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발레리오 데산티스.
성녀의 바로 아래에 있는 12 사제 중 한 명으로 미카엘과는 사이가 몹시 좋지 않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미국의 S급 헌터인 앤드류 발렌타인의 몸을 차지하고 있다니.
천영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미카엘 아니, 김주현을 흘끗 바라봤다.
‘…저자라면 알아차릴 수도 있어.’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라면 김주현의 상태를 금방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만일, 발레리오가 김주현의 이상을 알게 될 경우 그는 다른 부작용을 겪은 이들처럼 폐기처리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억울한 누명이라 하더라도 발레리오 입장에서는 전혀 나쁠 것이 없는 결말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김주현의 신변에 대해 걱정하는 사이 발레리오, 이제는 앤드류가 된 남자가 그의 밝은 노란 눈동자로 두 사람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김주현의 얼굴에 고정이 되었다.
“호오…….”
그가 조롱을 하는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모를 태도로 김주현을 향해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김주현은 그의 태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비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까지는 미카엘 사제와 행동이 같으니까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천영은도 이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미카엘, 자네도 오랜만이군.”
앤드류가 김주현을 향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잠시 동안 흘끗 쳐다만 볼뿐 이내 고개를 돌려 관심 없다는 듯 무시했다.
하지만 그런 김주현의 모습이 익숙한지 앤드류의 생글거리는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발레리오, 이제는 이곳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네. 밖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이제부터 조심하지.”
앤드류가 빠르게 답했다. 하지만 그 지적이 언짢았는지 생글거리던 표정에 약간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앤드류의 등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김주현이 불편한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 입을 열었다.
“왜, 앤드류 발렌타인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한국은 제 관할입니다.”
“네 것, 내 것이 뭐가 중요하지?”
현아린 대신 앤드류가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이 있으니까 굳이 이곳까지 온 거지. 나도 오지 않을 수 있다면 안 왔을 거야.”
그러나 여전히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김주현이 얼굴을 구긴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주현 형제님. 한국의 비전투계 각성자 중 B급 이상 각성자가 몇 명이죠?”
“B급 이상이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대략 1,000명 정도 됩니다. 하지만 이 중 제작계 헌터만 세면 고작 200명 언저리입니다.”
“A급은?”
김주현은 순간 말하기를 주저했다. 지금 저 질문을 저에게 던지는 이유가 뭐지? 그때, 천영은의 목소리가 그 대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50명입니다. 포션 마스터나 대장장이 같은 클래스를 다 포함해서요.”
현아린은 김주현 대신 대답한 천영은을 한번 힐끔 쳐다본 후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역시 작은 나라라 그런가 그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고작 천 명도 되지 않는 사제들로는 전 세계 모든 헌터의 몸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지구를 손아귀에 거머쥘 생각이었는데 그 방법이 예상치 못한 문제로 틀어졌으니 조금 비효율적이더라도 다른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계약서 중 금제를 걸 수 있는 계약서라는 게 있다는 거로 압니다.”
현아린의 목소리가 작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투자라고 생각하죠. 얼마를 들이게 되더라도 쓸모가 있어 보이는 제작계 헌터를 모두 포섭하세요. 그게 자의든 타의든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는 방식으로요.”
롬바르디와 연결되는 게이트를 언제까지고 열어 둘 수는 없었다. 곧 있으면 무너질 롬바르디와의 연결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면 롬바르디의 멸망에 휩쓸려 지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들은 정착하기 위해 지구라는 차원으로 넘어온 거지 이곳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욕구인 의식주 중 ‘식’을 손에 쥐고 모두의 목줄을 잡으려 했지만 그건 이미 소용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게이트를 닫기로 했던 날짜를 조금 미뤄야겠군요.”
게이트 문을 닫으면 이제는 더는 세계 곳곳에 던전이 발생하지도,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 몬스터가 출몰하지도 않게 될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 구역을 벗어나 정착하게 될 거고, 자연스럽게 전투계 헌터의 쓸모는 사라지게 된다.
싸울 줄만 아는 군인도 아닌 용병이 평화로운 세상에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비전투계, 즉 제작계 헌터는 달랐다.
그들은 스킬을 이용해 과학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이템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것을 독점하게 된다면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신’의 존재가 중심이 되는 롬바르나와 달리 이 차원은 ‘자본’이 중요하지 않은가.
자신들은 언제나 민중의 머리 위에 군림해 있었으므로 난민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롬바르나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시작했을 때인 20여 년 전부터 천천히 이곳을 장악해 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대던전 토벌이 있을 12월 20일이 아닌, 12월 31일인 올해 마지막 날로 미루죠.”
열흘 정도 미루는 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원래 계획은 포섭하지 못할 고등급 헌터들을 모두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고 연결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토벌 기간은 한 달 정도로 꽤나 길었기 때문에 고작 열흘 미루는 게 그들의 계획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거였다.
한국에 온 김에 전달해야 할 이야기를 끝낸 현아린이 고개를 돌려 앤드류 발렌타인을 바라봤다.
그가 할 일에 대해 한 번 더 언급할 생각이었다.
‘위트 아메리카’라는 회사는 타격을 입긴 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좋은 기업이었고 그런 기업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른 쪽으로 이용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그 이유뿐 아니라 개인적인 용건이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앤드류.”
“네, 성녀님.”
“저번에 포섭하는 데 실패했었다던 ‘권래희’라는 여자를 잘 데려올 수 있겠죠?”
순간 김주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천영은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물론입니다.”
앤드류 발렌타인은 재수 없을 정도로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을 회유하는 건 이곳이나 저곳이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은 결국 아름다운 것에 약하기 마련이고 이번에 차지한 앤드류 발렌타인이라는 남자의 몸 또한 제 본래 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김주현이 제 앞을 스쳐 지나간 앤드류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 * *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로 정리된 각성자 명단입니다.”
천해훈이 잠긴 목소리로 자신의 상사 앞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A급 헌터였어도, 대던전 토벌 준비와 남몰래 해야 하는 조사 업무가 겹치니 정식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힘들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자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실종자였거나 귀환자라고?”
“그렇습니다.”
알버트 로스의 사망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용암 지대 게이트에 들어간 헌터들 위주로 조사하던 중 윤청현은 저도 모르게 이전에 들었던 김유한의 대화를 떠올렸다.
‘힌트를 주자면 말이지… 음……. 이전보다 힘을 좀 못 쓰는 것 같달까?’
그래서 그는 처음 각성자로 판정되었을 때 측정된 힘보다 오히려 약해졌거나, 행보가 수상한 사람을 위주로 조사를 지시했다.
그런데 막상 명단을 작성하고 보니 대부분이 게이트에서 실종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으로는 최소 하루 정도는 게이트 안에서 사라졌던 인물들이군.”
“그렇습니다. 난이도가 높은 게이트에서 실종된 것 치고는 다른 실종자들과 달리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리 고등급 헌터라도 홀로 낙오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건 맞지.”
윤청현은 보고서에 적힌 인물의 사진과 이름들을 눈에 담았다.
첫 장만 보아도 천해훈의 설명대로였다.
그리고 그가 다음 장을 펼쳤을 때, 그곳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주현?”
김유한의 아들이 아닌가? 심지어 어느 날 갑자기 래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김주현에 관한 보고를 읽어 내려갔다.
‘5년 전 대던전 토벌 이후 성격이 변했다는 주변인들의 진술이 공통적으로 발견. 평소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신경질적으로 변함. 당시 대던전 보고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며칠 동안 다른 헌터들과 실종되었었다는 증언을 입수.’
5년 전……. 공교롭게도 모든 변화가 ‘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분명 100 만큼 힘을 쓸 줄 알던 내 새끼가 이전의 70밖에 못 쓰는 것처럼 말이야.’
조금 전 떠올렸던 김유한의 대화 중 하나가 또다시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내 새끼…….’
그게 김주현을 말하는 거였군.
윤청현은 몇 달 전 S급 게이트에서 하루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제 아들 윤재언을 떠올렸다.
과연 저도 제 아들을 믿어야 할까?
하지만 보고서 내용을 보면 S급 이상의 헌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사람을 붙여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니…….’
그는 피어오르는 의심을 억누른 채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아한 인물 한 명을 발견했다.
“현아린이라…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과거의 래희를 생각했을 때, 본인이 없는 몇 년 사이 변해 버린 지구에 정착하기가 몹시도 어려웠을 텐데?
윤청현의 중얼거림에 천해훈이 빠르게 대답했다.
“귀환자들의 특징을 살펴보던 중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들 모두 지구로 귀환한 이후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나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더군요.”
“그건 이상하군.”
“그 명단에 올라오지 않은 귀환자는 래희 양뿐입니다.”
보고서의 종이를 팔랑거리며 넘기던 윤청현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