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럴 땐?”
“모르지? 형이 갑자기 싫어진 게 아니라면, 새삼스럽게 반하기라도 했겠지?”
그리고 아무리 연애 상담이라도 구체적인 상황도 없이 무턱대고 이렇게 물어보면 나라도 설명하기 어려워.
“형이 싫대?”
그렇게 말하다 문득, 최재휘의 눈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익숙하디익숙한 얼굴이었다.
설마…….
“지금 형이 말하는 사람이… 래희 씨야?”
“…….”
그러나 평소라면 저의 말을 비웃거나 부정해야 할 사람이 긍정도 부정도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재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탄식이 섞인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는 부러 과장된 행동을 하며 양손으로 놀란 듯이 제 입을 가렸다.
“와…….”
예전에 형이 유난히 챙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무리 오래된 팬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챙기지는 않았잖아.
“그럼 잠깐… 도대체 언제부터야?”
물론 그때는 전혀 그런 감정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최재휘의 입장에서는 간만에 류정우를 놀려먹을 건수를 하나 잡은 듯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숫자를 세는 듯한 최재휘의 접히는 손가락을 조용히 응시하던 류정우가 그에게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상대방이 누군지 알았으니 다시 똑바로 대답해 봐.”
“빵집 사장님이라면… 형을 좋아하나 보지.”
그걸 모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물론 팬의 감정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좋아했으면서 갑작스럽게 바뀐 태도가 문제인 거였다.
답답하다는 듯 내뱉는 류정우의 한숨에 최재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거의 10년 동안 류정우에게 굴복해 온 몸은 그의 한숨에도 빠르게 반응했다.
“아니, 갑자기 형이 남자로 보이는 거 아냐? 그동안 유난히 형을 의식하지 않기도 했잖아. 갑자기 형이 싫어진 게 아니라면 이유가 이것뿐이지 않겠어?”
저번에 분명 탈덕한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와, 그런데 진짜 의외다. 형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걸 영상으로 남기지 못해서 진짜 아쉽네.”
최재휘는 즐겁다는 듯 소파 위에 두 다리를 올려 양팔로 감싸 안으며 눈앞에 앉아 있는 류정우를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형을 보니까 거의 1년 동안 쫓아다닌 것 같은데 래희 씨도 진짜 징하네. 넘어오는 데 1년이나 걸리다니. 저번에 보니까 남자친구도 따로 있는 것 같았는데? 근데 오늘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남사친?”
“아냐.”
평소와 다르게 빠른 대답이 류정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원체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로봇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모습도 있다니. 최재휘는 처음 보는 류정우의 인간적인 면모에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듣기로는 윤재언 헌터랑 한집에서 자랐다던데? 내가 헌터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데. 이 바닥 소문 빠르잖아.”
저번에 윤재언 헌터가 빵집에 방문했을 때 다른 헌터들이 수군거리던 걸 엿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야.
그런 최재휘의 말에 류정우가 짜증이 났는지 소파 팔걸이를 꽉 쥐었다. 찌익 소리와 함께 소파의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재휘는 저도 저렇게 될까, 놀리는 걸 자제하며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때, 류정우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자꾸 피할 때는 어떻게 하는 거지? 아침부터 못 본 척하면서 먼저 집을 나서는데?”
“형 동거해?”
진짜?
“와, 나도 못 해 본 동거를 류정우가 먼저 하네. 팬들이 이 사실을 알면 통곡을 하겠어. 아니, 이미 스캔들이 한번 났었으니 충격이 크지는 않을지도 몰라. 더군다나 이제는 아이돌도 아니…….”
“그만.”
류정우는 간만에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그를 놀리며 재잘거리는 최재휘를 향해 시끄럽다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리고 속이 타는지 평소라면 전혀 건들지 않았을 최재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뺏어 들어 벌컥 들이켰다. 얘는 식량난인 와중에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건지.
“형이 싫어진 게 아니라고 했다며. 그러면 답은 하나네. 형이 남자로 보이는 거지.”
와, 진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네.
최재휘는 저 혼자 감탄하곤 이어 말했다.
“아무튼, 잘 꼬셔 봐. 걔는 형 얼굴을 좋아하니까 빨리 넘어오겠지.”
그 말에 류정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1년이 걸렸는데, 이게 먹힐 거라고?
아니, 최재휘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다시 돌이켜보면 얼굴이 창백해졌다기보다는 귀 끝이 빨개졌었다. 분명, 그의 말대로 그를 의식하기 시작한 거라면 이 얼굴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안 되지는 않을 거였다.
류정우가 그의 눈을 피하며 도망치는 래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거리며 웃고 있자 최재휘는 별꼴을 다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형, 이거 다른 애들한테 말해도 돼?”
그러나 류정우가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이 없자 최재휘는 다 큰 아들을 보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보아하니 첫사랑 생각으로 심취해 계신 것 같은데 모솔을 위해 연애 선배로서 그를 배려해 줘야지.
그러다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한 최재휘가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그와 가장 친한 주단오에게 연락을 하며 방 밖으로 나설 때도 류정우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다 나를 의식한 행동이었다는 말이지…….”
얼마 전까지 이 문제로 고민했던 게 전부 명쾌하게 해결된 기분이었다. 류정우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제야 그동안 래희의 행동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맹수 앞의 토끼처럼 열심히 뛰어서 도망가는 모습이 딱… 잡아먹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잡아먹어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니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상냥한 모습 따위는 집어치워야 할 듯싶었다. 얼마 뒤면 그동안 그가 다시 되돌아온 사건이 일어날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회차에는 최선을 다해 살아 보고 싶었다.
* * *
위트 아메리카의 새 CEO 케빈 로스는 보고서를 읽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의 식량 보급률 증가라…….’
얼마 전, 정화된 지역에서 구황 작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더니 그새 그 많은 인구가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한 듯했다.
게다가 이번 일로 그 땅 위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성을 높인다고 하니 그에게는 꽤나 거슬리는 소식이었다.
‘작은 나라 하나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꽤나 곤란했다. 그리고 그는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은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군요. 하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불편합니다.”
알버트 로스를 죽였던 여자는 제 앞에 앉아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형제님께 어울리는 몸 아닙니까. 이전에도 신전의 재무 관련 업무를 담당하셨으니 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론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뭐, 이론이라는 게 다 들어맞지는 않으니까요. 그래도 고작 작은 나라 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우리 일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큰 것을 손에 쥐기를 바라니까요.”
여자의 말에 케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차원을 우리 손에 쥐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실 겁니까? 식량을 손에 틀어쥐는 건 영원한 방식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종교적인 지배력이 강한 차원이 아닙니다.
“자본이지요. 우리는 이곳을 손에 쥐는 동안 자본력을 키우면 돼요.”
이 차원은 돈이면 불가능한 일이 없더군요. 정치, 군사, 종교… 그 모든 일의 끝은 결국 돈이에요.
케빈은 그녀의 설명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그들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두 이주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바로 앤드류 발렌타인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적당하군요. 이제 지구의 땅도 대부분 오염되었겠다, 게이트 문은 닫아야 할듯싶네요. 계속 이렇게 문을 열어 두면 지구도 롬바르나와 같이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될 테니까요.”
“그럼 시기는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음…….”
여자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올해의 마지막 날로 하죠. 내년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테니 의미 부여하는 것도 좋잖아요?”
즐거운 목소리로 노래하듯 대답한 여자는 이내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역시, 커피보다는 위스키가 좋았다.
* * *
래희는 지금 류정우와 함께 엘프 마을에 방문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류정우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혼자 갈 생각으로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설 생각이었으나, 신발을 신고 있는 사이 집으로 들어온 류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한 웃음기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그는 현관 앞에 앉아서 운동화 끈을 묶고 있는 래희를 향해 물음표를 띤 표정으로 물었다.
“래희 씨,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래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땅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아 얼떨결에 대답했다.
“퀘스트 때문에 엘프 마을에 가 볼 예정이에요…….”
“…저를 두고요? 혼자서?”
류정우는 그 말에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몹시 당황한 듯한 래희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래희는 얼떨떨하게 그의 손을 붙잡으며 일어났다. 2주 동안 그를 열심히 피해 다녔지만 류정우의 배려에 익숙해진 몸뚱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원의 문이 있는 마을 회관까지 10분 동안 말없이 걸었다. 적막한 침묵에 오죽 답답했으면 평소였음 좋아했을 성좌마저 어색해 죽겠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며 두 사람에게 칭얼거렸다.
그러나 류정우는 저를 힐끔 쳐다 보며 부끄럼을 타는 래희의 모습이 재미있었으므로 일부러 상황을 더 어색하게 두며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아니라 귀 끝이 빨개지는 게 맞았네.
‘여기서 부끄러워서 피한 거냐고 물으면 도망칠까?’
아니면 이전처럼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 반응이든 재미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래희를 관찰하며 이동하기를 10여 분. 벌써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 류정우는 저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내고 하루 종일 쫓아다녀 봐?’
왜 자꾸 래희를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냐고 성내는 성좌의 메시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저기… 정우 씨. 이제 문이 열렸는데요?”
차원의 문을 열고 래희가 안에 들어가는 걸 봤음에도 가만히 그녀를 지켜만 보고 있다, 래희가 어색한 목소리로 건너편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에 류정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따라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