을 고비 넘기시더니 성격이 좀 변하셨네요? 캄보디아 계실 땐 물불 안 가리시더니.
해외 범죄 수사 팀에서 일하며 폭탄 테러를 겪은 건 물론이거니와 FBI의 스카우트까지 받았던 그였다. 전 세계를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던 특수 범죄자 강무진을 FBI에게 넘기고, 그 배후였던 국회 의원 강무호를 감방에 넣은 것 또한 이두이였다.
다들 이두이가 한국에 머물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두이는 임무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왔고, 지금의 부서에 정착했다.
“목숨 귀한 줄 알게 돼서요. 어쨌든 브리핑 끝났으면, 이만 끊어요. 회선 다시 돌려놓고.”
- 예, 저는 공연장에서 뵙겠습니다.
싹싹하게 인사한 세현이 전화를 끊었다.
이어 두이는 커피를 물처럼 들이켠 뒤, 옷장을 열어 트랙 슈트를 꺼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빼놓지 않는 아침 조깅을 위해서였다.
바지를 갈아입은 그가 담배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현관문을 세 번, 한 번, 다시 세 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머그잔을 내려놓은 그는 현관 밖으로 나가 도착한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세현이 말한 물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위장 신분을 위한 신분증과 세 종류의 명함, 실시간 영상 전송이 가능한 안경을 비롯해 도청 기능이 있는 커프스 링크까지.
담배를 찾아 불을 붙인 그가 맨 아래 깔린 발레 공연 티켓을 꺼냈다.
그것은 하루 전 체포한 허우성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과 같은 티켓이었다. 물론, 치밀하게 위조해 만든 가짜.
메인타이틀 아래, 당당히 지젤 역할에 인쇄된 이름을 지그시 노려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고작 그 여자의 이름을 떠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찾아온 갑갑함에 저절로 짜증이 치밀었다.
***
전석 매진이라는 홍보성 문구에 걸맞게, 이미 내부는 자리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발레 공연이 열리는 이흠 아트홀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콧대 높은 공연장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유명한 공연이라 해도, 이흠 아트홀은 함부로 무대를 내어 주지 않았다. 적어도 이흠에서 공연했다는 것은, 까다롭고 콧대 높은 예술가들의 니즈를 만족시켰다는 것.
이흠은 곧 예술가들의 명예다.
몸에 붙는 검정 하이넥 셔츠에 캐멀색 코트를 걸친 두이는 자연스럽게 공연장 안으로 들어섰다.
급격하게 내려간 바깥 날씨에 맞춰, 공연장 내부는 훈훈한 공기로 가득했다. 두이는 그들과 섞여 태연히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1층 S석 외곽. 출구와 가까우면서 무대가 잘 보이고 유난히 어두운 좌석은 범죄를 저지르기 최적화된 공연장의 구멍이었다.
이미 좌석 주변엔 제법 많은 사람이 착석한 상태였다. 의미 없이 티켓을 들여다보던 그의 귓속으로 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팀장님, 공연 관계자가 경호 인력을 늘려 달라는 연락을 해 왔다고 합니다. 저희가 들어갈까요?
공연을 고작 10분 남긴 상황, 경호 인력을 늘려 달라?
“이유는요?”
- 단장의 지시라는 것 외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패턴을 보아하니, 테러 예고를 받은 것 같은데요?
“정우랑 같이 움직여요.”
- 예!
두이는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둔 안경을 꺼내 썼다. 그러곤 놈이 예약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직 놈이 체포된 것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조직 내에선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지만, 속단하긴 이르다.
그럼, 이 모든 것은 우연일까. 계획된 범죄일까.
두이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커튼이 닫힌 무대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껌이라고 부르는 KA-947A은 신종 마약으로, 멕시코에서 만들어져 동남아시아를 통해 급격하게 확산된 마약이었다.
정확히는 모르핀을 대체할 진통제를 만들고자 했던 제약 회사의 실패작이, KA-947A였다. 돌발성 통증을 제어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후 찾아오는 과도한 성 흥분과 감각 상실. 지독한 무력감과 강한 중독성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제약 회사는 KA-947A의 인증에 실패한 뒤, 자료를 폐기했다. 아니, 폐기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소속 연구원 한 명이 그것을 빼돌려 마약상에게 팔아넘겼다.
제약 회사는 당국에 소속 연구원을 신고했으나, 그때는 이미 다크 웹을 통해 약이 유통되기 시작한 뒤였다.
놈들은 물이 닿으면 밀가루 반죽처럼 엉기는 약의 특성을 이용해 동그랗게 만든 뒤, 설탕으로 코팅했다.
마치, 껌처럼.
그렇게 KA-947A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나름대로 마약 청정국으로 신종 마약 범죄에서 자유롭다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 데이트 폭력범으로 구속된 남자의 혈액에서 KA-947A가 검출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감시 체계가 뚫렸다는 뜻. 경찰은 국가 정보원에 공조를 요청했고, 부장은 적임자로 이두이를 지목했다.
그것이 지금, 관심도 흥미도 없는 발레 공연장에 앉아 자신의 첫사랑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이유였다.
빌어먹을 윤해서가 대체 왜 이 판에 얽혀 있는 건지, 미적지근한 짜증이 치민다.
“실례합니다.”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열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 그의 옆 좌석에 조용히 자리했다.
짙은 차콜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키는 190cm 이상. 목덜미를 덮는 머리 길이에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이목구비는 선명한 편이다.
두이는 습관처럼 상대를 관찰했다.
상대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인상을 풍겼다.
담배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애연가. 찬 공기가 들러붙은 코트는 지하 주차장이 아닌 1층 로비를 통해 진입했다는 뜻이고, 남자 혼자 발레 공연을 보러 왔다는 것은 공연 마니아. 혹은 목적을 가진 쪽이다.
어떤 면으로도,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발레 공연 좋아하십니까?”
정면을 노려보던 두이는 제게 묻는 것이 분명한 남자의 말에 예의 멋쩍은 미소로 답했다.
“발레 공연보다는 이 공연의 주인공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예쁘거든요.”
그러자 턱 끝을 가볍게 끄덕인 남자가 웃는다.
“음, 인정합니다. 저도 좋아하는 배우이자 무용수예요.”
두이는 안경테를 문지르며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세현이 잽싸게 보고한다.
- 알아보겠습니다.
피차, 초면인 상황. 더 이상 상대와 할 이야기는 없었다.
객석의 의자 간격은 키가 큰 그에겐 이코노미석에 몸을 구겨 넣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서서히 소등되는 조명, 두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구두 끝으로 앞좌석 시트 아래를 더듬었다.
툭.
역시, 발끝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무대가 밝아졌다. 무대 위에 등장한 무용수들을 발견한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진다.
아름다운 농촌을 배경으로, 네 명의 발레리나와 한 명의 발레리노가 춤을 추다가 연기에 돌입했다. 당연히 그들 사이에 윤해서는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단번에 알아보았겠지.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꺼내다 말고 부러 툭 떨어트린 두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떨어진 휴대 전화를 찾아 몸을 숙인 얼뜨기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던 두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남자의 눈빛에서 일견 몸에 밴 오만함이 느껴진다.
제가 휴대 전화를 찾는다는 걸 알면서도 놈은 발을 치우지 않았다.
빌어먹을.
두이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드는 척, 시트 아래로 손을 넣었다.
지퍼 백에 담겨 시트 바닥에 고정된 물건의 형태가 익숙하다.
‘총?’
공연장의 경계가 삼엄해진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좌석의 주인인 허우성은 현재 유치장에 있다. 그럼, 누가 이곳을 테러할 예정이었을까.
가까이에 있는, 가장 의심스러운, 혹은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 범인이다.
‘이 새끼군.’
휴대 전화만 챙겨 바로 앉은 두이는 어느새 무대 위를 활보하는 윤해서를 찾아냈다. 주인공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 아래,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사위가 예술의 경지에 오른 발레리나라는 것을 증명했다.
종잇장처럼 가느다란 몸, 발끝을 세우고 손을 뻗어 움직이는 그녀는 종종거리는 작은 새 같았다.
자그마한 얼굴에 가득 찬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 놀랍도록 동서양의 조화가 완벽한 저 얼굴을 잊는 건 불가능하다.
두이는 무대 위의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지젤의 파드되와 그랑 파드되는 아주 볼만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1막보단 2막을 좋아합니다.”
몸을 기울인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두이는 무대 위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 중 말을 거는 매너 없는 행동임을 하면서도, 놈은 거리낌이 없었다.
“처절하고, 비극적이거든요. 미쳐 버린 지젤이 망령이 되어서도 결국 자신을 배신한 왕자를 위해 춤을 춘다는 것.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쪽 자리, 내가 예약한 건데.”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나직하게 중얼거린 남자가 묵직한 지퍼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린다.
- 최우재, 나이 35세. 과거 이정 건설 상무 이사로 현재는 IJ 투자 그룹 재무 이사이자 사장입니다. 팀장님, 위험합니다.
세현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갈라질 때였다.
탕!
2층 테라스 석에서 들려온 단발의 총성이 공연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린다. 순간 멎어 버린 오케스트라와 무용수들의 몸짓.
멍하니 넋을 놓은 채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악!”
“총이다!”
“꺅! 비켜!”
만석인 오페라 홀에 모인 수천의 관객들이 너도나도 공연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아비규환을 만들었다.
그것은 두이의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우는 소리, 여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가운데 누군가는 총에 맞은 것 같다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가짜 총성입니다. 2차 테러 대비하십시오.”
- 예!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바닥을 짚은 두이는 눈에 띄지 않게 시트 아래 총을 회수했다.
지금 들린 총성은 가짜다. 탄약 냄새나 반동의 울림이 없는 스피커에서 나온 사운드. 하지만 공연을 망치고 사람들을 겁주는 데는 성공한 테러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놈이 담배를 꺼내 무는 게 보였다.
이곳이 공연장임을 망각했든, 총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든 정신이 이상한 게 분명한 놈이 담배에 불을 붙이곤 태연히 연기를 흘린다.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다리를 꼬아 앉은 최우재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무대였다.
“이봐요! 안 피합니까?”
두이는 부러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최우재의 코트를 당겼다. 그러자 웅크린 두이를 내려다본 최우재가 싱긋 입매를 올리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두이의 입술에 대어 준다.
“여유를 가져요. 가짜 총성인 거, 그쪽도 알지 않습니까?”
이 새끼….
욕설을 뇌까린 두이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말은, 제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 이것 봐라?
두이는 얼굴에 덧씌웠던 어리바리한 회사원의 가면을 벗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담배를 받아 바닥에 비벼 끈 그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자, 최우재는 다시금 무대 위의 누군가를 응시했다.
“그 자리에 앉을 새끼의 머리통을 박살 내러 온 건데… 생각보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요. 어쨌든 다행입니다. 공연이 무사히 중단되어서.”
최우재가 바라보는 상대는 다들 빠져나간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서 죽일 듯한 눈빛으로 이곳을 노려보는 여자였다.
공연 중 그 사랑스럽던 미소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주먹을 말아 쥔 윤해서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어금니를 눌러 문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 있는 여자의 눈빛엔 지독한 분노가 뜨거운 물처럼 끓어올랐다.
그러다가 최우재가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느긋하면서도 태연하게, 미친놈처럼 산뜻한 미소를 띤 채 박수를 보낸다.
“여전히 예쁘네. 우리 해서.”
***
공연장을 나선 두이는 입구를 막은 경찰들과 대치 중인 관객 틈에 섞이는 대신, 미리 확보해 둔 비상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복도 코너를 돌며 코트를 벗어 버린 그가, 소화전 안에 든 시큐리티 조끼를 꺼내 걸친다. 이어 보안 업체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까지 눌러쓴 채, 허리에 가스총을 걸자 그는 영락없는 공연 관계자로 변했다.
복싱 선수처럼 단단하게 균형 잡힌 상체에 모자 안으로 완벽하게 가려져 버리는 작은 얼굴. 마스크까지 쓴 그가 관제실의 문을 열고 말했다.
“2층 테라스 석에서 총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2층? 당장 CCTV 돌려!”
새로운 정보를 얻은 이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두이는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이따금 VIP의 방문 시에만 오픈하는 비상구는 보안실을 지나 관제 시설과 연결된 공연장 내의 비밀 구역으로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소리 없이 그 안으로 몸을 숨긴 두이는 익혀 둔 길을 따라 걸었다.
“또 봅시다.”
최우재는 윤해서가 관계자들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서 사라진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과거 이정 건설의 대표였던 이정수는 건달 출신 사업가로 악명 높았다. 이정 건설은 재개발 반대 세력 무력화, 불법 점거 등 온갖 악행과 비리를 저질러 온 곳이었으나, 묘한 사업 수완으로 건설업계의 큰손이라 불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3년 전 벌어진 이정 건설의 주가 조작 및 대표 이사의 살인 청부 스캔들로 인해 대표가 구속되었다.
이정 건설의 실세라 불리던 최우재는 사건 이후, 대한민국에서 사라졌다. 당시, 사람들은 최우재란 인물을 제법 다각도로 평가하고 궁금해했다. 이정수의 개라든지, 호스트바 출신의 고급 콜보이라든가 하는 루머를 양산하고 퍼트렸다.
그런데 오늘, IJ 투자 그룹의 재무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제가 누구인지 뻔히 안다는 얼굴로, 요란한 축포를 터트렸다.
‘개새끼.’
건달이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게 준수한 외모에 고급스러운 태를 가진 놈이 윤해서를 알고 있다.
안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 해서’라며 애정을 드러냈고, 테러가 일어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기분이다. 누군가 짜 놓은 치밀한 판에 발 들인 것 같은 기분 나쁜 촉이 예리하게 곤두선다. 타깃은 정말 윤해서였을까. 나직하게 욕설을 흘린 그의 얼굴에 평정이 깨어졌다.
- 팀장님, 입구에 차량 도착 15초 전입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배전함이라고 쓰인 문이 열리고, 주차장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5초 뒤, 그 앞에 멈춰 선 SUV 한 대.
뒷좌석에 몸을 실은 두이는 모자를 벗자마자, 조끼에 넣어 둔 총을 꺼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조수석에 탄 세현에게 안경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이 재밌게 됐네요. 부장님 어디 계십니까?”
***
두이는 한가롭게 책상머리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서 부장을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부장님.”
일주일이란, 이흠 아트홀에서 가짜 총격전이 벌어진 지 7일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날, 현장에서 곧장 본부로 돌아와 상관인 서 부장부터 찾았으나, 그는 면담을 거부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번 건은 서명택 부장이 직접 판을 짜고 모든 결정을 이두이에게 일임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뭐? 개인적인 문제로 보고를 들을 수 없어?
“부장님, 그거 제 보고서 맞습니까?”
세련된 포마드 헤어스타일에 살짝 흐트러진 정장 차림의 서명택은 나른한 분위기를 가진 속을 알 수 없는 부류였다.
두이의 질문에 고개를 기울인 서 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찬 바람이 싫다며 창문도 열지 않은 실내. 지독한 담배 연기가 금세 피부로 들러붙는다.
“그래. 네 보고서는 맞는데, 그 총격전은 단순 스토커 사건 아니었어?”
“단순 사건이었으면 제가 보고서 올렸겠습니까?”
되묻는 두이의 목소리가 오만불손하게 비틀린다.
여전히 비딱하고 버릇없는 놈이라고 구시렁거리며, 서 부장은 혀를 찼다.
“그럼 그 스토커는 누군데. 결론도 안 난 사건을 보고부터 올린 이유는 뭐야.”
“추가적인 권한이 필요합니다.”
“권한?”
서 부장이 담배 연기를 두이의 방향으로 흘려 보내며 이마를 긁었다. 뒷짐을 지고 선 이두이는 군인 출신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국내 브로커였던 놈의 소지품에서 발레 공연 티켓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놈이 예약한 좌석 아래에서 글록(미국 글록사가 생산하는 권총)을 발견했는데, 일개 마약 브로커가 소지할 만한 무기는 아닙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최우재를 만났고요.”
“으흥, 계속해.”
“윤홍주 장관이 아신 은행 총재 시절, 최우재와 깊은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정 건설 스캔들이 터지고 최우재가 구속을 피해 도피하면서 연이 끊어졌습니다.”
“어떤 깊은 관계였다고 생각해?”
담배를 비벼 끄는 서 부장의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두이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삐딱하게 치켜들며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최우재와 윤해서는 약혼 관계였습니다.”
서명택은 제대로 꺼지지 않은 담배를 내려다보며 그 위를 들고 있던 보고서로 덮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설명하라는 듯한 건방진 눈빛이 서명택을 꿰뚫는다. 누가 부하고, 상관인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최우재는 윤홍주에게 원한이 있어. 그때 이정 건설을 물 먹인 게 바로 아신 은행이거든. 이상하지 않아? 제 딸과 결혼해 사위 될 놈을 물 먹이고, 범죄자로 만들어 버린 이유가 뭘까?”
“거래가 틀어졌나 보죠.”
“어떤 거래를 했을 것 같아?”
서명택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공연장에서 일으킨 총성, 우리 작품이다.”
부릅뜬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명택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이두이는 부하였지만, 부리기 어려운 놈이었다. 사람을 죽여 본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놈의 전신에 들끓었다.
“이유가 뭡니까?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급하게 결정된 사안이었거든. 그 공연, 중단되지 않았으면 윤해서 무대 위에서 죽었어.”
이두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 걸 본 서명택이 책상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들어 벽 모니터를 켰다.
“이거나 봐.”
두이는 서 부장이 튼 모니터로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모니터에 뜬 건, 소파에 앉아 손을 모은 남성이었다. 초조하게 움켜쥔 손을 쥐어뜯던 60대 남성이 마주 앉은 누군가에게 말했다.
“나를 노리던 놈들이, 이제는 해서를 노려. 이번 일도 분명 그놈들 짓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총질이라니!”
총질이란 단어를 내뱉은 남자는 손톱 거스러미를 콱 뜯었다. 이어 카메라가 든 가방이 기울어지더니, 60대 남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장관님, 하지만 이정수는 아직 출소하지 않았습니다. 원한을 가질 만한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최우재가 입국했잖아! 그놈이… 그놈이 우리 해서 죽이려는 거야. 깡패 새끼가 어딜 감히 해서를 건드려!”
“하지만 최우재는 알리바이가 명확합니다. 입국과 동시에 저희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고요.”
“그놈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쓰겠어? 그만해. 안 도울 거면, 내 사람들 쓸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네가 어찌 나한테 이러나! 내가 범인을 알려 주는데, 왜 수사를 안 해!”
“진정하세요, 장관님. 일단 윤해서 씨는 무사하고 총성은 가짜였습니다. 범인들이 왜 장관님을 노리는지, 짐작 가는 거… 정말 없으십니까?”
“이, 이유가 어디 있나! 정치적인 목적이겠지. 분명 야당에서 수를 쓴 거야.”
화면 속 두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서 부장은 윤홍주가 담배를 태우는 화면을 빠르게 넘기곤, 다시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안 되겠어. 이봐, 사람 좀 붙여 줘. 24시간 우리 해서 옆에 붙어서 감시할 수 있는 놈으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실력 좋은 놈… 절대 죽지 않는 놈으로 데려와.”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두이는 멈춘 화면을 노려보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서 부장이 의자를 젖히며 빙그르르 돌아앉는다.
“야, 이두이.”
“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두이를 빤히 보며, 서 부장이 손깍지를 거꾸로 끼워 턱을 괬다.
“너 윤해서, 24시간 커버 쳐 볼래?”
“예?”
“경찰이 직접 장관 딸내미 보호한다는 소문 돌면 안 되잖아. 그래서 저거 우리 쪽으로 넘어왔거든. 어때, 오랜만에 언더커버 한번 할래?”
과거, 아신 은행이 이정 건설의 꼬리를 자른 이유는 해외에서 유입된 블랙머니 때문이다.
당시 아신 은행 측에선 이정 건설에서 유동하는 자금이 블랙머니인 줄 몰랐다고 했다. 윤홍주는 그 주장을 모두 소명하여 아신을 살렸지만, 이정수는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 최우재는?
“그 자리에 앉은 새끼의 머리통을 박살 내러 온 건데….”
두이는 최우재의 말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런 두이를 빤히 쳐다보던 서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마, 뭐 그렇게 고민을 해? 약쟁이를 움직이는 건, 약쟁이라는 거 잊었어? 우린 KA-947A의 유통 경로와 그 꼭대기에 있는 KING만 찾아내면 돼.”
심드렁한 말투에 이두이의 날렵한 눈매가 가볍게 찌푸려진다.
“이번에 윤해서 살해를 사주한 놈이 KING이라는 뜻입니까?”
천천히 집무실을 거니는 서 부장을 따라 두이의 눈빛이 움직인다.
“내 감인데, 이번에야말로 KING 목 딸 수 있을 것 같다. 이정수가 킹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네가 붙어, 윤해서한테.”
“저 움직이고 싶으시면, KING이 왜 윤홍주와 윤해서를 노리는지 알려 주십시오. 3년 전 이정 건설 이정수가 살인 청부한 상대가, 혹시 윤홍주입니까?”
걸음을 멈춘 서명택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두이와 마주 서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윤해서. 그때도 윤해서를 죽이려 했어. 어때, 이제 좀 할 마음이 생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