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새로운 회차가 시작됩니다.]
한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 래희가 정신을 차렸다.
이건 모두 과거의 일이다. 래희가 류정우를 만났던 시점에서는 이미 류정우가 그 모든 걸 겪고 지나간 상황이었다.
래희는 자신이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바람에 류정우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대로 언젠가 진엔딩을 발견해서 퀘스트를 성공한다 하더라도 류정우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모든 걸 해결하고 류정우와 함께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런 날이 오더라도 래희는 온전히 그 행복을 누릴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부스럭.
이전 회차에서 단 한 번도 이 시점에 움직인 적 없던 류정우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지?’
분명 이번 게이트에서는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구조대가 들어오면 일반인인 척 얌전히 구출되는 게 순서인데? 작은 행동이라도 나비효과처럼 다가올 미래에 큰 영향을 주는데, 지금 그렇게 일어나 버리면 다음에 떠오를 선택지가 바뀌지 않나?
래희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수풀 사이에 숨어 숨죽이고는 류정우의 움직임을 조용히 관찰했다.
류정우는 숲 밖으로 걸어 나가는 듯했다.
숨어 있으려면 울창하고 낮은 나무가 많은 이곳이 더 유리했는데 저렇게 휑한 곳으로 걸어가다니, 힘숨찐을 유지하는 S급 헌터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보이는 광경에 래희는 기시감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색 물결이 일렁이는 밀밭.
…어디서 봤는데?
래희는 지난 회차 중 다섯 번을 이번 던전에서 시작했지만 이렇게 어디선가 본듯한 장소가 던전 안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곧바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류정우가 밀밭 한가운데 서 있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이는 다름 아닌 래희 자신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미친.
래희는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 회차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래희 자신이 류정우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되돌아오기 전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창의 ‘히든 엔딩’으로 가는 히든 루트가 권래희 자신이었던 건가?
그리고 래희는 제 꼴을 발견하고서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밀밭에서 굴렀던 기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꼬질꼬질한 행색에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물수건으로 얼굴이라도 벅벅 닦아 주고 싶었다.
“저 꼴로 류정우를 마주친 거야?”
팬 사인회 때도 있는 대로 힘줘서 꾸몄는데 오랜만에 만난 최애 앞에서 저런 거지꼴이라니.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어 래희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게다가 저 검은 슬랙스에 하얀 셔츠…….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며 사노비 생활하던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의상을 보니, 더는 두 눈 뜨고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게이트에 휘말린 저 때야말로 제 인생의 최악의 날 탑3 안에 드는 날짜가 아닌가.
래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녀의 뒤로 멀뚱히 서 있는 빅레이븐을 보자 더 어이가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 래희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정우는 프로 아이돌답게 눈앞에 그 어떤 광경에도 당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며 과거의 래희에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왜 그렇게 바보같이 웃는 거야!’
래희는 과거의 자신이 꾸며 내는 듯한 어색한 웃음소리를 듣자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다. 이따위 기억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얼른 선택지가 나타나는 순간까지 스킵 버튼을 누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스킵 버튼 따위는 없었으므로 멀쩡한 정신으로 저 제정신 아닌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류…정우 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는지…….”
‘야!’
일코한다더니 곧바로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부르다니. 피에타가 아무리 유명해도 일반인들은 제일 잘생긴 멤버 활동명 하나 겨우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대중에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성을 제외한 ‘정우’가 다였다.
그리고 그 이상함을 류정우도 감지한 건지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놀라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고 두야…….’
래희는 이마를 짚으며 저 콩트 아닌 콩트 같은 광경을 숨죽여 지켜봤다.
“혹시 테이머이신가요?”
“아… 네.”
아니지. 하루 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도대체 왜 하는 거니.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뭐라 한다고 과거의 래희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류정우의 얼굴 위로 애처로운 표정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행입니다. 제가 일반인이라 B급 게이트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음…….
‘역시 오빠는 배우는 아니야.’
래희는 류정우의 발연기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알림]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연계 퀘스트 9-1: 류정우(9)와 권래희(1)의 친해지기’의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불시에 불쑥 도착한 알림 창에 래희가 화들짝 놀라며 동그란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처음 보는 새로운 스토리였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건으로 넘어가나 보네.’
띠링―!
[사용자 ‘류정우’와 ‘권래희’가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 줍시다. (아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주세요.)]
A. 몬스터 A로 위협하기.
B. 몬스터 B로 위협하기.
…이게 뭐야.
래희는 이미 저 미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뒤로 곰, 블러디베어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랜덤 뽑기처럼 선택지를 애매하게 가려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어이없게 꼬여 버려서 회귀하는 수도 있었다.
“하…….”
아, 몰라. 어차피 최소 한 번은 실패했는데 어떤 선택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래희는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선택지 A 위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크아앙―!
쿵―!
얼마 뒤, 블러디베어가 소리 지르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자 류정우가 과거의 래희 자신을 낚아채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거 힘숨찐 중 아니었어?’
비각성자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피하는데 그건 누가 봐도 ‘나 각성자에요~’하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어휴…….’
래희는 류정우가 과거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걸 조용히 지켜봤다. 그 품에 안겨 있는 래희는 놀란 듯이 눈동자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폐급 헌터인 과거의 래희의 어색한 움직임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싸울 줄 모르는 건 당연하고 저 고장 난 움직임을 보라. 지난 1년 동안 A급으로 성장한 것도 정말 대단한 발전이었다.
‘내가 저 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더라?’
류정우가 잘생겼다는 생각?
아무튼, 래희는 갑자기 등장한 구오빠에게 안겨 당황한 과거의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류정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래희는 과거의 자신을 내려다보는 류정우의 표정을 보고 눈썹을 씰룩였다.
‘저거, 지금 꽤나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아주 귀찮게 되었다는 표정을 보아하니 까딱하면 품에 안겨 있는 래희 자신을 기절시킬 작정인 것 같아 보였다.
아냐, 원래 류정우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꿈틀거리는 다른 손을 보아하니 그 생각이 정답인 듯했다.
‘저 인간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눈새인 폐급 래희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류정우의 어깨를 살짝 쳤다. 그리고 류정우의 귀를 향해 가까이 대어 달라는 듯이 팔랑거리며 손짓했다. 분명 류정우의 귀에 대고 자신에게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중일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폐급인데 네 말을 믿겠니, 래희야.’
아니나 다를까 류정우의 얼굴 위로 떨떠름한 표정이 찰나의 순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류정우가 그러든가 말든가 그녀는 재 인벤토리를 열어 분홍색의 거품기를 꺼내 들었다.
‘아이고 두야…….’
래희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 안 그래도 이상한데 저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을 건 또 뭐야.
그리고 바로 그런 과거의 래희 앞에 류정우가 당황한 듯 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래희는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두 눈을 가렸다.
다음 일어날 일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그걸 차마 제 두 눈으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래희야, 제발.’
“뾰로롱……!”
래희의 귓가로 과거의 자신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 류정우 앞에서 흑역사 적립의 첫 시작이었다.
* * *
새로운 회차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이전과 달리 선택지가 모두 달라졌다. 그러나 류정우와 함께 있지 않았던 시간에는 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래희는 전혀 몰랐으므로 하나하나 신중히 생각하며 선택지를 눌렀다.
“후…….”
다행히 아직까지는 배드 엔딩의 확률이 올라가지 않았다.
[‘연계 퀘스트 9-3: 류정우(9)의 발견’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완료된 스토리가 자동 저장됩니다.]
방금 막 스토리를 끝냈으니 얼마간 숨 돌릴 정도의 시간은 벌었다. 시스템도 양심이 있긴 한 건지 곧바로 다음 선택지를 들이밀지는 않았다.
류정우의 9회차 삶.
여기까지 오는데 체감상 한 달은 걸린 것 같았다. 보통 소설에서는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 여행을 할 경우 현실에서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데, 게이트 안에 홀로 고립되었을 류정우를 생각하니 부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다.
히든 엔딩이라…….
그게 어떤 건지는 몰라도 자신이 전생에 읽었던 소설의 결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원작은 아직 뒤쪽 회차가 꽤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완결이 나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래희는 엔딩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손가락질하며 빠르게 퀘스트 창을 켰다. 물 흐르듯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니, 퀘스트의 목표가 엔딩을 보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걸 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사용자 ‘류정우’의 시스템 오류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 이 부분.”
이 문장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퀘스트 창의 완료 조건을 보면 연계 퀘스트가 모두 완료되면 성공적으로 퀘스트를 끝맺을 수 있을 것처럼 적혀 있었지만, 퀘스트 상세 설명에 적힌 ‘사용자 류정우의 시스템 오류 해결’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래희는 그동안의 배드 엔딩을 떠올렸다.
그동안 회차를 플레이하면서 모든 선택지는 래희가 선택했지만, 항상 마지막 순간만은 달랐다.
마치 오류가 난 듯이 새빨간 창으로 떠오른 마지막 선택지는 래희가 아닌 류정우 앞에 나타났다.
[회차를 리셋 하시겠습니까?]
A. 리셋한다.
B. 리셋하지 않는다.
섬뜩할 정도로 붉은 창은 어딘가 묘하게 래희에게 주어진 시스템 창과 다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