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미친 거 아냐?”
래희는 어이가 없었다. 류정우 키우기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상황이지?
어떤 걸 선택하든 전부 별로였다.
심지어 ‘C. 성좌의 선택을 받게 하기’는 애초에 제외된 선택지가 아닌가. 류정우는 성좌와 계약을 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류정우를 각성시키자고 사지로 몰아넣는 짓을 하다니.’
래희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어느 선택지도 고르지 않고 망설이자 붉은색의 경고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경고] 제한 시간 내로 선택하지 않으면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배드 엔딩……?’
그 문구를 보자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배드 엔딩이라니. 보통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면 여러 엔딩이 나오지 않던가. 만약 이게 게임이라고 가정했을 때 류정우에게 있어 배드 엔딩은 ‘죽음’일지도 몰랐다.
“설마…….”
혹시, 회귀를 반복하는 것도 진엔딩을 내지 못해서는 아니겠지?
래희는 갑자기 드는 미친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한 가설이기는 했지만, 류정우의 반복된 회귀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면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제한 시간 00:01:29]
어느새 경고창 위로 제한 시간이 1분 30초도 남지않았다. 일단, 배드 엔딩이 뭔지는 몰라도 그걸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뭐가 더 나은 선택지지?’
낭떠러지? 아니면 보스 몬스터?
만약 류정우가 보스 몬스터 앞에서 각성하면 그가 S급 헌터라는 걸 남들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원래 류정우는 회귀하기 직전까지 들키지 않지 않던가.
그렇다고 낭떠러지를 선택하면 각성을 할지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보통 던전 안에서의 각성이라는 게 몬스터에 위협을 받다가 각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선택지가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제한 시간은 10초도 남지 않았다. 더 고민할 시간도 없었으므로 래희는 곧바로 선택지를 눌렀다.
* * *
쿠궁―!
래희가 선택지를 누르자 땅바닥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흙먼지를 휘날리며 무언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류정우는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각성자인 자신은 무조건 도망치고 봐야 했다.
그러나 한낱 비각성자의 체력과 힘으로는 고등급의 몬스터보다 빠를 수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방금까지 다른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었지 않나.
급격하게 떨어진 체력으로 인해 류정우는 얼마 못 가서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허억―”
그의 바로 뒤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는다.
세 글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때였다.
탕―!
어디선가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
쿵, 소리와 함께 그의 뒤에 있던 몬스터가 쓰러졌다. 류정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헌터였다.
손에 들린 총을 보아하니 방금 들은 총소리의 주인이 류정우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인 듯했다.
“비각성자셨군요.”
류정우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 헌터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를 구해 준 헌터의 이름은 박이안이었다. 그는 B급 각성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류정우를 쫓아오던 몬스터는 C급 몬스터 ‘스톤보어’라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류정우가 자신을 구해 준 헌터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죽을 뻔한 걸 구해 줬으니 당연한 인사였다.
박이안은 그들이 휩쓸린 게이트는 B급 게이트라 저 혼자서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건 무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류정우를 보호하면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니 걱정 말라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들이 적당히 숨을 장소를 찾아 얼마나 헤매었을까. 수풀 사이를 헤치던 와중 박이안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멈춰요.”
류정우는 곧바로 그의 말에 따라 멈춰 섰다. 비각성자인 자신과 달리 박이안은 무언가를 느끼는 듯했다.
“류정우 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박이안은 굳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 뒤, 총을 앞으로 겨눈 채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박이안이 몇 발짝 앞섰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두 사람에게 날아왔다.
휙―!
탕―!
류정우가 본능적으로 엎드리자 한차례 총성이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류정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박이안이 서 있던 자리는 움푹 팬 채였고 다행히 박이안은 몸을 피한 듯 바로 옆에 굴러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곧바로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며 어두운 숲속을 응시했다. B급 몬스터치고 공격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려면 최소한 보스 몬스터 정도는 되어야 했다. 보스……?
“설마…….”
박이안은 그의 뒤에 엎드려 있는 류정우를 흘끗 바라봤다. 민간인을 지키면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더 이어 갈 수 없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다른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윽.”
순간 다른 생각을 한 탓인지 공격을 비켜 맞았다.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니기에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원거리 딜러인 그로서는 명중률이 꽤나 중요했기 때문에 곤란했다.
어둑어둑한 정도였던 숲에 어느새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와 있었다. 그래서 어딘가에 있을 몬스터를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구슬 모양의 빛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그는 긴장한 채 빛 덩이를 바라봤다. 그의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빛을 보니 단순한 불빛에 불과한 듯했다.
원래 게이트란 게 워낙 다양했고 알려지지 않은 게 많았기 때문에 박이안은 금세 빛 덩어리들에 신경을 껐다. 저게 뭔지 몰라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오히려 정체 모를 불빛 덕분에 시야 확보를 할 수 있으니 좋았다.
“저기 있군.”
불빛들 사이로 몬스터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자신을 공격한 몬스터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블루 크라운 리자드……?”
그가 몬스터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필드 보스 ‘블루 크라운 리자드(B)’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반투명한 메시지 창 너머로 리자드의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여태껏 그를 공격한 건 채찍처럼 내려치는 리자드의 푸른색 혀였다.
휙―!
박이안은 재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치달았다. 리자드를 따라온 다른 몬스터들이 있었던 건지, 그들 주변을 몬스터들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블루 리자드…….”
보스 몬스터 몸집의 절반 크기의 일반 C급 몬스터였다. 일이 이렇게 되면 살아남기는 글렀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 혼자서는 도망칠 수는 있어도 민간인인 류정우는 도망치지 못할 거다.
하지만 나름 고등급이라 분류되는 B급 헌터의 자존심과 사명감은 민간인을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도망가는 것 대신 총구를 겨누는 걸 선택했다.
탕―!
그의 총성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아니, 이건 아니지!”
[스토리를 진행하는 중에는 인과율에 영향을 주는 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스킬 ‘반짝반짝’을 이용해 불빛을 보내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할 때부터 래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드는 몬스터들한테서 B급 헌터가 홀로 민간인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처음 몬스터를 마주쳤을 때부터 예상한 대로 B급 헌터 박이안은 한계에 도달했다.
“윽…….”
꽤나 뛰어난 헌터였던 건지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가며 류정우를 노리는 일반 몬스터들을 빠르게 처리해 갔다.
그러나 몇 마리를 남기지 않고 미처 피하지 못한 보스의 공격에 박이안은 그만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탕―! 탕―! 탕―!
어두운 숲 한가운데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인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박이안은 제가 몬스터를 얼마나 쓰러뜨렸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탕―!
마지막 총성과 동시에 박이안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 주변에 블루 크라운 리자드를 포함해서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휙―!
어디선가 공격이 날아왔다. 류정우는 쓰러진 박이안을 붙잡고 옆으로 굴렀다. 판단이 옳았던 건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헌터인 박이안이 쓰러졌다. 민간인인 저 혼자서는 저것들을 피할 능력이 없었다. 류정우는 유난히 늦는 것 같은 구조대를 원망하며 다시 한번 공격을 피했다.
“아악―!”
잘만 피하던 박이안과는 달리 민간인의 신체적 능력은 형편없었으므로 당연히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류정우는 공격에 스쳐서 피를 흘리는 다리를 돌아봤다.
‘젠장.’
이젠 정말 끝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박이안에게 미안해졌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이 남자까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띠링―!
[사용자 ‘류정우’가 시스템에 등록됩니다!]
[축하합니다! ‘스나이퍼’로 각성에 성공하셨습니다!]
[상태 창]
이름: 류정우
나이: 22세
칭호: 일류 아이돌
클래스: 스나이퍼
등급: S
스킬
- (열어 보기)
스탯
- (열어 보기)
‘각성?’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상태 창이 빠르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나이퍼’로 각성한 사실 말고는 다른 상태 창 내용을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휘익―!
쓰러진 박이안을 낚아챈 류정우가 곧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콰광―!
보스 몬스터의 빠른 공격이 이어졌지만, S급으로 각성한 류정우에게는 모든 게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류정우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게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강함을 느낀 건지 움직임이 이전보다 훨씬 느려졌다.
‘공격할 만한 무기가 없어.’
방금 각성하긴 했지만, 클래스가 ‘스나이퍼’였다. 그 뜻은 자신에게는 총기류와 같은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불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박이안의 총이었다.
류정우는 곧바로 총을 주워 들고 어둠 속에 숨어든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총구를 겨눴다.
탕―! 탕―! 탕―!
몇 번의 총성 소리를 끝으로 어두운 숲속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게이트가 클리어됩니다.]
류정우는 제가 쥐고 있던 총을 박이안의 손에 쥐여 줬다.
‘이쪽이 한 걸로 하는 게 좋겠지.’
그의 손에 총을 쥐여 주자마자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정우는 인기척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싸늘하게 식어 있던 표정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다행이라는 표정이 얼굴 위로 드러나 있었다.
“여깁니다!”
푸르게 변한 류정우의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감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