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안녕 자기?”
체자레는 제 연인을 향해 눈웃음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화가 난듯한 레지나는 그런 그의 얼굴에 전혀 넘어가는 기색 없이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당장 일어나지?”
“싫은데.”
“체자레 몬페라토. 당신 짓이야?”
“흠…….”
그제야 체자레는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장난스런 기색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진 채였다.
“뭘 말하는 거지?”
“세계수.”
“그게 뭐.”
“그게 뭐라니?”
레지나는 신경질적인 기색으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그게 뭐라니. 방금 그게 저 남자가 할 말인가?
그녀는 한 손에 쥐고 온 종이를 그에게 내던지며 말했다.
“당신이 이 계약서를 쓰면서 고위 사제들을 설득한 건가?”
그제야 체자레는 제 얼굴 위로 던져진 종이를 펼쳐서 확인했다. 하. 난 또 뭐라고.
“세계수를 심는 위치 말인야? 당신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러는 거지? 적당히 에너지가 충분한 땅 위에 심으면 그만인데.”
이미 자라나 있는 세계수 근처에 심게 되면 뿌리조차 내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멍청한 신관 놈들이 어찌나 고집을 피우는지 절대 수도의 신전 아래가 아니면 세계수를 심는 걸 허락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는 누가 봐도 실패할 확률이 커 보이는 곳에 자신이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이뤄낸 실험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자칫하다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는 걸 실패하기라도 하면 앞으로 어쩔 건가.
그래서 그는 적당히 그들의 이득을 챙겨 주면서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그가 원하는 곳에 세계수를 심기로 결정했다.
‘세계수 심는 위치로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어련히 알아서 적당한 위치로 제가 찾아 두지 않았겠는가. 저가 이번 실험이 실패하도록 두지 않을 거라는 건 레지나도 잘 알 텐데, 그런 제 앞에서 미친 듯이 화를 내는 레지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신전에 세계수를 심게 되면 실패할 확률이 큰데 왜 자신이 바보같이 이곳을 고집하겠는가.
하지만 신전 측이 혹시라도 이 문제에 예민하게 굴까 미리 사전에 이 문제에 관해 동의를 얻어 둔 것이었던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눈앞의 제 파트너가 이렇게 반대하고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이곳에는 새로운 세계수가 다시 자랄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가 고여 있지 않아. 그렇다면 다른 곳에 심어야지. 적어도 수도의 반대쪽 끝에 위치한 남부라면 세계수가 자랄 만한 에너지가 땅에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레지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세계수가 자라느냐 자라지 못하느냐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전 아래에 묻혀 있는 타 차원으로 가는 길. 그것만은 신전에 소속된 몸으로써 꼭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타지역에 세계수가 자라나 신전의 중심을 옮기게 되면, 언젠가 이 지역 신전 지하에 숨겨져 있는 타 차원으로 가는 길이 세상에 들통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외부인인 체자레는 세계수를 키웠던 공간 외의 다른 통로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이렇게 태평한 소리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아마 저기 계약서에 사인한 신관들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만 동의한 것이었겠지.
레지나는 냉정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사랑? 그녀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하,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어차피 세계수의 존재 자체는 비공식적인 일이니, 당신이 밖에 나가서 아무리 떠들어 봐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테지.
“고작 롬바르나의 대공 한 명보다는 레지나 성녀의 위세가 더 높으니까 말이야.”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면 저 약삭빠른 체자레 몬페라토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이제 세계수 문제는 당신 손을 떠난 일이야. 이 계약서에 사인한 신관들은 곧바로 축출될 거고, 당신도 이제 여기서 손 떼.”
그 말에 체자레가 정색을 하며 일어섰다. 여태껏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게 당신 결정인가? 아니면 신전의 결정인가?”
중요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앞으로 체자레 몬페라토의 신전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레지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신전이 곧 나야.”
깊은 심해 같은 체자레의 눈이 차갑게 레지나를 응시했다. 불편한 침묵이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자레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성녀님.”
체자레는 레지나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신전이 황가보다 위세가 높은 이 시대. 함부로 신전의 얼굴인 성녀에게 덤벼들 수 없었다.
그는 깔끔하게 세계수에 대한 문제를 포기했다. 공을 들였던 터라 노력과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시작한 실험이 한두 번 실패하는 것도 아니니, 이번 한 번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성녀와의 연인 관계는 어차피 비공식적인 문제였고 그로서도 항상 필요에 의한 가벼운 만남만을 추구해 왔으니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아무리 대공으로서의 직위에 미련 없이 살아왔다 하더라도, 결국 지배 계층으로 태어나 자라 온 그는 사랑보다도 자신의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이번 일 모두 언젠가 발견한 금서에 대한 내용이 궁금해 시작했던 일이었으므로, 얼추 그 내용에 대한 실체 정도는 두 눈으로 확인을 했으니 지금 실험이 실패하든 아니든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롬바르나의 멸망.’
금서의 제목이 순간 떠올랐으나 그는 머릿속에서 그 내용을 지웠다. 100년 후의 미래를 그리기에는 그는 아직 2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고 경험도 적었다.
그래서 세계수의 수명이 다해 롬바르나의 외곽을 시작으로 오염 지역이 하나둘 발견되는 것 정도는 그의 안중에 있지 않은 문제였다.
단지 제 연인인 레지나와 신전. 약간의 배신과 더불어 이 둘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내가 신전의 개들과 일을 하는 게 아니었지.’
그의 스승을 포함한 다른 마법사들이 신전을 눈속임 정도의 힘만 발휘되는 가짜들이라고 폄하하며 욕하는 걸 그동안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마법사 중 가장 어려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있겠지만.
그런 곳에 신경을 쓸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러게 재차 말하지 않았더냐. 신전과는 엮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2년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스승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 일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10년 뒤. 그는 수도의 서쪽 숲에서 홀로 버려져 있는 세계수를 발견하고 말았다. 어린 세계수는 성장에 실패한 채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체자레, 이번엔 당신이 너무했어.”
저를 쫓아다니던 바람의 정령인 제피로스가 그를 비난했다. 타인에게 연민이나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았던 체자레는 버려진 세계수의 모습에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 * *
“검은 머리의 검은 눈을 가진 자를 발견했다고?”
그의 나이 103세. 여전히 30대 초반의 외모를 가진 체자레 몬페라토 대공은 황실에서 도움을 요청해 온 서신을 읽고 서신을 가져온 궁정 마법사에게 말했다.
“네, 그러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져 황궁 호수에 빠진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첫 발견자는 황태자 전하라 하십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라…….”
색채가 옅은 롬바르나 인들은 그런 머리 색을 절대 가질 수 없었다. 체자레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황궁에 나타난 인간의 정체에 호기심을 보였다.
“본인이 누구라고 소개하던가?”
“그저 롬바르나라는 곳을 처음 들어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합니다.”
순간 70여 년 전, 체자레는 그가 젊었던 시절에 했던 실수를 떠올렸다. 분명 신전 지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계인?”
“네? 그 단어는 어찌 아셨습니까? 신전 측에 알렸을 때, 이계인인 것 같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계인 송환을 요청하시더군요. 돌려보낼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전.
체자레는 그 두 글자에 눈동자에 빛을 잃었다. 지루하다. 더는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궁정 마법사에게 말했다.
“이미 황실과 신전 사이에서 이야기가 다 끝난 듯한데 왜 나에게 알린 건가?”
의도가 무엇이지?
그에 궁정 마법사는 벌벌 떨며 그에게 대답했다.
“수석 마법사께서, 신전이 의심스럽다며 우선 대공께는 알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이계인의 존재는 이전에 몇 번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신전 측에서 이미 전부 데려갔다고 합니다. 문제는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데지고 실험을 하는 것 같다고…….”
“실험? 신전이 키메라라도 만든다는 건가?”
키메라. 본래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의미하는 그것은 마법사라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오염 지역이 점차 늘어나면서 몬스터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 키메라 문제까지 끼어들면 재앙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전투 인력을 외곽 지역으로 대부분 돌리고 있는데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기라도 하면 해결할 이가 없었다.
체자레의 말에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듯이 궁정 마법사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자레는 궁정 마법사의 추측에 따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는 아무것도 모르던 젊은 시절 신전에 대해 몸소 겪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신전과 실험 그 두 단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으니 이만 돌아가게. 수석 마법사의 고민이 뭔지는 알겠다고 전하고.”
그리고 이때의 일이 체자레와 래희가 만나기 바로 10년 전이었다.
* * *
체자레는 요즘 줄어드는 듯한 마석 공급 루트를 조사하기 위해 10년 만에 수도로 올라왔다. 그러다 우연히 수도의 신전 근처 빈민가에서 이세계인 꼬마를 주웠다.
짧은 단발에 무명옷을 입은 채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뒷골목을 누비는 어린아이는 여러 의미로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롬바르나인 사이에 있으면 무조건 눈에 띄는 외양이었다.
체자레는 망설임 없이 아이의 뒤를 쫓았다. 그러고는 고양이 줍듯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렸다.
“…이세계인?”
아이가 입고 있는 낡은 무명옷 위로 신전 소속임을 알리는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순간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린아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표정 관리를 하며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희멀건 하얀 반죽같이 생긴 얼굴 위로 작고 동글동글한 눈코입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황실 정원에 황녀가 키운다던 토끼처럼 생긴 외모였지만 반항적인 눈빛을 보니 맹수가 따로 없었다.
“이세계인 중 어린애는 처음 보는데…….”
이전에 한 번 신전에 몰래 잠입했을 때 영혼이 소실된것처럼 보이는 이세계인의 몸을 여럿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적어도 성인은 되었을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어린아이라니.
음침하기 짝이 없는 신전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