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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84화 (84/120)

84화

“그게 무슨 뜻이죠?”

래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제피로스에게 되물었다.

“말 그대로지. 롬바르나에서는 세계수가 자랄 수 없다. 이게 바꿀 수 없는 명제야.”

“왜죠?”

제피로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본다는 표정으로 래희를 내려다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스승한테 들은 적이 없나? 뭐 그렇다면 할 수 없고. 롬바르나에는 이미 세계수가 존재한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땅 위에는 다른 세계수의 성장은 불가능해. 그래서 엘프들이 키우던 세계수도 전혀 성장을 보이지 않았고.”

“하지만…….”

분명 제피로스와 함께하던 어린 세계수는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였다.

“걔는 예외고. 아무튼, 설명하자면 긴데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하지.”

그는 래희의 뒤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류정우의 얼굴과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래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아까 말한 생명, 또는 에너지의 근원. 그게 바로 뿌리내리고 성장한 세계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건강한 세계수를 중심으로 한 세계가 유지되는 거지. 에너지가 순환되고 생명체들이 자연의 법칙을 따라 순환되도록 말이야.”

“아…….”

래희는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에너지의 근원인 세계수가 롬바르나의 땅 위에 자라나 있으니 이곳에서는 또 다른 세계수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롬바르나의 세계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어. 신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이들이 세계수 위로 신전을 세우고는 그 힘을 이용하려 들었으니 말이야.”

힘?

“신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한 집단으로 같은 힘을 사용하는 걸까? 그것도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힘을 말이야.”

“그게 모두 세계수의 힘이었다는 뜻인가요?”

제피로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맞아. 자연의 법칙은 자연히 흘러가는 대로 건드리지 말고 둬야 해. 하지만 그들이 세계수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세계수는 점점 힘이 고갈되어 죽어 갔던 거지.”

“원래라면 자연에 순환된 에너지가 다시 세계수로 되돌아가면서 힘을 잃지 않았겠군요.”

“맞아.”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류정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에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할 걸 알면서도 시도했던 겁니까?”

“말했잖아. 몰랐다고. 정확한 건 실패하고 난 뒤에 알았던 거야.”

제피로스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숲속 한가운데 쓰러진 나무 위에 올라가 앉으며 말했다.

“세계수가 다 죽어가니 롬바르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단순히 새로운 세계수를 심으면 되는 줄 알았던 거지.”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니 일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오염 지역에 세계수를 심었던 거지.”

“오염 지역이요?”

래희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롬바르나에 오염 지역이라니?

“몰랐던 건가? 체자레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웠나 보군.”

“그게 아니라 그걸 알기에는 너무 어려서 그랬을 거예요.”

여기 처음 왔을 땐 고작 8살이었다구요.

“흠… 그렇다면 그런거고. 200년 전부터 죽어 가는 세계수와 그 주변으로 토양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제 롬바르나의 대부분 땅은 오염되었어. 그 위에서 태어난 생명체들은 모두 괴수가 되었지.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야.”

그 말에 래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는 멀쩡하잖아요.”

“멀쩡하지 않아. 주변에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있어. 엘프들이 그걸 주기적으로 처리하니 네가 못 본 걸 테고.”

“아…….”

“그나마 엘프들은 음식을 매일 먹지 않으니까 식량이 남아도는 거야. 하지만 이곳에도 언젠가 끝은 오게 되어 있어.”

류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끝을 바라보는 것 치고 이곳은 너무 평화롭군요.”

“그게 엘프니까. 있는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건 그들의 천성이니 되물어 봤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테고.”

얼마간 그들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그때, 제피로스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는 어디에 세계수를 심을 거지? 너희 세계에?”

너희 세계?

래희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예상치 못한 단어에 당황하며 굳은 고개를 겨우 돌려 제피로스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제피로스는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모를 것 같았나? 처음부터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

그러나 여전히 래희가 굳어 있는 표정을 풀지 못하자 제피로스가 엘프의 모습을 벗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차원의 문이 열려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이 땅에 매여 있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겠니? 중요한 건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아니야.”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살랑거리는 머리칼 위로 햇빛이 비치며 물에 비친 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녹빛의 눈동자가 래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희 세계에는 애초에 세계수가 없는 듯하군.”

“그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때, 류정우가 래희 앞으로 끼어들며 물었다. 그에 제피로스는 귀엽게 군다는 듯이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너희가 그 아이를 성장시켰잖아.”

“하지만, 이미 세계수가 존재하는 롬바르나에서도 어린 세계수 하나가 존재하는 걸 봤는걸요.”

“걔는 다른 곳에서 왔으니 예외야. 아무튼, 너희가 키운 세계수를 그쪽에 심으면 해결될 문제야.”

“무엇이 해결된다는 겁니까?”

그 질문에 제피로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으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너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말이야.”

그때였다.

삐이―

래희의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다.

“읏!”

흔들리는 그녀의 시야 너머로 시스템 창이 붉은 경고창을 내보이며 번쩍이기 시작했다.

[시스템 에러 발생: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시스템 에러 발생: 사용자의 제한이 풀립니다. (50%)]

“래희 씨!”

놀란 듯한 류정우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암전이 찾아왔다.

* * *

류정우가 넘어가는 래희를 받아 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축 늘어진 걸 보니 단순히 쓰러진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류정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제피로스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지. 너도 봤다시피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녀는 여전히 가벼운 태도로 살랑거리며 사뿐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래희를 품에 안고 있는 류정우의 푸른 눈동자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가 생각나는 깊은 호수 같은 눈이었다.

“너, 태엽이 여러 번 감겼구나?”

류정우는 그 말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품에는 여전히 래희가 안겨 있는 데다가 상대방의 힘을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노려보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류정우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제피로스가 곧바로 이어 말했다.

“뭐,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거야. 이미 네 품에 안긴 아이도 태엽이 한 번 감겼었어. 본인은 모르는 듯하지만.”

측은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래희를 내려다본 후 작게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힌트를 주자면, 그것들은 자신들이 불구덩이에 스스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거지. 결국 그들도 발버둥 치지만 바뀌는 건 없어.”

“그들이 누굽니까?”

류정우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으며 제피로스를 바라봤다.

“스스로 신의 사자라 칭하는 이들. 그들은 남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모든 것들을 제 발아래 두려고 하지. 사실 그들도 따지고 보면 롬바르나 영혼이 아니야. 그리고 힌트를 주자면 제 육신이 아니라 힘이 많이 약해졌을 거야. 그들을 조심해.”

“회귀를… 막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류정우는 처음으로 제 회귀를 인정하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제피로스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세계수를 심는다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결국 정해진 건 바뀌지 않을 거야. 네 회귀도 내 죽음도 그리고 세계의 종말도.”

* * *

래희는 눈을 떴다.

“일어났냐?”

“……?”

아주 오랜만에 듣는 제 스승의 목소리였다.

“너, 그렇게 자다가 영원히 잠들 수가 있어. 빨리 숙제나 하도록.”

“…체자레?”

콩.

그때, 체자레가 래희의 작은 머리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

“스승님한테 체자레라니. 레이, 네 꿈속에서 나는 네 친구였나 보지?”

“아잇 진짜 뇌세포 죽으니까 머리 좀 때리지 말라구요!”

입에서 저도 모르게 제 스승인 체자레에게 반발하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에 체자레가 비웃으며 대답했다.

“네 뇌세포는 이미 다 죽어 없어진 거 아니었나? 이 정도면 한 번만 봐도 외울 것을 너는 하루 종일 붙잡고 있잖아.”

언제 들어도 짜증 나는 저 잘난 척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짜증스러웠다.

래희는 말없이 체자레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만년필을 쥐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작아. 몇 살 때지?”

“몇 살 때라니? 제 나이도 까먹은 거야? 11살이잖아, 바보 제자야.”

그러나 체자레는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래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어갔다. 그리고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래희는 이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서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의 근원』

평범한 11살짜리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한 제목이었다.

래희는 질린 듯한 눈빛으로 체자레를 바라봤다. 지금 내가 숙제를 하는 동안 심심하니 저런 책이나 읽고 있겠다는 건가?

역시 가방끈이 긴 것들은 죄다 미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런 래희의 예상과는 달리 체자레는 그 책의 표지를 넘기며 쓱 한번 펼쳐 보더니 래희의 책상 위로 올려 뒀다.

“이번 숙제는 이 책을 참고하면 된다.”

장장 700페이지는 될 법한 아주 두꺼운 책을 보니 대학 전공 책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런 책을 고작 11살짜리의 숙제 참고용으로 쓰라고? 역시 제 스승은 미친 자였다.

래희는 한숨을 푹 쉬며 책 표지 위로 손을 올렸다. 열어 보기도 싫은 두께에 몸서리치며 위로 올려다보자 체자레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해? 숙제 안 하고? 못하면 용돈 없다.”

“아잇 진짜 쪼잔하게!”

이번 용돈을 못 받으면 에바 아주머니네 빵을 사 먹지 못할 게 분명했다.

래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시야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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