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래희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류정우는 그런 래희를 달래 주기 위해 주방에서 핫초코를 타 와서는 그녀에게 건넸다. 물론 래희의 취향은 술이었다.
“여기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많이 나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래희는 그에게서 핫초코 잔을 받아 손에 들었다.
알코올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인데 달콤한 냄새만 코끝에 맴도니 더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그런 래희의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류정우는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래희에게 물었다.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셨네요? 급한 일이었으면 연락했으면 되었을 텐데.”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거실에서 잠들어 버린 듯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사실이 굉장히 마음에 든 듯한 류정우의 표정을 보니 그의 기분을 깨 버리고 싶지 않았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원래 사람은 진실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시야 한구석으로 치우며 말했다.
“이제 대던전 토벌 준비로 정신없을 텐데 방해되기는 싫……?”
적당한 변명을 찾아 둘러대던 그때, 래희의 눈앞에 이상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류정우!’
피를 뒤집어쓴 류정우가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뭐지?’
말하다 말고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래희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류정우가 무슨 문제가 생겼냐는 듯 물었다.
“괜찮아요?”
래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눈앞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류정우의 얼굴 위로 방금 본 피에 젖은 류정우의 얼굴이 겹쳐졌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아침에 이야기해요. 내일은 조금 늦게 출근할 것 같아서요.”
“아뇨, 괜찮아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류정우는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래희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핫초코를 래희의 손에서 빼내 탁자 위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고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늦게까지 저를 기다렸어요?”
“아…….”
그제야 래희는 류정우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침을 한번 삼킨 뒤,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세계수를 어디에 심어야 할지 알 것 같아서요.”
“그래요?”
래희는 오늘 오전 추리한 내용과 함께 왜 마을 회관 화단에 세계수를 심어야 하는 건지 열심히 설명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 이야기를 듣던 류정우가 얼마간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곳밖에 없긴 하네요.”
바깥세상에 심게 되면 세계수를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을 하며 류정우는 래희가 쓰러진 뒤 엘프 마을에서 만난 제피로스가 그에게 설명한 걸 떠올렸다.
‘신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이들이 세계수 위로 신전을 세우고는 그 힘을 이용하려 들었으니 말이야.’
‘스스로 신의 사자라 칭하는 이들. 그들은 남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모든 것들을 제 발아래 두려고 하지.’
롬바르나라는 세계의 세계수와 신전, 그리고 신의 사자.
그가 하는 말을 곱씹어 보면 이미 그들이 멸망하는 세계를 버리고 지구에 숨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구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세계수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만약 세계수의 존재가 발각된다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보호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그 문제 때문에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해결되다니.
래희의 말대로라면 결국 이 시스템도 지구라는 차원에 속하는 것이니 세계수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그러나 문득 떠오른 걱정에 류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권래희의 감을 믿었다. 몇 번의 회귀 속에서 그의 힘으로 단 하나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권래희의 날갯짓 하나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이 옳을 것이 분명했다.
“이만 졸린 듯한데,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해요. 어디에 심을지는 결정했으니 언제 심을지는 내일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요.”
류정우는 그새 잠기운이 가득한 래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래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 들어갔다. 류정우는 래희가 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 * *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잔 것 치고는 래희의 눈이 이른 아침부터 번쩍 떠지고 말았다.
래희는 새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이내 제 방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세수를 했다.
쏴아아―
2층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이후 집에는 방 3개 화장실 2개의 집으로 변했다.
거실에 있는 공용 화장실 하나뿐이어서 그동안 류정우와 함께 쓰는 게 생각보다 꽤 불편한 일이었는데, 집이 업그레이드된 이후 제 방에도 개인 화장실이 하나 생겼다.
그래서 래희는 아침부터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아도 되어 긴장을 풀고 따뜻한 물을 맞으며 샤워를 마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는 방 밖으로 나왔다.
“일어났네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래희는 깜짝 놀라며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아침 6시.
어젯밤 자러 간다고 인사한 지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S급은 잠도 없는 건지 분명 저보다 늦은 시간에 잤을 게 분명한데도 류정우는 멀쩡한 모습으로 식탁 앞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뭐야, 피곤하지도 않은 건가?’
자연스럽게 저도 커피를 내려 마시기 위해 주방을 향하다 래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이번에는 노린 게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시선을 빨리 돌리지 않느냐고 화를 냅니다.]
류정우의 잠옷 단추가 다 잠기지 않아 건지 그의 가슴이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미친.’
문득 현역 시절에 노출 있는 무대 의상을 입은 류정우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 질렀던 과거의 제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변태도 그런 상변태가 따로 없었다.
래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를 빠르게 지나쳐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래희의 모습에 류정우는 피식 웃으며 남은 커피를 마저 홀짝였다. 래희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아침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두 사람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마을 회관으로 걸어가는 10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언제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데자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을 회관 중앙에 위치한 화단 앞에 도착했을 때, 래희는 류정우가 들고 있던 세계수 화분을 받아 들었다.
“정말 여기에 심으면 되는 걸까요?”
그러나 제피로스에게 별다른 설명을 들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생각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래희는 마을 상점에서 구매한 모종삽을 들고 화단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만 파면 될 것 같아요. 더 파면 아예 세계수를 묻어 버릴 것 같은데요?”
열심히 파고 있던 와중, 류정우의 말에 래희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퍼낸 흙구덩이를 내려다봤다.
‘너무 많이 판 건가?’
혹시 몰라 흙을 조금 더 추가하고 그 자리 위에 세계수의 가지를 고정한 채 그 주변으로 퍼낸 흙을 다시 덮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다 심은 뒤, 주변을 정리하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변화가 없는 걸 보니 뭔가 부족한 듯싶었다. 그러다 문득, 리프가 성장하기 전 두 사람이 매일 물을 번갈아 가며 줬던 기억을 떠올렸다.
래희는 재빠르게 인벤토리를 열어 물뿌리개를 꺼내 들었다.
[황금 물뿌리개(S)]
- 어떤 식물이든 튼튼하게 자라게 한다.
그 설명마저 든든한 내용이라 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뿌리개를 기울여 세계수의 가지에 물을 뿌렸다. 제 몫만큼 적당히 물을 뿌린 래희가 류정우에게 물뿌리개를 건넸다.
“황금 물뿌리개……?”
그동안 사용했던 플라스틱으로 된 D급 코끼리 물뿌리개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화려한 아이템이었다.
류정우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번쩍거리는 물뿌리개를 기울여 물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세계수가 ‘지구 10’에 뿌리를 내립니다!]
[축하합니다! 세계수 ‘리프’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시끄러운 알림 너머로 작은 나뭇가지에 불과했던 세계수의 덩치가 커지며 급격하게 하늘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부피를 키우는 세계수에 놀라며 래희는 류정우와 함께 몸을 뒤로 피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을 뒤덮을 만큼 울창한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와…….”
띠링―!
[축하합니다! 공동 퀘스트 ‘세계수의 뿌리’가 완료됩니다.]
[완료 보상이 지급됩니다.]
[세계수 소원 팔찌(SS)]
- 사용자가 원하는 간절한 소원 하나를 이루어 준다.
그와 동시에 래희와 류정우의 팔목에 나뭇잎 모양의 실로 꼬여진 초록색 팔찌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래희는 팔찌에 집중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앞에 자라난 세계수는 경이로울 정도로 신비로웠다.
“…리프?”
래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걸어나갔다. 그리고 이내 뻗은 손바닥 위로 거친 나무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래희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세계수의 가지와 잎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말 리프야? 알아듣는 것 맞지?”
바람은 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래희의 말에 대답하듯 세계수의 가지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래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리프의 나무 기둥을 끌어안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감격스러웠다.
* * *
리프가 성공적으로 지구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전 세계 곳곳의 오염 지역들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정화되는 속도에 모두 당황한 듯싶었다.
지난 몇 달간 세계 종말을 거론해 오던 뉴스 보도나 기사들은 줄줄이 사라지고 다시 인류의 생존을 외치기 시작했다.
오염 지역이 정화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식량난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지만 종말을 피했다는 소식만으로 모두 기쁨에 겨워했다.
그런 와중 한국은 이미 지난 한 달간 어느 정도 여유로운 식량 확보에 성공했기 때문에 다들 어느 정도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던 가게들도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식량 구매는 인당 제한을 걸고는 있기는 했지만 암울한 미래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서 있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래희 또한 한 달 만에 가게 문을 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