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 *
삐이이―
이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몸은 우주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래희가 초기화 버튼을 누른 직후 정신을 잃은 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류정우는 다시 눈을 뜨니 새카만 공간 속을 힘없이 부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패한 건가?’
분명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기억을 잃을 것이라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때였다.
어디선가 푸른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류정우는 빛이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빛은 바로 제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뭐지?’
그리고 곧이어 손목의 빛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해 그가 그동안 잊고 있던 팔찌 모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
언젠가 래희와 세계수를 성장시키고 보상으로 받았던 ‘세계수의 소원 팔찌’였다.
팔찌의 형태가 나뭇잎 모양으로 엮어서 만들어지자 뒤이어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팔찌 위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팔찌(SS)’에 소원을 비시겠습니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그가 소원을 빌자마자 시야가 어지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그동안 그가 겪어 온 과거가 잔상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그가 겪었던 회귀를 포함한 기나긴 시간이었다.
래희와 함께였던 마지막 순간부터 거꾸로 되감겼다.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숨을 나눴던 그때의 기억이 시작이었다.
‘래희 씨.’
래희의 입술을 훔친 이후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가 토해 내듯 내뱉었다.
‘나는 어때요?’
당황한 듯 떨리는 래희의 눈동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랑해요.’
저도 모르게 내뱉은 고백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느껴진 감정에 저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뒤에 과거 속의 래희가 입을 열었다.
‘저도요.’
이미 겪은 장면이었지만 마치 저가 지금 저 순간에 있는 것처럼 지켜보던 류정우의 심장도 미칠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했던 일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류정우 씨! 이것 좀 도와줘요!’
집을 청소하던 도중 밖에서 그를 부르는 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뒷말도 듣지 않고 뛰쳐나간 그는 제 시야에 보이는 광경에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
래희와 곰순이가 낑낑대며 풀어 뒀던 소 ‘딸기’를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전날 게이트를 도느라 바빠서 밥 주는 걸 잊었더니 행복도가 낮아져서 래희에게 반항하는 듯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울타리 수리를 하던 와중 도망가서 작물을 훔쳐먹고 있었어요!’
아니, 마른 건초가 주식이라면서 아직 덜자란 작물을 그렇게 먹어대면 어쩌자는 거야!
래희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류정우는 귀엽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류정우는 아마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되감기고 있는 시간의 흐름에 제 몸을 맡겼다.
* * *
아이돌 류정우.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1군 아이돌 피에타의 멤버였다.
어릴 적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아이돌로 데뷔하는 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빛을 보지 못한 채 곧바로 해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 대형 소속사에 캐스팅되어 재데뷔에 성공하여 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2년 차 프로 아이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 무너져 가는 오래된 지하 쇼핑몰 구석에서 30명도 안 되는 한 줌의 팬들과 팬미팅을 하던 과거와 달리, 번듯한 무대와 조명, 그리고 팬들을 위한 편안한 좌석들이 배치되어 있는 쾌적한 장소에서 피에타 정규 1집 응모 팬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건가?’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팬 사인회는 아이돌로서 당연히 해야 하지만, 하기 힘든 스케줄 중 하나였다. 직접적으로 팬을 대면하는 자리.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한 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얼마 남지 않은 줄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몇 명 안 남았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자.
팬 사인회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태도가 있다. 첫 번째는 ‘아 진짜요.’라는 대답하지 않기.
그리고 두 번째는 ‘동태눈깔’하지 않기.
하지만 팬들의 중복되는 레퍼토리에 지겨운 기색 하나 없이 항상 밝은 태도를 유지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의 처절한 실패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다시는 그런 망돌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1군 아이돌이 된 지금까지도 열심히 제 직업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어? 오빠, 얼굴에 김이 묻어 있어요!”
프로 아이돌이라면 백 번 넘게 들은 것 같은 드립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해야 했다.
“네? 김이요?”
류정우는 능청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팬은 밝게 웃으며 제가 준비해 온 드립을 마저 완성했다.
“잘생김이요!”
“아~”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서 대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재휘가 박수 치며 속삭였다.
“형은 진짜… 지독한 인간이야.”
류정우는 익숙한 최재휘의 악담을 산뜻하게 무시하며 다음 팬을 맞이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마지막 순서의 팬이 제 앞에 다가왔다.
아, 익숙한 얼굴.
류정우는 반가운 얼굴에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동생이 집에 없었어?”
“네! 다행히 걔는 수학여행 기간이라 내일 저녁에 들어올 예정이라서 이렇게 오빠를 보러 왔죠!”
권래희. 류정우가 망돌이던 시절부터 그의 팬이었던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모든 행사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 고3 아니었어요? 공부 안 해도 되는 거야?”
“아, 오빠한테까지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익숙하다는 듯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몇 번 주고받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매니저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여기서 슬슬 끝내야 할 듯했다.
그리고 귀신같이 그 타이밍을 알아챈 건지 래희는 자신이 들고 온 종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녀가 꺼내 든 건 팬 사인회에서 가장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인 ‘화관’이었다.
‘아…….’
화관을 쓰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결국 아이돌이 된다면 이런 걸 쓰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과거 망돌인 시절 자신은 이런 이벤트를 할 수 있는 다른 아이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니까.
‘초심을 잃지 말자.’
류정우, 망돌 시절을 기억해.
그는 래희가 건네는 하얀 꽃들로 꾸며진 화관을 익숙하게 받아 들어 제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뒤쪽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팬들을 향해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그렇게 그가 팬들을 향해 서비스를 하는 사이 래희는 제 가방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하얀 이면지였다.
구겨지지 말라고 파일에 넣어 온 걸 보니 그는 오랜만에 흥미가 생겨 래희에게 물었다.
“그건 뭐죠?”
“아, 오빠 말대로 이제 고3이잖아요. 앞으로는 대학 갈 때까지 최소 1년은 오빠를 못 만날 것 같아서요.”
“어… 안 되는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자 류정우는 멈칫했다.
이맘때쯤이면 수험생 팬들이 그를 잘 못 만날 거라고 말하는 건 익숙한 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팬이 모자랄 일 없는 1군 아이돌인 그는 이제 아무리 제 오랜 팬인 래희라 하더라도 절대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그의 몸은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섭섭할 리가 없을 테니까.
“오, 오빠도 저를 못 봐서 아쉬운 거예요?”
진짜 영광이다.
래희는 예상하지 못한 제 최애의 발언에 기분이 좋아 발랄하게 말하며 가져온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사인하세요. 혼인신고서예요. 여기다 사인해 주시면 1년 뒤에 바람 안 피고 돌아올게요.”
저 이제 만 18세라서 부모님 동의만 받으면 돼요.
물론 ‘혼인신고서’ 같은 건 팬 사인회에 매번 한두 명 정도 들고 오는 익숙한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동안 류정우는 능숙하게 팬들의 혼인신고서를 받아치며 에둘러 거절하고는 했는데 충동적으로 이번에는 사인을 해 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옆에 굴러다니는 펜을 들고서 래희에게 말했다.
“여기다 사인하면 돼요?”
“네?”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에 래희가 당황한 듯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오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연히 그녀로서는 사인을 바라고 혼인신고서를 내민 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그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으므로, 류정우는 그런 자신의 팬의 당황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제 서명을 적어 넣었다. 심지어 이름을 적은 칸에는 활동명인 ‘정우’가 아니라 ‘류정우’라는 이름을 정자로 적어 넣기까지 했다.
그리고 래희가 사인이 끝난 혼인신고서를 들고 가려 하자 들고 가지 못하도록 혼인신고서를 꽉 붙잡고는 잠시 생각했다.
‘…이대로 돌려주기는 싫은데.’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뭐, 오랜 팬이니 오지 않는 동안 탈덕할까 봐 불안할 수도 있는 거겠지.
“돌아오면 그때 다시 돌려줄게요.”
그러나 1년 뒤, 수능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음에도 자신의 팬은 다시 자신의 앞에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매번 그녀가 팬 사인회에 왔는지 남몰래 확인했던 류정우로서는 이유 모르게 매우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정말 탈덕이라도 한 건가?’
섭섭하네.
그리고 래희가 남겼던 그날의 혼인신고서는 류정우의 집안 어딘가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고, 그가 그 혼인신고서를 다시 발견한 건 그로부터 5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