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어느덧 시간이 흘러 12월의 중순이 지나갔다.
12월 20일. 예정되어 있던 대던전 토벌로 인해 ‘대던전 서울 82’ 앞 게이트는 무장한 헌터들과 그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기자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래희는 게이트 토벌에 필요한 빵을 길드에게서 공식적으로 의뢰를 받은 상황이라 모여든 사람들을 뚫고 헌터들이 위치한 곳까지 다가가야만 했다.
‘어휴……. 어제 미리 전해 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동안 농사짓는 기간이 빠듯했기 때문에 원하는 일정에 맞춰서 빠르게 준비할 수가 없었다.
‘몰라, 어쩔 수 없지.’
래희는 사람들 사이를 열심히 헤치고 바리케이드 앞까지 도착했다.
바리케이드 앞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서인지 던전 관리청 직원들이 그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래희는 그 푯말을 읽으며 인벤토리에서 청해 길드 소속 헌터증을 꺼내 들었다.
“헌터증을 제출해 주세요.”
던전 관리청 직원은 헌터증에 찍힌 래희의 사진과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어…….”
대던전 토벌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아이템을 배달하러 왔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런 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어 도저히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 래희 씨!”
멀리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걸어왔다. 래희는 구세주를 보는 듯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철용 헌터님!”
안철용은 던전 관리청 직원들에게 청해 길드에서 요청한 물품 때문에 부른 소속 직원이라고 설명한 뒤,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래희 씨, 오랜만입니다. 제가 진짜 그동안 래희 씨 빵을 얼마나 먹고 싶었는… 억!”
누군가 뒤에서 안철용의 머리를 종이 뭉치로 퍽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리고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윤청현 청해 길드 길드장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철용 헌터. 곧 있으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죄송합니다!”
안철용은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는 래희를 발견하고는,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해야 할 장비 점검을 후배에게 떠넘긴 뒤에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그동안 일이 바빠 래희의 빵집을 들르지 못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안부도 묻을 겸 겸사겸사 빵 한 조각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직장 상사의 등장에 안철용은 당황하며 래희에게 인사를 한 뒤, 재빠르게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길드장님.”
래희는 그래도 폭력은 아니지 않냐는 눈빛으로 눈앞에 불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윤청현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는 그런 래희의 눈빛을 모르는 체하며 말했다.
“대던전 토벌은 1세대, 2세대 할 것 없이 모두 들어가니까 당분간 길드는 무방비 상태일 거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나서지 말고 숨어.”
“벌써 그 말씀도 10년이 넘었어요. 늘 그랬듯이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요?”
윤청현은 알 수 없는 듯한 눈빛으로 래희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래희를 혼자 두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혹시 문제 생기면 천해훈 실장한테 말하고. 부상 때문에 은퇴한 몇 안 되는 케이스긴 해도 이 바닥에서 구른 지도 벌써 20년이야.”
“넵.”
래희는 윤청현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길어질 듯하자 눈을 굴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봤다.
“게이트 안에서 육포만 드시지 말구요. 제가 만든 빵 꼭 드세요.”
음식은 아이템으로 분류되지 않아서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지 않지만 제가 만든 건 특수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잖아요.
윤청현은 저를 걱정하는 듯한 래희의 말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래희의 뒤에서 뭔가를 발견한 건지 표정이 굳어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김유한 아들이랑은 아직 연락하는 사이냐?”
“아뇨?!”
제가 미쳤나요?
래희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그런 강한 부정에 윤청현은 뭔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앞으로도 엮이지 말고.”
뒤에서 래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청해 길드 물자 담당 직원으로, 얼마 전 래희에게 소속 헌터들을 위한 빵을 주문한 그 직원이었다.
래희는 곧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윤청현을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이만 일 때문에 가 봐야겠어요. 길드장님, 무리하시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이제는 제법 딸 같아 보이는 인사말이었다.
키운 정도 정이라고 아빠라고 불러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윤청현도 그건 무리라는 건 알았다.
그는 멀어져 가는 래희의 뒷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바로 뒤에 열려 있는 붉은 게이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헌터넷 익명 게시판
[잡담] 이번 대던전 토벌 명단
(사진)
(사진)
라인업 화려한 거 보니 이번에는 진전이 좀 있을 수도.
- 한국 스급 그럼 이제 몇 명인 거?
└8명.
└인구 대비 많은 편이네.
- ㅅㅂ 단체 사진 보니 살기 싫어진다 스급은 얼굴 순으로 뽑는 거?
└아예 잘생겨야 성좌의 선택을 받는 걸 수도.
└저 중 절반은 성좌가 없음.
└시스템도 눈이 높은가 보지.
- 류정우 ㅈㄴ 점점 맛깔나네…….
└유난히 예민해 보이는 거 내 착각? 예민미도 야미~
└대던전 들어가는데 안 예민한 게 더 이상한 거지.
- 근데 청해 길드 단체 사진에 빵집 사장님도 있는데?
└소속 식구니까 같이 찍었겠지.
└남친 보러 갔다가 찍은 듯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거 개X받네.
└병먹금———————-
고등급 헌터들이 대던전 안으로 들어간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늘 그랬듯이 사람들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으며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대부분의 고등급 헌터들이 대던전 토벌에 참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안전지대 중심에서 발생한 게이트는 사람들을 패닉에 빠트릴 수밖에 없었다.
- 긴급 속보입니다. 서울 안전지대 11-3번가에서 게이트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예상 규모는 A급으로, 정부는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하여 투입 가능한 헌터들을 찾…….
하지만 래희는 그런 밖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사건의 태풍의 눈 한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대던전 토벌로 고등급 헌터들이 자리를 비운 지 사흘.
래희는 대부분의 고객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탓에 손님이 얼마 없어 베이커리의 문을 일찍 닫을 생각이었다.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번에도 홀로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원래 인생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거라고 말합니다.]
손님이 모두 매장을 떠나고 가게 정리를 하던 중 가게 문이 열렸다.
딸랑―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래희가 고개를 돌리며 영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의외의 인물에 놀란 래희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어? 앤드류 발렌타인?”
“Hi.”
앤드류는 오랜만에 만난다는 듯이 래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몹시 놀란 듯한 래희가 제 자리에 멈춰서서 영어로 물었다.
“지금 그쪽도 미국에 있는 대던전 게이트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앤드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지금은 제가 들어갈 타이밍이 아니라서?”
하지만 래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앤드류는 그런 래희의 모습에 예상했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래희한테 빵을 구매하려고요.”
“어떤……?”
앤드류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무거나? 나 그쪽이 만든 거면 아무거나 잘 먹어요.”
…아무거나?
잠시 진열대를 정리하던 래희의 손이 멈칫거렸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곧바로 앤드류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초코 곰순이빵이랑 소금빵, 멜론 곰순이빵 이렇게 세 개 남아 있는데 전부 드릴까요?”
“…소금빵 주세요.”
‘소금빵…….’
초코빵이 아니라?
래희는 문득 든 위화감에 소금빵을 꺼내던 손을 살짝 떨었다.
그나저나 쟤는 왜 아까부터 말을 공손하게…….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라고 충고합니다.]
‘아…….’
래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소금빵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앤드류를 향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소금빵이 세 개 정도밖에 안 남아서 괜찮겠어요? 빨리 구우면 15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그 말에 앤드류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 의자에 앉아 있을 테니 다 되면 불러 주세요.”
래희는 뒤돌아서서 가게 한구석에 배치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는 앤드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고는 의미 없이 한번 웃어 주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초조해 보이지 않아야 했다.
‘지금이 기회야.’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당장 대던전에 들어가 있는 류정우에게 연락하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저 어색해 보이고 이상한 앤드류 발렌타인의 모습을 보니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망쳐야 해.’
혹시라도 스킬로 인해 주방 밖으로 빛이 새어 나갈까, 래희는 주방 입구 쪽 커튼을 꼼꼼하게 쳤다. 커튼을 치며 밖을 살짝 확인하자 앤드류는 여전히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래희가 ‘잊혀진 마을’의 스킬을 시전하려던 순간이었다.
“잡았다.”
커다란 손이 래희의 어깨를 붙들었다. 극심한 공포가 전신을 지배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래희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뒤로 돌아섰다.
방금 앤드류 발렌타인이 롬바르나어로 그녀에게 잡았다, 라고 말했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래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는지.”
“무슨…….”
아무 핑계나 대려 래희가 재빨리 입을 열었지만 이어 말할 수 없었다.
앤드류가 허공에 손을 뻗어 이상한 문장을 적더니 제법 커다란 마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마석 안으로 불길해 보이는 기운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붉은색의 기운이 마석 안을 맴돌다 마석에 금이 가며 쩌억 갈라졌다.
순식간이었다. 갈라진 마석 사이로 거센 바람이 불어 나오기 시작했다.
래희가 미처 도망갈 틈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