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왜 돌아온 거지?’
류정우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새끼 여우의 행동에 당황하며 여우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여우의 맑은 금빛 눈동자에는 이전과 같은 경계심은 사라진 채였다. 솜털이 자란 새하얀 귀가 작게 팔랑거렸다.
얼마간 두 시선이 마주쳤을까 여우가 입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물고 류정우에게 다가왔다.
입에 물고 있던 반짝이는 것을 그의 발치에 떨어뜨린 후 그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곧바로 다시 뒤돌아 망설임 없이 수풀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류정우는 여우가 사라진 곳을 조용히 응시하고는, 제 발 앞에 떨어뜨린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발 앞에 반짝이는 분홍빛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색 열쇠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열쇠?’
류정우는 여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열쇠의 등장에 의문을 가진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열쇠라니. 몬스터한테 인간이 쓸법한 아이템을 얻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몬스터를 처치한 후 얻는 부산물은 마석과 같은 기본 재료 같은 것들뿐이니까. 그리고 마치 여우가 제게 살려 준 은혜를 갚듯이 던져 준 걸 보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겠지. 류정유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주워 들었다.
열쇠에는 약간의 마력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아이템임을 알리는 설명창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몬스터가 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쇠를 버리기에는 찝찝했으므로 그는 그것을 인벤토리 창을 열어 집어넣었다.
‘인벤토리 안에 등록이 되는 걸 보면 아이템인 건 분명한데…….’
그렇다면 왜 설명 창은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러나 류정우는 그 의문을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멀리서 지원 요청을 하는 다른 헌터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류정우는 인벤토리를 닫고 마지막으로 여우가 사라진 수풀을 응시한 뒤,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뛰어갔다.
* * *
“끼잉(으)…….”
네발로 걷는 건 느낌이 이상했다.
래희는 류정우가 제가 준 열쇠를 주워 들고 반대편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을 풀고는 제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없던 꼬리가 살랑거리고 이족 보행에서 사족 보행으로 변했는데도 원래 제 것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손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앙증맞고 하얀 새끼 여우의 발은 꽤나 귀여웠다.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기회는 없겠지만, 그 류정우가 순순히 풀어 준 걸 보면 상상만큼이나 귀여운 모양새일 듯했다.
“끼에(언제 돌아오냐)…….”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짐승의 울음소리뿐.
시스템 창을 확인하니 아직 2분은 더 기다려야 사람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장 인간으로 돌아오고 싶었으므로 래희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끼우…….”
하는 수 없지. 남은 시간 동안 퀘스트 창이나 확인하자. 그리고 그때 타이밍 좋게 퀘스트 완료 알림이 하나둘 나타났다.
띠링―!
[축하합니다! ‘히든 퀘스트: 류정우(9)에게 ‘차원의 열쇠’를 전달하기’를 완료했습니다!]
[히든 퀘스트 성공으로 히든 루트를 향한 성공 확률이 오릅니다!}
[히든 퀘스트 성공으로 ‘게이트 소멸 조각 1/3’을 획득하였습니다!]
…게이트 소멸 조각?
‘설마, 게이트 소멸 조각이란 걸 모아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아야 한다는 건가?’
‘1/3’이라는 숫자를 보니 앞으로 조각 두 개는 더 획득해야만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
앞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히든 퀘스트를 최소한 두 번은 더 해야 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이웃 나라 반요처럼 조각 모으느라 몇십 년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띠링―!
[게이트가 클리어됩니다!]
그새 보스 몬스터를 잡은 건지 눈앞에 게이트가 클리어되었다는 시스템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타난 새로운 퀘스트 창에, 어느새 인간으로 돌아온 래희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퀘스트가 끝난 후 휴식시간처럼 주어지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쉴 틈 없이 바로 다음 퀘스트를 다시 전달하는 듯했다.
[알림]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연계 퀘스트 (9-2): 류정우(9)와 권래희(1)의 친해지기(2)’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에이 설마.”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이다음에 나타날 선택지가 어떤 상황일지, 그리고 무엇이 될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래희의 시야가 변하며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앗!”
내 눈!
저기 멀리서 류정우의 가슴팍 위로 엎어져 있는 폐급 래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류정우에게 열쇠를 받아 관찰하던 중 함께 게이트에 휘말렸던 그날이었다.
‘권래희! 뭐 하는 거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래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 흔한 로맨스물의 클리셰가 작용한 것도 아니고. 원작 남주인 류정우 가슴팍에 안겨 있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지가 원작 여주도 아니면서 저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이가. 심지어 원작에는 로맨스의 ‘로’자도 없었다.
‘…X발.’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과거의 자신이 겨우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왜 제 꼰대 성좌가 저를 향해 정신 차리라고 항상 욕을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일어났어요?”
류정우가 제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과거의 래희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때는 당황해서 류정우의 얼굴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저거, 웃고 있는데?
서로에 대해 안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인데 어딘가 모르게 류정우의 표정이 과거의 자신을 놀리는 데 거리낌 없이 편안한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과거의 래희는 그런 류정우의 말에 놀란 건지 버둥거리다 중심을 잡지 못해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류정우가 꽉 붙들었다.
‘아이고…….’
래희는 차마 저 꼴을 두 눈 뜨고 보기 힘들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눈 위를 덮었다.
류정우 위에 앉은 채 얼굴이 빨개진 과거의 래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도 터질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래희를 구원하듯 시스템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남녀가 친해지는 데에는 적절한 ‘위기 상황’이 주어져야겠죠. 사용자 ‘류정우’와 ‘권래희’가 더욱더 서로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가는 기회를 만들어 줍시다. (아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주세요.)]
A. 래희 혼자 몬스터에 쫓기며 낙오되기.
B. 래희 혼자 비탈길에 굴러서 낙오되기.
…구원이 맞는 건가?
이건 누가 봐도 B를 누를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폐급 래희 혼자서 몬스터에 쫓기면 죽어!”
래희는 씩씩거리며 허공을 향해 소리 없이 아우성쳤다.
이번에는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연계 퀘스트(9-2): ‘류정우(9)와 권래희(1)의 친해지기(2)’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완료된 스토리가 자동 저장됩니다.]
래희는 저 멀리서 꼬질꼬질한 꼬락서니로 이제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겠다고 기뻐하며 류정우를 껴안은 채 방방 뛰고 있는 과거의 자신을 보고서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선택지 창을 누르지 않고 보류하다 제 기억을 떠올려 적절한 타이밍에 낙오시켰더니 발목을 삔 걸 제외하고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어휴…….’
보아하니 당장의 성공에 눈이 멀어 자신의 눈앞에 누가 서 있는 건지 잊은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매우 답답한 광경이었다.
그러다 래희는 어느새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류정우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류정우는 혼자서 좋다고 방방 뛰는 저 철없는 자신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가?’
류정우의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이 누가 봐도 호의 이상이라 래희는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간지러워지는 듯했다.
‘아…….’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니.
래희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제가 류정우를 좋아하는 건 언젠가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다시 류정우와 재회한 이후 최근까지 시도 때도 없이 그에 관한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역시 탈덕에는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덕질이란 한쪽이 일방적으로 마음을 주는 일이었으므로, 최애에게 그 마음에 대한 보답을 받겠다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류정우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자신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 않는가.
래희는 자신을 향한 류정우의 표정을 보며 묘한 기분과 함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윽고 이어지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래희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제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아…….”
내가 류정우를 진짜로 좋아하는 거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 최애인 그를 좋아하는 건 당연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렇게까지 가슴이 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류정우의 따뜻한 눈빛을 확인하자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은 단순히 그런 팬심으로의 감정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제 심장은 래희 자신이 류정우를 남자로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의심이었다면 이번에는 확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통 제 심장 소리만으로 가득 찬 듯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서로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같은 건 귓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래희의 온 신경이 류정우에게 고정되었다.
저 멀리서 과거의 자신이 퀘스트에 필요한 재료를 다 구했다고 좋다며 방방 뛰는 걸 보며, 류정우는 작에 웃으며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래희는 류정우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귀엽네.’
아…….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생각보다 제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에 대해 새로운 점을 많이 발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가 제게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래희는 함께 지내 온 시간과 퀘스트를 통한 수많은 회귀로 최소한 류정우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 같은 저 말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