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음료 형태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까?’
그러면 먹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하지만 밀로 만들 수 있는 음료에 대한 레시피는 아직 없었으므로 래희는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냈다.
힐러가 쿠키 조각을 환자의 입에 넣어 주자 모든 대화를 들어 그 의도를 알아챈 환자는 얌전히 입에 들어온 쿠키를 씹어 넘겼다.
“큽.”
“물도 마셔요.”
건조한 입 안에 음식물이 들어오자 환자가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힐러는 예상했는지 쿠키를 주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둔 물병에 빨대를 꽂아 환자에게 건냈다.
“큼!”
물과 함께 쿠키를 겨우 삼키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곧이어 전신에서 느껴지는 개운함에 환자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이 간지러웠던 증상은 말끔히 사라지고 아까까지 뜨거운 열감이 느껴지던 이마는 차가운 물수건을 갖다 댄 듯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하.”
지난 일주일 동안 그를 괴롭혀 온 중독 증상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 같았다.
[‘약쟁이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저주가 해제되었다는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약쟁이의 저주? 이게 저주였어?”
환자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캐치한 윤청현은 환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성규남 헌터, 다시 한번 말해 주겠나? 무슨 저주라고?”
환자, 아니 성규남 헌터의 저주가 해제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는 것과 저주의 명칭을 들은 윤청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진짜로… 저주가 맞았나 보군.”
그리고 정말로 쿠키가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곧바로 래희가 만들어 온 쿠키를 의무실 환자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래희가 넉넉하게 만들어 온 덕분인지 쿠키는 청해 길드 소속의 환자들에게 모자라지 않았다.
이후, 청해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 포션 중독 증세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외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과 질병 관리청 소속의 직원이 청해 길드를 방문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에 윤청현은 래희에 대한 이야기는 쏙 뺀 채로 포션 중독 증상은 ‘약쟁의 저주’라는 이름을 가진 저주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주 해제’와 관련된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주 해제’와 관련된 아이템이라뇨. 그건 길드 부산물이라 쉽게 구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많은 헌터들에게 나눠 줄 만큼 아이템이 많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결하신 거죠?”
그리고 그의 설명을 들은 질병 관리청 소속의 공무원은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윤청현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거저먹으려 드는 질병 관리청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 앞으로 다가올 대던전 토벌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이 사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그건 우리 청해 길드 소속의 헌터가 만든 아이템 덕분입니다.”
“아, 그때 성좌와 계약에 성공해서 재각성 했다던 헌터 말이죠? 클래스가 뭐였더라… 되게 특이했는데?”
* * *
“이봐! 빨리 정리해! 증거를 없애야 해.”
청해 길드에서 해결책을 찾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을 때.
유성식품 사무실에서는 한참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아니, 증거를 없애야 한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저기 밖의 시선을 피해서 이것들을 어디다 버리냐고요.”
한 직원이 다른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자에게 항의했다. 남자는 바로 래희에게 계약을 제안하러 왔던 파견 직원 조지호였다.
조지호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였지만 실상은 대주주인 한 외국 기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조차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 씨X.’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동안 반항하는 기색 한번 없다가 일이 이렇게 되니 자신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해 오는 저 직원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이러다가 내가 전부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조지호는 이렇게 될 상황을 대비해 미리미리 자신이 빠져나갈 증거를 모아 두었다. 예를 들면 본사가 그에게 지시한 흔적이 담긴 메시지 같은 것들.
그는 그 모든 증거물이 담긴 USB를 목에 걸고선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걸 쓰게 된다면 죽을지도 몰라.’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몸담았던 유성식품의 대주주인 외국계 기업이 어떤 곳인가. 그 회사는 지난 경험으로 보아 단순히 농산물 생산 회사로만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달랐다.
모든 곳에 문어발처럼 교묘하게 걸쳐져 있는 이곳은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식량 문제를 제 발아래에 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외국계 기업의 이름은 바로 ‘위트 아메리카’.
‘위트 아메리카는 전 세계 인류의 목숨줄을 쥐고 있어.’
다만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뿐이지.
20년 전 지구가 대재앙을 겪은 이후 지구의 토양은 점차 오염이 가속화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양에서는 더는 제대로 된 작물을 기를 수 없었으며 이는 인류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80억 인구 중 절반밖에 살아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40억. 40억 인구가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작물을 기를 만한 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등장한 게 바로 위트 아메리카.
그들은 밀과 같은 주요 작물을 도심 안에서 기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만든 빌딩형 농장은 전 세계에 하나둘 퍼져 나가기 시작해 어느새 전 세계 식량 시장의 90%를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이는 위트 아메리카가 단순히 점유율 1위가 아니라 대체 불가한 회사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아무도 본사에 문제를 제기하려 들지 않겠지.’
혹시라도 기분 상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기술력으로 키운 작물을 판매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이 크게 이슈화되더라도 유성식품에 파견된 자신의 선에서 정리된 확률이 매우 커 보였다.
그때였다.
“팀장님!”
“으아악―!”
바로 그의 주변에서 서 있던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출구 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쨍그랑―!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위치의 바로 옆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 날아들어 왔다.
‘화염병?’
놀란 그가 굳은 몸으로 겨우 고개를 돌려 창문 아래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화염병이 떨어져 있었다.
‘안 돼!’
하지만 몸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으악!”
병의 불은 바닥에 깔린 카펫을 따라 그를 향해 순식간에 번져 올랐다. 그렇게 그는 한순간에 화마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으로는 불이 붙지 않고 푸른 불꽃은 오로지 그만을 집어삼켰다.
이건, 시위대가 한 짓이 아니야. 분명…….
그게 그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아아악!”
생각이라는 것이 그에게서 지워졌다. 조지호는 단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수밖에 없었다. 1초가 10년 같이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 오늘 오전, 유성식품과 밀키베이커리 콜라보 사업의 총 책임자였던 ‘조지호’ 이사가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중략) 당국은 조사 결과 이번 사태의 원인이 유성식품 측에서 생산한 제품에 문제가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이에 대주주인 위트 아메리카는 몰랐던 사실이라고…….
삑―
“결국은 이렇게 되었군.”
“예상한 거 아닌가?”
윤청현이 뉴스 화면을 끄며 중얼거리자 청해 길드를 방문해 그의 앞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던 김유한이 약 올리듯이 대꾸했다.
“누가, 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번 일을 저지른 건지는 전혀 모르지 않나. 결국 우리가 진 거지.”
“완전히 졌다고 볼 수도 없지. 일단 위트 아메리카 측이 아무것도 몰랐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그들에게도 꿍꿍이가 있다는 건 드러났군.”
“하지만 문제는, 지금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파악이 되는 게 없다는 거지.”
작년 겨울부터 조사한 인위적인 게이트 발생 사건부터 재언이 말한 실종되었던 헌터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포션 중독 사건까지…….
지난 1년 동안 이상할 정도로 사건들이 모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이 사건들 사이의 연결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 다른 사건인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넘기기에는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번 김유한의 방문 때 그가 힌트를 준 것을 바탕으로 조사가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형체 없는 것들을 좇는 일에 대해서는 마땅한 수확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길을 잃고 있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보이는 것부터 하는 게 어떤가. 보이지 않는 걸 좇는 것보다는 낫겠지.”
보이는 것이라.
윤청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나기 시작했는지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연락처를 뒤적거리다가 누군가의 번호를 확인한 후 전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 * *
화려한 전경이 보이는 오피스텔의 방 안. 현아린은 손에 든 위스키 잔을 굴리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지구의 밤은 밝군요. 롬바르나와 달리.”
멸망을 코앞에 둔 롬바르나와 달리 지구의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인 듯했다. 물론 지구인들은 지금 이 상황을 인류의 멸망 단계라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지만.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가?”
지구인들의 몸을 빼앗고 그곳에 롬바르나인의 영혼이 섞여 들었으니 지구인의 멸망이란 단어는 크게 틀린 말은 아닌 듯하기도 했다.
“저는 여기가 참 마음에 든단 말이죠. 물론 이것도.”
현아린은 말을 마치며 손에 쥔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볼록한 위스키 잔을 돌리며 스월링하자 위스키가 글라스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흘러내리는 속도가 느린 걸 보아하니 그녀의 취향대로 보디감이 묵직한 편인 듯했다.
롬바르나에서는 이 정도의 고급 위스키는 구하기 어려웠지만, 지구에서는 돈만 있다면 그곳보다는 비교적 구하기 쉬우니 얼마나 좋은 곳인가.
그녀는 잔을 입까지 들어 올려 숨을 한 번 불어넣었다. 그리고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향을 맡았다.
달달한 바닐라 향과 싱글몰트 향이 코끝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향을 느낀 뒤, 위스키를 입 안에서 굴려 그 맛을 음미했다. 눈을 감자 지난 세월 동안 대업을 이루기 위해 해 왔던 일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후…….”
입 안에 든 위스키를 삼킨 후, 코로 숨을 한 번 들이켠 뒤 곧이어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위스키의 풍미와 함께 짠맛, 신맛 그리고 단맛… 다양한 맛들이 차례대로 천천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뒤이어 혀가 약간 얼얼해지며 아려 오기 시작했다.
현아린,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해 온 지난 오랜 세월 간 이루어졌던 이 계획은 위스키와 같다.
앞서 입 안에서 느낀 위스키의 맛들은 그녀가 모두 겪어 본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제 입 안에 맴돌게 될 그것은 앞으로 그녀가 쟁취해야 하는 것.
위스키가 넘어간 목구멍으로 감칠맛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녀가 미처 느끼지 못한 듯이 아슬아슬하게.