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에필로그 】
래희가 ‘초기화’ 전의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건 수능이 끝나고 찾아온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녀는 지난 19년간 늘 그래 왔듯이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비는 행사에 참여했다.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날만 가득하게 해주세요.’
후―
소원과 함께 촛불이 꺼지자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스위치를 켠 것처럼 잊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을 모두 떠올렸다.
래희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휘몰아쳐 눈물을 왈칵 쏟기 시작했다. 그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은 볼을 타고 흘렀다.
잠시 뒤, 집 안의 불이 켜지고 눈물로 범벅된 래희의 얼굴을 본 부모님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일 모래면 성인이 될 애가 새삼스럽게 사춘기를 겪는 것도 아니고, 수능을 실패한 것도 아니니 큰일이라도 일어난 게 분명했다.
부모님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래희는 그냥 눈물이 나서, 라는 어설픈 변명과 함께 정확한 대답을 피했다.
전생에는 게이트 사고에 휘말려 제 곁에 존재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이번에는 그녀의 곁에 함께했고, 존재하지도 않던 연년생의 남동생이 맞은편에 앉아 다가오는 고3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번 생에 새로 생긴 남동생은 제 누나가 울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평소라면 괘씸했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남동생의 얼굴에 래희는 울다 말고 웃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이었다.
“진짜, 제발. 수능 대박나게 해 주세요!”
두 눈을 질끈 감고 아직까지 소원을 비는 모습이 제법 꼴값이었다. 지금이야 저렇게 소원을 빌어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전부 잊은 채로 야자를 패스한 채 PC방으로 도망치겠지. 래희는 뻔히 보이는 이번 생의 남동생의 미래를 점쳐 보았다.
래희의 부모님은 그녀가 울다 말고 제 동생을 보고 웃기 시작하자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릴 때부터 느낀 거긴 하지만 첫째나 둘째나 가끔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래희의 아버지는 고개를 내저으며 제 누나가 울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제 앞의 케이크에만 집중하고 있는 예비 고3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권희우. 말로만 빌지 말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나 좀 해 보렴.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보이면 수능을 망해도 엄마가 뭐라 하지 않지.”
이번 생에 새로 생긴 남동생의 이름은 권희우. 한때 그녀의 친구이자 곰순이로 불리던 아이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외모도 같았다.
아, 그럼 남동생이 곰 인형이라도 되냐고?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한 곰순이 희우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착하고 순진한 곰순이와 달리 제 앞에 호적을 공유한 저 인간은 제법 남동생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그냥 존재 자체로 재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전 생의 기억을 방금 막 떠올린 래희는 처음으로 제 앞에 앉은 남동생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빛을 알아챈 권희우는 미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적 메이트를 보며 부모님께 속삭였다.
“엄마. 권래희 미쳤나 봐요. 울다가 웃다가 이상해! 수능도 끝났는데 아직 저러는 거 보면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탁―!
권희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빠가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며 말했다.
“누나한테 미쳤다느니 제정신이 아니라느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아니, 아빠!”
그는 벌게진 이마를 부여잡으며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저거 눈빛 좀 봐요! 눈이 이상하다니까?”
딱―!
“누나한테 저거가 뭐야, 저거가!”
그러나 권희우는 이번에도 딱밤을 한 대 더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래희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싸가지 없는 새X”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감상에 젖어 있었을 뿐, 각성자나 몬스터가 사라진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19년을 살아온 래희는 제 눈앞의 희우가 전생의 곰순이가 아닌 그저 징그러운 혈육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딱―!
“악!”
“너는 동생한테 새X가 뭐냐 새X가. 낼모레 성인이라는 애가 말본새가 그게 뭐니!”
말을 함부로 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은 부모로서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존재했다.
이전 생에 대한 기억을 찾았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나온 욕설에 래희는 결국 권희우와 마찬가지로 아빠에게 훈육을 빙자한 꿀밤을 한 대 맞고야 말았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번 생에서의 래희의 일상이었다.
* * *
새로 재정립된 세상에서 맞이하게 된 20살의 3월.
한국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한 래희는 이번 생엔 처음 와 보는 대학교임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학교를 누빈 사람처럼 능숙하게 길을 찾아가며 캠퍼스 안을 이동하고 있어다.
‘또다시 대학이라니…….’
어쩌다 보니 이과를 선택하는 바람에 생물학과에 진학하고 말았다.
공대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의사가 될 성적은 아니었으니 자연스럽게 자연대로 진학이 결정 나 버린 거였다. 물론 대학 타이틀을 포기하지 못해 결정한 과였다. 대학까지 왔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휴학하고 피트(PEET, 약학대학 입문자격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겪어 보지 않아도 머지않아 미래에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 래희는 예상이 갔다.
피트 준비는 무슨. 공부하기 싫어서 졸업하자마자 빵집이나 차리겠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쓸모없는 이과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제과제빵을 선택해 그쪽으로 진학했어야 했다. 이왕이면 재능을 살려 외국의 유명한 파티시에 전문대에 진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래희는 그렇게 또다시 돌아온 캠퍼스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생에는 되도 않는 전공 좀 살려 보겠다고 랩실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다시 없을 거였다.
‘뭐, 일단 지금은 1학년이니까.’
대학원이나 연구실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자.
래희는 교양 수업 교재를 들고 15분 뒤에 있을 수업이 열릴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워낙 익숙한 캠퍼스라 구경할 생각 없이 그저 앞만 보며 목적지를 향해 걷던 래희의 뒤로 누군가 소리소문없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꺅!”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 래희는 작게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돌았다.
그러자 자신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왔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을 홉뜨던 래희는 자신을 놀라게 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눈을 크게 떴다.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바로 ‘김주현’이었다.
“아…….”
래희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오해한 건지 김주현은 재차 죄송하다, 말하며 그녀에게 사과해 왔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길을 몰라서요…….”
신입생이라 길을 잃었는데 마침 같은 교재를 들고 계시길래… 혹시나 싶어서 길을 물으려던 게, 그만 놀라게 하고 말았네요.
180 초반의 다정하게 생긴 미남. 눈썹을 덮은 곱슬기 있는 앞머리에 깔끔한 회색 맨투맨을 입은 김주현은 누가 봐도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잘생겼다.
만약 래희에게 이전 생에 대한 기억이 없었더라면 바로 넘어갔을 만한 얼굴의 그는 귀 끝이 빨개진 채 그녀를 향해 연신 사과를 해 왔다.
이번 생에는 그와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래희는 짧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가 찾는 장소는 저 앞에 있는 건물 안에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한 뒤 깔끔하게 그를 무시하며 제 갈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흥미가 붙은 건지 김주현이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같은 수업을 들으시는 것 같은데, 우리 이왕 이렇게 인연 맺은 거 서로 통성명 정도는 하는 게 어때요?”
우선 제 이름부터 말하면 저는 김주현이구요, 올해 경영학과로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는 자기소개였다. 그러나 언젠가의 첫 만남과 같은 대사에 래희는 저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하…….”
이 찰거머리.
이번 생엔 이 인간과 엮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물론 이전 생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떻게 떼어 낼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권래희!”
저를 붙잡고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김주현을 바라보던 래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윤재언이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래희는 구세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윤재언을 향해 손짓했다.
이전 생과 달리 이번 생에서 래희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윤재언을 만났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계시니까, 그리고 윤재언의 아버지인 윤청현이 그녀의 보호자가 될 일은 전혀 없었으므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 자체도 기적일지 몰랐다.
그래서일까 래희와 윤재언의 관계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거리감 있는 그런 관계였다.
국가대표 펜싱 선수로, 체대생인 윤재언은 빠르게 래희에게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누구야?”
“음…….”
래희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분이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을 잃어버리셨다 해서.”
“아, 그래?”
윤재언은 래희의 대답에 눈앞에 남자를 바라봤다.
‘하.’
표정을 보아하니 갑작스럽게 등장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윤재언은 그런 것에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므로 그런 그의 태도를 모른 척하며 말했다.
“10분 뒤에 있을 ‘논리와 이해’라면 바로 저 건물 1층으로 가시면 돼요. 저는 이 친구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어서 빨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든가 해야지.
래희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그녀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윤재언은 그를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곤란할 정도로 친한 척하는 그런 무례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숨기며 웃으며 대답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수업 때 봐요.”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던 건지 김주현은 래희를 향에 눈웃음친 뒤 뒤돌아 건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윤재언과 김주현 두 사람은 래희와 함께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 캠퍼스 안에서 계속해서 부딪히며 신경전을 펼치곤 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바로 류정우.
래희는 왜 기억을 찾았음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20살에 류정우를 탈덕했을까?
그건 기억을 찾았던 그 이후로 돌아가야 한다.
* * *
모든 기억을 되찾은 뒤, 래희는 제일 먼저 포털사이트에 류정우를 검색했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현재 가장 잘나가는 1군 아이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래희는 그 1군 아이돌의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전부 앨범에 투자하는 그런 평범한 돌덕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은 이후는 많이 달라졌다.
‘…못 보겠어.’
모든 기억을 되찾은 이상 이제 자신은 류정우를 아이돌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전과 같이 최애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담백한 태도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멀리서라도 바라보자는 심정으로 바로 연말에 열렸던 콘서트를 보러 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류정우의 모습을 보자마자 오열을 하고 말았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사람처럼. 주변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보며 ‘진짜 광팬인가’라는 태도로 흘끔대고 있었다.
많고 많은 콘서트 좌석 중 겨우 하나를 차지해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오열하는데 직접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작 23살의 아이돌 류정우를 붙잡고 일방적으로 제 감정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래희는 그날 이후 조용히 류정우를 덕질하던 것을 멈췄다. 간간이 류정우에 대한 근황만을 찾아볼 뿐 그 이상의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날 류정우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러 온 그날까지, 래희는 그를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