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탁.
전등을 켜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벽과 천장의 조명에 밝은 불빛이 들어왔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기둥과 천장은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래희는 분명 처음 와 보는 공간임에도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과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아마 방금 스치듯 봤던 체자레의 기억 속에서 본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그들이 서 있던 복도 저 끝에 웅장한 붉은 문을 발견했다.
조명은 그 문으로 향하는 길만을 비추며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라는 듯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퀘스트대로라면 저 방 안에 체자레가 기다리고 있다. 래희는 조급해진 마음에 류정우의 손을 놓고선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래희의 손이 자연스럽게 문고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래희가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먼저 문이 활짝 열렸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열린 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는 키가 큰 남자의 뒷모습.
약간 흐트러진 금발의 남자는 제 방 앞에 사람이 있음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래희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체자레?”
물기 섞인 래희의 목소리에 남자가 뒤돌아섰다. 금태 안경을 쓴 남자는 그녀의 짐작대로 바로 체자레였다.
“왔어?”
띠링―!
[축하합니다! ‘라스트 퀘스트: 류정우의 비밀’을 완료하였습니다!]
눈앞에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알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래희는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
언젠가 체자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하겠다고 마음먹었더랬다. 그리고 조금 전 모든 걸 다 알게 된 이후에는 꼭 원망의 말을 퍼부어 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마주한 자신의 보호자의 두 눈을 바라보자 래희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 체자레는 류정우와 래희 두 사람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단지 롬바르나와 우연히 엮였다는 사실 만으로 상처뿐이었던 수많은 회귀를 겪게 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마주하게 된 그를 보니 원망의 말은 단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동안 제 스승을, 그리고 한때 보호자였던 체자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동안 그녀가 겪어 온 일들의 원인이라 할지라도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 쌓아 온 유대감은 무시 못 할 감정이었다.
원망도 아닌, 그렇다고 반가움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애매하게 걸쳐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체자레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도 모르게 래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체자레는 그런 래희를 향해 한 번 가볍게 씩 웃어 보이고는 장하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래희, 너라면 언젠가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단다.”
‘나쁜 새X’
노망난 할배 같으니라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한참을 원망 대신 그리움이란 감정에 파묻혀 있을 때, 래희는 제 눈앞에서 그녀를 자랑스럽다는 듯한 체자레의 칭찬이 들려오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 대신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저 망할 노친네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이렇게 겪지 않아도 되었을 회귀를 겪으며 고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런 엄청난 일들을 벌여 놓고선 저런 태연한 얼굴이라니. 체자레 몬페라토는 정말로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래희는 여전히 물기 어린 목소리로 제 눈앞에 능글맞게 웃으며 서 있는 체자레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무엇을 묻는지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그러나 래희도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기에 그를 노려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
이번에도 역시 모호하다. 그러나 체자레는 이번 질문에는 대답할 의사가 있었던 것인지 래희와 류정우 두 사람을 한번 번갈아 보고는 래희의 두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성공한 걸까……?”
네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거의 성공한 건데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은 아니야.
“아직, 네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잖니, 래희야.”
그렇다. 방금 히든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를 완수한 거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의 퀘스트 창에는 ‘고장납 태엽 고치기’가 진행률 99%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 하면 돼.”
체자레가 이어서 설명했다.
“네 뒤에 서 있는 류정우의 버그는 성공적으로 고쳐졌어.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 그리고 그 끝을 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고.”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류정우가 래희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래희 대신 류정우가 물었다.
“그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게 무엇입니까?”
체자레는 대답 없이 류정우를 조용히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롬바르나는 어차피 멸망한다.”
이건 바꿀 수 없는 운명이란다.
체자레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뒤돌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저 밖을 보면 멸망은 현재 진행 중인 거지. 이건 돌이킬 수 없어.”
그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 어디에도 안타까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들의 세계인 지구는 다르지. 일시적인 버그로 인한 오류일 뿐 ‘멸망’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래희의 두 눈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버그를 고치고 나면 다시 재부팅을 해야겠지. 그건 지구도 마찬가지야. 이 세계는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으니까.”
네 곁에 서 있는 남자의 죽음 자체가 버그였으나 그건 네가 그의 죽음을 막음으로써 끝난 문제지.
“그러나 여전히 세계는 그동안 쌓여 있던 데이터를 기반으로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
그리고 그게 문제란 뜻이야.
그 설명에 래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나 대답은 체자레가 아닌 류정우에게서 흘러나왔다.
“…제 죽음을 막았어도, 지구는 여전히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체자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네 세상은 시스템 오류를 고치려는 시도로 인해 과부화에 걸렸어. 그러니 지금 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 말은 곧.
“네가 뜨거워진 컴퓨터를 껐다 켜듯이 간단하게 너희의 지구도 껐다 켜야 한다는 거지.”
“…….”
“그래, 이해했나 보구나.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체자레가 옅은 웃음을 띠며 래희를 향해 말했다.
“버그는 제거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야.”
오류가 나기 시작한 시점부터.
요약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오류를 고치고 초기화 과정을 통해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라.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20여 년 전, 지구에 대던전이 생기기 전으로, ‘헌터’와 ‘각성자’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개념들은 모두 오류를 고치기 위한 지구 시스템이 마치 백신처럼 만들어 낸 방법이었으므로 초기화를 한 뒤에는 이 개념 모두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럼, 저희 모두 서로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 건가요?”
모든 걸 다 잊은 채로?
그 말에 체자레가 래희를 보며 웃었다. 마치 정답이라는 듯이.
“그래, 다 잊은 채로. 롬바르나인인 나는 상관없고 너희 둘만.”
이대로 나는 멸망하는 롬바르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고, 우리 세계와는 전혀 엮이지 않은 채 네 ‘지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말로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강요일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초기화를 선택하지 않으면 네 지구는 롬바르나와 함께 사라질 테니까.”
래희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녀는 단지 류정우를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을 뿐, 제 손에 지구의 멸망이 달려 있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방금 그녀는 이제야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기억 속의 대부분은 류정우만큼이나 눈앞의 체자레 몬페라토의 지분이 컸다.
오랜 시간 헤맨 끝에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그를 보내야 한다고? 아무리 이 모든 일의 원인이 그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부모와도 같은 존재를 다시 잃게 되는 건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래희는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런 래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체자레가 웃으며 말했다.
“…딸. 우리는 애초에 만나지 않았어야 해.”
아니지,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지. 그러니까.
“초기화를 하게 된다면 어차피 나를 잊게 될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하렴.”
래희는 그와 재회한 순간부터 너무 울어서 아픈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부정했다.
“…싫어.”
내가 왜?
그러나 그건 그저 생떼를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체자레의 말대로라면 애초에 두 사람은 부녀든 사제든 어떤 관계도 될 수 없었고, 그녀의 선택에는 ‘지구’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단순히 제 앞의 남자와 헤어지기 싫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럼, 초기화를 하면 그동안의 기억은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뿐만 아니라 류정우도?
그제야 래희는 막 떠오른 지금까지의 기억 때문에 잊고 있던 류정우의 존재를 떠올렸다.
류정우까지 잊게 된다니. 아니, 류정우뿐만 아니라 지금 지구에 있을 윤재언부터 다른 소중한 인연들까지 전부. 없었던 일이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래희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체자레는 그녀를 향해 재촉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는 선택해야 해.
래희는 어쩔 줄 몰랐다. 눈 한번 질끔 감고 선택하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래희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였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류정우가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래희 씨.”
래희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류정우는 그녀를 향해 살풋 웃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떤 선택을 하던 다 괜찮을 거예요. 난 당신이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 지구의 생존을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역시.
“당신이 초기화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괜찮을 거예요.”
알 수 없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괜찮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단단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모든 걸 다 잊게 되더라도 이번에는 제가 먼저 당신을 찾아갈게요.”
언제나 래희 씨가 제게 먼저 찾아와 줬던 것처럼요.
래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저 하염없이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억울했다. 제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건지.
이제야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는데 왜 한순간에 모두 다 잃어야 하는지.
하지만 류정우의 눈을 마주하니 그런 모든 억울한 생각이 전부 사라졌다.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래희와 달리 류정우의 눈빛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태껏 자주 봐 왔던, 지루하다는 듯한.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듯한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래희는 그 모습을 보자, 그제야 저도 모르게 조금씩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눈앞의 류정우뿐만 아니라 곰순이도 윤재언도. 지구에서 인연 모두와……. 그리고 체자레도.
체자레는 애초에 인연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래희의 생각은 달랐다. 인연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반복해서 지독하게 엮일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래희가 크게 숨을 들이쉬곤 내뱉었다.
그리고 류정우를 향해. 저기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체자레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다시 만나요.”
또다시 몇 번의 생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요.
그러니까, 약속대로 이번에는 먼저 나를 찾아와요. 내가 항상 먼저 당신을 찾아간 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결심을 알아챈 것처럼 래희의 시야를 시스템 창이 가리며 나타났다.
[‘지구’ 시스템을 초기화하시겠습니까? Y / N]
래희는 울음을 삼키며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Y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띠링―!
[축하합니다! ‘히든 퀘스트: 고장난 태엽 고치기’를 완료하였습니다!]
[완료 보상으로 히든 엔딩(1)이 주어집니다!]
곧이어 암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