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설마 저거 눈물은 아니겠지?
‘아니네, 내가 잘 못 본 거였네.’
기분 탓인지 래희 자신을 내려다보는 류정우의 눈이 맑고 촉촉해 보였다. 아마 촛불의 불빛에 비쳐 눈동자가 반짝인 듯했다.
래희는 류정우가 토벌을 가 있는 사이 그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하루 종일 고심했다.
‘뭘 선물로 줘야 하는 거지?’
그에게 줄 선물에 대해서는 몇 날 며칠 동안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그의 호불호에 관해 설명 한 줄 쓰여 있지 않았고, 아이돌인 류정우를 덕질하던 시절에도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와… 나 진짜 헛살았구나.”
몇 년을 좋아한다고 쫓아다녔으면서 뭘 좋아하는지도 아는 게 없었다니. 물론 다른 멤버들이나 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아무튼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케이크라도 만들어 주자.”
그래서 래희는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분야인 베이킹을 선택했다. 뭐, 이맘때쯤에 관한 소설 속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큰 틀이 바뀌지 않는 걸 보면, 이전 생이나 그 이전에도 식량난인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 회귀를 시작한 이후 생일 케이크 한 번 제대로 먹어 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래희는 류정우가 돌아오면 바로 케이크를 건네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1시부터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옆으로 일찌감치 잠들었어야 할 곰순이와 리프도 졸음 가득한 눈으로 함께 그를 기다렸다.
“언제 오는 거지?”
분명 윤재언과 문자하기로는 11시 반에는 다들 복귀했다고 들었는데 12시가 지나도록 류정우의 모습은 현관 근처에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먼저 자. 굳이 너희까지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돼.”
하지만 꼭 언제나 그녀가 하는 말은 반대로 하려는 듯, 곰순이와 리프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꼼짝도 않고 소파에 꿋꿋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실 시계가 거의 1시 10분을 가리킬 때쯤.
철컥.
“왔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래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케이크를 들고 현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래희의 모습에 곰순이와 리프도 각자 몫의 폭죽을 들고 그녀를 뒤따랐다.
“생일 축하합니다―!”
류정우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터진 폭죽과 함께 래희는 그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리고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인지 촛불인지 모를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류정우가 이상하다.
래희는 평소와 묘하게 다른 류정우를 바라봤다.
크게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가게로 출근할 일이 없어 래희가 늦잠을 잘 동안 부지런히 농장일을 가꾸고 아침밥을 차리고 집 청소를 하고.
래희가 하겠다고 해도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가 알아챌 새도 없이 해야 할 집안일은 먼저 다 끝내 버리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보다 좀 더한 것 같았다.
“리프,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만 하기로 나랑 약속하지 않았니?”
이전에는 크게 나무라지 않았던 리프에게 좀 더 보호자다운 모습을 보인다든지,
“곰순이 너, 이제 래희 씨랑 자지 마. 너도 다 컸으니까 혼자 잘 줄 알아야지.”
본모습이 이렇게 귀엽긴 해도 인간으로 변한 뒤에는 말이 다르잖아?
얼마 전 새로 생긴 방을 창고로 쓰는 대신 열심히 청소하더니 하루아침에 쓸 만한 방으로 만든 그는 그 방에 곰순이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식량 위기가 선포되기 직전 가게 레벨이 50까지 오른 덕분에 ‘나만의 작은 마을’ 스킬 등급이 A로 올랐다.
덕분에 집은 2층짜리로 바뀌며 2층에는 방 하나와 작은 거실이 추가되었다.
곰순이는 류정우의 논리에 납득했는지 울상 가득한 표정으로 터덜거리며 제 베개를 끌어안고 류정우가 정리해둔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좀 뭐랄까… 나보다 더 집주인 같아 보여…….’
래희는 멀뚱히 거실 소파에 앉아서 그가 집 안을 정리하는 걸 지켜봤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도우려고 하면 거절하기에 앞서 래희가 하려는 일을 류정우가 먼저 완료해 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방해될까, 래희는 얌전히 소파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좀 부담스럽긴 한데…….’
하지만 그런데도 너무 편했다. 제 말은 제대로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리프는 군말 없이 류정우의 말을 들었고, 원래 그녀가 해야 했을 농사일이나 집안일도 류정우가 다 끝내 버렸다.
제 동거인이 귀찮은 일을 모두 처리해 버리니 집주인으로써 민망하기도 하고 이대로 퀘스트가 끝난 뒤 더는 이 집에 머물 이유가 없는 류정우와의 이별이 아쉬워지기도 했다.
‘아니, 아쉽기는…….’
래희는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고개를 털며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가볍게 뺨을 찰싹, 쳤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했다.
그때,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류정우가 방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래희 씨, 준비는 다 되셨나요?”
“네.”
래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최근, 그녀는 모처럼 남는 시간을 이용해 류정우와 윤재언 두 사람에게 기본적인 전투 훈련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앞으로 그녀의 상황상 게이트에 자주 들어가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아무리 류정우가 S급이라지만 그동안 게이트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지고는 했던 때를 돌이켜 보면 제 몸 하나는 스스로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류정우에게 기본적인 사격 훈련이나, 아니면 스킬 ‘쓱싹쓱싹’을 전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제는, 그래도 나름 헌터라 부를 정도는 되겠네.’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인지 어느덧 그녀의 등급은 A로 성장해 있었다.
비전투계라도 이 정도 고등급일 경우에는 적어도 스탯이 C급 전투계보다는 높았기 때문에, 굳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전투 훈련은 기본으로 받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래희의 갑작스러운 훈련이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것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류정우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비장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래희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쾅―!
흙먼지가 흩날리며 래희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순간적으로 눈 안에 들어간 모래에 래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털어 냈다.
“우프프!”
“래희 씨, 집중해야죠!”
“아니, 모래가! 퉤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비웃습니다.]
[역시 인생은 원래 실전이라고 말합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관용구라 평소 래희라면 곧바로 반박했을 테지만, 안타까운 건지 다행인 건지 눈에 들어간 흙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해 래희는 성좌가 보내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 진짜. 모처럼 폼 나게 몬스터 좀 잡아 보려 했는데 이게 뭐야.’
급하게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물로 얼굴을 씻어 낸 래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덧 상황은 정리가 되어 있었다.
“래희 씨, 괜찮아요?”
“네…….”
허무하게도 아까까지 싸우고 있던 C급 몬스터 ‘피카피카 우는 토끼’는 류정우에게 단번에 처치되어, 땅 위의 토끼 사체로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로 상황이 정리가 되어 버려 허무해진 래희가 멍하니 토끼를 바라보고 있자, 류정우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처음부터 성공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이번이 처음이니 다음에 잘 해 보면 되죠.”
“…네.”
분명 제 손으로 몬스터를 잡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떠먹으라 차려 준 밥상에 숟가락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 래희는 저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사막에 가까운 지형이라 그런지 ‘쓱싹쓱싹’과 같은 바람을 이용한 스킬은 활용하기가 어려워 보이기는 했다.
래희는 물끄러미 류정우의 손에 쥐어져 있는 리볼버를 내려다봤다.
‘리볼버 쏘는 법을 배우기는 했는데…….’
하지만 고작 2주 배워 놓고서는 총을 쓸 생각을 하는 건 자살행위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인벤토리 안에 잠자고 있을 총기 아이템을 떠올렸다.
그때, 류정우가 토끼 사체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오늘 보니, 래희 씨 실전 훈련 겸 퀘스트용으로 이 게이트를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딱 래희 씨가 성장하기 좋아 보이는 수준이에요.”
아, 네.
래희는 저보다 더 열정적으로 보이는 류정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류정우는 그런 래희를 향해 한번 싱긋 웃어 보이더니 이어 말했다.
“아직 게이트가 클리어된 게 아니니, 이만 다른 토끼를 잡으러 가 볼까요? 무작정 잡다 보면 언젠가는 이번 게이트 보스몹도 나오겠죠.”
그렇다. 그동안 그들이 게이트를 클리어해 온 방식 중 가장 무식한 방법.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보스 몬스터가 나오겠지’를 정말로 실행 중이었다.
더군다나 세간의 눈을 피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정화하는 중이었기에 최근 생성되어 정보가 없는 게이트를 도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떤 보스 몬스터가 상주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보이는 몬스터를 무식하게 모두 잡아 죽이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래희는 류정우의 ‘보스몹’ 발언에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한 마리라도 내 손으로 잡아 보자.’
팀장이 조별 과제 멱살 잡고 캐리하며 버스 태워 주는 중인데 조금이라도 기여해야지.
그때, 진동이 땅바닥을 타고 다리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쿵― 쿵―
처음 토끼를 봤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래희는 이번 시도에는 꼭 성공시켜 보겠다는 다짐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새 두 사람에게 빠르게 접근한 건지, 100m 조금 안 되는 거리를 남겨 두고 토끼가 코를 벌렁거리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팔자에 어울리지도 않게 소처럼 일하는 것 같다고 한탄합니다.]
“그니까요.”
성좌의 말처럼 ‘S급 빵집 사장’이라는 누가 봐도 비전투계인 클래스를 가진 것과 달리, 직접 몬스터를 잡아가며 게이트를 클리어한 지도 이번이 벌써 13번째였다.
래희는 방금 막 클리어한 게이트의 정화를 완료한 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은 한국 최대의 곡창 지대로 알려진 전북 김제시에 발생한 게이트를 공략했다.
퀘스트로 리프와 함께 정화할 수 있는 게이트는 기껏해야 스무 개뿐. 그 이후 리프가 마지막 성장을 완료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략적으로 당장 정화가 필요한 땅 위주로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었다.
‘으… 찝찝해.’
우는 토끼를 나오는 대로 해치운 끝에 마주한 이번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는 바로 티베트 여우처럼 생긴 ‘샐쭉한 킹여우’였다.
여우는 보기와 달리 끈적한 혓바닥을 길게 뻗어서 닥치는대로 주변의 생명체들을 사냥해 물어 가곤 했는데 그 과정에 래희도 여우의 침을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래희가 찐득거리는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내려다보고 있자, 류정우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꼼꼼하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이었지만 그녀의 손을 정성스레 닦아 내는 류정우의 손길을 래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