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 *
그동안 신전에서 빈민가의 아이처럼 피죽도 못 먹고 지낸 탓인지 야위었던 아이는, 체자레의 보호 속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레이, 당장 마력을 거둬라.”
“아니…….”
“당장 거두지 못해?!”
“으…….”
체자레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앓는 소리만 낼뿐 래희는 허공에 뻗어 올린 손을 전혀 내리지 않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선 채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체자레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곤 큰 소리로 말했다.
“레이 몬페라토!”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요! 마력이 제어가 안 돼요! 으어엉…….”
“뭐? 지금 네가 마력 응용을 시작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제어 하나 못하고 그동안 뭐 했냐? 나 같은 대마법사의 제자면 그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뗐어야지!”
“아이 썅! 원래 마력 운용만 5년 이상 걸린다면서요! 저 이제 겨우 마법을 실전으로 배운지 3년이거든요? 나 정도면 천재지!”
그 말에 체자레는 더욱더 버럭 소리치며 반박했다.
“나는 마법을 배운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아이고~ 정말 잘나셨어요, 할아버지!”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앞의 욕설보다는 다른 것도 아닌 ‘할아버지’ 발언에 화가 난 체자레가 그 말에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며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래희의 조절 실패로 떠올라 위협적으로 이리저리 날아가고 있던 방 안의 가구들이 곧바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언제 난리가 났었냐는 듯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아이고, 내가 쟤 때문에 빨리 늙겠다.
방대한 마력으로 더는 늙지 않고 30대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체자레가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한테는 아직 실전은 무리니 이론이나 공부하라고. 아무리 마력이 많고 잠재력이 높다고는 하나 네 응용력은 저 바닥 수준이니 혼자 있을 때는 마법을 쓰지 말라고 말이야.”
“바닥 수준은 아니거든요! 체자레 기준에서나 바닥이지 원래 내 나이 또래는 이 정도도 못 한다고 그랬어요!”
“대체 누가?”
누가 저 어린애한테 헛바람을 불어넣은 거지? 체자레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래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반항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베르토 할아버지가!”
“…뭐?”
체자레는 순간적으로 예상치 못한 이름에 놀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가 깃든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소리 질렀다. 아니, 이 할배가.
“…집사!!”
평화로운 0회차 시절, 10살 래희의 어느 날이었다.
* * *
“레이!”
뿌연 연기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 한가운데, 체자레가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달려왔다.
“괜찮은 건가? 어디 다친 데는?”
체자레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아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겁을 먹은 듯 눈물이 맺힌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해 보였다. 그는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그녀를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알베르토가 레이가 놀러 나간 마을 뒷산에 불이 났음을 알렸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몸부터 뛰쳐나가 아이를 찾았다. 래희와 항상 함께 지내는 몬스터인 곰순이의 리본 보석에 위치 추적 마법을 걸어 뒀기에 급하게 위치가 잡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레이와 떨어져 낙오된 곰순이만 홀로 서 있었을 뿐 그 어느 곳에도 레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저 멀리서 도와 달라고 외치는 래희의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그녀를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래희를 발견한 체자레가 단숨에 아이를 품에 안았다.
체자레의 양손이 덜덜 떨렸다. 순간 아이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내가?’
충격이라니. 그는 자신이 충격받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러나 그런 놀람도 잠시, 래희의 뒤쪽에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언젠가 그가 젊었을 적, 어린 세계수를 키우던 신전 지하 아래에 연결되어 있던 이계의 통로에서 느꼈던 그것과 같은 기운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거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는 곳 너머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법을 이용해 그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
……!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던 언어였다. 그의 정확한 기억력으로는 분명, 처음 만났을 때의 래희가 입에 담았던 언어였다.
‘안 돼.’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제 품의 래희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의 저 너머로 래희가 건너온 이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마 래희를 저들에게 보내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야.’
하지만 래희가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계에서 롬바르나로 넘어온 순간 래희는 그곳에서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묻겠지.
아이의 부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체자레는 그 의문을 곧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래희의 부모는 그녀가 롬바르나로 넘어왔을 때 죽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건 아이가 직접 그에게 전한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본 장면이, 그들은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했었다고. 힘없는 일반인이라고 했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 결과가 어떨지 뻔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듯 속으로 자문자답하며 생각을 정리한 체자레는 곧이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리고는 그 마력 파장을 뒤로한 채 숲을 벗어났다. 흥분으로 인해서인지 래희를 안은 그의 팔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뒤로 거짓말처럼 마력 흐름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연결되어 있던 이계로 향하는 통로가 닫힌 듯했다. 그에 체자레는 안심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 그는 애써 동요를 가라앉히며 래희를 품속에서 내려놓고는 그녀의 키 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서 눈을 맞췄다.
의문 섞인 별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이 그의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이의 호박색 눈동자 너머로 창백한 그의 얼굴이 비춰졌다.
순간 체자레는 깨달았다.
아이. 내 아이. 그저 호기심으로, 연민으로 데려온 아이는 어느샌가부터 진정으로 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
이렇게 사랑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평생 진심으로 누군가를 상대해 본 적 없던, 그리고 소중한 무언가를 만든 적 없던 체자레는 처음으로 아이를 거뒀던 제 행동을 후회했다.
* * *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음에도 돌려보내지 않고 제가 데리고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났다.
신전이 아이의 얼굴을 잊었을 때쯤, 레희의 머리 색을 자신과 같은 금발로 바꾼 그는 아이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왔다. 그는 래희를 제 딸이라고 소개한 뒤, 제 후계자로 발표했다. 그에 수도 사교계가 아이의 친모 그리고 출신에 대한 의문으로 발칵 뒤집혔으나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체자레가 래희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롬바르나가 재앙에 삼켜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체자레가 예언서에서 읽었던 ‘롬바르나의 멸망’이 다가온 것이었다.
“…레이?”
그는 비틀거리며 무너진 몬테라토 타운하우스를 바라봤다. 방금 전 그가 정문을 통과하기 직전까지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던 새하얀 저택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졌다.
체자레는 저 무너진 저택 안에 있을 래희를 떠올리며 옆으로 엎어진 마차를 벗어나 저택을 향해 달려나갔다.
“레이!”
자신의 제자인 래희가 고작 저택이 무너지는 것 정도로는 크게 다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무너진 저택은 불안하리만치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가 래희를 찾으며 마법으로 저택 잔해를 하나하나 치우고 있을 때였다. 잔해 더미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끄으윽…….”
여성의 신음으로 들리는 소리에 체자레는 그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의 잔해 더미를 치우자마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살려… 끄르륵…….”
하녀복을 입고 있는 여성은 전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하녀였던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두 눈은 하얗게 변해 동공이 보이지 않았고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푸르게 변해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더는 사람의 것이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만 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저 외곽. 서쪽의 사막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던 데드보디가 왜 롬바르나 수도의, 그것도 자신의 저택 한가운데 있단 말인가?
두 발목이 잘린 데드보디는 걷지 못해 그를 향해 꿈틀거리며 기어 왔다. 데드보디한테는 더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체자레는 망설임 없이 그 목을 단번에 베어 냈다.
그리고 그게 시발점이었다.
목을 베어 내자마자 곳곳에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체자레는 잔해 더미를 뒤지는 것을 포기하며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잔해 더미를 기어 나오는 데드보디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제 딸로 보이는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래희가 저것들과 한 공간에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체자레는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리고 그때, 무너진 별관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찾고 있던 금발의 금안을 가진 여자가 비틀거리며 집사인 알베르토와 함께 서 있었다.
바로 래희였다.
“레이!”
래희는 제게로 달려드는 데드보디의 목을 내려치며 불꽃을 피워 내 그 시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체자레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그 모습에 안심하며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래희와 5m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 뒀을 때,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지?’
래희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는 그 위화감의 원인을 찾으려 래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와 같은 찬란한 금발, 저택이 무너질 때 다친 건지 피 묻은 하얀색 마법사 로브……. 그리고 항상 찬란하게 빛나던 잿빛 눈동자… 잿빛?
순식간이었다.
체자레의 온몸이 섬뜩한 감각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네 눈이 왜 그런 거니.
설마, 아닐 거야. 그렇지?
그러나 래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체자레가 재차 부정하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에 맞춰 래희가 뒷걸음질 쳤다.
“…죄송해요.”
“고개 들어.”
래희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감겨 있던 두 눈꺼풀이 올라갔을 때, 가려져 있던 래희의 눈동자가 밖으로 드러났다. 눈동자에 담겨 있던 찬란한 태양이 저물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