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류정우가 있을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위안이었다는 게 이번에 처음 알았다.
“보고 싶다고…….”
래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런 래희의 곁에서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알베르토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체자레님은 열쇠만 가지고 계신다면 만나실 수 있습니다만……?”
아니, 누가 그 인간 보고 싶다고 했냐고요…….
언제나 푸근한 할아버지 같던 알베르토도 오랜만에 만나니 공감 능력 제로인 로봇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베르토 입장에서는 래희가 주어 없이 말한 문장에 나름대로 데이터를 추출하여 대답한 것일 뿐이었으므로 억울할 따름이었다.
“…집사 할아버지.”
“네, 아가씨?”
래희가 울다 말고 허공을 향해 손짓하며 그에게 물었다.
“저건 뭔가요?”
그는 래희의 손끝을 따라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한 템포 느린 알베르토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의 손끝에는 데드보디의 사체 더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널브러진 데드보디가 한 곳에 점점 모여들어 뭉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랄까?
래희의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저건 제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거였다.
“미친…….”
데드보디의 사체들은 한데 모여 녹기 시작하더니 슬라임과 흙더미 중간 형태의 기괴한 덩어리로 뭉쳐지며 점점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거대한 진흙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다.
“우웩.”
시체 썩은 냄새가 풍겨 왔다. 래희는 비위가 약했으므로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X 저게 뭐야.’
래희는 답을 구하려 알베르토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알베르토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런 몬스터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하…….
래희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 도망칠까? 이곳에는 그녀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게 없었다. 결국 래희는 자리에서 빠르게 털고 일어나 알베르토에게 말했다.
“도망갈 곳이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저걸 해치우는 건 무리인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동의하듯 알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저 몬스터는 변형이 완료된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그 틈을 타 도망치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러나 폐허가 된 이 도시에 몸을 피할 곳은 없었다. 그나마 넓고 복잡한 신전이 몸을 숨기기에는 훨씬 적합해 보였지만 그곳이 이 롬바르나에서 가장 오염이 많이된 장소이므로 인간인 래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알베르토는 빠르게 계산한 끝에 래희에게 말했다.
“일단 도시를 벗어나는 게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래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곳에 있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 알베르토의 말대로 대공저가 멀쩡하다 할지라도 저 괴물의 영향에도 멀쩡히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제 직위에 애착이 없는 체자레라면 수도의 타운하우스에는 아무런 방어 마법을 두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 빨리 피하죠.”
그러나 그때였다.
쾅―!
래희와 알베르토 두 사람이 몸을 피하자마자 진흙 괴물은 거대한 사람 손 모양을 만들어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후드득 쿵―!
방금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자리는 손바닥이 떨어지자마자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뭐야.”
끔찍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기에 맞아 죽을 뻔했다니. 알베르토는 몸을 급하게 틀어 그들을 덮쳤던 손을 빠르게 공격했다.
싸악―!
무언가 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토의 공격으로 괴물의 한쪽 손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이 무색하게 잘린 손끝에서 새로운 손가락이 빠른 속도로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악!”
곧이어 빠르게 들어오는 공격에 래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A급 스탯으로도 피하기 힘든 속도였다.
‘신체가 잘려도 다시 자라나다니.’
저건 어떻게 해치우란 말이야!
이제는 도망가기에도 늦은 것 같았다. 최대한 엮이지 않고 몸만 내빼려 했건만 게이트 안에만 들어서면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과연 게이트 안에서만 그런 걸까?’
귓가로 성좌가 비웃으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 *
사방이 어두웠다. 그의 시야에는 불에 타고 있는 무너진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건축 양식은 지구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유럽풍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곳곳에서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살피니 하반신이 잘리거나 신체 부위가 온전치 못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데드보디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후처리를 제대로 안 했군.’
데드보디는 머리를 자른 뒤에 신체를 불태워서 마무리해야 한다. 혹시라도 남은 시신들이 모여 다음 단계의 몬스터로 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였다. 그는 그 몬스터를 마주한 적 없지만, 이번 토벌에서 경험이 많던 1세대 헌터들이 꽤나 역겨운 몬스터였다고 진절머리 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치익―
류정우는 인벤토리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들었다. 일반 성냥개비가 아닌 아이템인 이것은 한 번 타기 시작하면 잿가루가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태우는 효과가 있었다.
일일이 지나치면서 데드보디의 사체가 다 태워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주변 모든 걸 태우기로 결정했다.
화르륵.
순식간에 데드보디들이 기어 다니던 집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데드보디들의 고통스런 비명을 뒤로하고는 류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퀘스트가 알려 주는 대로라면 여기 어딘가에 래희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저벅저벅.
생명의 존재가 이 주변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땅 위로 살아 숨 쉬는 존재는 자신 하나뿐인 듯했다.
‘제발, 무사하기를…….’
이제 래희도 1인분 정도는 할 수 있는 헌터가 되었지만, 류정우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처음 만났던 어벙한 표정의 래희가 디폴트 값이었다. 그만큼 류정우는 래희를 설탕 과자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할 때까지 래희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기를 빌면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처음에는 래희가 분명 지구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퀘스트 보상으로 래희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한 시스템은 그의 기대를 비웃듯 이렇게 폐허가 된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마치 네가 찾고 있는 권래희는 이곳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거라는 듯이.
류정우는 폐허가 된 도심을 걸어 올라가며 생각했다.
만약 래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꼭꼭 숨겨 두겠다고.
아니다. 래희는 적당히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 가둬 두기만 하면 도망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전처럼 손님이 잘 오지 않는 곳에 가게를 차리고 집과 가게 두 곳만 오가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만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사교적인 것 치고 그녀는 은근 생활 반경이 좁았으므로 그 정도만 해 줘도 저가 갇혀 지내는 건지도 전혀 모르고 만족하고 지낼지도 몰랐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내가 미친 건가?
방금 자신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욕심에 휩싸인 채,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권래희라는 존재가 자꾸 자신을 바꾸는 것만 같았다.
류정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
류정우 정신 차려.
지금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권래희를 빨리 찾는 게 더 시급한 문제 아닌가?
A급으로 스탯이 올랐다 하더라도 전투 경험이 많이 없는 래희가 혼자서 오랜 시간 게이트에서 버티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올라오면서 발견한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전투 흔적을 보면 그 싸움의 주인공이 바로 래희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남겨진 족적을 보면 그녀를 도와주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 안심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러던 그때였다.
“아가……! 피…십시……!”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지만 류정우는 본능적으로 그곳에 래희가있을 거라 판단한 뒤 거침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뛰어 올라갔다.
쾅!
“아 씨X!”
익숙한 목소리의 욕설이 들려왔다. 조금 지친 기색이 묻어 나오긴 했지만, 목청 크게 욕설을 내뱉을 만큼 아직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목소리에 류정우는 조금은 안심하며 래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흙먼지가 올라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몬스터의 공격에 겨우 몸을 피한 래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땀으로 범벅되어 얼굴 여기저기 붙은 머리칼과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을 걸치고 내숭 하나 없이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며 흙바닥을 뒹굴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러나 그런 치열한 광경과 달리 이리저리 뒹구는 래희의 모습은 여전히 작고 귀여웠다.
화가 났다는 걸 나타내듯 발을 구르며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 화가 난 토끼가 뒷발을 내리찍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동안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래희를 찾아 나서던 시간 때문인지 래희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류정우는 감격스러운 기분이었다.
‘다행이야.’
여기저기 스친 것 같은 자잘한 생채기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용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건강한 것 같아 그의 마음 한편에 있던 불안감이 누그러들고 안도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류정우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을 생각하고 살았다. 늘 그랬듯이 그의 회귀는 죽음으로 시작되었으니까. 류정우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지나쳐 온 길목에서 발견한 데드보디에 류정우는 최악으로 치닫는 래희에 대한 걱정으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만일 그의 예상대로 래희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긴 상황이었더라면 류정우는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끊어 회귀를 선택했을 거였다. 그 선택으로 다음 생에 래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래희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머릿속을 단 하나의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다.’
여러 생을 반복하면서 이렇게까지 삶에 대한 욕구가 커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권래희와 함께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싶었다.
‘진짜 미친 건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까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류정우의 입장에서는 권래희가 작고 소중하고 귀여운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막는 건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한 류정우는 래희를 부르려던 입을 굳게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제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방금 그녀를 공격한 몬스터로 시선을 옮겼다.
뇌 속까지 찌르는 듯한 역겨운 시체 냄새, 흘러내리는 진흙으로 구성된 듯한 거대한 덩어리 모양의 몬스터.
그건 바로 얼마 전까지 류정우가 데드보디 시체를 불태운 이유인 그 몬스터였다.
“이런.”
아마 데드보디를 처리하는 데 머리를 베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아도 시체를 태워야 한다는 건 몰라 일어난 일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