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방금 뭐였어?”
분명 처음에 류정우와 제피로스를 만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그게 과거의 기억이 맞기는 한 건가?
그러나 10년도 더 지난 오래전 시기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래희는 제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여기는 제가 서 있던 엘프 마을의 외곽 숲이 아니었다.
“여기는 또 어디지……?”
사방이 모두 불바다였다. 마치 재난 영화 속 파괴된 도심 한가운데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래희는 건물 잔햇더미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거리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큰 지진이 땅을 흔들기 시작했다.
지진의 여파인지 부서진 건물 잔해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귀가 아프도록 울려왔다.
중심을 잡지 못해 주저앉은 그때, 래희의 손 아래로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청해?’
그건 바로, 청해 길드 건물 로비에 적힌 명패였다. 래희는 놀란 나머지 숨을 멈추고 말았다. 쿵쿵거리며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냐. 아닐 거야…….’
래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길드 이름을 발견 뒤, 처음으로 그녀가 주변을 시야에 담았다.
그제야 래희는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청해 길드 건물이 있었던 안전지대 12번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아까까지 제피로스와 대화 중이었어.”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두통을 느끼며 과거의 한 장면을 꿈꿨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진 것 같은 도시 한 가운데 떨어져 있다니.
지금 역시 조금 전처럼 꿈일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현실 부정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쾅―!
어디선가 전신을 울리는 듯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류정우가 피가 범벅이 된 채로 무언가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류정우?’
미친.
류정우가 노려보고 있는 건 바로 눈앞에 터질 듯이 붉은빛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게이트였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저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발을 내디디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류정우는 지금 제 몸 하나 게이트 안으로 갈아 넣어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으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제 이게 꿈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래희의 머릿속에는 그저 막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었다.
“류정우!”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눈가가 홧홧해지고 목구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정말 안 된다. 왜 항상 주인공들은 저 하나 희생하면서 모두를 구하려 하는 걸까? 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필사적으로 류정우를 향해 달려가며 그의 이름을 울부짖자 그제야 류정우가 그녀를 향해 돌아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악!”
누군가 그녀의 팔을 꽉 붙들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지금 죽으려고 작정했어?”
래희는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저를 막는 사람의 손을 팽개치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힘은 래희 혼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 놓으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뒤를 돌자, 갑작스럽게 암전이 찾아왔다.
“헉.”
래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안에는 낡아 보이는 듯한 나무 천장이 눈에 보였다.
하…….
‘여긴……?’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자 이곳은 이전에 한 번 류정우와 함께 하룻밤을 지냈던 숙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래희는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꾼 악몽을 복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흥분한 듯 쿵쾅대며 뛰고 있었다.
래희가 뜀박질을 멈출 줄 모르는 심장이 있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래희 씨, 일어났네요?”
그는 바로 류정우였다.
“아…….”
그의 얼굴을 보자 시끄럽게 멈출 줄 모르며 뛰던 심장이 아프도록 죄어 오기 시작했다. 래희는 가슴을 붙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괜찮아요?!”
래희가 쓰러지자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단숨에 달려온 류정우가 그녀를 부축했다. 짧은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래희는 저를 걱정하며 확인하는 류정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류정우의 벽안을 마주하자 아프도록 뛰던 심장이 심해처럼 고요해지는 듯했다.
* * *
류정우와 함께 세계수의 퀘스트에 관한 힌트를 얻기 위해 엘프들의 마을을 방문한 다음 날. 래희는 오래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제는 거의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흐릿하기는 했지만 웃기게도 그녀가 빙의한 소설 속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걸 지금 와서 기억해 낸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쁠 건 없었다.
한창 연재 중이었던 미완결 소설이라 결말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얼마 뒤에 일어날 사건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12월 24일.
앞으로 한 달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알릴 수도 없었고, 만약 알린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 사건을 막을 힘이 없었다.
‘뭐, 완결까지는 못 봤어도 거의 끝날 무렵이니까… 결국 게이트 브레이크로 세계 멸망 이런 엔딩이 아닐까?’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헌터물에서 새드 엔딩을 본 적이 없다고 중얼거립니다.]
“님, 성좌니까 해결할 방법 정도는 알 거 아니에요.”
[아무리 성좌라도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없다고 말합니다.]
래희는 그 메시지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예측은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다른 방법 없어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자신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어휴…….”
래희는 답답함에 먹고 있던 치즈케이크를 저도 모르게 으깨고 있었다.
‘일단… 세계수를 심기나 할까? 게이트 브레이크든 뭐든 완결 난 게 아니니까 주인공은 안 죽었다는 뜻 아니야.’
그렇다는 건, 그 이후에도 류정우는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래희는 무기력함에서 벗어난 듯이 세계수의 가지가 심겨 있는 작은 화분을 제 앞으로 들고 와서 식탁 앞에 앉았다.
“너를 심으면 어쨌든 오염 지역은 모두 정화된다는 소리겠지?”
제피로스는 래희와 류정우 두 사람에게 세계수에 관해 두리뭉실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세계수를 심으면 걱정하는 문제가 해결된다고는 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지구에 세계수를 심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면, 어디다 심어야 하는 거지?’
문제는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거였다. 인간은 결국 언젠가 나무를 베어 가며 환경을 파괴하게 될 거고, 그렇다면 리프를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 심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눈앞에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세계의 근원』
작은 손 아래로 ‘세계의 근원’이라는 제목이 적힌 아주 두꺼운 책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겨우 두꺼운 책장을 넘겨서 읽던 중 보았던, 한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스템은 해당 차원의 정보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손이 그 아래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시스템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은 그 차원의 프로그램 안에 기록된 공간이며, 이는 결국 한 차원의 시스템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그러나 래희는 본능적으로 세계수를 어디에 심어야 할지 떠올렸다.
마을 회관 한가운데에 무언가 심어졌어야 했었다는 듯이 커다란 화단이 하나 있었다.
“거기가 맞겠지?”
잘못했다간 리프가 제피로스 곁에 있는 그 어린 세계수처럼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 래희가 서 있는 공간은 바로 롬바르나에서 정착했던 작은 마을 아닌가. 이곳이 지구에 속하는 곳인지 롬바르나에 속하는 곳인지 래희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애초에 시스템 창을 언제 처음 보았냐고 묻습니다.]
“언제긴요, 게이트에서 지구로 돌아오고 바로 다음 날이었나?”
아…….
자신은 지구에서 처음 각성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용하는 시스템도 지구라는 차원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이 공간을 구현한 거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알기는 어려워 보였다.
래희는 이내 포기하며 더 급한 건부터 처리하고자 생각을 전환했다.
“그럼, 일단 세계수부터 심어야지.”
집 밖을 나서기 위해 급하게 잠옷 위로 두꺼운 옷을 걸치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래희는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래희는 확인을 위해 퀘스트 창을 열었다.
“‘공동’ 퀘스트였지……?”
그 말은 이번 퀘스트 또한 혼자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 * *
새벽 2시.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거실에 류정우는 당황하며 거실 한구석에서 졸고 있는 래희를 발견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거나 귀걸이를 통해 연락하면 되는데 미련하게 저를 기다리다가 잠든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곧 있을 대던전 토벌 때문에 훈련으로 바쁠 자신을 배려한 모양이었다.
류정우는 집에 돌아오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래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방으로 옮기려 했지만, 이 시간까지 제 방에서 잠들지 않고 저를 기다렸을 래희의 모습을 보니 중요한 이야기인 듯싶어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래희 씨, 들어가서 주무세요.”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느낌에 래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슬며시 올라갔다. 거실 형광등 아래로 불빛이 비친 래희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류정우를 발견했다.
“아, 류정우다…….”
막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건지 래희는 류정우를 향해 평소와 다르게 반말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류정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류정우 왔으니까 일어나 봐. 나 기다렸어?”
“응……?!”
대충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던 와중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꿈속의 류정우가 아닌 현실 속의 류정우라는 걸 알아차린 래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류정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 미쳤어!’
래희는 혹시라도 침을 흘리고 잔 건가 싶어서 제 입술을 소매로 박박 닦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던 류정우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