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윗마을에서 불이 난 그때.
래희는 곰순이와 함께 숲속에 불길이 번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뒷산을 올랐다.
여느 때처럼 숲속의 무해한 몬스터나 동물들과 놀기 위함이었는데, 그날따라 다른 이들과 만나던 약속 장소에는 평소와 달리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곰순아, 다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뀨우?(그러게?)”
동물들에게 부탁한 것들이 있어서 빨리 전달받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계획이 어긋난 듯했다.
“체자레 생일이라 마석 모아 주려고 했는데…….”
토순이가 최근에 반짝이는 돌들을 많이 주웠다고 했단 말이야.
“뀨우 뀨뀨뀨(그게 마석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
“저번에 걔네가 숲속에서 주운 돌로 만들어 줬던 팔지를 체자레가 보더니 그거 마석으로 만든 거랬어.”
어디서 주웠냐고 흥분해서 묻던데?
래희는 발끝에 채는 돌부리를 걷어차며 대답했다.
아니, 이것들이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해 놓고선 이렇게 늦으면 어쩌자는 거야. 지들이 인간도 아니고.
그러던 때였다.
킁킁.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게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게, 매우 불안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래희는 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곰순아,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디서 불이라도 났나 봐.
“뀨우우!(저기 봐!)”
그때, 곰순이가 소리치며 래희를 불렀다. 곰순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지며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뒤로 뜨겁고 빨간 불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불이네?!”
“뀨! 뀨우!(뭐 하는 거야! 빨리 뛰어!)”
곰순이가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래희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래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서 연기로 뒤덮여 보이지 않는 숲속을 무작정 달려나갔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불길은 피하고 봐야 했다.
“하…….”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 샌가부터 뒤따라오던 곰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야를 가리는 연기 때문에 갈라지게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체자레가 찾아 주겠지.’
대마법사가 그것도 못 하면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곰순이는 일반적인 몬스터와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 안전할 게 분명했다.
래희는 제 스승인 체자레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았으므로, 안심하고 곰순이의 행방을 우선순위에서 밀어 놓았다. 지금 곰순이보다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아는 게 중요했다.
여전히 사방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아까와 달리 탄내가 맡아지지는 않았다. 아마 눈앞의 안개는 불로 인한 연기가 아니라 순수한 안개인 것 같았다.
“휴… 다행이네…….”
일단 불에 타 죽을 위험에서는 벗어난 거잖아. 길을 잃은 것 같긴 하지만 제시간에 마을로 돌아가지 않으면 체자레가 찾으러 오겠지.
래희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우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길을 잃었을 때 무작정 앞으로 걷는 건 어린아이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문득 래희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으로부터 위화감이 들었다.
바스락바스락.
숲속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뭐지?’
13살의 어린 몸으로 위험을 벗어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래희는 안개 너머에서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누군가의 인영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안개 속을 헤치고 나오는 사람은 매우 잘생긴 남자였다. 스스로 잘생겼다고 매일매일 자화자찬을 하는 체자레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
게다가 부실한 체자레와는 달리 남자는 군인인지, 군복 비슷한 옷 아래로 탄탄한 몸을 가졌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권래희, 너 지금 13살이야 인마. 정신 차려.’
래희는 벌어지는 입을 겨우 닫으며 남자를 관찰했다.
그녀처럼 숲속을 헤매기라도 한 건지 남자의 꼴은 꽤나 꾀죄죄했다. 머리는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이곳에는 없는 사막에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옷은 모래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꾀죄죄한 몰골에도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래희는 눈앞 남자의 푸른빛 눈을 바라봤다.
‘체자레랑은 조금 다른 느낌의 푸른빛이네…….’
체자레의 눈동자가 심해라면 눈앞 남자의 것은 우주 같았다. 검푸른 눈동자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그리고 그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린…애?”
그 뒤로 무언가 덧붙여 말하려던 남자는 마저 잇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래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한국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어?
5년 만에 듣는 한국어였지만 잊을 수 없었다. 만약 제가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모국어를 잊을 수도 있었겠지만, 속 알맹이는 25년산 성인 여성이었으므로.
래희는 저를 내려다보며 놀란 듯한 남자의 바지를 붙잡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이라니!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지난 롬바르나에서의 생활이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구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어린이를 위한 기반시설이나 이런저런 문화생활 같은 것들이.
특히나 인터넷, 스마트폰! 뮤튜브와 같은 오락거리 없는 세상은 너무나도 무료하지 않은가.
그리고 생활을 떠나서 한국에서 전·현생 통틀어 30년 이상을 살아온 그녀로서는 역시나 집이었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백배 천배 나았다.
게다가 지구에는 제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었다.
‘살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5년 전 8살의 몸으로 롬바르나에 떨어지기 직전 분명 부모님과 함께 게이트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그녀는 롬바르나에 혼자 떨어졌었으니까.
체자레를 생각하면 인사도 못 하고 떠나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만약 눈앞의 남자가 한국인이라면 이번이 집으로 돌아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남자는 내가 아저씨라니… 라며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래희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아저씨, 정말 한국 사람이에요?”
그제야 남자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에 래희의 손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래희는 환희에 차올라 기쁜 몸짓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에게 첫인상을 이따위로 심어 줄 수는 없었으므로 애써 춤추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고개를 올렸다.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집 가는 길 아저씨는 알아요?
그 말에 남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인 표정으로 래희를 내려다보았다. 얼마간 말이 없던 남자는 그녀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조금만 쭉 걸어가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어.”
미안하지만 아저씨는 여기서 할 일이 있어서 같이 가줄 수 없을 것 같네?
래희는 남자의 말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이제 저도 13살이거든요!”
물론 속에 든 건 25살이지만요.
그런 래희의 씩씩한 대답에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곤 곧이어 그의 이쁜 입술을 열며 말했다.
“많이도 컸네. 저 앞에 군인들이 많이 서 있을 수도 있는데 너무 놀라지는 말고. 천천히 걸어 나가면 괜찮을 거야.”
래희는 그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구로 돌아가기 전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저씨,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지구에서 봐요!”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남자는 작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그래, 나중에 보자 래희야.”
잘생긴 미소를 눈에 담으며 래희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집이다. 저기로 쭉 걸어 나가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래희는 남자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 누군가 있어요!”
자신을 발견한 듯 안개 너머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놀라지 말고 천천히 걸어 나가라는 남자의 조언대로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사뿐사뿐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푹신한 숲길에서 어느새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밟아 보는 도심의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안개가 걷혔을 때, 래희는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군복을 입은 어른들이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며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 무기라니…….’
몬스터인 줄 알았나 봐.
남자가 조언한 대로 천천히 걸어 나오지 않고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린애?”
누군가가 탄식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 탄식을 시작으로 래희 저를 겨누고 있던 무기들이 하나둘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래희는 어색한 상황에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바로 래희가 S급 게이트에서 실종된 지 5년 만에 지구로 귀환한 날이었다.
* * *
순식간이었다.
눈앞에서 닫힌 게이트를 확인하자마자 류정우의 시야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닫힌 게이트 너머로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노을 지는 하늘에서 새파란 하늘로 시야가 변한 직후 류정우는 제 몸이 공중에서 아래로 빠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몸뚱어리 하나만큼은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S급 헌터였으므로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해 설 수 있었다.
“하…….”
이게 무슨 일이지?
류정우가 알 수 없는 공간에 떨어진 순간, 그의 눈앞에 시스템이 메시지 하나를 보내 왔다.
[히든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히든 퀘스트?’
성좌도 없는 자신에게 퀘스트라니?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류정우는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고자 곧바로 퀘스트 확인 버튼을 눌렀다.
[히든 퀘스트: 차원의 열쇠 획득하기.]
과거의 래희로부터 차원의 열쇠를 얻어 주세요.
- 차원의 열쇠 (0/1)
- 완료 보상: 권래희와의 재회.
“아…….”
차원의 열쇠라니. 게다가 여기가 과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