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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네 빵집은 언제 오픈하나요-75화 (75/120)

75화

래희는 자신의 앞에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그… 저도 몰라요.”

“…왜?”

“갑자기 제가 다른 곳에 휩쓸려서 의도치 않게 더는 못 보게 되었는걸요…….”

토레스, 아니 제피로스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무언가 매우 짜증이 난 것 같아 보였다.

“너도 그랬다는 거지…….”

그래서 하루아침에 내 계약도 끊겨 버린 건가?

너도라니? 계약 관계면 언제든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인가?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는 듯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어. 뭐, 어쩌겠냐. 정령이자 계약자인 나도 못 찾는 인간을 한낱 인간인 네가 찾아낼 수는 없겠지.”

갑자기 세상이 갈라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건 한낱 피조물에 불가한 내가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래희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제피로스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딘가 모를 불안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제피로스가 고개를 돌려 래희를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래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바로 등이 소파 뒤에 닿았기 때문에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저거 눈이 조금 돈 것 같은데……?’

왜 체자레가 제피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몸서리를 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피로스는 래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번뜩이는 눈으로 관찰하는가 싶더니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가 어쩔 수 없는데요……?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리지 않았다.

“너, 나랑 계약하자.”

“네? 왜요?”

래희는 저도 모르게 계약하자고 저에게 달려드는 정령에게 감히 말대꾸하고 말았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그런 무례함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체자레의 제자니 언젠간 그를 만날 수 있겠지.”

“아니, 저 못 만난 지 12년은…….”

“그런 건 상관없어. 100년도 기다릴 수 있어.”

저기, 저는 인간이라 100년도 살기가 어려운데…….

게다가 정령사 클래스도 아니라 애초에 계약이 성립이 안 될 텐데?

그러나 제피로스는 그런 래희의 생각에도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나랑 계약하면, 바람의 힘을 쓸 수 있어. 지금 너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주저앉는 게 아니라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 대신, 우리 자기를 만나면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는 거야.”

뭐, 너를 보니 힘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자질이 보이지는 않지만 노력하다 보면 백 년 뒤에는 내 힘을 그럭저럭 쓸 수는 있겠지.

‘백 년 뒤라니…….’

그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닐 텐데, 그럼 내가 계약할 의미가 없지 않나?

그 순간, 래희의 눈앞에 성좌의 메시지 창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이중 계약은 계약 위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계약서 쓴 적 없는데요?’

[어쨌든 영혼을 묶는 계약은 결사반대합니다.]

래희는 모처럼 강해질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붙잡지 못할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성좌에게 대꾸하며 제피로스에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계약은 어려울 것 같아요.”

“왜?”

어쩌지? 이유는 생각 안 했는데…….

[성좌 ‘운명의 길잡이’가 이미 침 발린 몸뚱이라 주장하라고 말합니다.]

‘아니, 침 발렸다가 뭐예요? 더럽게.’

[이미 다른 정령과 계약했다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어떤 정령요? 그걸 제피로스가 못 알아챌 리가 없어요.’

[못 알아채니까 적당히 알아서 꾸며 대답하라고 재촉합니다.]

어휴. 어쩔 수 없지.

[빨리.]

알았어요. 재촉 좀 하지 마.

래희는 의문 섞인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피로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다른 정령이랑 계약을 해서요.”

“다른? 누구?”

“아, 그게…….”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게 변명해야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래희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제피로스에게 대답했다.

“파티셰의 정령이요!”

“…파티셰?”

전혀 납득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래희는 다급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어릴 때 맛있는 간식이 먹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가 얼떨결에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을 해 버렸어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냐옹이의 부탁 때문에 식량 창고에 채워 둔 빵을 확인하시면 돼요.”

이게… 먹히나?

순간적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이러다 거짓말인 거 전부 들키는 거 아닌가? 혹시라도 저 미친 정령이 제 말이 거짓인 걸 알아차리면 무슨 보복을 해 올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걱정은 곧바로 사라졌다.

“그래?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계약자의 제자이니 선물을 안 줄 수는 없겠지. 아, 내 입술은 체자레 것이니 너는 이마로 만족하렴.”

래희가 자각할 새도 없이 제피로스는 그녀에게 다가와 래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래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바람의 정령 ‘제피로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래희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축복이라니… 이거 좋은 거겠지?’

그리고 그때,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우리 자기 만나면, 나를 불러.”

아, 물론 위험할 때 불러도 되고. 단, 일회용이니까 죽기 직전에만.

* * *

다음 날 아침. 고작 4시간만 자고 일어난 래희는 눈을 뜨자마자 제피로스의 집을 나섰다. 래희가 제피로스의 집을 나설 때쯤에는 제피로스의 모습은 다시 토레스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축복이 있으니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명색이 대마법사의 제자인데 비실비실하다니.”

래희는 그의 배웅을 받으며 그에게 받은 지도를 들고선 오두막이 있는 숲속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래희는 조난 9시간 동안 여전히 게이트 밖을 빠져나갈 만한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게이트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니까 지도를 본다고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얼마나 눈보라 사이를 걸었을까.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이 래희의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니 헌터 복장이라 래희는 자신을 구하러 온 헌터들이라는 생각에 그쪽을 향해서 열심히 걸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앞에 서 있는걸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의 류정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류정우 씨……?”

래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멍하니 올려다보자 류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있는 힘껏 꽉 끌어안았다.

“어… 류정우 씨?”

“내가 또 래희 씨를 잃는 줄 알고…….”

또라니? 그러나 래희는 그 의문을 더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류정우의 뒤로 경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헌터들 때문이었다.

래희는 그들의 눈빛에 놀라 순간적으로 류정우를 밀어내며 그를 떨어뜨렸다.

‘아, 그 망할 열애설!’

안 그래도 요금 그 열애설이 거의 다 가라앉은 느낌이었는데, 두 사람을 바라보고 경악하는 저 눈빛을 보아하니 소문이 다시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특히 저기 저 채재휘의 놀란 표정이라던가…….

* * *

게이트가 발생한 지 20시간 만에 12번가와 1번가에서 발생한 게이트가 클리어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동시에 소멸되었다.

안전지대 12번가에서 실종된 래희와 1번가에 투입된 공략팀이 함께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자 언론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이내 가까운 거리에서 발생한 게이트가 같은 던전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는 결론과 함께 논란은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음, 정말로 서로 가까이에서 게이트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던전끼리 연결되었던 건가요?”

“그건 정확하게는 모르죠, 그냥 이번에 12번가의 실종자를 구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이번 게이트 사건을 크게 다루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심지어 처음으로 고등급의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는데도 말이죠.

류정우는 냉소적인 어조로 래희에게 대답했다.

“우우우!”

“뀨우!”

뒤에서 리프와 곰순이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래희는 곧바로 고개를 뒤로 돌려 싸우고 있는 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자꾸 게임기 가지고 싸우면, 둘 다 못 쓰게 빼앗아 버릴 거야.”

래희는 지금 리프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지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대부분이 위험 구역이었으며 상당히 오염도가 높은 게이트가 많이 발생하고는 했다.

그래서 래희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게이트만 골라서 리프의 퀘스트를 수행할 계획이었다.

다만 차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게임기 하나 가지고 싸우는 리프와 곰순이가 래희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게 문제랄까.

우연히 래희의 집에서 그녀가 어릴 적 쓰던 게임기를 발견한 리프가 게임을 시작한 게 문제였다. 옆에서 하고 싶었는지 곰순이가 기웃거리더니 결국 번갈아 가면서 게임을 하게 했지만, 서로 양보를 하지 않고 저렇게 틈만 나면 투닥거리는 게 아닌가.

래희는 자식 둘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정우가 차를 세우며 래희에게 말했다.

“래희 씨 도착했어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산 입구였다.

“어, 게이트가 보이지 않는데요?”

“천실장님 말로는 게이트는 산 위에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거기를 클리어하면 들킬 위험은 없을 거라고 해요.”

래희는 황당한 심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정우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저희… 등산해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런 래희의 질문에 류정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죠?”

등산이라니. 래희는 절망적인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는 어엿한 A급 스탯을 가진 헌터가 되었어도 여전히 등산은 싫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가 짜증이 나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래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류정우는 래희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등산이 싫으면… 제가 업고 올라갈까요?”

래희는 그런 류정우의 말에 기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선은 지켜야 한다. 안 그래도 퀘스트 때문에 신세 지는 마당에 류정우에게 염치없게 업어 달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류정우 입장에서는 래희를 업는 게 포상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전혀 알지 못하는 래희는 그저 류정우가 그녀를 놀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짜증 나는 기분을 애써 참으며 산을 오른 그날, 산 위의 게이트를 포함해 총 세 곳의 게이트를 일주일 동안 연달아서 클리어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세계의 재난을 알리는 기사가 온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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