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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103화 (103/120)

103화

* * *

래희가 류정우를 남자로서, 그리고 류정우의 마음을 자각한 순간부터 과거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류정우가 제게 해 왔던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나서서 남을 먼저 챙기는 성격이 아닌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류정우가 저를 챙기는 모습은 아무리 자신이 눈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내가 멍청한 건지.’

래희는 한숨을 쉬며 그들을 관찰했다. 이곳은 바로 두 사람이 두 번째로 함께 휘말렸던 미로형 던전이었다.

방금 류정우와 함께 미로 정원의 중심부에 도착한 직후, 두 사람 위로 잔뜩 맺혀 있던 복숭아나무의 복숭아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나무 아래로 들어오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복숭아 열매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듯했다.

‘너무 대놓고 주우라는 듯이 유혹하는데 그걸 냅다 주운 너도 정말…….’

래희는 과거의 자신이 홀린 듯이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복숭아를 주워 드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아마 퀘스트에 필요한 작물을 모으는데 꽂혀서 다른 생각은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쿵쿵거리며 던전의 바닥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드너래빗. 정원사 복장을 한 토끼들이 복숭아나무 아래 우글우글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는 사람만 한 크기에 징그럽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몬스터의 생김새가 꽤나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엉덩이를 흔들고 래희와 류정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류정우가 자신을 번쩍 안아 올리고는 뒤돌아 그들이 지나왔던 유일한 통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래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미로의 벽 위에 앉아 느긋하게 감상했다.

‘저 때도 공주님 안기를 했었던 거였나?’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인지도 못 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지금 둘이 다시 만난 지 다섯 번도 안 된 거 아냐?

류정우는 아직은 전혀 쓸모없는 폐급 래희를 그들이 넘어온 벽 너머로 밀어 넣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래희는 류정우의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너네 여기서 또 헤어진다고.

그러나 제 눈앞에 떠오른 또 다른 히든 퀘스트를 보면 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하고.

[히든 퀘스트: 권래희(1)를 도와주기.]

과거의 당신이 무사히 퀘스트를 수행하고 류정우와 재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과거의 당신에게 멜론 전달하기. (0/1)

- 류정우와 재회하기. (0/1)

- 완료 보상: 게이트 소멸 조각 1/3

처음으로 래희 자신을 도우라는 퀘스트 내용이었다.

류정우 말고 과거의 자신과의 재회라니. 래희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게이트 소멸 조각’이 완료 보상으로 걸려 있기에 당연히 수행해야 했다.

물론 이번에도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조건 때문인지 아이템 하나가 전달되어 있었다.

[몬스터로 위장하기 티켓]

- 랜덤 / 1회권 / 30분

래희는 인벤토리에 넣어 둔 티켓을 사용하기 전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다.

지금 보니 류정우와 권래희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엇갈리고 있는 듯했다.

래희는 과거의 자신이 류정우와 떨어졌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티켓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전에 여우로 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야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변했는지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르츠슬라임. 과거의 래희와 마주쳤던 그리고 그녀를 도와주었던 작고 귀여운 후르츠슬라임이었다.

“뀨!(불편해!)”

손발이 없어 이동하려면 온몸을 통통 튕겨서 움직여야 한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몸인가!

하지만 래희는 투덜거릴 시간은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과거의 래희에게로 다가갔다.

과거의 자신은 이 상황에도 배가 고픈 건지 인벤토리에서 스콘을 하나 꺼내 먹고 있었다.

‘플레인 스콘!’

저거라면 나도 지금 필요한 것 같은데!

몸을 통통 튕기며 움직이는 게 꽤나 버거운데 힘 스탯을 조금이라도 올리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물론 몬스터한테는 통하지 않는 부가 효과였지만 자신은 몬스터로 모습을 변신한 거지 진짜 몬스터는 아니었으므로 통할지도 몰랐다.

래희는 열심히 통통거리며 과거의 래희에게로 뛰어갔다. 남은 스콘을 마저 입에 털어 넣으려는 모습을 보며 전력을 다해 몸을 튕겼다.

다행히 스콘을 다 털어먹기 전에 과거의 자신과 래희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폐급 래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도 달라고?”

래희는 긍정의 의미로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비전투계라 능력이 없을 뿐이지 다행히 눈치가 없던 건 아니었는지, 과거의 래희는 손에 쥔 스콘 조각을 래희에게 내밀었다.

래희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에 넣고는 꿀꺽 삼켰다.

[힘 스탯이 10분간 30 증가합니다.]

다행히 부가 효과가 통하는 듯했다.

‘좋아 좋아.’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었는지, 래희는 눈앞에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고 있는 과거의 래희를 순간적으로 잊고 말았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 본 적 없어? 키는 나보다 훨씬 크고 잘생긴 남자 말이야.”

아, 그러게.

류정우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지? 분명 과거에(지금 보니 미래의 자기 자신이었던) 슬라임이 위치를 안내했었던 것 같은데, 아까처럼 인간으로 변한 채 위로 올라가서 관찰할 수는 없었다. 류정우에게 위치 추적기를 붙이거나 관련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재주로 그를 찾는단 말인가.

“아냐 아냐. 그러면 여기를 나가는 길은 아니? 보다시피 내가 길을 잃었거든.”

과거의 래희가 달리 묻는 것과 동시에 타이밍 좋게 허공에 화살표가 나타났다. 마치 이것을 따라가면 류정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처럼.

래희는 그에 기운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갑게 연약하디 연약한 과거의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쀼우쀼!(따라와!)”

래희는 저 어설픈 과거의 자신을 화살표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예상대로 골렘을 처리하는 광경을 류정우에게 들키고야 말았고 그걸 바라보던 래희는 그저 퀘스트가 이끄는 대로 과거의 자신에게 멜론을 건넸다.

이후, 퀘스트는 이전 회차들과 달리 황당한 제안을 그녀에게 들이밀며 과거의 래희를 그녀가 알고 있는 결말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번 회차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절차를 밟아 가던 과거의 래희는, 결국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는 걸 막지 못하고 또다시 실패를 맞이해야만 했다.

* * *

[히든 퀘스트 ‘고장난 태엽 고치기’가 ‘히든 엔딩 2’를 맞이하였습니다.]

“하…….”

X발. 또다시 실패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 이번 회차에서도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지 못해 실패로 끝나 버린 상황에 래희는 욕설을 내뱉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모아야 할 게이트 소멸 조각은 총 세 개.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조각은 고작 두 개뿐이었다.

거기다 히든 엔딩 2라니. 그럼 히든 엔딩 1이 해피엔딩이란 뜻인가? 아니면 3, 4도 있다는 의미인가.

이제는 그 어떤 생각을 해도 머리가 복잡해져서 짜증이 났다.

“…이제 어쩌라는 건지.”

래희가 기억하는 회차는 여기까지.

한 번의 회귀를 기억하기에 그대로 따라왔건만 역시나 예상대로 류정우의 죽음을 막지 못해 자동으로 리셋 버튼이 선택되고 말았다.

이번 회차의 류정우는 래희를 살리기 위해 제 몸을 갈아 넣어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고자 했다.

그 선택을 한다고 바뀌는 건 없음에도, 다시 시작하는 그로서는 그 이후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한 결과였겠지.

래희는 게이트로 걸어 들어가는 류정우의 모습에 과거의 자신이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도 크게 다가온 탓이었다.

“야, 시스템 새X인지 성좌 새X인지 뭐 하자는 거야.”

하지만 시스템 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성좌의 답변이나 시스템 메시지 그 어느 것도.

래희가 크게 소리를 쳤다.

“뭐 하자는 거냐고!”

목이 찢어져라 외친 그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시스템 창에 드디어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히든 엔딩 2’를 발견하셨습니다. 발견 보상으로 게이트 소멸 조각 1/3이 주어집니다.]

‘……?’

이제 와서?

어이가 없었다. 한 번의 실패 후에야 게이트 소멸을 위한 나머지 조각 하나를 보상인 것처럼 건네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한동안 침묵만 유지하던 래희이 눈가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억울함을 넘어 너무 서럽고 화가 났다.

처음에는 그저 몇 개의 퀘스트를 통해 류정우를 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끔찍한 광경을 반복해서 봐도. 그것을 바꾸고자 나타난 어떠한 선택지를 눌러도. 결국 이 모든 상황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는 듯 결과적으로 바뀐 건 없었다.

이 모든 발버둥이 의미가 있는 일이었던가?

아니면 결국 제가 어떤 선택을 하던 류정우는 9번의 회귀를 겪게 될 사람이었던 건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앞으로 자기가 겪지 않은 미래도 바꿀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X발. X같네.”

시스템한테, 성좌 새X한테 놀아나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저장된 시간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Y / N]

(00:00:59 시간이 끝나면 자동으로 Y를 선택합니다.)

래희는 엔딩을 맞이한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공간에 드러누워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을 멍하니 응시했다.

어차피 자동으로 돌아갈 거라면 Y를 선택하나 안 하나 같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와서 N을 누르고 싶지도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시스템한테 놀아나는 거라도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는, 지난 경험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는 기분이라 X같아서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아악!”

허공을 향해 거칠게 발길질하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나자, 미치도록 뛰는 심장이 흥분한 탓에 아픈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악이라도 써서 그런지, 고조되던 감정은 많이 나아진 듯했다.

[히든 퀘스트 ‘고장난 태엽 고치기’]

(진행률 99% | 히든 엔딩 95%, 노멀 엔딩 90%, 베드 엔딩 80%)

진행률 99%.

1%를 남기고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듯이 시스템 창이 래희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00:00:18]

선택지 옆 남은 시간을 보자 괜히 래희는 울컥했다.

에잇,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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