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세계수 】
리프의 성장을 위해 방문했던 걸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엘프 마을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래희!”
그녀가 온 걸 눈치챘는지 저 멀리서 엘이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엘은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을 반겼다.
“잘 왔어요! 마침 래희가 필요했는데!”
“네?”
래희는 의문 섞인 표정으로 엘을 올려다봤으나 다른 특별한 설명 없이 그녀는 두 사람을 족장의 집으로 안내했다.
“아니… 갑자기 왜?”
기나긴 장로의 이야기를 또다시 듣게 될 거라는 생각에 래희는 엘을 막아 보려 했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엘이 장로의 집 문을 활짝 열고야 말았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래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피로스?”
얼마 전 다른 게이트에서 만났던 제피로스가 그곳에 장로와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토레스 자네가 말한 아이가 래희 양이었나?”
장로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아직 제피로스가 바람의 정령인 걸 모르는 듯했다. 자연 친화적인 그들이 제피로스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까무러치게 놀라며 그를 숭배할 게 분명하니 숨긴 거겠지.
“조난당한 인간을 구했는데 그 인간이 장로님과 안면 있는 사이였군요.”
그녀와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제피로스는 아주 예의 바른 태도로 장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성격 더러운 정령 주제에 가식적으로 착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다고 중얼거립니다.]
‘그렇게까지 욕할 게 있나요…….’
래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좌의 메시지를 치우다 제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제피로스는 이내 래희와 류정우를 번갈아 보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오, 그걸 누구한테 주나 했더니… 옆에 서 있는 인간이랑 나눠 꼈네?”
‘뭘 말하는 거지?’
그러다 문득 제피로스의 시선이 그녀를 살짝 비껴가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래희의 얼굴 바로 옆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제피로스가 말하는 게 뭔가 싶었던 래희는 뻘쭘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다 문득 귓불에 달린 귀걸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
그는 래희의 귓불에서 붉은색 보석을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귀걸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피로스의 고양이인 야옹이의 보은으로 받아 낸 귀걸이는 이걸 나눠 낀 상대방과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덕분에 래희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던전 속에서도 류정우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래희는 나눠 낀 상대가 류정우란 사실이 새삼스러워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당시에는 퀘스트 수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귀걸이 한쪽을 그에게 나눠 줬던 거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랬을까 싶었다.
‘잠시 미쳤던 거지!’
아니, 오히려 지금 와서 이렇게 혼자 의미 부여하는 게 더 이상했다. 잘 생각해 보면 정말 건전하고 담백한 이유가 아니었나? 이제 와서 저 혼자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하는 건 제가 류정우에게 다른 감정이 있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냐, 이건 내가 성덕이라서 그런 거야. 잘 생각해 봐. 그동안 최애 앞에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 과거가 더 이상하지 않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상대방이 내 최애란 걸 자각하기 시작한 거지.’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계속 그 마음가짐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래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리는 와중에, 류정우는 붉어진 래희의 귀 끝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자신을 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전부 저를 의식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하.”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제피로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류정우를 훑어봤다.
보아하니 저쪽은 확실하고…….
제피로스가 다시 래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표정을 보아하니 같은 감정은 맞지만, 여전히 자각을 못 하는 듯했다.
“쯧.”
얼마 전 보았던 불쌍한 것이 생각났다. 그 녀석을 보면 저 꼬마가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것이 아닐 텐데, 왜 저렇게 자기감정 하나 깨닫지 못하는 건지 답답할 뿐이었다.
‘인간들이란.’
금발의 남자가 제피로스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 잘난 남자도 제 감정 하나 제때 자각하지 못해 후회했던 걸 생각하면 인간은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생명체였다.
그리고 슬쩍 제 바로 옆에 있는 장로를 흘끗 바라봤다.
‘하다못해 엘프들도 본능에 충실한데 말이지…….’
그러다 문득 이렇게 혼자서 생각해 봐야 답도 없다고 판단한 제피로스는 다시 래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 이곳에 다시 방문한 거지? 저번에 듣기로는 조난당했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아, 저들은 저번에도 어린 세계수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그동안 단절되었던 자네가 있던 곳과 다시 연결된 걸 보면 이제 숲 밖으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나 보군.”
장로는 기쁜 소식이라며 흠흠 거리며 설명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어린 세계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 말에 래희는 허둥지둥 대며 제 인벤토리를 열어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리프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뭇가지 하나가 화분 한가운데 꽂혀 있었다.
“아…….”
그걸 발견한 장로가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리프였던 나뭇가지에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성체가 되었군?”
말로만 들었지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네…….
“적당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장로님은 그 적당한 장소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장로는 일단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고는 가져올 게 있다며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로가 사라진 사이 래희가 제피로스의 눈치를 슬쩍 보며 의자에 앉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가 멍하니 화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성체가 되다니.’
제피로스는 제집에 있을 자라지 못한 어린 세계수를 떠올렸다.
보호자 둘 모두를 잃고 성장이 멈춘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둘이서 키운 건가?”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래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어쩌다 보니…….”
제피로스는 제 앞에서 어색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래희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금빛으로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햇빛에 반사되며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
그때, 그의 등 뒤로 방문이 활짝 열리며 장로가 무언가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로는 책상 위로 크고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어 올리더니 세계수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 열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넘어가는 와중에 보이는 삽화를 보니 식물도감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글이 엘프어로 적혀 있어 래희도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찾았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롬바르나 공용어를 사용하며 글의 내용을 읽어 갔다.
“성장에 성공한 세계수는 생명의 에너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소에 뿌리를 내리며 그 주변의 생기를 다시 되살린다.”
그러나 래희의 표정은 장로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차 굳어만 갔다.
“다만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한 세계수는 영원히 자라지 못한 상태로 남은 생을 보내며, 보통 자라지 못한 세계수의 수명은 천 년…….”
그녀는 눈앞의 제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영원히 자라지 못한 상태.’
그때 보았던 어린 세계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래희가 입을 열어 그에게 물으려던 찰나, 제피로스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막았다.
그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류정우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 장로에게 물었다.
“생명의 에너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소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다만 무조건 척박하다고 뿌리를 내릴 수는 없다는 거야.”
한마디로 답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래희는 제피로스와 함께 지내던 어린 세계수의 모습을 잊지 못해 리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세계수 키우기 행사를 하는 걸 보면 생각해 둔 장소는 있을 것 아니에요?”
“그건 맞지만 그동안 엘프들이 세계수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던 사례가 없어. 우리가 심어도 자라지 않으니까. 우리도 자연의 일부니 세계수 종족에게는 보호자로 느껴지지 않는 거지.”
“아…….”
그때, 장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찾아온 마법사에게 후보였던 장소에 대해 들은 적은 있습니다.”
“마법사? 아… 100년 전에 세계수를 들고 찾아온 이가 한 명 있었지. 이야기가 들려오는 게 없는 걸 보면 실패했나 보군.”
“그렇다기보단……. 아무튼 그가 추려 둔 후보지가 두 군데가 있었던 거로 압니다.”
그때, 류정우가 재빠르게 그에게 물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압니까?”
제피로스의 녹색 눈동자가 류정우를 처음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이전의 따뜻한 온기라고는 한 점 없는 싸늘한 빛이었다.
* * *
“하나는 이미 실패했어.”
장로의 집에서 나와 제피로스가 두 사람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
“실패했다뇨?”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영원히 어린아이가 된 거지.”
그 말에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래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왜 실패한 겁니까?”
“잘못된 정보 때문에. 애초에 생명이 없는 땅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거야. 생명이라니 그 땅 위에 세계수를 심는 당사자도 생명인데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조건이지.”
류정우는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래희가 물었다.
“생명… 번역이 잘못된 것 아닌가요? 엘프어로 생명은 에너지의 근원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그럼 그 에너지의 근원이 뭔지는 알고?”
역시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것에 관한 답은 그녀의 스승과 같은 대마법사 정도나 되어야 알지, 소설 속 엑스트라가 알법한 답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롬바르나에는 세계수를 심을 수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