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마지막으로 저장한 시점이 언제더라?
그건 바로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 류정우가 게이트를 빠져나오기 5분 전이었다.
래희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래희가 분노를 짓씹으며 중얼거린 순간 하얗게만 둘러싸여 있던 배경에 색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되돌아왔다.
바로 1차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기 직전으로.
콰과광―!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가면서 바로 앞에 서 있던 롬바르나인들을 포함해 근처의 건물들까지 잿가루가 되어 버렸다.
래희는 저 멀리서 잔해 더미 사이로 비틀거리는 래희를 흘끗 한번 바라본 뒤 인벤토리를 열었다.
[게이트 소멸 조각 ×3]
[게이트 소멸 조각을 모두 모았습니다. 지금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Y / N ]
래희는 망설임 없이 Y 버튼을 눌렀다.
‘뭐가 되었든 간에 일단 게이트 브레이크부터 막고 봐야지.’
여태껏 이것 때문에 류정우가 죽어 버리지 않았던가.
[게이트 소멸 조각 사용 시 모든 게이트가 사라집니다. 단, 게이트가 모두 닫힌 후 게이트 너머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게이트 소멸 00:00:59]
이동이 안 된다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설명에 래희는 당황하며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봤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류정우는 게이트가 사라지기 전 넘어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원히 저 너머에 갇히게 된다는 뜻인가?
‘그럼 이번 회차도 망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게이트 소멸 조각을 다 써 버린 지금, 이번 회차를 실패하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게이트 소멸 00:00:49]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래희는 게이트 앞에 서서 줄어드는 시간을 확인한 후 주변을 살펴봤다.
1차 게이트 브레이크의 충격 때문인지 이쪽을 신경 쓰는 시선 같은 건 아직 없어 보였다.
‘시간이 없어. 넘어가려면 지금 넘어가야 해.’
곧 있으면 이곳으로 대던전 토벌을 떠났던 헌터들이 돌아올 타이밍이었다.
“휴…….”
래희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민은 사치였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더라도 류정우를 멸망하고 있는 롬바르나에 혼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게이트 소멸 00:00:39]
래희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넘어온 게이트 반대편으로 시끄럽게 달려오는 헌터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반대편이라 그들의 시야에서는 래희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빨리 넘어가!”
헌터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점점 줄어드는 타이머를 확인했다.
[게이트 소멸 00:00:09]
[게이트 소멸 00:00:03]
[게이트 소멸 00:00:01]
[모든 게이트가 성공적으로 소멸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후 혼자 남아 있을 류정우를 확인하기 위해 래희는 뒤돌아섰다. 그러나 닫힌 게이트 앞에 서 있어야 할 류정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류정우 씨?”
래희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보이지 않는 거지? 혹시, 지구로 넘어가 버린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제가 기억하기로는 류정우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류정우는 어디로 간 거지?
래희는 당황하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으므로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던 퀘스트 창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히든 퀘스트 ‘고장난 태엽 고치기’]
(진행률 99% | 히든 엔딩 95%, 노멀 엔딩 90%, 베드엔딩 80%)
진행률 99%.
“…뭐야.”
왜 아직도 99%인 거지? 게이트를 막고 류정우를 살리는 게 퀘스트 달성 조건이 아니었던가?
그때였다. 래희의 그런 의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하나 날아들었다.
[히든 퀘스트: 고장난 태엽 고치기의 마지막 퀘스트 입니다.]
[라스트 퀘스트]
퀘스트 창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듯 래희의 눈앞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스트 퀘스트 : 류정우의 비밀]
사용자 ‘류정우’의 시스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그에 대한 비밀을 알아냅시다. 퀘스트 수행을 위해 ‘롬바르나의 대마법사’를 찾아가세요.
래희는 마지막 퀘스트라고 알리는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뒤,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롬바르나의 대마법사?”
체자레를 찾으라는 건가?
- 실패 페널티: 지구 멸망, 더는 리셋이 없습니다.
“미친.”
지금 협박하는 건가?
“그럼 류정우는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러나 시스템은 래희의 질문에 침묵을 유지했다. 래희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에 코웃음 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대답은 기대도 안 했어.”
여기까지 왔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류정우를 구하기 위해 시작한 퀘스트이니 성공하고 나면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래도, 힌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체자레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내가 그 인간이 있는 곳을 찾아가냐고.
그때였다. 래희의 의문을 눈치챘다는 듯이 그녀의 눈앞에 새로운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게이트가 발생하는 것처럼 공간이 찢어지며 통로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찢어진 틈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저 너머에 지옥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
이제 아무리 A급이 되었다 하더라도 저런 필드에는 가 본 적 없던 래희로서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권은 없었다. 래희가 저기로 넘어가야만 체자레를 만날 수 있다지 않는가.
‘…그래, 할 수 있어.’
이제는 될 대로 되라지.
래희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뱉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손에는 앙증맞은 분홍 마법봉을 든 채로.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찌르르 찌르르.
울창한 여름의 풀숲.
화창한 하늘은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외국의 시골 마을같이 생긴 작은 마을을 지나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이층집.
한 노인이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집 앞의 밭에 난 길에서 아이가 곰 인형과 함께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겨울을 대비해 아이를 위한 목도리를 새로 짤 계획이었다. 5년 전 처음 보았을 때 작고 왜소했던 아이는 어느새 하루가 멀다고 무럭무럭 자라나 한 계절 전에 입었던 옷이 몸에 맞지 않는 성장 속도를 보였다.
‘역시 어린아이는 잘 먹고 쑥쑥 자라는 게 맞는 게지.’
오랜만에 아이를 돌보는 그녀는 괜히 그 모습에 뿌듯해져서 이번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색상으로 목도리를 짜 줄 생각이었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그해 겨울, 분홍색 목도리를 건넸을 때 싫다고 말은 못 하고 입술만 삐죽 나온 모습이 꽤나 귀여웠지만. 이제는 자랄 만큼 자랐으니 취향도 존중해 줘야겠지.
롬바르나인이라면 칙칙하고 불길하다고 취급하는 색이라 별로 선호하는 색상은 아니었지만, 노인은 아이의 취향에 맞춰 검은색 털실을 구해 왔다.
검은색 털실을 구매할 당시 상인이 자신을 향해 이상한 사람 보듯 하긴 했지만 다 늙은 노인이 그런 눈빛에 굴하겠는가.
다만 다른 이들의 눈에 띄면 괜히 말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 적당히 하얀색의 무늬를 넣어 줄 생각이었다.
“할머니! 저 곰순이랑 뒷산에 다녀올게요!”
곰순이가 뒷산에서 토순이랑 만나기로 했대요!
노인은 아이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보호하는 이 산골 마을에 큰일이 일어날 일 같은 건 없었다. 5년 전 저 레이라는 아이를 품에 안고 온 그 마법사는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마을을 비호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 약속 덕분인지 마을 근처에는 이웃 마을처럼 사람을 해치는 몬스터 같은 건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외지인을 경계하는 마을 주민들은 아이와 마법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게다가 마법사는 있는 듯 없는 듯 잘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아이는 어린 나이치고는 말도 잘 듣고 눈치도 빠르지 않은가.
그래서 마을 주민 누구도 두 사람을 배척하는 일 없이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 보르노 마을에 정착했다.
래희를 돌봐 주는 노인, 마사 할머니는 마법사가 친구라고 붙여 준 곰 인형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가는 레이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태도를 보이기는 해도 저렇게 제 친구와 함께 이리저리 쏘다니는 걸 보면 제 나이에 맞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진 후 하던 뜨개질에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마사!”
마을로 이어지는 오솔길 사이로 누군가 열심히 뛰어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바로 마을 이장 마르코였다.
“마르코?”
아침부터 저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웬일인 게지?
“이 시간에 자네가 급하게 올 일이 뭐가 있는가?”
“마법사 선생 못 봤소?”
“못 봤지. 마법사 양반은 왜?”
바쁜 총각인 마법사가 레이 그 어린아이를 방치하다시피 두길래 제가 데려와서 돌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보호자인 마법사의 안부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글쎄, 오늘 윗동네에 불이 났다고 하지 않는가.”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불이야 날 수도 있는 거지. 80세 노인인 마사 입장에서는 다른 마을에 불이 난 게 마법사를 찾을 정도로 급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저 마르코는 전혀 괜찮아 보이는 안색이 아니었다.
“불이 점점 번지고 있다지 않은가! 벌써 산 쪽에 불이 다 번져서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네!”
“아니, 그 정도여?”
마을에 난 불을 제때 못 잡아서 산까지 번지다니. 이건 오래 살아온 마사도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마사의 집이 광산을 제외하고 마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마사는 레이를 불러 마법사에게 빨리 이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레이가 제 인형과 함께 뒷산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한 게 생각이 났다.
“안 돼!”
마사는 너무나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레이를 위해 짜던 목도리가 제 발밑에서 짓밟히는 것도 잊은 채 급하게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가 방금 전에 뒷산으로 올라갔어!”
“뭐? 지금 불난 곳으로?”
그 소리에 놀란 마르코가 빨리 구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먼저 마을로 돌아가 아이를 찾을 젊은이들을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듯했다.
그가 오솔길 사이로 사라졌을 때는 이미 불길이 마사의 집 뒤까지 거의 다 다다랐던 건지 바로 뒤 숲속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이고, 레이야…….”
그리고 그게 마사와 레이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