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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87화 (87/120)

87화

“어서 오세요! 야미베어 베이커리입니다!”

오랜만에 가게를 오픈하자 래희는 기분이 좋았다. 돈이야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 상황이었고 항상 돈 많은 백수를 노래 부르기는 했지만, 막상 진짜로 백수가 되어 보니 너무 힘들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며 나이만 먹는 기분이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니 보람차게 느껴졌다.

‘일개미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일하는 것이 보람차다면 앞으로도 바쁘게 사는 수밖에.

래희는 이제 겸허하게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반가운 얼굴이 가게 문을 열며 들어왔다.

“래희야!”

문을 활짝 열며 들어온 사람은 바로 백화 길드의 길드장이자 윤청현의 친구인 김유한이었다.

“길드장님!”

래희는 오랜만에 만난 김유한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했다.

“직접 오셨네요? 그동안 다른 직원분 보내셨잖아요.”

“그걸 알고 있었니?”

“모르는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고 비서님을 보낸 건데 모를 리가요. 그런데 오늘은 직접 오셨네요?”

그리고 그때, 김유한의 뒤로 김주현의 얼굴이 보였다.

“아…….”

래희가 밝게 웃다 말고 김유한의 뒤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그는 래희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근처 지나가다가 들른 거야. 저 녀석은 그림자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말고.”

어째, 김유한의 태도가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래희는 애써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메뉴가 몇 개 없는데 괜찮으세요? 재료가 모자라서 기본 빵 종류밖에 없어요.”

과일이 들어간 빵이 시그니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국에 그런 사치스러운 빵은 눈에 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래희의 가게 안에는 온통 무난하고 담백한 빵들로 가득했다.

종류별로 1인당 2개 구매 제한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뒤, 김유한은 곰순이 소금빵 4개를 쟁반 위에 옮겨 담았다. 보아하니 김주현을 끌고 온 이유가 더 많은 빵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보였다.

“허.”

그 모습을 보던 래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가 입을 막았다. 어찌 되었든 가게 매출을 올려 주는 거니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래희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저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김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지금 죽으려고 작정했어?’

무언가 머리를 세게 내려친 기분이었다. 래희는 멍하니 서서 김주현을 응시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김유한을 바라봤다. 그는 어서 계산해 달라는 듯 래희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못 느낀 건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유한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래희는 곧바로 방금 떠올린 김주현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간 그가 의심이 갈 만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래희의 능력으로써는 그 의도를 알아낼 능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김주현은 이제 그녀와 관련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 * *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군요.”

위트 아메리카의 미국 본사의 사장실 한가운데에 CEO인 케빈 로스가 누군가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면서 소파 가운데 앉은 여성의 얼굴 아래를 밝게 비췄다. 그녀는 한 손에 든 위스키 잔 속 얼음을 소리 나게 굴리며 다리를 꼰 채로 발을 까딱였다.

“물론, 오염 지역이 정화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긴 했어요. 이게 형제님의 잘못은 아니죠.”

그러나 케빈의 고개는 올라올 줄 모른 채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케빈을 향해 구두를 또각거리며 걸어갔다. 검정 큐빅으로 장식된 드레스가 달빛에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케빈의 무릎 앞에 멈춰 선 여자는 고개를 숙여 케빈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케빈의 갈색빛의 두 눈동자 안에 검은 머리의 동양인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바로 ‘현아린’이었다.

현아린은 케빈의 턱을 붙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형제님이 그 몸에 들어가기 전, 제가 맡겼던 일이 하나 있었거든요.”

케빈은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현아린은 케빈의 턱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를 하나 발견해서요. 계속 생각나는 걸 보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겠더군요.”

그리고 그녀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진 몇 장을 그에게 던졌다.

“이름은 ‘권래희’. 헌터긴 한데 특이한 클래스를 가지고 있더군요? 빵집 사장이라던가…….”

“이전에 보고된 보고서에서 들어본 적 있습니다. 식품 관련 이능력이라 미리 포섭하기 위해 손을 썼었는데 실패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만…….”

원래는 구석으로 몰아세워 어쩔 수 없이 계약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포섭을 못 한 것뿐만 아니라 호감까지 잃어버렸죠.”

케빈은 제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아린이 저를 비난하는 것 같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던 현아린이 피식,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것도 당신 잘못은 아니죠. 그때는 나도 육체를 바꾸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성좌의 계약자라 육신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게 아쉬운 거죠.”

그 몸을 빼앗았다면 일이 아주 쉬워질 텐데 말이죠.

그리고 얼마간 두 사람이 있는 사무실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케빈의 떨리는 듯한 숨소리가 옅게 울려 퍼지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된 마당에 남은 힘이라도 잘 이용해서 전세를 다시 이쪽으로 끌고 와야죠. 그리고 그 길에는 ‘권래희’라는 사람의 힘이 필요한 것 같지 않나요?”

그 말에 케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이전에 앤드류 발렌타인과 따로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를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런 친분도 없고, 상대방이 딱히 돈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 같아 케빈, 자신이 나서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만일 자신이 나섰다가 실패해서 제 앞에 있는 이의 분노를 사게 되면 어쩔 건가.

그래서 그는 얼마 전 발렌티오 사제가 몸을 빼앗은 앤드류 발렌타인을 떠올리며 제안했다.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한 사이가 아니라 앤드류 발렌타인을 보내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가 부작용으로 자세한 기억이 없어 대외 활동을 못 하고 있긴 하지만 이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현아린은 고민을 하는 듯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이내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렇다면 그가 권래희를 데려오기 전에 그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세요.”

“네.”

현아린이 잔 속에 남은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또각거리는 걸음 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기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현아린의 모습이 방 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케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에게 있어 성녀 레지나는 공포의 존재였다.

* * *

김주현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가 가로질러 온 어두운 복도의 끝에는 철로 만들어진 듯한 두꺼운 문 하나가 존재해 있었다.

“후…….”

김주현은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마음의 평정이 필요했다.

지금 그는 그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섣불리 행동하거나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지금 미카엘이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얼마 전 만났던 존재의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두 가지 영혼이 섞여 있군. 그것도 하나로 거의 융화되어서 말이야…….’

그동안 의심해 왔던 모든 것들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그들과 함께해 오면서 결코 혼자서는 그들을 모두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제 아버지인 김유한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라도 막아 보고자 했을지도 몰랐다. 제가 진실을 말한다 해서 믿어 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아버지를 믿을 수 없던 것이었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아버지 김유한이 그를 의심한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 갔다. 1세대 헌터 중 몇 안 되는 생존자답게, 그는 상황 파악이 빠른 듯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김주현의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른 이들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김주현은 김유한에게 그 어떠한 사실도 직접 입 밖으로 전달하는 일 없이, 단순히 이중 첩자처럼 제 아버지에게 힌트만 계속 흘렸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정보를 제공하는 이가 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어.’

김유한은 알면서도 그런 제 아들의 행동을 모른척했다.

금속 문고리의 냉기가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철컥―

문고리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 눈앞의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수많은 눈동자가 모두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김주현은 곧 있을 대던전 토벌 준비를 마치자마자 온 것인지, 아직 전투복을 입은 채였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앞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넘겨져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가고 뭐 해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뒤돌아 확인하자, 바로 등 뒤에는 천영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

짧은 감탄과 함께 그녀는 김주현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이들을 한번 힐끔 바라봤다.

“생각보다 많이들 모였네요?”

그런 천영은의 목소리에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현아린 옆의 한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찰랑거리는 금발을 쓸어 올리며 천영은을 응시했다. 그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엔드류 발렌타인?”

아니,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보다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 다른 걸 봐서는 그의 육신을 다른 누군가가 빼앗는 데 성공한 듯해 보였다.

‘S급 각성자의 몸을 빼앗는 건 처음 봤는데…….’

신기하다는 듯 그를 관찰하는 천영은의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앤드류가 이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오랜만입니다. 아녜제.”

그리고 그의 평범하디 평범한 인사에 천영은의 몸은 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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