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래희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류정우는 제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이 식탁 위로 그릇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에 래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나 같은 건 의식도 안 된다는 건가?’
물론 래희도 지금 저가 왜 이런 언짢음을 느끼고 있는지 잘 몰랐다. 단지 류정우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가 매우 거슬렸을 뿐이었다.
‘잠시만. 내가 왜 짜증을 내고 있는 거야.’
갑자기 저 혼자 당황하고 저 혼자 짜증 내다니. 래희는 방금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류정우를 의식하고 있는 거였어?’
갑자기?
아니, 갑자기는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의식하지 않은 게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게 류정우와 손을 잡거나 그에게 안긴 적이 몇 번인가.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한결같은 태도를 보인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하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래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새삼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연스레 늘 그랬듯이 식사 준비를 하는 류정우 옆으로 식기 도구를 챙기는 곰순이. 그리고 딱히 밥을 먹진 않지만 소외되기는 싫은 건지 거실 소파 한구석에 앉아 있는 리프까지.
모두가 한 공간 안에 한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 * *
2주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밤낮으로 남몰래 정화된 땅에서 작물이 자라게 만들고 류정우와 퀘스트도 수행하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벌써 2주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웃기게도 2주 전, 류정우를 의식하기 시작한 날부터 래희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평소와 같은 모든 행동이 래희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래희는 그동안 그녀를 괴롭혀 온 지긋지긋한 마지막 게이트의 클리어를 앞두고 있음에도 류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대신, 래희는 멍하니 조금 전 클리어한 게이트가 리프의 손끝에서 정화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일도 끝이 난 건가?’
이내 게이트의 정화가 끝나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공동 서브 퀘스트 ‘우리 아이(세계수) 바르게 키우기’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완료 보상으로 세계수의 성장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갑자기?’
“리프?”
그때, 놀란 듯한 류정우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에 래희가 리프가 서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리프의 몸에서 빛이 일렁이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뒤, 덩치가 이보다 더 커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리프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리프!”
래희가 저도 모르게 리프가 있던 자리를 향해 달려가 소리 질러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성장을 한다고 하고서는 이렇게 사라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래희 씨.”
당황한 래희의 옆으로 류정우가 걸어오며 그녀의 발치에서 무언가를 주워 올렸다.
그리고 래희는 2주 만에 처음으로 류정우의 푸른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이걸 보세요.”
그리고 류정우의 말에 그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리프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가 류정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리프(성체가 되기 직전 깊은 잠에 빠진 세계수)]
래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류정우에게서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그것을 손에 쥐자마자 래희의 눈앞에 갑작스러운 퀘스트 창 하나가 날아들었다.
[공동 퀘스트: 세계수의 뿌리]
마지막 성장을 앞둔 세계수를 위해 그가 정착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줍시다.
- 세계수 정착시키기 (0/1)
- 완료 보상: 세계수의 소원
“아…….”
끝이 아니었다.
리프였던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며 퀘스트 내용을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렸다.
“적당한 장소…….”
세계수의 생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어떻게 리프에게 뿌리를 내릴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준단 말인가.
그리고 그때, 그녀의 눈앞에 얼마 전 게이트에서 만난 또 다른 어린 세계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분명…….’
분명히 그녀가 만난 건 세계수가 맞았다. 말하는 고양이와 체자레의 계약자였던 바람의 정령 제피로스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래희는 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제피로스를 떠올렸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라면 성체 세계수가 뿌리내릴 만한 적당한 장소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가지?”
차원의 열쇠로 이전에 방문했던 던전을 또다시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제피로스가 있는 던전은 매우 넓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거기서 제피로스가 지도를 줬던 건 기억하지만 그걸 제대로 사용한 기억은 없었다.
‘지도를 이용해 제피로스를 만나겠다는 계획은 어려워 보여…….’
그럼 일단 세계수를 처음 얻었던 엘프 마을을 찾아가야 할 듯싶었다.
그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래희에게 류정우가 한 걸음 성큼 걸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놀란 래희가 흠칫, 하며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류정우는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래희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야 저를 똑바로 바라보시네요.”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니네 조금만 떨어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래희는 성좌의 메시지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깊게 가라앉아 보이는 류정우의 심해 같은 깊은 푸른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래희 씨께 뭔가 실수했나요?”
“아뇨!”
래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대답했다. 자신이 괜히 류정우 앞에 서는 게 민망해서 그런 거지, 절대 그게 류정우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덕질할 때도 단 한 번도 부끄럼 타거나 내빼지 않고 뻔뻔하게 이상한 말을 잘도 지껄였는데. 이상하게 요즘 류정우의 앞에만 서면 저도 모르게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는 했다.
“류정우 씨 잘못은 아니에요.”
“그럼?”
그러나 래희는 류정우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는 제 감정을 드러내기가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래희는 가장 쉬운 ‘회피’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으며 저도 모르게 뒤돌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런 래희의 뒷모습을 류정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 *
류정우는 래희가 자신의 질문을 피해 달아난 뒤부터 기분이 조금 좋지 않았다. 아니, 많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2주 전부터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피하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니 답답했다.
관계의 진전이 보이지도 않는데 상대가 그를 피하기 시작하니 류정우는 지금 상황이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랜만에 한때 그의 동료였던 ‘최재휘’를 불러들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화로 하려 했던 대화를 얼굴을 보고 하고 싶다는 최재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고 만난 거였지만.
“형이 나한테 연락을 다 하고. 세상이 내일 종말 하나?”
“시끄러워.”
약속 장소인 류정우의 사무실 소파 맞은편에 앉은 최재휘가 놀랍다는 목소리로 류정우를 향해 물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가 놀랄 만도 한 게 류정우는 피에타 탈퇴와 동시에 다른 멤버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룹 활동과 같은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사적인 일로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연락은 거의 1년 만이지 않은가.
그래서 류정우 얼굴도 볼 겸 빵집에 들락거린 거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룹의 리더는 전혀 바뀐 게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했잖아. 아무리 형이라도 1년은 너무했지.”
“생사 확인은 하고 있으니 된 거 아닌가?”
“대충 살아 있나 멀리서 확인하고 가 버리는 거? 그게 뭐야. 우리 7년을 같은 그룹으로 활동했어. 심지어 형이 제일 진심이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잡아 댔지.
최재휘는 세간에 알려진 꽃사슴, 천사와 같은 별명과는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 덕분에 스캔들 하나 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여자 아이돌과 눈이 마주치며 웃는 장면이 포착되더라도 친절하고 착한 이미지 덕에 인사성이 바르다는 소리밖에 듣지 않았다.
실상은 연애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왔으나 리더인 류정우와 소속사의 철저한 관리 덕에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여자 문제야? 형이 나한테 전화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내 쓸모는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 알잖아.
그러나 류정우는 그 대답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앞의 최재휘를 노려봤다.
“…진짜야?”
형이?
최재휘가 동그래진 눈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허리를 똑바로 세워 앉았다.
류정우가 여자 문제로 자신에게 연애 상담 비슷한 걸 요청하다니. 뉴스에서 떠드는 대로 정말 내일 세상이 망하는 걸지도 몰랐다.
놀란 듯한 표정의 최재휘를 무시하며 류정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람을 피하는 건 무슨 의미지?”
“형을 피한다고?”
대단한데? 눈이 굉장히 높나 보다.
최재휘는 놀리듯이 감탄하며 제 앞에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는 류정우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썸녀야? 아님, 형 혼자 짝사랑?”
물론 그는 썸녀라고 생각하고 물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류정우의 심각한 태도를 보니 헛다리를 짚은 게 분명했다. 저, 류정우가 짝사랑이라니. 저 얼굴로?
“형이 짝사랑이라고?”
“대답이나 해.”
그러나 류정우는 최재휘의 질문을 회피하며 제 물음에 대답이나 하라고 재촉했다. 그제야 최재휘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먼저 어떤 관계였냐가 중요하지. 나 같은 경우는 헤어지기 전부터… 아니, 형 말고.”
그가 이별을 언급하자 류정우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재휘는 재빠르게 그 말을 부정하며 이어 말했다.
“형같이 짝사랑…이거나 아님 썸녀라면…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냐? 형 팬들도 대부분 형이랑 눈도 제대로 못 맞췄던 걸 생각해 봐.”
형 얼굴이면 나라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기가 어렵지. 아, 일단 한 명은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