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어……?”
래희는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이 넘어온 곳을 바라봤다.
“여기, 롬바르나 수도인데……?”
어릴 적 봤던 동상이 검게 그을린 채 부서진 건물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이곳에 엄청난 재앙이라도 닥친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때, 건물 잔해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이가 기어 나왔다.
“…살려 주세…요…….”
래희는 그 사람을 보고 너무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핏 보면 부상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결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는 하얗게 변한 건지 온통 백색뿐이었고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피부 아래의 푸른 혈관을 비추었다.
그래, 마치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좀비 같았다.
“살려…주…….”
놀라는 바람에 굳어 버린 래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만 보던 와중 결국 바닥을 기던 그것은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건가?”
그러나 영화 속에선 항상 이 상황에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게 국룰이었으므로, 래희는 정말로 죽은 건지 궁금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는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래희의 예상대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선 흰자를 보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에에―!”
찢어지는 비명 소리는 래희의 귓속으로 소름 끼치도록 파고들었다.
순간 너무 놀란 래희가 귀를 막고는 그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행히도 무너진 잔해 더미에 깔린 그것은 상반신만 꿈틀거릴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자 래희는 이전에 한번 얼핏 스쳐 지나가듯 교육받았던 몬스터의 이름을 떠올렸다.
“데드보디……”
지구에서는 흔히 부르는 좀비. 저것에 물리면 1시간 이내로 바로 좀비가 되어 이지를 잃게 된다고 들었다. 좀비는 영화처럼 아무리 칼이나 총으로 공격하더라도 죽지 않았고 머리를 잘라야만 처리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데드보디가 왜 여기에…….”
래희는 10여 년도 더 전에 이곳에 떨어졌던 당시를 떠올렸다.
판타지 영화에서 묘사되는 중세 유럽풍의 도시. 알록달록하고 동화 같은 건물들과 그 건물을 장식한 이쁜 꽃들.
이곳이 이세계라는 걸 가리키듯 연한 빛깔의 머리 색을 가진 사람들과 이질적인 의복들.
신전과 왕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분명 겉보기에는 매우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이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래희는 언제 어디서라도 공격받을 것을 대비해 잔뜩 주변을 경계한 채, 그나마 덜 무너져 걸을 수 있을 법한 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이 위쪽으로 쭉 올라가면 체자레의 수도 타운하우스인 대공저가 있었다.
일단 그곳부터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래희는 길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가씨?”
그녀를 부르는듯한 익숙한 목소리에 래희는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화상을 입은 건지 얼굴 반쪽이 일그러진 채로 깔끔한 행색의 노년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지 알아차리자 마자 래희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주르륵 흘러내렸다.
“집사 할아버지?”
그에게 가까이 달려가던 래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어…….”
집사 알베르토의 팔 한쪽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로봇처럼 보이는 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래희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알베르토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재료가 부족해서 미처 피부를 이식하지 못한 겁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그렇지.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탓에 잊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사람이 아니라 체자레가 만든 로봇이었다는 것을.
예전에도 평소 너무나도 말끔한 모습과 인간다운 언어 구사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해 그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녀가 체자레와 함께 수도의 대공저를 벗어나 시골 마을에 살 동안 알베르토도 두 사람을 따라와 체자레가 지내는 곳을 관리하고는 했다.
래희는 아까 전 재료가 부족하다는 알베르토의 말을 떠올리며 내부가 드러난 그의 팔에서 시선을 옮겼다.
지금 다시 보니 팔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움직임이 제때 기름칠을 못 한 듯 삐걱이는 게 꽤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있다.
“집사 할아버지, 체자레는요?”
“모릅니다.”
“네?”
두 사람 한 몸 아니었나? 생활력 없는 체자레가 알베르토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차라리 그 잘난 대마법사가 죽었다는 게 더 납득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죽었어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자레요. 그가 죽은 거예요?”
래희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알베르토를 향해 재차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주인님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제가 멀쩡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주인님이 살아 계신다는 의미겠지요.”
“아…….”
다행이었다. 나름 롬바르나의 세계관 최강자라는 이가 죽어 버렸다면 래희도 류정우를 데리고 돌아갈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도 있고.
그녀는 알베르토의 말에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재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주변을 둘러봤다.
불타고 부서지고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니, 저기서부터 일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래희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며 알베르토를 향해 물었다.
“그럼 여기서 뭐 하고 계셨던 거예요? 체자레의 행방은 모른다면서요.”
“재료를 모으는 중이었습니다. 주인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최대한 마석을 있는 데로 긁어모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모은 마석을 대공저에 가져다 두니 주인님께서 회수하시는지 사라지기는 하더군요.”
“마석?”
그 말에 래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석이라니. 그게 필요한 일이 있던가?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는 게 아닌 이상, 체자레의 실력이면 마석 같은 건 딱히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왔던 것 같은데…….
래희는 의문을 잠시 뒤로 미루며 일단 당장 궁금한 것부터 알베르토에게 물었다. 분명 멀쩡했던 도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좀비 사태라도 발발한 건가?
“알베르토, 롬바르나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수도가 엉망이에요. 심지어 조금 전에는 데드보디도 봤다니까요?”
“롬바르나에 멸망이 도래했습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래전부터 시작된 멸망의 전조를 막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신전의 폭발로 그곳에서부터 오염된 마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주변의 생명체들을 모두 오염시켜 살아 있는 것들은 지금 모두 몬스터로 변하였습니다.”
“네?”
오염으로 인해 몬스터가 되었다고?
래희는 순간 그동안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몬스터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젠가 세계수인 리프로 인해 정화되었던 양이 떠올랐다.
‘그게… 오염으로 인해 변한 거였단 말이지.’
그 뜻은 그동안 게이트에서 처리해 온 몬스터들은 모두 롬바르나에서 오염된 생명체들이라는 뜻이었다.
얼마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확신까지 생기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럼 저기 저렇게 기어 다니는 이들처럼, 자신 살던 마을의 주민들도 저렇게 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래희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열심히 부서진 잔해 더미를 뒤지고 있던 알베르토가 래희에게 말을 붙였다.
“아,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만나면 전해 드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이전에 주인님께서 선물해 주신 열쇠로만 주인님을 찾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쇠? 설마 차원의 열쇠를 말하는 건가?
순간 래희의 머릿속에 얼마 전 여우로 변해 류정우에게 열쇠를 건넸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거… 류정우 줘 버려서 지금 없는데?’
망한 건가?
“차원의 열쇠를 말하는 건가요?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열쇠 이름은 모르겠지만 분홍색 다이아라면 맞을 겁니다. 주인님께서 직접 골라 제작하신 보석이었으니까요.”
어… 진짜 망했네?
래희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라스트 퀘스트 : 류정우의 비밀]
사용자 ‘류정우’의 시스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그에 대한 비밀을 알아냅시다.
퀘스트 수행을 위해 ‘롬바르나의 대마법사’를 찾아가세요.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체자레를 찾아야 하는데, 체자레를 찾으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고?
- 퀘스트 실패 페널티: 지구 멸망, 더는 리셋이 없습니다.
숨이 막혀 왔다. 아니, 이보시오 시스템 양반.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열쇠를 줘야 한다더니, 이제 와서 열쇠가 다시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쩌란 말이야?
래희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흘리며 속으로 시스템을 향한 욕을 내뱉었다.
* * *
쾅!
“아가씨, 강해지셨습니다!”
“아니,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인가요?”
래희는 처음으로 알베르토에게 신경질을 내며 대답했다. 저 로봇 할배.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로봇이라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태연히 감상을 내뱉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로봇이었다.
쿵―!
흙먼지가 휘날렸다.
래희의 옆으로 달려들던 데드보디가 알베르토의 일격에 날아가 박히는 소리였다.
알베르토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투 로봇이라도 된 양 래희를 공격하는 데드보디드를 빠른 속도로 치워 나가고 있었다.
그에 질세라 래희도 마법봉을 휘두르며 데드보디의 머리를 부수고 있었다.
“어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베르토의 도움을 받아 대공저로 가던 길에 데드보디의 습격을 받았다. 불에 탄 신전 지하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데드보디가 되어 건물이 부서진 기회를 틈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했다.
다행히 방심하고 있던 탓에 이렇게 죽나 싶었던 순간에, 이전에 받았던 바람의 정령 제피로스의 축복으로 한 차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알베르토는 로봇이었으므로 그들의 표적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롬바르나 수도에 있는 모든 데드보디들은 래희를 쫓아 공격해 오고 있었다.
콰과광―!
“와 씨…….”
죽을 뻔했다.
A급 헌터의 몸이라도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는 생각보다 불리한 점이 많았다. 래희는 눈앞의 데드보디를 처리하는 사이 뒤에서 달려들던 데드보디를 겨우 피해 그 목을 내리찍었다.
쿠웅―!
드디어 끝이다. 여태껏 계속해서 달려드는 이 많은 데드보디들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
눈앞에 쌓여 있는 데드보디 사체 탑을 보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내가 저걸 전부 때려잡았다고? 언제부터 이렇게 대담해진 거지?
“움직이는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옆에서 주변을 살피고 온 알베르토에 래희는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보고 싶어…….”
류정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