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직 정부에서는 몰라. 다행히 길드 명의 게이트가 아니어서 알려진다 하더라도 우리랑 엮일 일은 없을 거야.”
그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래도 래희는 윤재언이 전한 소식이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소시민의 삶만 살아왔던 그녀의 작은 행동이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결과로 돌아온다니?
물론 이번 생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과 엮이긴 했지만, 현생에도 엑스트라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래희는 처음 겪는 일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이번 생도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운이 좋아 이상한 성좌와의 계약으로 듣도 보도 못한 빵집 사장이라는 클래스도 얻게 되어 이전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뿐. 래희는 제 행동이 이 지구에 한 줌의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그토록 원하던 주체적인 삶 아니냐고 묻습니다.]
‘주체적인 삶이랑은… 결이 좀 다른 것 같은데요?’
뭐랄까.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오염을 제가 정화했다는 소식이라니……. 물론 정확히는 리프가 한 것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래희야 식량난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는 해도 남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와 친했던 청해 길드 동료들과 아니면 가끔 연락하거나 만나는 대학 동기들. 그리고 더 뒤로 가서 학창 시절 친구들…….
식량난은 래희를 제외한 인류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상황에 제 한 몸만 멀쩡하다고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래희가 이타적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었으므로 래희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 제 혼자만 안전하다는 건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죄책감을 선사했는데,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니…….
하지만 이 위기를 해결할 열쇠가 래희 자신에게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심란한 기분이었다.
그건 눈앞의 윤재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래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한숨이 재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식량난의 위기로 밖의 상황은 전쟁이 터진 듯한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였다. 당장 청해 길드 소속의 헌터들도 다음 달부터는 비축된 식량이 없어서 문제가 많았다.
래희가 식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래희가 나서는 방법은 친구로서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몰래 오염 지역을 정화할 수 있다면 말이 달랐다.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고 남들의 눈을 피해 오염 지역을 정화한다면 한국 한정으로는 식량난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한국에 뻗친 ‘위트 아메리카’의 검은 손아귀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였다.
이미 국력이 약화하거나 식량난의 타격이 큰 국가들은 그들 손에 넘어가 그들 마음대로 주물러 지고 있었고, 곧 있으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도시형 식량 재배 기술을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가격을 100배 이상 올리는 등 이미 폭리를 취하고 있었으며, 이미 한국에 지어진 그들의 재배 빌딩으로도 충분히 한국인들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음에도 판매를 한정적으로만 진행해 팔고 남은 식량은 태우거나 바다에 내다 버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들은 빠르고 체계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 정부와의 불평등한 조약을 통해 한국이라는 국가 하나를 그들 손아귀에 쥘 계획이 눈에 뻔히 보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오염 지역 정화라니…….
윤재언은 복잡한 심경으로 눈앞의 래희를 바라봤다.
가게를 운영할 때와 달리 풀려 있는 긴 머리.
역광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갈색 머리카락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연상시켰다.
‘그때도 이렇게 사무실에서 노을이 보이는 창문 앞에 해를 등지고 서 있었는데…….’
어릴 적 래희의 모습이 지금의 성숙한 래희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그리고 그때처럼 지금 래희의 눈동자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윤재언은 그런 래희의 모습을 눈에 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퀘스트를 마저 진행하려면 류정우 헌터가 있어야 하는 거지?”
제가 류정우를 대신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씁쓸했다.
* * *
[게이트 ‘광활한 캄파냐 평야’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정화됩니다.]
황금빛으로 뒤덮인 메마른 평야 위로 푸릇푸릇한 잔디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언제 생기 없이 메말랐냐는 듯 촉촉한 수분을 머금은 토양에는 생명의 기운이 순식간에 넘쳐 올랐다.
기괴한 몬스터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사라진 몬스터들의 자리 위로 하얗고 뽀송한 털을 가진 양들이 나타나 풀을 뜯고 있었다.
래희는 이전과 달리 처음 등장하는 동물에 신기해 하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메에에에에.
래희가 가까이 오자 경계하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우는 양 위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정화된 양]
: 세계수의 축복으로 오염에서 정화된 양이다.
정화되었다니.
“그럼 이게 아까 본 몬스터였나?”
눈앞에 솜뭉치처럼 온순하게 생긴 양과 대조적으로 검고 커다란 먼지 덩어리는 본래 양이라고는 짐작조차 못 할 정도로 징그러웠었다.
래희는 손을 뻗어 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에에에에.
‘한 마리만 납치해 갈까? 농장에 두고 키우고 싶은데…….’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이 친구에게는 여기 자유로운 들판이 훨씬 더 잘 어울려 보였다.
“래희 씨, 이제 나가 봐야 해요.”
그때, 그녀의 뒤에서 류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류정우는 게이트를 등진 채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리프가 게임기를 든 채로 언제 나가냐는 듯 발을 구르며 서 있었다.
“야, 리프 너. 하루 종일 게임만 할 거니? 그거 부숴 버리기 전에 이제 그만해.”
언제 한번 날 잡아서 뭐라 해야지. 퀘스트 제목과 달리 점점 삐딱해져 가는 리프를 보니 절로 한숨이 우러나왔다.
래희는 리프가 혹시라도 남들 눈에 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킬을 이용해 문을 열었다.
그동안 레벨 미달이란 이유로 게이트에서 열 수 없었던 집으로 이동하는 문은, 이제는 언제 어디서라도 열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감싼 채 생겨난 나무 문 사이로 리프가 들어가는 걸 보고 난 후에야, 래희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래희는 제게 내민 류정우의 손 위로 손을 올리고는 함께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권래희 헌터님!”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천해훈 비서실장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오며 환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말라비틀어진 풀과 나무들로 가득했던 토양이 아주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길드장님 말씀대로 오염된 땅이 정화되어 가고 있군요.”
천해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모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래희의 퀘스트 때문에 남모르게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워낙 별난 퀘스트를 부여하는 성좌들이 많아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끝나나 싶었던 찰나에 구원자 같이 등장하다니.
그는 래희가 청해 길드, 아니 한국인이라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아니, 오늘만큼은 주모를 불러야지.’
만약 래희가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그저 두 눈 뜨고 국권을 빼앗기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는 길드장의 당부대로 따로 지시가 있기 전까지 오염 지역 정화와 관련해서 그 어느 곳에도 입도 벙끗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퀘스트 때문에 래희와 함께 게이트를 돌기 시작한 것도 벌써 10번째. 벌써 달성 조건의 절반을 채운 시점이었다.
류정우는 길드에서 파견된 게이트 토벌을 마치고 자신의 오피스텔에 먼저 들렀다. 몬스터의 피 냄새와 먼지로 뒤엉켜 꼴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으로 가기 전 오피스텔에서 먼저 씻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낸 뒤, 화면이 꺼져 있는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새벽 1시.
꽤나 늦은 시간이라 자고 있을 래희와 마주칠 일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오피스텔 방문 하나만 열면 바로 집으로 넘어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오피스텔 거실의 창가로 향했다. 사람이 지내지 않는 오피스텔에는 온기라고는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밝았다.
위기감으로 인해 도시도 잠들지 못할 밤을 지새우고 있는 듯했다.
‘이전에도 이런 분위기였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돌이켜 보면 그가 죽기 전 항상 이맘때쯤 인류 최대의 위기라느니 이런 말이 돌았던 것 같기도 했다. 반복되는 회귀 속에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도 오래되어 뭐가 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벌써 대던전 토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날이 두 달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번 회차의 끝도 앞으로 두 달 남았다는 걸 의미했다.
이전과 많이 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큰 사건이 바뀌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나…….”
퀘스트가 점점 진행되어 클리어가 다가올수록, 래희와 함께 있을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크게 와닿았다.
그러니까, 그녀와의 동거나 연인.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말이다.
그가 래희를 붙잡기도 전에 태엽이 되감기는 게 먼저일지도 몰랐다.
‘다음 생에도 다시 나에게 찾아와 줄까?’
게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웬 커다란 까마귀를 옆에 달고서는 테이머냐고 묻는 말에 자신의 눈치를 보며 긍정하던 모습이.
그때, 이번 회차의 회귀 이후 이곳에서의 아이돌 활동 시절 래희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아 자신이 먼저 알아보지 못해 지금의 거리감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녀를 빨리 기억해 내지 못한 과거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류정우는 처음 만나 장난감 같은 분홍색 봉을 들고서 민망해하는 래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분홍색 봉을 한 손에 쥐고 호기롭게 곰을 쫓아내는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본인은 자신이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뒷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나서는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토끼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귀를 쫑긋거리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뒷발로 발차기하듯 화를 내는 모습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
시도 때도 없이 권래희 생각이지.
분명 처음에는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관해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어떤 생각을 하든 권래희로 끝을 맺는다.
류정우는 너무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흘리며 제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이 문을 열면 래희와 곰순이, 그리고 리프가 잠들어 있을 집일 것이다.
끼익―
낡지 않았지만 낡아 보이는 나무 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펑―!
“서프라이즈!”
짝짝짝―!
밝게 불이 켜진 거실에는 고깔모자를 쓴 래희가 두 손으로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